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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14화 (613/1,132)

< -- 614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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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먼저 내린 니사는 안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던 사에나에게 문을 열어주며 고개를 숙였다.

“내리십시오.”

순간 잘못을 깨달은 니사가 자신의 행동에 지레 놀라며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니사도 황제 주치의에 내의원장인 만큼 중랑장 계급인 사에나와 직급으로만 따지면 5품의 동격이었다.

사에나 역시 조금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열어 준 문으로 나섰다. 어쨌든 그도 황제의 뜻을 모르지 않았고, 니사가 이렇게 알아서 상대(上對)해 준다면 굳이 피할 이유는 없었다.

안에 들어선 니사와 사에나는 사뭇 굳은 표정으로 카토를 따라 병원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의 병원 지하실은 드나드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곧 있을 모임 때문에 이곳의 환자들은 이송이 어려운 중환자 일부만 제외하고는 거의 외부의 다른 병원으로 옮겼소. 의료요원들 역시 필수인원만 제외하면 나오지 않았고.”

어두운 철제계단을 타고 한참을 내려간 곳에는 ‘지하 5층’이라는 팻말이 녹이 슨 채 걸려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폐쇄된 듯 군데군데 못질까지 되어 있었고 조명까지 모두 꺼져 있었지만 카토는 익숙하게 랜턴을 켜 들고 일행의 앞을 밝혀주었다.

“따라오시오.”

카토는 못질이 된 나무조각을 들어내고 안으로 일행을 인도했다. 이런저런 버려진 상자와 가구들이 즐비하다보니 걷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잔뜩 긴장한 사에나의 손이 허리춤의 석궁 주변에서 계속 맴돌았지만 목적지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기.”

카토는 안쪽의 나무문을 열고 안에 성큼 들어섰다. 밝은 불빛, 그리고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에 놀란 사에나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간 무고하셨사옵니까.”

니사가 가슴에 손을 X자로 엮으며 바닥에 얼른 꿇어앉고 바닥에 이마를 댔다. 안에는 평소처럼 하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수나 마구스가 막 들어선 이 일행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을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에워싸고 있었다. 사에나는 그들의 허리에 채워진 석궁이 자신의 것과 같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챘다.

“헤네……티?”

사에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별다른 표식도, 제복도 없었지만 그들의 무기, 그리고 지금 상황을 보아 책에서 보았던 교단 헤네티들에 틀림이 없었다. 한때는 X들조차 두려워해야 했던 교단의 무시무시한 광신도들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마구스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저네들이 아직…….”

카토로서는 저들의 존재에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가디언이기는 했지만 성전 이후 세대였고, 실제 교단의 무장 세력과 싸워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저들의 능력이 어떤지, 실전에서 어떻게 싸우는지 같은 것들은 그저 역사책에서 본 피상적인 것들뿐이었다. 저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싸웠던 당시의 ‘특무대 X들’ 중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사람은 이제 적군 쪽에 있는 베흔이 유일했다.

“헤네티가 맞는 거냐?”

카토가 물었지만 니사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카토는 카렐이 ‘교단 쪽에 무장병력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놈들인지 반드시 알아보고 와야 한다’며 조심스레 지시했던 사실을 상기하며 몸을 떨었다. 자신이 저들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본능적인 위기감과 불안감을 느낀 카토는 할 수만 있다면 베흔에게라도 찾아가 저들에 관해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니사에게 일어나라며 손짓한 수나의 시선은 사에나의 긴 얼굴과 뾰족한 턱, 그리고 말랐다는 편이 더 어울릴 날렵한 몸을 축 따라 내려갔다.

“가오케레나를 닮기는 했군.”

수나 마구스의 첫 마디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했다. 사에나는 저 여자의 말투가 ‘순수하지 못한 피’가 섞인 자신을 경멸하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오만하던 수나 마구스의 표정은 니사가 다가와 건넨 짧은 귀엣말 한 마디에 확 변하고 말았다.

“가오케레나가 남긴 것이 확실한가?”

사에나는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수나 마구스를 응시하며 첫 기세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 눈을 최대한 부릅떴다. 그 역시 마구스가 될 사람이니 수나에게 ‘기가 죽지’ 말라는 건 황제가 그에게 내린 엄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얼굴의 베일을 확 걷어낸 수나는 부릅뜬 사에나의 얼굴에 당장 잡아먹을 듯 눈동자를 바싹 들이댔다.

“네겐 무슨 능력이 있나?”

“에……예?”

“가오케레나는 수학의 천재였다. 넌 혈통에서 무얼 물려받았냐는 말이다.”

“그런……건 없습니다.”

사에나가 입을 야무지게 다물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는 수나에게 눈을 더 크게 떠 보이며 평소처럼 전혀 높낮이가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학과 정치학에서 우등생이기는 했지만 딱히 재능이 대단한 건 아니었고, 당신처럼 사람의 속을 읽는 특별한 능력 같은 것도 없습니다.”

니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이 두 사람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지금껏 수나 마구스의 시선을 이렇게 똑바로 마주하고 노려볼 수 있었던 사람은 황제뿐이었다.

“훗.”

사에나를 압박하던 수나 마구스의 차가운 표정에 번개처럼 짧은 미소가 스쳤다.

“신탁을 받고 첫 인사하러 온 날부터 감히 내게 눈싸움으로 대들던 당돌한 녀석이었는데.”

수나 마구스의 ‘기세’가 한풀 꺾인 후에도 사에나는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수나 마구스가 얼굴을 다시 베일로 가리며 뒤로 휙 돌아섰다.

“네 원하는 대로, 아니 그분이 원하는 대로 네 어머니의 자리를 물려받는다고 해도 나보다는 하급자라는 것을 아느냐?”

“…….”

“우리 교단과 에아, 하오마, 아나히타, 티시트리야, 드르바스파의 6개 교단은 ‘하마타’라고 하고, 그 지도자는 나다. 알겠나.”

수나 마구스는 속 보이는 의도로 접근해 온 이 비서관에게 사뭇 단호한 어조로 서열을 확실히 했다.

“예. 알겠습니다.”

사에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카를 제외한 나머지 5개 교단은 동료 마구스들과 코메트의 배신으로 마구스들이 처참하게 처형당했던 그 교단들이었다. 교단 역사에 관해서 잘 알지는 못하는 사에나였지만 교단의 분열이 바로 바로 ‘하마타’와 다른 6개 교단의 대립이었다는 정도는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럼 나머지 6개 교단은…….”

“하마피타 말인가? 그들도 물론 우리의 형제고 동반자다.”

사에나는 자신들을 배신한 ‘하마피타’의 6개 교단을 ‘형제’라고 부르는 그의 태도에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하지만 수나 마구스는 그의 이런 의아함까지도 미리 계산하고 있었다.

“하마피타의 결정과 하마타 다섯 마구스들의 죽음 역시 신의 뜻이니 그대의 쓸데없는 호기심 따위에 대답해 줄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아참, 가디언 카토.”

수나 마구스의 희미한 시선이 이번엔 카토를 향했다.

“그 아이가 석궁을 받던가?”

“재가 될 뻔했죠. 지금은 자이나브 카메네이 중랑이 개인적으로 몰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수나 마구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다지 놀랐다거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아주 당연히 예상할 수 있던 결과였지만.

“이제 내 손을 떠났으니 이제 그 아이는 운명이 이끌겠지. 이번에 살아남지 못한다면 자격이 없는 것이고.”

“흐음.”

무책임하게까지 들리는 말에 사에나는 눈앞의 이 마구스가 정말로 코리온의 조모가 맞을까 하는 생각까지 품었다. 하지만 후계자 신탁 때마다 그 행운을 얻지 못한 수십, 많게는 수백의 자손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 것이 마구스들의 운명이라면 ‘고작 하나 정도’ 죽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어쨌든, 그는 수나 마구스가 손자인 코리온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으음?”

그때, 카토가 칼을 뽑아들며 뒤로 휙 돌아섰다. 동시에 헤네티들의 석궁 또한 일제히 문 쪽을 향했다.

“누구야!”

누군가 어둠 속에서 허겁지겁 달아나는 실루엣이 희미하게 비쳤다. 칼을 든 카토 역시 문을 때려 부수듯 열고는 그 뒤를 급히 쫓았다. 하지만 도망치던 그 괴한의 행운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엄마야.”

어두운 계단을 내려와 지하 5층에 접어들자마자 이 소동과 딱 마주친 자이납이 지레 놀라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괴한 역시 자이납에게 놀라 옆으로 방향을 막 틀려다가 각목에 걸려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아읍!”

그는 재빨리 일어서 다시 도망치려 했지만 이번엔 자이납이 그의 발목을 다짜고짜 덥석 붙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도망치는 놈이 ‘더 나쁜 놈’ 같아 보였다.

“에이, 씨, 왜 난 이런 일에만 꼬여드는 거야!”

상대의 체구를 보아 그저 보통 ‘시민’이라고 쉽게 생각한 자이납은 그를 별 생각없이 바닥에 엎드리게 만들려 했지만 누워있던 그 상대가 자이납을 힘껏 밀어내며 얼굴 앞으로 날린 단검의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아악!”

자이납이 기겁을 하며 단검을 쳐냈지만 뒤이어 날아든 괴한의 왼쪽 주먹에 자이납의 턱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괴한은 쓰러진 자이납의 목을 찌르려 했지만 그 사이 카토가 바싹 따라붙어 있었다. 그는 충격에 까무러친 자이납의 얼굴을 짓뭉개고는 허겁지겁 계단을 달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카토가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몸을 날렸지만 괴한은 계단 대여섯 칸을 단숨에 날아오르듯 뛰어올라 그의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저놈 뭐야!”

바로 그때, 카토의 등 뒤에서 따악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위층에 거의 도착해가던 그 괴한이 움찔하며 비틀거렸다. 그 사이 계단을 달려 오른 카토가 괴한의 허리를 덥석 붙들었다.

“근위대 소속이냐?”

자이납이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한 카토는 상대의 팔을 힘껏 꺾어 일단 확실히 제압하고는 상대의 고개를 치켜들려 했다. 하지만 거세게 저항할 듯 보였던 이 괴한의 고개는 너무도 쉽게 뒤로 확 꺾여 올라왔다.

“엉?”

괴한이 숨을 쉬지 않자 깜짝 놀란 카토가 재빨리 입을 억지로 벌려 보았지만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자살한 것도 아닌데…….”

“어차피 죽을 자였습니다.”

그 사이, 카토의 뒤를 따라온 니사가 쓰러진 괴한의 목 옆을 짚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손칼로 옆구리를 서슴없이 도려내고는 죽은 시체의 옆구리에 박힌 작은 볼트를 힘껏 뽑아냈다. 한 뼘 반이나 될까 싶은 짧은 볼트였지만 그 위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근육은 물론이고 내장의 살점까지 피와 함께 온통 뒤엉켜 있었다.

“사로잡아도 어차피 아무 소용없으니 일격에 죽이는 게 낫습니다.”

니사는 볼트를 손수건으로 감싸 재빨리 품에 감추어 버렸다.

“이자가 누군지 아는 건가?”

카토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물었지만 니사는 씁쓸한 웃음만을 지었을 뿐 별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카토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계단 아래를 문득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 볼트로 이자를 쏘아 맞춘 수나 마구스의 호위 헤네티가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무표정하게 주인의 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 괴한은 카토가 잡지 않았어도 어차피 볼트의 독에 즉사할 운명이었다.

“도대체 저자들은…….”

카토에게는 이렇게 이 날랜 괴한도 놀랍지만 이렇게 빠른 적을 한 단 발로 쏘아 맞추는 헤네티의 능력 또한 경악스런 것이었다. 지금껏 최소한 체력적인 면에 있어서는 ‘시민과 가디언’의 이분법밖에 없던 그로서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카토는 니사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더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겠지?”

니사에게 퉁명스레 쏘아붙인 카토는 다시금 시체를 조심스레 살폈다. 비록 방심해서이기는 했지만 자이납을 꺾을 정도의 괴력에 이 정도의 순발력을 지녔다면 보통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X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마약냄새 풍기는 피다이도 아니었다.

“일단은 안전합니다만 장소를 옮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카토는 헤네티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오고 있는 수나 마구스를 얼른 돌아보았다. 계단을 오르려던 수나 마구스는 정신을 잃은 채 계단 한쪽에 쓰러져 있는 자이납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처럼 아무 감정 없는 밋밋한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 친구도 그대로 놔둘 수는 없겠군.”

“예?”

기겁을 한 카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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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두 즐거운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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