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20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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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학…….”
코리온이 어깨를 가늘게 떨며 조금씩 뒷걸음쳤다. 동료를 배신한 남자 피다이는 목이 잘린 채 버둥대는 동료를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마구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주춤거리며 물러난 코리온은 한쪽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샤드니를 다시 돌아보았다.
“샤드니, 샤드니.”
졸지에 역할이 뒤바뀐 코리온이 쓰러져 있는 샤드니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했다.
“안됩니다, 저까지는 못 데려가십니다.”
샤드니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코리온의 손을 쳐냈다. 그의 말대로, 이미 중상을 입은 코리온은 남을 추스르기는 고사하고 스스로의 몸조차 가누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말하지 마라.”
코리온은 축 늘어진 샤드니의 팔을 질질 끌고 복도를 힘겹게 걷기 시작했다. 부서진 샤드니의 갑주가 돌바닥에 긁히며 듣기 싫은 소음으로 복도를 울렸다.
“둘 다 죽습니다. 제발요, 그냥 가십시오.”
“시끄럽다 하지 않았느냐! 라스! 라스! 하심은 또 어디 갔느냐!”
코리온이 팔과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샤드니를 끌었다. 하지만 하심은 별궁 다른 곳에 가 있었고, 몸종 라스는 숙소에서 잡일을 하고 있을 터였다. 코리온은 무언가에 홀린 듯 여전히 동료를 난도질하고 있는 피다이의 옆을 지나 별궁 쪽으로 비틀비틀 걸었다. 그의 피 묻은 손에는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샤드니가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저기 간다!”
반대편 실내에 들어서려던 코리온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홀로 악전고투하는 카토를 우회해 돌파해 온 코나 시디크가 석궁을 번쩍 들어 그의 등을 겨누고 있었다. 코나 시디크가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자리에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코리온의 귀 옆을 스쳐 벽에 딱 소리와 함께 박혔다.
“쫓아가라. 잘난 황제에게 저놈의 머릿가죽을 선물해 줄 테니.”
코나 시디크의 손짓을 받은 3명의 헤네티들이 각각 손에 칼과 석궁을 뽑아들고 코리온에게 돌진하려 했다. 그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유령처럼 비틀비틀 일어서서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동료를 완전히 난도질해 토막토막을 낸 남자 피다이가 히죽거리며 손에 묻은 피를 핥았다. 그리고 헤네티들을 향해 또다시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다 어디 갔냐고!”
반쯤 판단력을 잃은 코리온 고개를 저으며 울부짖었다. 샤드니를 끌고 가까스로 테라스를 빠져나온 코리온이 실내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별궁 내부에 원래 있던 직할군 경비병들은 행여 호족 편으로 돌아설 가능성을 걱정해 외부로 모두 내보내 놓은 상황이었다. 코리온은 피로 범벅이 된 손으로 할룩스를 꺼냈다. 그리고는 머릿속에서 막 생각나는 코드를 무조건 눌렀다.
우베와 자이납이 도착한 '레스토랑'은 별궁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호수가, 지금쯤 코리온이 호족들과 대면하고 있을 '테라스'가 접한 절벽 아래에 자리잡고 있었다. 자이납은 이곳에 오는 도중에도 무언가가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 절벽 위 별궁만을 올려보곤 했다.
“약, 구급약 혹시 있어요?”
레스토랑 안쪽의 작은 피어에 안내된 자이납은 자리에 궁둥이를 대기가 무섭게 거울을 꺼내들고 얼굴부터 살폈다.
“이런 빌어먹을, 학장님한테 예쁘게 보여야 하는데 꼴이 이게 뭐람.”
자이납이 거울을 보며 얼굴의 상처 확인하는 데 정신이 팔린 새, 우베는 이번에 안내된 이 피어 부근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잔다란 오아시스의 잔잔한 물 위로 길게 나와 있는 이 자그만 야외 목조 피어에는 우베와 자이납 두 사람만을 위한 테이블과 의자만이 호젓하게 놓여 있었고 사방으로 넓은 창이 나 있었다.
“꺼지는 건 아니겠지?”
우베가 발밑의 나무바닥을 발로 툭툭 차 보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모습에 자이납이 짜증스레 눈을 흘겼다.
“정말, 걱정도 팔자야. 이런 새가슴으로 어떻게 전사단에는 들어왔을까?”
“봐봐, 나무 틈새로 물이 다 보이잖아.”
자이납의 놀림에 발끈한 우베가 다시 바닥을 가리켰다. 하지만 두툼한 나무마루로 짜여진 피어 바닥은 중간중간 틈이 있기는 했지만 제법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우베는 계속 무서운 티를 내며 자이납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여전히 얼얼한 턱만 더듬고 있던 자이납은 갑자기 따끔한 느낌에 뒷목을 짚었다.
“왜 그래? 벌레 물렸어?”
“그, 글쎄요, 모기 때문인가? 오늘 몸이 정말 이상하네.”
우베가 짐짓 걱정하는 척,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자이납의 뒷목을 은근슬쩍 더듬기 시작했다. 자이납은 그런 그의 손을 짜증스레 쳐내며 고개를 세게 흔들어 보았다.
“갑자기 머리가 아찔하네. 아, 젠장.”
혼자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던 자이납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어딘가 갔었던 것 같아요.”
“아니라니까, 거기 자빠져 있던 놈이 가긴 어딜 가.”
우베가 신경질을 부리며 대꾸했다. 바로 그때, 종업원이 나타나 둘의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잠깐, 이것도 그대로 있던가?”
자이납은 그제야 무언가 생각난 듯 가방을 뒤지더니 지난번 빼돌렸던 그 석궁을 불쑥 꺼내들었다.
“휴우, 다행이네.”
어디서도 눈에 확 뜨임직한 그 화려함 때문인지, 옆에서 테이블을 세팅하던 종업원의 눈 또한 바로 휘둥그레졌다. 그 종업원의 시선이 석궁의 옆에 새겨진 바람 문자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지만 우베도, 자이납도 아직 알지 못했다.
“근데, 이 석궁은 어떡할 거야?”
“어떡하긴요? 그걸 말이라고 물어요? 난 무장이라고요.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 쓸 일이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근데 그거 쏘면 나가기나 하는 걸까?”
우베가 석궁에 손을 대려 했지만 자이납이 혀를 쑥 내밀며 재빨리 빼앗아들었다.
“여기 사람도 없으니 테스트나 해 볼까나.”
자이납은 풀려있던 줄을 반대편 시위로 바싹 잡아당겼다. 아직 몇 번 쓰이지 않아서인지, 끼익 하고 낮은 마찰음이 공기를 울렸다.
“우우, 이거 금속제 줄이네? 보통 시민이 걸려면 장난 아니겠네?”
약간은 어렵게 시위를 건 자이납은 줄을 퉁 하고 튕겨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탄성에 자이납이 지레 놀라 움찔했다.
“대단하네? 이 정도면 웬만한 갑주도 그냥 뚫겠는데요? 도대체 재질이 뭔지…….”
자이납이 장전된 석궁을 갑자기 번쩍 치켜들자 종업원이 반사적으로 뒤로 성큼 물러났다.
석궁을 쥐고 있던 자이납은 물러나는 종업원의 스텝이 마치 군사 훈련에서 배우는 회피 동작 보법 같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챘지만 일단은 모른 척 했다. 물론 그는 평소 같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이 잘생기지도 않은 종업원에게 왜 자신이 유달리 관심을 뒀는지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기왕 나온 김에 저녁 먹고 시장 가서…….”
우베가 한참 분위기를 잡으려 했지만 자이납은 그의 말은 들은 척 만 척 석궁의 카트리지에 볼트만 정신없이 끼워 넣고 있었다.
“잠깐만요, 이거나 좀 쏴 보고.”
자이납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에이, 씨, 누구 죽일 일 있어? 도시 한복판에서 그걸 뭣 하러 쏴?”
우베가 버럭 화를 냈지만 자이납의 눈은 그 사이에도 레스토랑 안쪽을 재빨리 살피고 있었다.
그때, 테이블 세팅을 끝낸 종업원이 서두른다 싶을 정도로 급히 돌아서서 주방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순간, 자이납이 갑자기 석궁을 겨누는 모습에 우베가 깜짝 놀라며 머리를 움츠렸다.
“뭐 하는 짓이야!”
우베가 비명을 꽥 질렀지만 자이납은 식당 안쪽, 돌아서서 레스토랑 쪽으로 가고 있는 그 종업원의 뒷목을 향해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아읍!”
전혀 대비조차 못한 채 뒤에서 기습을 받은 그 종업원은 목 뒤 급소에 일격을 당하고는 비명도 못 지르고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기겁을 한 우베가 자이납의 석궁을 붙들며 악을 썼다.
“미쳤어! 민간인을 왜 쏴!”
파랗게 질린 우베가 자이납에게서 허겁지겁 석궁을 빼앗았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긴 자이납 역시 멍한 표정이었다.
“아, 아니……이러려는 게 아니었는데……내가 왜 이랬지?”
잠시 정신이 돌아온 자이납 역시 자신이 해 놓은 짓이 믿어지지 않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같은 순간, 주방 쪽에서 몰려나온 사람들을 본 자이납이 우베의 멱살을 순식간에 낚아채 바닥에 동댕이치듯 쓰러뜨렸다. 그의 힘에 밀려난 우베는 공중을 붕 날듯 그대로 바닥에 꽂혔다.
“아압!”
얼떨결에 자이납의 밑에 깔린 우베가 비명을 질렀다. 물론 이것이 그가 ‘원하던 것’이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충격에 테이블이 넘어지면서 우베의 얼굴 위로 접시와 식기가 쏟아져 내렸다.
“너, 너 왜 그래!”
우베는 어딘지 이상해 보이는 자이납의 뺨을 톡톡 두드렸지만 자이납은 그를 거칠게 뒤로 떠밀어 버렸다. 잠시 제정신을 차린 듯 싶었던 자이납은 우베의 손에서 석궁을 다시 낚아채서는 주방 입구를 겨누었다.
“으, 으아악!”
어딘가에서 울리는 쉿 하는 소음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우베가 손으로 머리를 싸쥐며 바닥에 냉큼 엎드렸다. 따닥 하는 소리를 울리며 쓰러진 테이블에 대여섯발은 될 석궁이 날아와 깊숙이 박혔다.
“아이 씨! 빌어먹을! 자경단 놈들이야? 이게 도대체 뭐야! 자이납 다 너 때문.......”
자이납의 잘못으로 공격당한다고 생각했던 우베는 조금 전 쓰러진 종업원이 살아있는지 확인하려 조심스레 눈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때, 그의 눈에 띈 건 쓰러지며 드러난 그자의 옷깃 아래 숨겨져 있던 단검이었다.
“엑?”
우베는 자신들을 향해 석궁을 쏘아대고 있는 자들을 향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주방 앞에 있는 7명 정도의 적들은 누군지는 몰라도 이곳 자경단 놈들이 절대 아니었다. 다시 겁을 집어먹은 우베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자이납의 뒤에 몸을 숨겼다.
“저 새끼들 뭐야? 넌 아는 거지?”
“여기서 나가야 돼요. 이걸 돌려드려야 한다고요.”
자이납이 쓰러진 테이블 위로 고개를 내밀고 주방 앞의 무리들에게 한 발을 다시 쏘았다.
“돌려줘? 누구한테?”
자이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의 나무판 사이에 손을 밀어넣고 악 소리를 지르며 힘껏 잡아당겼다. 끼익 하며 못이 빠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바닥의 두툼한 나무판 한 장이 그대로 뜯겨 나왔다. 사람 한 명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기는 했지만 아래는 깊이도 가늠하기 어려운 오아시스의 물이 파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들어가요!”
자이납은 우베의 뒷덜미를 잡고는 다짜고짜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익!”
다음 일을 예상조차 못 하고 있던 우베는 자이납의 팔에 붙들려 구멍 속으로 쏙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는 짧은 비명 한 마디만을 남긴 채 물에 큰 소리를 내며 풍덩 빠지고 말았다. 과정은 좀 어처구니없지만, 그가 식당에 오자마자 그리도 두려워했던 일이 ‘정말로’ 벌어진 것이었다.
“아푸푸!”
우베도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얼떨결에 빠졌다보니, 아니 던져졌다 보니 잠시 정신이 없었다. 물 위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는 무언가 옆에 또다시 빠지는 소리에 기겁을 하며 버둥거렸지만 다행히 그에 뒤이어 물에 뛰어든 자이납의 손이 우베의 뒷덜미를 꽉 붙들었다.
“가만히만 있어요. 뜰 테니까.”
자이납은 한 팔로 우베를 붙든 채 호수물 위를 헤엄쳐가기 시작했다. 우베는 자이납이 왜 갑자기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아가씨가 대책없는 왈가닥에 제멋대로 바람둥이기는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지금의 자이납은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이라도 받고 있는 듯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새 이 둘을 쫓아온 레스토랑의 정체불명 괴한들이 물 위에서 이들에게 마구 사격을 퍼부었지만 어둠 때문인지 그리 정확하지는 못했다. 우베를 붙든 채 수면 아래로 급히 잠수한 자이납은 타르서스 별궁과 마주하고 있는 절벽 쪽으로 숨도 쉬지 않은 채 계속 헤엄쳐갔다. 숨이 막힌 우베가 그의 손에 붙들린 채 계속 버둥거렸지만 자이납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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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어(pier)는 보통 해안가 같은 곳에 물 위로 길게 나와 설치된 구조물을 말합니다. (베이와치같은 외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죠.) 레스토랑에서는 이런 것을 여러 개 작게 만들어서 vip석으로 꾸미기도 하고요, 따로 객실로 만들기도 합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