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17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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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같습니다.”
페로는 이번에 노획한 문서들 중 제일 위에 있던 ‘거사 계획서’를 펼쳐보았지만 곧 낯을 찡그렸다. 틀림없이 계획서가 맞는 것 같기는 했지만 온통 음어로 쓰여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아리아노를 슬쩍 흘겨보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뻔했다.
“날 심문해서 알아낼 즈음이면 별로 필요 없는 정보가 될 텐데요? 심문하려면 하시지요. 시간은 내 편이니.”
“법률 공부했다는 사람들은 보면 매번 흥정에 서투르단 말이야.”
페로가 경멸적으로 중얼거렸지만 아리아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론 페로도 아리아노가 쉽사리 입을 열어 줄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여기 리스트에 있는 사진 보안국에 모조리 전송해서 누군지 파악하고 다 잡아들여.”
문득 고개를 든 아리아노는 페로가 그 문제의 ‘군기빠진 장교’의 파일을 보고 있는 것을 바로 눈치 챘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강한 패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시면 흥정 하나 하시겠습니까?”
“응?”
페로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리아노는 제롬의 장모였고, 딸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에 ‘흥정 따위’는 절대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도와주기만 한다면야, 몸값을 깎아주는 거래 정도야 어렵지 않지.”
“아뇨.”
아리아노가 묘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절 지금 당장 풀어주신다면, 아주 좋은 정보를 하나 드리지요. 몸값 깎아주는 따위가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서 아들놈하고 비서관과 함께 석방해 주신다면 말입니다.”
페로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당장 풀어달라는 아리아노의 요구는 상식적으로도 무리하다 못해 황당한 것이었다.
“경께서도 사위를 닮아서 그렇게 간이 어처구니없이 부은 거요?”
“거래 내용을 아신다면 그런 말씀은 못 하실걸요.”
아리아노가 히죽거리며 페로에게 웃음을 지었다. 그가 실없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페로로서는 순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노의 아들이 비서관과 함께 얼른 일어나 손목을 앞으로 내밀었다.
“제가……인질이 되겠습니다.”
아리아노가 아들에게 믿으라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친아들이 인질이라면 페로로서도 그와의 흥정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 2스타디아 밖으로 물러나라. 아리아노 라자루스 경은 차가 부서지자 아들과 비서관을 차에 내버려두고 도보로 도망친 것 같다. 주변을 수색하도록 해.”
페로가 페다이와 휘하 가디언들에게 떨어지라며 손을 저었다. 말뜻을 눈치 챈 페다이와 직속 가디언들이 아리아노의 아들과 비서관을 포박해서는 급히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가디언들이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난 후, 혼자 남은 페로가 칼을 찬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며 아리아노를 노려보았다.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난 아리아노 역시 가지고 있던 할룩스를 멀리 내던지고는 한 가문의 종장다운 당당한 태도로 어깨를 폈다. 이제 이 둘의 대화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번 일에 우리 양자 말고도 관심을 가진 또 다른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페로 경.”
아리아노의 엉뚱한 말에 페로가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내 장담하지만 우리는 코나 시디크를 보호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그쪽 역시 그런 일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페로 경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코나 시디크’라는 말에 페로의 눈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그자는 자이센 가의 철천지원수였고, 페로의 증조부 제수스 일가와 조부 투모카프를 모두 죽인―혹은 죽였다고 알려져 있는― 악당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노는 페로가 자신의 기대만큼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을, 아니 무언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그자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오셨습니까?”
아리아노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이번 공격의 원래 목표가 어쩌면 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페로는 대놓고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의사는 분명했다.
“그자가 지금 어디, 어떤 상태로 있는지, 누가 보호해주고 있는지만 알려주면 약속대로 그대를 풀어주지.”
“방금 말씀드린대로, 앞의 두 가지는 압니다만 뒤의 세 번째는 저도 모릅니다.”
아리아노의 대답 역시 분명했다. 페로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서며 눈을 부라리고 물었다.
“그래, 그럼 순서대로 묻지. 이년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있나?”
아리아노는 재빨리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대로 보아 이미 코나 시디크가 ‘일을 벌이고도 남았을’ 때였다. 이 정도라면 밝혀도 상황 자체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 확실했다.
“타르서스 별궁. 피다이 7명, 용병 50명과 함께 있다죠. 호족 대표들과 함께 있을 겁니다. 그년이 여기 있는 줄 알고 오셨나 본데……오늘 오후에 마잔다란에 갔습니다.”
‘피다이’라는 말에 페로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며칠 전, 뜬금없이 총리실에 찾아온 군수부장 밀리타가 그에게 제시한 ‘거래’는 한편으로는 귀에 확 들어오는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심스런 것이었다. 밀리타가 제시한 조건은 ‘자신이 귀인이 될 수 있도록 아메스 황후께서 도와주셨으면 좋겠다.’는 제법 그럴싸한 것이었다.
물론 귀인 운운하는 것부터가 페로로서는 울화통이 확 치미는 내용이었지만 이라즈가 죽은 이후, 내명부에 북부 출신을 하나나 둘 정도 더 들여야 되지 않겠냐는 논의는 이미 내각에서 심심찮게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들일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페로 자신과 엮인 사람이 들어가는 편이 어느 면으로도 나았다. 물론, 가문의 원수인 코나 시디크를 잡을 수 있는 정보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으니 그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다.
어쨌든 페로는 그 거래에 흔쾌히 응했고, 밀리타는 그 대가로 ‘북부 바하칼리 혹은 나에스탄에 코나 시디크가 은거하고 있다는 첩보를 많이 접했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가 약간의 무장병력을 데리고 황제령에 들어와 타르서스의 호족들에게 의탁했고, 이번에 ‘큰 건을 맡아’ 근위대와 함께 있다는 정보, 그리고 그가 있는 이곳 캠프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가 이렇게 정확히 야습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밀리타가 알려준 정보 덕분이었다.
물론 기대했던 코나 시디크는 잡지 못했지만 그가 이곳에 있었다는, 그리고 적 법무대신인 아리아노를 생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보의 가치는 충분했다.
물론 밀리타도 이 정보에 별다른 근거를 내놓지는 못했고, 그저 ‘첩보로 입수한 것’이라고 알려주었을 뿐이었지만 한때 노에누스 가에서 장관까지 지냈던 만큼 나름대로 정보통이 있을 테니 전혀 근거 없는 정보는 아닐 터였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제국 제일의 악당’을 고용한 것만으로도 타르서스의 발칙한 호족들을 모조리 학살할 명분은 충분했다.
“약속은 지키시겠죠?”
아리아노는 창백해진 페로에게 대놓고 히죽거렸다. 하지만 페로 역시 감정에 휩쓸려 이 중요한 거래를 빨리 끝내버릴 사람은 아니었다. 페로는 표정에서 재빨리 감정을 감추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조금 전, 말한 뜻이 무어지? 다른 세력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리아노가 페로의 까만 눈동자를 똑바로 올려보며 대답했다.
“아시겠지만, 전 경의 조부께서 돌아가신 후 5년간 법무관으로 그자를 쫓았었습니다.”
“그래도 결국은 못 잡았지.”
“당초 전장에서 놓치신 건 경의 조부이지요.”
아리아노가 애써 변명했지만 코나 시디크를 잡지 못한 일은 그의 법무관 전력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지금 빠져나가려면 당시 그가 모아들였던 조각조각 정보라도 풀어서 페로와 최대한의 협상을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훗, 그때 일의 책임추궁을 할 때는 아닌 것 같군. 그래서, 다른 세력이 있다는 근거는?”
페로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그는 눈앞의 이 호적수가 동맹군 편이었다면 ‘특별수사관’으로라도 삼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아리아노가 말을 이었다.
“코나 시디크 이놈은 입대하자마자 별다른 검증도 없이 종장인 자블리스 아크반의 개인경호원으로 배치되었으니 수상해도 한참 수상하지요. 그런데……글쎄요, 이자가 자블리스를 대하는 태도는 경호원이라기보다는……마치 인질을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블리스도 이자 앞에서는 꼼짝을 못 하더군요.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는 모습도 자주 목격되었고……누군가 자블리스를 비롯한 타르서스 호족들이 반란을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였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와서 이들에게 반란을 사주하기는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해놓고 기다리던 느낌이었습니다.”
“그건 그대의 심증일 뿐이야.”
페로가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아리아노의 표정은 확고했다.
“들어보세요, 저도 법무관으로서의 감각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그놈의 행적을 마지막으로 놓친 곳이 북부 바하칼리였습니다. 그곳에서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했죠.”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 보안국 수사관 3명이 피살당했습니다. 4명은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지만 당시 기억을 모두 잃었습니다. 노예 폭도들의 짓은 틀림없이 아닙니다. 전문가의 짓이었습니다.”
“코나 시디크 그놈은 교단 시절 특수부대 출신이야. 따르는 놈들 중에도 거기 출신들이 많고. 그놈들이 전문가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정밀검사 결과 수사관들은 특수한 약물에 의해 단기 기억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전혀 보고된 바 없는 신종약물로 추정됩니다만 현재 우리의 기술로는 만들지 못합니다. 현재 우리의 기술로도 말입니다. 고작 노예폭동무리의 잔당들이 그 정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리아노가 마지막 말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리고……바하칼리에서의 수사를 고의적으로 방해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말투를 들으니 그건 누구인지 아는 것 같군?”
“예.”
아리아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페로 가디언들에게 붙들려 있는 자신의 비서관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름만 알려드리지요. 당시 수사과정에서 입수한 세세한 자료들은 이후 제 아들, 비서관과 교환하면 공평하겠지요?”
아리아노가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로서는 아들과 오랜 측근의 목숨을 건 큰 도박이었다. 그리고 가문의 원수를 갚아야 하는 대명제를 지고 있는 페로 역시 일단은 이 정도로 거래를 성사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페로는 멀찍이 있던 자신의 가디언들에게 새 차를 내 주라며 손짓을 보냈다.
“곧 풀려나게 해 주마. 걱정 말고 편히 기다려라.”
아리아노는 혼자 차에 오르며 적의 손아귀에 남은 아들에게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출발 전 페로를 올려보며 잠시 큰 숨을 내쉬었다.
“그 의심스러운 자가 누구인지 말은 하고 가야지?”
잠시 뜸을 들이던 아리아노가 조종간에 손을 대며 낮게 입을 열었다.
“오르마즈 카파키 경입니다.”
“뭐, 뭐라고?”
“놀라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저도 처음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으니까.”
페로의 표정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아리아노는 그런 그를 올려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시 오르마즈 경은 2차 혼란기의 패전 이후 북부에 연금 중이었지만 코나 시디크 본인 혹은 그 연계세력과 직접이든 간접이든 관계가 있던 것은 확실합니다. 통신 기록도 확보했고, 놈의 측근과 오르마즈 경이 만나던 광경도 포착했습니다. 워낙 정치적으로 큰 파장이 예상되는 사안이라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려고 저도 거의 1년 가까이를 허비했지요.”
페로는 아무 대답 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허탈한 표정의 아리아노 경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옛 기억을 계속 떠올렸다.
“하지만 막상 오르마즈 경을 직접 조사하려고 했을 때 세나우스 2세 선제께서 돌연 수사중단을 명하셨습니다. 오르마즈 경이 눈치를 채고 손을 쓴 것인지, 아니면 선제께서 그 양반을 보호하려고 먼저 나서신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5년 동안의 제 고생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순간이었죠.”
아리아노는 말을 마친 후,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멀어져가는 아리아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페로는 잠시 혼란에 사로잡혔지만 곧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빌어먹을, 빤한 수작에 넘어갈 필요는 없지. 누굴 이간질시키려고.”
페로는 그의 마지막 말은 일단 잊기로 했다. 당시 오르마즈의 측근들, 혹은 그의 주변 북부 사람들은 이젠 카렐의 측근이 되어 페로 자신의 세력과 함께 동맹군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었다. 아리아노의 말 따위에 그들을 의심하는 바보짓을 할 페로가 아니었다. 어쨌든 아리아노는 적이고, 그의 말은 적당히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었으니.
그리고 코나 시디크는 할아버지 투모카프에게는 가족을 몰살시킨 철천지원수였는지 모르지만 사실 페로에게는 그를 잡는 것은 자이센 가 종장으로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귀찮은 의무일 뿐이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이 귀찮은 놈이 타르서스의 반란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과, 누군지 모를 그 배후세력이 제위경쟁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아리아노의 알 수 없는 언급이 더 중요했다.
페로는 할룩스를 켜고 마잔다란에 있는 타르서스 지방장관의 코드를 눌렀다. 그곳의 직할군들을 동원해 일단 호족들 일당을 잡아두라고 지시할 참이었지만 무슨 일인지 연결이 되지를 않았다.
“으음?”
무언가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페로는 자신의 가디언들에게 급히 손을 저었다.
“당장 마잔다란으로 출발한다!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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