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16화 (615/1,132)

< -- 616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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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서스 사막의 근위대 비밀캠프에 머무르고 있던 아리아노 라자루스 법무대신은 ‘코리온을 죽이고 마잔다란을 장악했다’는 보고만을 한가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거사를 코앞에 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된 순간이었지만 사실 그는 당장 크게 할 일이 없었다. 그는 군인이 아닌 정치가였고, 친 근위대 파 호족들이 마잔다란을 장악하는 건 그의 손 밖의 일이었다.

이곳에서 그가 할 일은 ‘거사를 마친’ 호족들이 연락을 해 오면 그때 가서 마잔다란에 입성해서 그곳의 행정체계를 장악하고 체포한 포로들, 반역자들을 처리하는, 다분히 사무적인 것들이었다. 그와 동시에 근위대가 진주하는 것도 타르서스를 다시 연합군의 손 안에 집어넣는 중요한 절차였지만 어차피 그건 마잔다란에 가 있는 보안국장 쿠베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렇다보니 그는 이미 받은 자료들, 혹은 굳이 그가 직접 챙길 필요 없는 자잘한 서류들만 뒤적거리는 일로 긴장을 달래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던 참이었다. 일도 가르칠 겸, 어머니를 따라 법무관의 길을 걷고 있는 아들도 함께 데려오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릴라크 그것은 잘 있으려나. 많이 다쳤다더니.”

아리아노는 뜬금없이 조카 생각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래 봤자 릴라크 누나는 이젠 적인데요. 천상 어머니가 손에 피를 묻히셔야 할 텐데요 뭐.”

함께 있던 아들의 무정한 대답에 아리아노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적에게 도망가 버린 조카 릴라크는 어린 시절, 종장인 자신이 직접 키워서인지 친자식들보다 더 그를 닮은 면이 많았다. 평소 냉소적이고 누구보다 차분하지만 한 번 발끈하면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 그랬고, 머리는 좋지만 학구적인 면과는 담을 쌓았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남극성당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가 적응을 못 하고 중퇴했다는 ‘전적’까지 똑같았다.

그래도 둘 다 똑똑한 본바탕, 혹은 타고난 무골 기질은 있어서인지, 아리아노는 순전히 독학으로 상급 법률사가 되어 법무부에 형사 법무관으로 화려하게 입성했고, 릴라크도 제국에서 손꼽히는 기병 지휘관이 될 수 있었다. 릴라크도 적 진영에서 슈로 기사단장에까지 선임된 것을 보아 적 황제에게까지도 제법 인정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젠 적이라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아리아노도 한 명의 종장으로서 그런 조카를 보며 내심 기특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식들이 다 똑같은 것도 영 재미가 없어.”

그는 옆에 있는 아들을 돌아보며 내심 조카 릴라크와 바뀌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엉뚱한 아쉬움을 품었다.

“넌 왜 하필 법무관이 됐냐?”

“예? 그야 어머니도…….”

어머니의 황당한 물음에 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라자루스 가는 전통적으로 법률가를 많이 낸 가문이었지만 무장 쪽으로는 릴라크를 빼면 별반 인물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종장인 아리아노는 내심 친자식들 중에서도 듬직한 무장이 하나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했지만 피는 못 속이는지 그의 자식들도 모두 법률가 아니면 행정가가 되어 있었다. 그가 조카 릴라크에게 유달리 정을 주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듬직한’ 자식을 유달리 원하던 그가 호방한 성격의 남부 출신 무장 제롬을 맏사위로 맞은 것도 어쩌면 그런 것에 대한 보상심리였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말씀하신 겁니다. 조금 전 도착했습니다.”

막사 문을 열고 막 들어선 건 법무관 시절부터 그의 서기 겸 수사관 생활을 해 왔던 오랜 측근 비서관이었다. 아리아노 경은 뻐근해진 허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가 내민 상자를 받아들었다.

이번에 그의 손에 걸린 서류는 호족들이 제출한 이번 ‘거사’ 지휘관들의 프로필이었다. 사실 호족들은 이것만은 제출하기를 극도로 꺼렸지만 아리아노가 협박 반으로 그들에게서 받아낸 것이었다. 법무관 출신답게, 그는 이런 일에 앞장서는 ‘정치성향 짙은 군인’들은 언제든 비슷한 상황에서도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저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 목록을 기를 쓰고 받아놓은 것도 혹시 모를 ‘앞날’을 위한 자료를 미리 확보해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놈이로군.”

아리아노의 손에 들린 건 지난번 그 ‘군기 빠진 장교’의 파일이었다. 의도적으로 조작한 듯, 사진도 흐릿했지만 그 알 수 없이 묘한 인상만은 사진 속에 그대로 살아있었다.

“이놈 눈빛이 영 익숙하단 말이야.”

아리아노 경은 파일을 든 채 야전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현역 시절에 한두 건을 다루신 게 아닌데 눈빛이 익숙하시다는 걸 보니 꽤 큰 건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눈빛으로 사람 구분하시는 습관은 여전하시군요.”

비서관이 별 생각없이 대답했지만 순간 아리아노의 머리에 확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비서관을 손짓해 불렀다.

“자네 펜 좀 줘 봐. 빨리.”

“예?”

아리아노는 비서관이 별 생각 없이 내민 펜으로 사진의 아랫부분을 가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이마 위까지 가리고는 다시 사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의 비서관은 그의 낯빛이 순간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봐봐. 누군지 알 수 있겠나?”

아리아노는 눈만 내놓은 그 사진을 비서에게 내보였다. 형사 법무관의 직속 서기 겸 수사관이었던 만큼 비서의 눈썰미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왜 놀라시는지 알겠습니다. 5년이나 다루셨던 사건이었는데 이제야 알아보신 게 신기할 지경이군요.”

비서가 갑자기 쓴웃음을 짓자 아리아노가 이를 드러내며 짜증스레 쏘아붙였다.

“자네도 나처럼 백 년 넘게 정치판에 휩쓸려 있어 봐.”

“근위대에 알릴까요?”

“아직.”

아리아노가 얼른 손을 저었다.

“지금은 거사가 진행되는 중이니 괜히 건드리지 않고 잠자코 두는 게 나아. 함부로 건드렸다가 일을 모조리 망칠 필요는 없지.”

법무관 시절 기질이 발동된 아리아노는 이번 거사에 관련된 자료들을 탁자 위에 모조리 쏟아놓았다. 비서관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쏟아진 자료들을 재빨리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맡으셨던 5년 동안 뜬구름만 쫓는 기분이라고 계속 푸념하셨는데 생각지도 않은 데서 이렇게…….”

아직 모든 것에 서툰 아들은 어머니와 비서관의 손발이 기계적으로 착착 맞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추적자'의 본능을 오랜만에 되찾은 아리아노는 무언가에 홀린 듯 탁자 위의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비서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자이센 가에서 그렇게 죽어라고 쫓았는데 지금껏 이렇게 성공적으로 도피생활을 했다는 건 누군가 뒤를 돌봐줬다는 뜻이야. 게다가 이 정도의 성형수술이라면 전문적인 의사가 했음에 틀림이 없고, 그렇다면 관공서에 기록을 남겼거나 다른 사람 이름으로 위조라도 했겠지.”

“지금 이 놈은 뭘 하고 있죠?”

“7명의 피다이를 이끌고 있지. 그리고 어디에서 데려왔는지 모르지만 용병 50명도 함께 왔다지.”

“예에?”

‘피다이’라는 말에 비서관과 아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 뒤로 아리아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이번 ‘거사계획’이 적힌 보고서를 든 채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무언가 수상해……어쩌면 우리가 누군가에 놀아나고…….”

자료들을 한참 뒤적거리던 아리아노는 막사 바깥에서 들려온 군인들의 거친 고함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기습이다!”

“뭐야? 무슨 말이야?”

당황한 비서관이 밖으로 달려 나간 새, 아리아노는 아들과 함께 지금까지 보고 있던 자료들을 탁자 밑의 상자에 급히 쏟아 넣었다. 하지만 밖으로 달려나갔던 비서관은 채 10초도 되지 않아 파랗게 질린 얼굴로 되돌아 들어왔다.

“빨리 피하십시오! 정체불명의 적들이 사방에서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설마 그 호족 새끼들이…….”

“빨리요! 근위대들이 차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빌어먹을! 챙긴 건 챙겨야 할 것 아니냐!”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아리아노는 제일 중요한 2개의 상자를 무작정 챙겨 겨드랑이에 끼고 일단 밖으로 달려 나갔다. 비서관의 말대로, 사막 한중간의 작은 계곡에 유목민 부락으로 위장되어 있던 이 캠프 주변을 거의 50대는 됨직한 차들이 온통 에워싸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야? 어떻게 여길 알아낸 거냐!”

비서관과 아들을 대동한 아리아노는 대기하고 있던 차에 얼른 뛰어오르며 운전석의 근위대 참모에게 물었지만 그 역시 전후사정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꽉 잡으십시오!”

덜크덩 하는 큰 충격과 함께 차가 출발했다. 뒤로 자빠질 뻔했던 아리아노는 의자를 붙들고 급히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치밀하게 계산한 기습인 듯 저 정체모를 ‘적’들은 이미 구석구석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아리아노가 탄 차도 캠프 주변을 잠시 맴돌며 달아날 곳을 찾았지만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젠장! 산으로 갑니다! 반대편 골짜기로만 넘어가면…….”

참모는 하는 수 없이 험한 계곡 위로 몰기 시작했다. 사막 골짜기라 아주 큰 바위는 없었지만 자잘한 자갈들 때문에 차가 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문득 돌아본 근위대 캠프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기습병력에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셔틀만 쓸 수 있었어도!”

아리아노가 서류상자를 껴안은 채 악을 썼다. ‘격벽식 방어체계’ 덕분에 그의 탈출로는 육로 뿐이었다. 하지만 적들은 이미 차가 빠져나갈 구석구석을 모조리 차단하고 있었다. 불운하게도 그가 도망치고 있는 골짜기 너머에서도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기랄!”

놀란 근위대 장교가 급히 차를 세우며 뒤로 돌리려 했지만 어느새 차 한 대가 뒤에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그가 틴 차의 뒤를 쾅 소리를 내며 들이받았다. 깜짝 놀란 아리아노, 그리고 비서관과 함께 탄 근위대원들이 정신없이 앞뒤로 요동을 쳤다.

시끄러웠던 차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빌어먹을, 내 팔자야.”

의자 틈새에 처박혔던 아리아노가 그 조카가 걸핏하면 늘어놓는 똑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완충장치가 작동했지만 어딘가 제대로 부딪혔는지 이마에서 무언가 끈끈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뒷자리의 아들을 얼른 돌아보았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이게 뭐냐.”

아리아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기습’이라는 근위대들의 외침을 듣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한가롭게 ‘거사 성공소식’만 기다리던 자신이 고작 몇 분만에 이런 황당한 꼴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마치 지나가는 한 편의 꿈 같았다.

“오랜만이요, 아리아노 경.”

차 밖에서 들려온 굵은 남자 목소리에 아리아노의 멍멍했던 정신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는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획된 기습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눈을 덮은 피를 털어내며 깨진 차창으로 천천히 얼굴을 내밀었다.

“훗, 그 잘생긴 얼굴은 여전하시군요.”

아리아노가 차의 라이트 앞 멀찍이에 여유만만하게 서 있는 건장한 남자를 향해 입가를 실룩거렸다. 충격에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가디언처럼 떡 벌어진 체격과 번득이는 눈매만으로도 아리아노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적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까지도.

“오호, 칭찬이시라면 기꺼이 받지요. ‘전’ 법무대신이고 라자루스 가의 종장이신 아리아노 라자루스 경.”

냉큼 대답한 페로는 차를 에워싸고 있는 자신의 가디언에게 가볍게 손짓을 해 보였다.

“페다이, 차 문을 열고 꺼내드려라. 귀한 손님이다. 위생병 불러오고.”

아리아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위가 지위인 만큼, 적이 자신을 해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꼴사납게 적의 포로가 되었으니 거의 목전까지 와 있던 ‘총리직’은 이제 몇 발짝은 다시 멀어진 꼴이었다. 다혈질의 딸 오르테는 시가 델루지 가를 홀랑 뒤집어놓을 테고, 예산을 다 털어서라도 당장 어머니를 돌려받으라며 엄한 남편 제롬을 쥐 잡듯 몰아붙일 것이 뻔했다.

물론 그렇게라도 무사히 돌아간다면 다행한 노릇이겠지만 어쨌든 그는 연합군 진영에서 한동안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것이 뻔했다. 이전에 포로교환으로 귀환했던 뚱보 클레모 부총리를 ‘몸값으로 그 뱃살만큼 재정 깎아먹었다’며 매번 놀려댔던 아리아노가 이제 똑같은 꼴이 될 운명이었다. 그것도 아들, 비서관도 함께.

“근위대원 85명을 사로잡았고 21명을 사살했습니다.”

“잘했다. 이 정도면 대성공이군.”

다룬의 보고에 페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근위대의 비밀 캠프가 있던 이 골짜기는 거의 5백에 달하는 그의 가디언들이 이미 완전히 포위한 상태였다. 고작 100명의 근위대들로서도 항복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을 터였다.

비서관과 함께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 이마를 응급처치받던 아리아노가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한 가지만 물읍시다.”

“뭘 말이요?”

“내 여기 있던 걸 어떻게 안 거요?”

아리아노의 물음에 페로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내가 그걸 말해 줄 바보로 아시오?”

페로가 성큼성큼 걸어와 아리아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못난 사위 때문에 맘고생이 심하시구려. 그 예쁘던 얼굴이 꺼칠해진 것을 보니.”

“이 빌어먹을 사막에서 며칠 지내보시오. 페로 경의 그 잘생긴 얼굴도 여기 타르서스 촌구석 양치기처럼 부스스해질 테니.”

“거, 참, 역시 언제 만나도 유쾌한 양반이시구려. 쯧쯧, 그 사위 놈만 아니었어도 그쪽에 코가 꿰지는 않았을 텐데. 카렐, 아니 우리 폐하께서 딱 좋아할만한 인물인 것을.”

아리아노의 여전한 성깔에 페로가 다시 껄껄대고 웃었다. 굴욕감에 고개를 숙여붙였던 아리아노는 페로 가디언들이 자신의 소중한 자료들을 거둬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며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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