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18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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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 마구스와 함께 병원 지하실에서 빠져나온 사에나는 병원 2층에서 곧 ‘일이 벌어질’ 별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데려온 5백여의 휘하 헌병들이 각각의 제 위치에 있는지를 모두 확인하고 카토에게서 ‘작전 시작’ 연락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카메네이 중랑은 방금 전 우베 마르코스 비서관과 함께 별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막 돌아온 니사가 수나 마구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당초 사에나와 카토는 수나 마구스가 자이납을 죽이려 하는 것으로 알고 크게 당황했지만 마구스의 지시를 받은 니사가 한 일은 기절한 자이납의 목 뒤에 이상한 전극인지 주사인지를 꽂은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최소한 자이납을 죽인 건 아니었다.
살짝 부아가 난 사에나가 니사에게 쏘아붙였다.
“라말라 박사, 황제 비서관으로서 나도 그대에게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물어 볼 권리 정도는 있다고 생각되는군. 그대는 신관인지 모르지만 나와 함께 이곳에 황명을 받아 와 있다는 걸 잊었나? 도대체 카메네이 중랑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사에나의 험악한 표정에 니사가 움찔했다. 수나 마구스의 눈치를 살짝 살핀 니사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설명했다.
“사정상 카메네이 중랑의 단기기억을 조금 제어한 것 뿐입니다.”
“제어?”
“카메네이 중랑은 용감하지만 진중하고 사려 깊은 인물은 못 되니 지금 당장은 없는 편이 낫습니다. 외출시켜 적의 주의를 끄는 역할 정도면 딱 적당합니다.”
이번에 대답한 건 니사가 아닌, 헤네티들의 수장이었다. 그는 헤네티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표정이 없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눈가에 흐르는 알 수 없는 광기를 이미 눈치 채고 있었지만 정작 다른 사람이 보는 그 자신 또한 그렇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필요하면 다시 불러들일 수도 있고요.”
“다시?”
사에나는 수나 마구스를 힐끔 돌아보았지만 베일 속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그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자이납을 ‘제어’할 수 있는 무언가를 그의 몸 안에 설치했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사에나는 저들이 사람의 기억마저도 조종한다는 사실에 순간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리쿠 학장이 방금 만찬장에 입장했다고 합니다.”
사에나가 평소처럼 사무적으로 말했고, 수나 마구스 역시 아무 표정이 없었다. 나란히 서 있는 이 두 명의 ‘공인된 마구스’ 그리고 ‘마구스가 되려는 사람’은 마치 쌍둥이처럼 감정 없는 밋밋한 표정이었다.
“후계자를 선임하신다는 건 곧 나머지 세닉 가 사람들을 처단한다는 뜻이십니까.”
사에나는 아직은 얕은 지식이나마 동원해 수나 마구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화를 내리라는 사에나의 예상과는 달리, 수나 마구스는 비교적 솔직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리쿠 학장은 어차피 미끼 아니던가? 마구스들도 후계자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머지를 죽이는 바보짓은 하지 않아.”
“학장이 미끼라는 건 방금 제 눈에서 읽으신 겁니까? 아니면…….”
“설득이 당초 황상의 생각이라면 내가 이곳에 손자이며 후계자를 지키러 이렇게까지 와야 했겠는가? 그분과 나의 묵시의 합의 내용이니.”
수나 마구스는 헤네티들의 허리에 채워진 석궁을 보며 입술을 꽉 다물었다.
“오늘밤 조용히 넘어가지는 못할 테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 물론……물론 그때 그 날처럼 모든 것이 틀어질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지만.”
사에나는 ‘그 날’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별궁 안쪽은 내가 맡을 테니, 뒤처리는 사에나 그대의 헌병들이 맡아 주게.”
수나 마구스의 손짓에 그를 따라온 30여명의 ‘헤네티’들이 재빨리 별궁 안으로 향했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사에나가 다시금 시계를 확인했다. 예상대로라면, 10분 정도 후, 슬슬 일을 시작할 참이었다.
그는 병원 1층에 대기 중인 2백여의 헌병들에게 슬슬 움직여 별궁 주변을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 할룩스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그때, 할룩스는 카토에게서 연락이 왔다며 깜박대기 시작했고, 테라스 쪽에서도 시끌시끌한 소음이 들려왔다.
-빨리 오셔야겠습니다. 학장이 예상보다 빨리 일을 시작하려 합니다.-
순간 당황한 사에나는 수나 마구스를 휙 돌아보았다.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시작된 모양입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병력을 최대한 빨리 들여보내겠습니다.”
사에나는 군인도 아닌 이 쌀쌀맞은 마구스에게 이런 것까지 시시콜콜 보고하고픈 맘은 별로 없었지만 어쨌든 황제가 모든 것을 함께 하라고 했으니 일단 의사표시는 하기로 했다.
“그런가.”
메시지를 함께 본 수나 마구스는 그다지 놀란 표정도 아니었다. 그리고 짧게 한 마디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훌륭한 시험을 내리셨군.”
코리온의 느닷없는 작전 명령에 카토는 적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예상은 코리온이 만찬과 함께 몇 분 정도 긴장된 신경전을 벌이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에 얼마나 많은 세력이 얽혀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코리온은 만찬 시작과 동시에 멋대로 일을 벌인 것이었다.
카토로서는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일단 그의 명령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학장님을 지켜!”
헌병들이 몰려나오기가 무섭게, 샤드니는 한 팔로는 코리온을 품 안으로 거칠게 잡아당기며 나머지 한 팔로는 탁자 밑에서 방패를 꺼내 앞을 재빨리 막았다. 상대는 10명의 호족들,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경호원 20여명이었고, 이쪽에는 직할군 경호원 30여명, 그리고 20명의 헌병들까지 있었다. 2대 5의, 누가 보기에도 압도적인 싸움이었다.
“학장님! 이게…….”
놀란 호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지만 이미 테라스 출입문은 직할군 경호원들이 차단한 상태였다. 호족들의 경호원들 중 몇이 그들을 돌파하려다가 보안국 헌병들이 쏜 석궁에 명중당하며 무기력하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지만 않으면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카토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테라스를 울리자 호족들을 따라온 경호원들이 순간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들은 일단 순종하는 듯 무기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사실 그들이 가진 무기래야 단검 정도가 전부니 딱히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코리온의 주변은 샤드니를 비롯한 경호원과 헌병들이 이미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다.
“간단하군.”
잠시 긴장했던 샤드니와 카토도 일단 안도하며 서로 마주보았다. 황제의 1차 계획은 이렇게 싱거우리만큼 간단히 마무리되었으니 이젠 바깥에서 이들이 저항할 여지도 없도록 추종세력들을 확실히 제압하는 2단계만이 남아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상황이 대강 정리된 것으로 판단한 코리온이 앞을 가린 샤드니의 방패를 옆으로 밀쳐내며 앞으로 나섰다.
“학장님, 아직은…….”
불안해진 샤드니가 그를 다시 막으려 했지만 코리온은 그에게 다가오지 말라며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황제의 뜻을 전했다.
“상의 뜻에 따라, 이곳 타르서스는 이제 황실에서 파견된 행정관이 통치할 것이며, 이제 남극, 북극과 ㅤㅋㅞㄹ크에 이어 4번째 직할 주(州)가 될 것이다. 그대들의 재산권은 인정할 것이나 법률적 근거도 없이 무단으로 행사해 온 자치권, 조세 징수권, 영업권은 황실에서 모두 회수하며 기존 직할군은 해체해서 주지사 직속의 치안조직으로 재편한다. 그리고…….”
손끝으로 호족들을 가리키던 코리온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꼈는지 입놀림을 딱 멈추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의 시선은 맞은편 자블리스 아크반의 묘하게 미소 띤 얼굴, 그리고 그의 뒤에 선 구부정한 자세의 여자 경호원과 딱 마주쳤다.
“누구 맘대로?”
같은 순간, 그 여자 경호원의 뒤에 있던 또 한 명이 석궁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던 보안국 헌병의 머리를 주먹으로 한 방에 후려쳤다. 그 엄청나게 빠른 공격에 반격 한 번 못 한 채 얼굴이 짓뭉개진 헌병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지만 그자는 아랑곳없이 석궁을 낚아챘다.
“아, 아악!”
반쯤 의식이 남은 헌병의 손은 여전히 석궁에 걸려 있었지만 그 경호원의 괴력은 쓰러진 헌병을 마치 추처럼 석궁 밑에 매단 채 그대로 코리온을 겨누었다. 보통의 시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괴력이었다.
“피하십시오!”
위험을 먼저 직감한 카토가 코리온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의 걸음도 그 괴한의 공격, 그리고 석궁의 볼트만큼 빠르지는 못했다. 짧은 충격음을 내며 바람을 가른 석궁은 코리온의 가슴으로 정확하게 날아들었다.
“으읍!”
샤드니의 육중한 체중에 순간 밀려난 코리온이 테이블 밑으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볼트는 원래 목표 대신 그를 밀어낸 샤드니의 등 갑주에 딱 소리를 내며 명중했다. 그 충격에 샤드니와, 그가 껴안은 코리온의 몸이 옆으로 휙 틀어졌다.
“씨발! 경호원들은 싹 다 죽여!”
그 둘의 앞을 몸으로 막아선 카토가 앞뒤 볼 것 없이 고함을 꽥 질렀다. 다행히 볼트는 샤드니의 단단한 갑주를 완전히 뚫지 못한 채 끝만 걸려 있었다. 샤드니가 괜찮다며 손짓을 해 보이자 카토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둘의 안전을 일단 확인한 카토는 테이블 위로 얼른 눈을 내밀었다.
“뭐냐? 도대체 뭐야?”
카토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코리온의 상처를 살피던 그 짧은 시간, 50명이나 되는 보안국 헌병과 코리온 측 경호원들의 절반 이상이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모두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단검 정도로 무장하고 있던 적 경호원들은 어느새 헌병들에게서 빼앗은 석궁으로 모두 무장하고 있었다. 카토가 헌병대 장교에게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빌어먹을! 어떻게 된 거야! 정규군 경비병들을 불러! 갑옷을 입은 정규군들을 불러오란 말이다!”
“안됩니다! 직할군 경비병들은 누구 편을 들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다!”
바로 그때, 조금 전 코리온을 쏘았던 바로 그 경호원이 앞을 가린 테이블을 박차고 ‘날아올라’ 바닥에 쓰러져 있던 코리온을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꺼져!”
카토가 칼을 뽑아들며 코리온을 향해 공중에서 꽂히던 그자의 몸통을 힘껏 후려쳤다. 하지만 상대 역시 공중에서 체조를 하듯 순간 도움닫기를 하며 그의 칼을 발등으로 찍으려 했다.
“아읍!”
경악한 샤드니가 코리온을 다시 몸으로 가렸다. 카토의 무자비한 칼놀림에 상체와 떨어져 토막난 적의 다리와 시뻘건 피, 살점이 그 둘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리가 잘리고 허리까지 꺾인 채로 테이블 위에 뒹굴었던 그 적은 비명이나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석궁을 다시 코리온과 샤드니를 향해 겨누았다.
“이 새끼가!”
카토의 칼이 쓰러져 있던 그자의 목을 힘껏 찍었지만 상대가 누군지 정확히 모르는 그의 큰 오판이었다. 목이 잘리는 상황에서도 그 괴물같은 적수는 코리온의 가슴을 향해 정확히 볼트를 날렸다.
“이런!”
샤드니가 기겁을 하며 코리온을 다시 막았지만 이번엔 조금 전과 같은 행운은 없었다. 그의 갑주를 스친 볼트는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던 코리온의 겨드랑이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깊숙이 박혔다.
“아읍!”
막 일어서던 코리온의 팔이 맥없이 뒤로 꺾였다. 그리고 그는 순간 핏기를 잃은 채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졌다.
“학장님! 학장님!”
기겁을 한 샤드니는 코리온의 겨드랑이에 박힌 볼트를 허겁지겁 붙들었다. 찢겨 너덜거리는 무명포의 솔기와 피 묻은 방검복의 섬유 가닥이 스핀에 밀려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제발! 제발 눈 좀 뜨세요!”
머리의 충격으로 잠시 의식을 잃었던 코리온은 샤드니의 격앙된 목소리에 멍한 얼굴로 가늘게 눈을 떴다. 방검복이 볼트를 1차로 차단했지만 워낙에 칼을 막기 위한 것이다 보니 발사체를 완전히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그나마도 없었다면 겨드랑이의 동맥이 터지며 즉사하고도 남았을 위치였다.
어렵게 정신을 차린 코리온은 떨리는 손으로 피가 배어나는 볼트를 붙잡았다.
“괜찮아……괜찮아, 깊지 않으니…….”
코리온이 창백해진 약혼자에게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상처에서 배어난 피가 어느새 왼쪽 가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괜찮다니까……넌 빨리…….”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한 코리온은 묻지도 않은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며 샤드니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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