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25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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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이세요? 대낮부터 여길 다 오시고.”
강론을 마치고 학교에서 나온 유평은 ‘새아빠’의 더러운 화물차 문을 열고 고개를 휙 디밀었다. 자존심 센 보통의 황족 아가씨들 같았다면 친어머니의 허름한 행색, 기름때에 절은 의붓아버지의 차림새에 짜증을 낼 만도 했지만 이 왈가닥 아가씨는 학우들의 ‘황족 맞아?’하는 묘한 눈길 따위에는 그다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의 물음에 대답한 건 어머니가 아니고 이 자상한 새아빠였다.
“5일 후면 가족이 될 텐데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오오오, 비싼 거 사주시는 거죠?”
유평은 차 문을 다시 쿵 닫아버리고는 좌석 대신 높은 짐칸에 그 작은 키로 아둥바둥 기어올랐다. 남극성당 교복인 흰 무명포와 줄 1개가 쳐진 금빛 머플러에 시커멓게 눌은 기름때가 덕지덕지 묻었지만 유평은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툭툭 털어내고는 좌석이 있는 앞쪽 캐빈을 손바닥으로 탕탕 쳤다.
“빨리 가요. 나도 배고프던 참이니까.”
“아니 왜 여기 안 타고 그 더러운 데…….”
유레트는 유평을 좌석으로 불러들이려는 약혼자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눈치껏 자리를 피해 짐칸에 올라탄 딸을 힐끔 돌아보며 잠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남자는 못내 신경이 쓰이는지 그에게 다시 일렀다.
“거기 너무 더러워. 웬만하면 앞에 오려무나.”
“보니까 앉을 자리도 없구만. 뭐 프라임까지 갈 것 아니면 빨랑 출발해요.”
유평은 유레트의 옆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몇 개의 가방을 가리키며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짐칸에 널린 공구들, 선박 부품들을 한쪽으로 툭툭 걷어 차냈다. 차는 그제야 천천히 움직여 남극의 해안가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기분 괜찮네.”
화물차의 짐칸에 선 유평은 해안 절벽을 따라 난 도로의 풍광을 맘껏 만끽하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입을 쩍 벌리고 바닷바람을 그대로 들이켰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그의 하얀 무명포자락이 마치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결혼식날 입을 옷은 마련해 놨어요?”
유평이 앞자리의 유레트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오늘 가서 맞추게.”
“조만간 저도 물려입게 좀 비싼 걸로 해요.”
“어유, 벌써 급하기도 하셔?”
유레트와 새아빠가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이 그리워질 것 같네요.”
유평이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어머니 유레트도 이제 곧 행복한 가정을 꾸릴 테고, 남극성당 우등생도인 그의 앞날도 탄탄했다. 곧 박사과정을 마치고 교수가 되면 그도 당당히 한 명의 어른으로 인정받을 테고, 어릴 때부터 지금껏 마음에 두어 온 ‘소중한 그 한 사람’과 결혼해 가정까지 꾸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딱 한 가지가 문제이기는 했지만.
“엄마, 근데 나도 예뻐질 수 있을까?”
딸의 엉뚱한 물음에 유레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유평이지만 유일한 컴플렉스가 바로 외모였다. 누구보다 미남인 친아버지와 평균 이상 외모의 어머니를 둔 유평이었지만 유전자의 장난 덕분인지 그의 외모는 아무리 잘 보아줘도 ‘평범하다’고 말하기도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5척(150cm)이 가까스로 넘는 자그만 키에 짤막한 다리, 매부리코에 길쭉한 얼굴, 째진 눈에 입술 역시 있는지 없는지 할 정도로 얇아서 그는 누가 보아도 ‘꽤나 고약스런 인상’이었다.
“그래도 나 같은 여자도 좋아할 사람은 있겠지?”
“얼굴은 처음 며칠뿐이란다. 결국은 누구나 다 이뻐보여.”
새아빠의 위로 아닌 위로에 유평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지금껏 오르마즈에게 진심을 고백하고픈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매번 그의 앞에만 서면 움츠러들곤 했다. 6척 2촌(186cm)이나 되는 오르마즈는 그가 한참을 올려보아야 할 정도로 키도 컸고, 그의 넓고 당당한 어깨와 가슴은 숨막히게 할 정도로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위압적이기도 했다. 오르마즈의 수려한 얼굴은 마치 광채가 나는 것 같아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도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렇다보니 유평은 그에게 단 한 번도 진심을 말해볼 수가 없었다. 괜한 자격지심에 그에 대한 관심을 마치 어린애처럼 짓궂은 심술로 표현하곤 했지만 정작 그가 떠나고 나면 '왜 그랬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로 잠도 못 이룬 채 스스로를 학대하곤 했다.
“어쩌면 네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른단다.”
유레트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지만 화물칸의 유평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유평은 오르마즈의 품에 안겨 뜨거운 입맞춤을 받는 모습, 그리고 그와 나란히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꿈같은 광경을 떠올리며 혼자 이런저런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쳤다.
“지나다니는 생도들 보고 마냥 부럽다고만 생각했지 나같이 무식한 놈한테 이런 똑똑한 딸네미가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
운전을 하던 새아빠의 칭찬에 유평이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으니까 빨랑 동생들이나 낳으세요. 그 전에 교수가 될 테니 내가 동생들도 직접 족치고 가르쳐서 내 후배로 넣어줄 테니까.”
“하여간, 저 말하는 꼴 좀 봐.”
유레트가 여전히 거친 유평의 입버릇에 습관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혼자 바람을 쐬던 유평은 아까부터 계속 뒤를 따라오고 있는 화물차 한 대를 힐금 돌아보았지만 어차피 따로 옆으로 빠질 길이 없이 쭉 뻗은 도로인지라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유평은 유레트의 옆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큰 가방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다 뭐에요?”
“궁에서 보냈다. 거기서 나올 때 남겨놨던 물건들이야. 새로 시집가는 김에 싹 가져가라고 보낸 모양이더구나.”
“궁에서요?”
해맑던 유평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
“내용물은 확인해 보셨어요?”
“가서 열어보려고.”
“정확히 누가 보냈는데요? 아빠……아니, 폐하가 보냈나요? 아니면…….”
유평의 집요한 물음에 유레트가 그제야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내명부에서 보낸 것 같던데.”
“차 세워요!”
유평이 차 안으로 손을 밀어넣어 새아빠의 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응?”
유평의 찢어지는 고함소리에 깜짝 놀란 새아빠가 지레 놀라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관성에 밀린 유평이 화물칸 앞쪽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조심해!”
유레트가 비명을 질렀지만 바로 그 순간, 조금 전부터 뒤를 계속 쫓아오던 큰 화물차가 무서운 속도로 이 차의 뒤를 들이받았다.
“아아악!”
뒤를 들이받힌 유레트 일행의 차가 순식간에 찌그러들며 앞으로 튕겨 해안가 도로 모퉁이로 밀려나갔다. 그리고 화물칸에 있던 유평은 충격에 공중으로 한참을 튕겨나 흙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아, 아아악!”
다리부터 떨어진 유평은 바닥을 몇 바퀴 구르며 온몸이 부서지는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엄마, 엄마…….”
유평의 머릿속이 순간 아찔해졌지만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희미해져가는 판단력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지만 피로 범벅이 된 시야 때문인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젠장.”
그는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한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손으로 피를 털어내고 다시 눈에 힘을 준 그가 발견한 건 몇 바퀴를 빙빙 돌아 해안가 도로의 구부러진 모퉁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새아빠의 차, 그리고 그 뒤에 차를 멈춰 세운 채 이 사고광경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는 뒤쪽 화물차의 운전사였다. 완충장치 덕분에 차에 탄 어머니와 새아빠는 당장은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 새아빠, 엄마.”
유평은 한쪽 다리와 두 팔로 엉금엉금 기어 차에 다가갔다. 마비된 다리에서 부러져 튀어나온 뼈가 바닥에 긁혔지만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빨리 내려요! 내리라고요!”
유평이 악을 썼다. 하지만 새아빠는 잠시 의식을 잃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찌그러진 차에 끼어버린 유레트는 창 밖으로 나오려 버둥대고 있었지만 바깥에서 도움이 없이는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빨리 나오라니까요!”
악을 쓰는 딸을 향해 유레트가 무어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지만 유평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따를 생각은 없었다. 흙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기어간 유평은 차에 거의 다가가서야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오지, 오지 마…….”
“엄마.”
바닥을 필사적으로 기어온 유평은 손을 뻗어 창 밖으로 튀어나와 있던 어머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차 안에서 풍기는 인화물질의 매캐한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유평의 눈이 순간 커졌지만 끔찍한 운명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굉음을 울리며 차 안에서 폭발한 강력한 인화물질은 떨고 있던 어머니 유레트와 이미 의식을 잃은 새아빠를 집어삼켰고, 어머니의 손을 붙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유평의 눈동자, 그리고 그의 얼굴과 몸에 무시무시한 폭풍과 화염을 쏟아냈다.
“아악!”
바닥에 있었지만 유평 역시 폭발의 압력에서 무사하지는 못했다. 눈앞을 뒤흔드는 강력한 충격파에 뒤이어 차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과 파편이 그의 감각도,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마지막 의지력까지 모두 앗아갔다. 그리고 끔찍한 열기를 모조리 뒤집어쓴 그의 작은 몸은 불이 붙은 채 후폭풍에 날려 뒤로 맥없이 튕겨나갔다.
“아……아…….”
도로 밖으로 밀려난 유평은 가파른 해안가 절벽에 몇 번이나 부딪치고 미끄러진 끝에 어딘가에 큰 충격과 함께 동댕이쳐졌다.
“엄마…….”
희미한 의식이 남은 유평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입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불꽃과 파편을 뒤집어쓴 피부는 지글지글 타는 것 같았고, 눈도 보이지 않았고 귀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에 무언가 붙들고 있었지만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온몸이 불에 타고 조각난 끔찍한 고통이 그의 머리를 짓눌렀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뇌리에 단 하나의 영상만이 맴돌고 있었다.
“엄마.”
불꽃과 화염에 휩싸이면서도 끝내 딸을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며 유평이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고 조금씩 의식을 잃어갔다.
끔찍한 사고 소식을 전해들은 오르마즈는 황제의 전용셔틀을 거의 빼앗듯이 집어타고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남극으로 달려왔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절벽 밑에서 발견된 유평은 그가 도착하기 직전, 가까스로 구조되어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유레트와 약혼자의 유해는 차와 함께 불타거나 조각난 채 현장 주변에 끔찍하게 널려 있었다.
“맙소사.”
오르마즈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사고를 일으켰다는 대형 화물차 기사는 조사를 나온 치안군들에게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둘러대고 있었지만 유레트의 차 주변에는 인화물질의 흔적이 선명했다. 현장 주변에서 위압적인 눈길로 어슬렁거리고 있는 보안국 요원들의 눈빛만 보아도 모든 정황은 분명했다.
“유가족이 없는데 이건 어떡할까요? 그나마 제일 성한…….”
눈물마저도 잊은 채 절벽에 멍하니 서 있던 오르마즈에게 현장을 수습한 치안군 장교가 검은 봉투에 잘 싼 무언가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옹주 마마께서 끝까지 손에 쥐고 계셨습니다.”
“솔직히 말해라. 사고냐? 아니면 살인이냐?”
오르마즈의 물음에 현장 조사를 맡은 치안군 장교는 잠시 대답을 못 하고 어물거렸다.
“제가 보긴……그냥 사고입니다.”
장교의 거의 울먹이듯 떨리는 목소리에는 치안군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 그리고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이 그대로 숨겨져 있었다.
“저 보안국 놈들이 너희보다 먼저 왔느냐?”
장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리며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 옹주마마께선 저기 떨어져 계셨습니다. 보시다시피 절벽이 가팔라서 장비가 없이는 아무도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장비를 갖춘 전문 구급대원이 내려가서 끌어올려야 했습니다.”
장교의 눈치 빠르고 적절한 이 대답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다행히 그분을 막 끌어올렸을 때 비서관님께서 곧 도착하신다는 연락이 와서 그제야…….”
장교가 얼른 말을 끊으며 보안국 요원들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저자들은 유평을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고 ‘죽이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장교도 그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터였다.
“만일을 대비해 옹주마마의 병실에 치안군을 2명 배치했습니다.”
“잘했다. 이번 일은 내 손수 챙길 것이니 무슨 일이 생기면 내게 연락해라. 내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귀관은 옹주마마를 어떡해서든 보호해라. 큰 보답이 있을 테니.”
명함을 넘겨준 오르마즈는 짐짓 웃음을 지으며 그 장교에게 가 보라고 손짓했다. ‘개국공신’의 격려에 고무된 그 장교는 힘있게 경례를 붙이고는 멀어져갔다.
절벽에 혼자 남은 오르마즈는 그제야 검은 봉투를 조심스레 벌려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않은 채 한참동안 그 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지만 그 밑에는 차마 참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미안합니다.”
팔꿈치에서 잘린 유레트의 한쪽 손을 어루만지며 오르마즈는 그와의 긴 기억을 머리에 떠올렸다. 비천하게 태어나 제국의 건국과 그 모든 풍파를 지켜보았던 이 불행한 여인은 이렇게 끔찍하게 죽었지만 그가 남긴 핏줄만은 제국 ‘황실’에 아직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제국의 가장 고귀한 혈통에 계속 그의 흔적을 남기는 복을 거머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내 잘못이요…….”
오르마즈는 뼈아픈 눈물을 솟구치는 분노 속에 조용히 묻으며 그의 잘린 손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저들도 곧 대가를 치를 테니……조금만 기다리시오.”
그의 무시무시한 눈길이 이곳에 찾아온 내명부 내관들, 그리고 소리소문없이 도착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수하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물론 이들은 오르마즈의 차가운 회색빛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새겨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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