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23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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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로군.”
잠시 후, 부서진 문 밖에서 발음이 반쯤 풀어진 듯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 서 있던 그 괴한이 함께 온 피다이, 그리고 3명 정도의 헤네티를 밖에 놔둔 채 안에 성큼 들어섰지만 코리온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무슨 수작을 부리든, 내겐 어림없다.”
두 구의 시체를 무심하게 지나 온 코나 시디크가 허세를 부리며 휙 돌아섰지만 정작 그의 목표물은 자신을 죽이러 온 이 무시무시한 살인마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아름다운 군자는 여절여차 여탁여마 (如切如磋 如琢如磨)로다, 자른 듯, 다듬은 듯, 쪼아낸 듯, 갈아낸 듯 광채가 나시니, 끝내 잊을 수가 없구나.”
코리온은 죽은 샤드니를 무릎 위에 눕힌 채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감정이라고는 거의 거세된 코나였지만 눈물이 섞였을지언정 코리온의 고운 노랫소리에는 잠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내 사랑하는 이에게는 애정에 치우쳤고, 혐오하는 이에게는 혐오에 치우쳤고, 경외하는 이에게는 경외에 치우쳤고, 불쌍히 여기는 이에게 동정심에 치우쳤으나…….”
“닥쳐라.”
코나가 칼을 겨누었지만 코리온은 여전히 노래만 부르고 있었다. 이 무서운 유학자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까 내심 긴장했던 코나는 이런 그의 모습에 도리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코리온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코나에게 무심하게나마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눈물에 젖어 있는 그의 시선에는 조금 전 피다이를 굴복시켰던 그 무서운 위압감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온화하던 동풍이 이제는 폭풍과 비까지 휘몰아치네…….”
눈시울에 가득 고인 눈물 위로 잔잔한 물결 같은 일렁임이 번졌다.
“닥치라니까!”
코리온의 고운 노랫소리는 코나의 으르렁거리는 음성에 묻혀버렸다. 하지만 코나의 째지는 목소리에 파묻혀버린 또 하나의 소리가 있었다.
“악!”
코리온의 노랫소리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코나는 누군가에게 확 밀리며 바닥을 굴렀다.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그는 자신을 밀어낸 헤네티가 바닥에 피를 뿌리며 무릎을 꿇는 모습에 순간 기겁을 했다. 도대체 무엇에 맞은 것인지, 헤네티의 목 거의 절반이 잘리듯 떨어져나가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얼떨떨해진 코나가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어디야!”
뒤이어 퉁 하고 또다시 울린 석궁의 시위 소리에 피다이가 그제야 방향을 파악하고 고개를 휙 돌렸다. 믿어지지 않게도, 창살이 쳐진 절벽 쪽 창문 밖이었다.
“아읍!”
피다이는 방향까지는 파악했지만 미처 막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창 쪽에서 날아온 볼트는 그의 쇄골 아래에 푹 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깊숙이 박혀버렸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방 바깥 계단에서도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학장님 목소리다!”
사방에서 저항하는 경비병들을 어렵게 뚫고 1층에서 이곳까지 내려온 사에나가 십여 명의 헌병들과 함께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코나의 헤네티 2명이 급히 복도에서 그들을 막아섰다.
“너만 죽이고 그만 가야겠다.”
코나는 여전히 샤드니를 껴안은 채 넋을 놓고 있는 코리온에게 석궁을 치켜들었지만 절벽을 기어 올라와 창틀 밖 쇠창살에 힘겹게 매달려 있던 자이납 역시 그런 그를 그대로 놔두지는 않았다.
“이 빌어먹을 놈의 창살 같으니!”
유리창을 더 크게 깨낸 자이납은 창살 사이로 석궁을 디밀어서는 코리온을 겨누고 있는 코나 시디크에게 또 한 발을 쏘았다.
“우읍!”
강력한 볼트에 오른손목을 그대로 관통당한 코나 시디크가 짧은 신음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갈가리 찢긴 그의 손목에서 살점과 뼈, 근육까지 그대로 드러나 있었지만 코나는 그 와중에도 오른손의 석궁을 놓지는 않았다.
“좀 뒈져라!”
자이납은 그에게 최후의 일격을 쏘려 창살 너머로 다시 석궁을 디밀었다.
“이 년!”
방 안을 향해 방아쇠를 막 당기려던 자이납은 창틀 아래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시커먼 형상에 기겁을 하고 놀라 하마터면 손을 놓치고 절벽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으엑!”
자이납이 얼른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피다이의 손이 그보다 더 빨랐다. 유리창을 산산조각내며 튀어나온 피다이의 손에 순식간에 목 뒤를 낚아 채인 자이납은 꽝 소리를 내며 창살에 얼굴을 처박히고 말았다. 쇄골 아래 급소에 이미 볼트를 맞아 한쪽 팔을 쓰지 못하게 된 피다이는 이미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무지막지한 마약의 힘은 고통도, 심지어 죽음의 손길마저도 잠시나마 막아서고 있었다.
“아, 압.”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자이납이 창틀에 매달린 채 버둥거렸지만 그로서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다급해진 그는 장전되어 있던 볼트를 피다이의 얼굴을 향해 발사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이 새끼 뭐야!”
피다이에 관해 아직 잘 모르는 자이납은 자신의 행동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관자놀이에 볼트가 거의 반 뼘이나 박혔는데도 여전히 그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이 적수가 사람보다는 괴물에 가깝다는 정도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놔! 놔!”
목과 코가 짓눌린 자이납이 악을 쓰려 했지만 한 손은 철창을 붙들고, 머리는 창에 처박혀 있는지라 비어버린 석궁을 재장전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피다이의 머리를 석궁의 손잡이로 몇 번이나 힘껏 후려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록 손목을 잃었지만 이대로 놔두면 코나 시디크가 코리온을 죽이는 건 시간문제였다.
“씨이!”
이래저래 궁지에 몰린 자이납은 깨진 창문 사이로 석궁을 힘껏 던져 넣었다.
“학장님! 받으세요!”
자이납이 던진 석궁은 실내를 붕 날아가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코리온의 발밑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제법 충격이 컸지만 워낙에 무기다보니 별다르게 상한 곳은 없었다.
“좀 뒈져봐라!”
석궁을 던지고 오른손이 여유롭게 된 자이납은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을 뽑아 여전히 뒷목을 붙들고 있는 피다이의 목을 힘껏 찔렀다. 순간 피가 솟구치면서 거의 목뼈를 부러뜨릴 듯 내리누르던 힘은 좀 줄었지만 상대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이납은 칼로 상대의 목을 계속 찔러댔지만 이 괴물은 이미 숨이 끊어진 채로 그를 계속 붙들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이따위 괴물이 다 있어! 학장님! 제발! 그걸로 놈을 쏘시라고요!”
계속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코리온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석궁을 집어들었다. 그는 손가락에 시위를 걸고 이로 힘껏 잡아당겨 시위를 걸었다. 제법 강한 금속제 시위였지만 타고난 팔 힘 덕분에 그는 단 두 번만에 시위를 걸고 천천히 앞으로 겨누었다.
반대편에서는 오른손이 반쯤 떨어져나간 고통을 이를 악물고 이겨낸 코나 시디크가 그나마 성한 왼손으로 석궁을 바꿔 쥐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겨눈 코리온의 석궁을 보며 멈칫했다. 이제 칼자루는 코리온에게 가 있었다.
“저, 저놈…….”
“학장님! 놈을 죽이지는 말라는 상의 명령이십니다! 제발…….”
문 밖에서 헤네티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사에나가 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기겁을 하고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와 헌병들은 나름대로 분전하고 있었지만 고작 2명의 헤네티들을 돌파하지 못한 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지원군 좀 오란 말이다! 학장님이 여기 있다니까!”
사에나가 할룩스에 대고 지원부대에 고래고래 악을 썼다. 호족들을 편드는 경비병들의 산발적인 저항 때문에 추가병력이 빨리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10명의 헌병들 중 절반이 넘는 6명이 이미 다 죽었고, 4명은 부상을 입은 채 싸울 의욕마저도 잃고 있었다.
코리온의 석궁 앞에 드러난 코나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여기서 죽는다고 놀라운 것도 없겠군.”
그는 피에 젖고 너덜너덜해진 편물 가디건을 보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이거 뜨는데 20일이나 걸렸는데.”
코리온은 석궁으로 그를 겨눈 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코나는 눈물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그의 눈동자를 노려보며 계속 히죽거렸다.
“이봐, 난 옷을 다 직접 만들어서 입지. 뜨개질도 좋고, 자수고 좋고, 바느질도 좋아해. 사람들은 그런 날 보고 병적인 결벽 때문이라니 잔학한 속내를 숨기려는 수작이라느니 별 소리를 다 하더군. 너를 숫총각이라고 멋대로 넘겨짚는 웃겨먹은 사람들처럼 말이야. 그런데, 친구, 그 이유를 혹시 알고 있나?”
코나가 당장 쏘라는 듯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코리온은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유? 간단해. 난 골격이 별나서 기성복이 잘 맞지 않거든. 그뿐이야. 나도 너처럼 사람들의 기준에서 약간 벗어났을 뿐이지. 동지.”
코나는 죽음을 각오한 듯 빨리 쏘라며 눈짓을 보냈다. 반쯤 떨어져나간 코나의 팔에서 무섭게 피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서 있기도 버거운 듯 잠시 휘청거렸다.
“어지러워 죽겠으니 빨리 쏴. 씨발,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라는 거냐. 안 그러면 내가 쏘랴?”
“비(雨)야, 우리 공전(公田)에 먼저 내려 다오. 비가 남거든 우리 사전(私田)에 와서 논밭을 적시어 다오.”
코리온은 조금씩 차가워지고 있는 샤드니의 얼굴, 그리고 그를 사실상 죽인 ‘원수’를 번갈아 쳐다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손에 든 석궁을 쏘지는 않았다.
“뭐 이런 한심한 놈이 다 있나.”
코나가 석궁을 쥔 왼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길을 뚫지 못하고 있던 사에나는 상 안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코리온은 석궁을 제대로 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코나가 그런 그의 약점을 이용해 반격이라도 한다면 도리어 그를 죽이느니만 못한 결과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방으로 들어가는 문 앞은 지독한 헤네티 한 명이 온몸에 5발의 석궁을 맞은 채로 지겨우리만큼 버티고 있었다.
“비키란 말이다!”
다급해진 사에나는 방패 하나를 앞세우고 무작정 돌진해 그 헤네티를 어깨로 힘껏 들이받았다. 다른 헤네티가 쏜 석궁이 순간 등에 명중했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코나를 향해 힘껏 몸을 날렸다.
코나가 중심을 잃으며 엉겁결에 쏜 볼트가 사에나의 손목 브레이서를 스치며 궤도가 꺾여 천장에 딱 소리를 내며 꽂혔다.
“이년!”
사에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코나의 머리를 석궁 자루로 힘껏 내리쳤지만 동시에 지독한 고통이 그의 등을 강타했다.
“아, 아악…….”
사에나는 자신의 등에도 볼트가 박힌 것을 그제야 깨달았지만 기껏 잡은 코나 시디크를 놓아줄 수는 없었다. 그는 정신이 혼미해진 코나의 왼팔을 힘껏 꺾어 어깨 관절을 뽑아 버렸다. 코나가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지만 이만큼 확실한 해결책은 없었다.
순간 그는 자신이 등 뒤에 적들을 그대로 놔두고 방 안으로 돌진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맙소사.”
잠시 흥분에 휩싸였던 사에나가 등 뒤, 문 바깥쪽을 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자신에 데려온 헌병들도, 그들과 어울려 싸우던 헤네티들도 모두 쓰러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지독한 놈, 누가 제발 나 좀 올려줘요.”
여전히 바깥에 매달려 있던 자이납이 쓰러진 피다이를 방 안쪽으로 밀어버리고는 사에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사에나의 시선은 복도의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여러 명의 실루엣에 멎어 있었다.
“결국 이렇게 끝났군.”
수나 마구스가 바닥에 치맛자락을 끌며 천천히 방 안에 들어섰다. 그를 따라온 헤네티들이 신음하는 ‘적 헤네티’들을 포박하고 있었다.
“안 오신다면서요?”
사에나가 퉁명스럽게 물었지만 수나 마구스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손목에 차고 있던 여러 개의 팔찌 중 하나를 풀어 그에게 불쑥 내밀었을 뿐이었다.
“나보다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낫겠군. 네 할아버지 잘의 유품이다.”
사에나는 피로 범벅이 된 손으로 그 화려한 백금제 팔찌를 받아들었다. 12개 교단의 상징이 빙 둘려져 있는 그 팔찌의 손등 부분에는 에아 교단을 뜻하는 활과 화살 문장이 유달리 크게 새겨져 있었다.
멍해진 표정의 사에나에게서 고개를 돌린 수나 마구스는 겨드랑이에 석궁을 맞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신음하고 있던 코리온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수나의 얼굴을 비로소 알아본 코리온의 눈꼬리가 순간 사나워졌지만 이제 완전히 탈진해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수고했다. 파이, 코리온 빈 트라카.”
“이, 익…….”
코리온이 기를 쓰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수나 마구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떨고 있는 그의 얼굴을 품에 안았다.
“내게 있는 신성한 트라카의 기운이 언젠가 네게 옮겨 깃들 것이니.”
수나 마구스는 피로 물든 코리온의 얇은 입술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입맞춤이 아닌, 마치 연인에게 하듯 진하고 열정적이기까지 한 입맞춤에 순간 경악한 코리온이 어깨를 바싹 움츠리며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은 수나의 팔을 도저히 밀어낼 수 없었다.
그에게서 입술을 뗀 수나 마구스는 새끼손가락을 힘껏 깨물어 피를 내고는 코리온의 이마에 무어라 쓰기 시작했다.
“바 남 야즈드 박사야드 박사야쉬가르 메헤르반, 야타, 아후 바이료, 아타. 감마와 손자 파이, 하가, 마나이오 파투브.” *
수나 마구스는 멍해진 코리온을 바닥에 천천히 놓아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에서 이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던 니사가 그제야 안도하며 응급상자를 들고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수나 마구스는 쓰러져 있는 코리온, 그리고 등에 부상을 입은 사에나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하아아.”
긴장이 풀린 사에나는 바닥에 축 늘어졌다. 그리고 코리온 역시 조금씩 의식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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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시 부분은 아리안 경전인 Khorda Avesta 실제 기도문의 일부로,
'모든 것을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신의 이름으로......이제 나와 그를 보살펴 주소서'
라는 뜻의 아리안-팔레비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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