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28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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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강제로 엎드린 코나가 버둥거렸지만 카렐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기 질문만 이었다.
“황제로서 묻는다. 널 타르서스로 보낸 게 누구지?”
“닥쳐.”
“널 보낸 게 ‘가짜 마구스’ 람다냐?”
“씨이.”
“그놈이 타르서스에 개입한 이유가 뭐지?”
“…….”
“교단 잔존세력들이 지들끼리 내분을 벌이건 말건 내 알 바 아니지만 감히 내 일에 참견하는 건 참을 수가 없다.”
카렐이 발에 가하는 힘이 조금씩 강해지면서 바닥에 짓눌린 코나는 대답은 고사하고 숨도 내쉬지 못하고 있었다. 코나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대답을 듣자는 것이 아닌, 심리적으로 굴복시키자는 속셈임을 눈치챘지만 만만하게 꺾여주지는 않았다.
“가짜 마구스 람다가 누구냐?”
쉴새없이 쏟아지는 질문에도 코나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최소한 약속만은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가 대답을 하건 말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계속 질문을 쏟아 부으며 그의 머릿속을 엉망을 만들었다.
“네 주치의에게 물어보지 그러나?”
버티다 못해 숨이 막혀 어질어질해진 코나가 이를 빠득 갈며 대답했지만 같은 순간, 황제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감돌고 있는 것은 볼 수가 없었다. 쓸모가 있는 것이든 아니든, 어쨌든 코나는 그의 물음에 처음으로 대답한 것이었다.
카렐은 그제야 그의 등에서 발을 떼며 뒤로 휙 돌아섰다.
“투모카프 총리의 손에 죽은 네 남편과 자식들의 유골 정도는 조만간 찾아주지.”
“잊어버린 옛 일이다.”
코나가 즉시 대꾸했지만 황제는 이미 유리방을 나서고 있었다. 그가 사라진 이후, 혼자 남은 코나는 마치 유령이라도 마주친 느낌으로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주한 상대가 ‘람다’ 못지않게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굴복할 사람이 아닙니다.”
사에나의 한 마디에 카렐이 태연스레 대답했다.
“안다. 최소한 단기간에는.”
황제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는 않았다. 그렇게 유리방을 나선 카렐은 사에나와 모렌 박사를 대동하고는 상층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카렐은 원래 집무실인 유전자은행으로 가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뒤따라오고 있는 모렌 박사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사에나 경, 그럼 오늘도 수고해 주게.”
황제의 눈짓을 받은 사에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재빨리 자리를 비워주었다.
“웬일인가. 내가 따져묻지도 않았는데 그대가 자진해서 보고를 다 올리고?”
“무언가 이상한 것이 있어서……원정 떠나시기 전 여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카렐의 표정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대가 이상하다는 것을 보니 정말로 이상한 것인가.”
카렐이 그런 모렌 박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주페 태자 저하의 ‘두 번째 아버지’를 합성한 세포에 관해서 말씀드릴 것이…….”
“내 할아버지?”
“……굳이 말씀드리면 그런 셈입니다.”
어딘지 자신이 없는 모렌 박사의 태도에 카렐이 눈가를 다시 찡그렸다.
“자료가 없이 말로만 보고하려는 걸 보니 구체적인 서류자료는 없다는 뜻이군?”
“사에나 경이 빼돌린 헤네티의 시체에서 소지품들을 정리하다가 이걸 발견했습니다.”
모렌 박사가 손에 쥐고 있던 새끼손가락만한 캡슐 한 개를 불쑥 내밀었다. 긴 줄이 달려있는 것을 보아 목에 걸고 있었던 듯 보였다.
“교단에서 쓰는 유전자 캡슐입니다. 헤네티에게는 개인 인식표를 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X의 팔찌처럼 말입니다.”
모렌 박사가 마지막 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내용물은?”
“없습니다.”
“응?”
카렐이 캡슐 뚜껑을 비틀어 열어보았다. 그의 말대로. 가는 유리튜브가 꽂혀있어야 할 자리는 그냥 흔적만 남아있었다. 한쪽에는 소지자를 나타내듯 코드가 찍혀 있었지만 해독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은회색인 보통의 캡슐과는 달리 얼룩 칠이 되어 있습니다.”
“기도비닉 때문에 일부러 칠했겠지. 전시에 은폐해야 할 상황에서 행여라도 반짝거리면 곤란하니…….”
순간 카렐이 무언가 생각난 듯 지난번 모렌 박사가 가져온 자료를 재빨리 서랍에서 꺼냈다. 그곳에는 모렌 박사가 주페 태자를 합성하기 위해 황제, 그리고 오르마즈의 세포와 함께 썼던 ‘3번째 캡슐’의 오래된 사진이 함께 들어있었다.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카렐이 모렌 박사를 살짝 째려보았다. 전부터 의아하게 생각했던 검은색 얼룩은 이번에 입수한 헤네티 캡슐의 얼룩과 놀랄 만큼 흡사했다.
“어쨌든, 이게 무슨 뜻인지 나보다는 그대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당시에 전 초급 연구원이었고, 연구소에서 무얼 하는지는 잘…….”
“그건 아니까 내게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게나.”
카렐의 목소리가 어느새 차갑게 굳어 있었다. 모렌 박사가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헤네티들 역시 현재의 X처럼 당시 교단에서 인공적으로 합성한 전사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이 자신이 들어있었던 캡슐을 인식표로 목에 걸고 다녔던 것이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카렐이 그 빈 캡슐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며 다시 물었다.
“민병대가 교단의 연구소에서 훔쳐 간 건 개량형 헤네티의 세포였던 것 같습니다. 그네들로 최초의 X를 키웠다는 가설이 맞는다면…….”
“아버지는 할머니를 닮아 키는 작았지만 궁에서 무술을 가르치던 가디언 교관들을 꺾었을 정도로 싸움에 능하셨어.”
“폐하의 할아버지는 교단에서 당초 헤네티로 만들어졌던 사람, 그러니까 우리가 X라고 부르는 사람 중 하나일 가능성이……주페 태자 저하께선 유평대제와, 오르마즈 경과, X까지, 세 사람으로 만들어진 X, S가, 아니 R까지 모두 섞인 혼혈이셨다는…….”
“나도 마찬가지고.”
짧게 대답한 카렐은 캡슐을 여전히 손 안에서 굴리며 잠시 말이 없었다. 모렌 박사는 카렐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사라진 이유를 짐작하려 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옛날에 훔쳐온 그 캡슐들은 지금 어딨지?”
“유평대제의 명으로 성전 이전 물건들은 황궁 지하의 보안국 수장고, 남극성당의 지하 보관고, 13선지자의 묘까지 3군데에 분산 보관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캡슐은 현재는 13선지자의 묘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적지로군.”
카렐이 빈 캡슐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떨리는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명만 내려주시면 보관중인 주페 태자 저하의 세포로 문제의 헤네티……아니, X의 유전자를 분리해 보겠습니다. 나중에 그곳을 점령하고 캡슐들을 손에 넣으시면 즉시 비교해서 폐하 할아버지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됐다.”
“예?”
모렌 박사는 방금 전 들은 말이 믿어지지 않는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다시 물었다. 하지만 카렐은 탁자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죄송하오나 다시 하명을…….”
“아버지에 대한 모든 조사를 중단해라. 명령이다.”
모렌 박사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황제가 틀림없이 무언가 심중에 두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반응을 보아 차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황제의 손가락 사이로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존명하겠나이다.”
모렌 박사가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하오면 다른 황실 조상분들의 혈통 조사에 집중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르마즈 경께서 말년에 앓으셨던 병에 관한 것과…….”
황제는 얼굴을 가린 채 고개만 끄덕이며 그에게 나가라 손짓을 보냈다.
머뭇거리던 모렌 박사는 집무실에 혼자 남은 황제를 몇 번이고 다시 돌아보았다. 황제는 곧 2번 도시를 향해 원정군을 이끌고 나가야 할 테고, 어쩌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사지로 떠날 사람이었다.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의욕에 넘쳐야 할 지금, 황제의 모습이 그의 눈에는 어느 때보다 슬프고 초라해 보였다.
뒷걸음쳐 나오던 모렌 박사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역대 황제 3명의 동상과 그들이 남긴 유지가 적혀 있는 기단 아래, 황제가 부들부들 떨며 앉아있었다. 그 중앙에 있는 세나우스 2세, 유평 대제의 기단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 무너진 황실을 되세우던 타르서스 시기, 비록 나락에 있었으되 내게 가장 든든한 두 명과 함께하고 있어 진정 행복했도다. -
모렌 박사가 다시 황제를 쳐다보았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황제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그의 귀에 가늘게 울려오고 있었다.
“도대체……왜 그러셨습니까……왜 하필 오늘 알게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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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96년, 요동의 유목민 연합이 암바카이 슈트란의 주도하에 ‘동부제후’를 선언하면서, 제국은 결국 황제령과 4개의 ‘제후지역’의 5개 지역으로 분열되어 버렸다.
이제 세나우스 1세 마시야스 황제의 손에는 ‘황제령’으로 알려진 행성 2개―그나마 하나는 개발조차 되지 않은―와 태자들이 죽음을 맞았던 수베르의 미개발행성 하나만이 궁색하게 남아있었다. 물론 이름만 남고 몰락해버린 ‘황제령’이었지만 워낙 오랜 기간 동안 콜로니, 제국의 수도로 있었던 만큼, 그 경제, 사회적인 가치만은 상당히 높았다. 황제령의 교육기관과 각종 기간산업은 제국 제일의 수준을 자랑했고, 또한 제국의 하이테크 산업의 집산지였다.
또한 북반구의 프라임 지역은 남부에 못지않은 비옥한 농업지대였고, 타르서스는 북부에 맞먹는 지하자원의 보고이고 제국 최대의 보석 주산지였다. 그렇다보니 보통 한 가지 산업에 치중된 제후지역들과는 달리, 황제령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독자적인 경제체계를 갖출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단일 지역으로는 가장 가치가 큰 곳이었다.
그런 이상, 충분히 힘을 키운 제후들 중 ‘누가 먼저 총대를 메고 황제령에 반역의 깃발을 세우느냐’는 사실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위험천만한 뜨거운 감자를 먼저 집은 것이 바로 코윈의 카파키 가문이었다.
기원 97년, 오르마즈의 할아버지인 빌루이의 선택은 최소한 전략 전술적인 면으로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당시 황실에서 사람들의 주목하고 있던 ‘반역 1순위’는 교단 출신인 데다가 호전적인 군인인 테번 델루지가 이끄는 ‘남부제후’였지 빌루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황제 역시 막강한 테번을 달래는 데 모든 정치력을 집중하고 있었을 뿐, 정치조직이라기보다 사업 연합체에 가까운 북부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빌루이는 그런 황제의 허를 완벽하게 찌른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황도 아케메니아 시의 방어체계 역시 형편없어서, 황성 주변으로 교단 시절 만들어진 성벽이 있기는 했지만 난개발로 성벽 주변 일대가 온통 무허가 주택가와 시장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상태에서 성벽은 그저 수도의 관공서 구역과 외부를 나누는 물리적인 담장 이상의 역할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주택들로 덕지덕지 둘러싸인 성벽에서 제대로 된 수성전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시장 위로 불붙은 발리스타를 쏘아 날린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황제와 근위대 역시 그런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그곳을 정리하려는 시도는 생존권을 요구하는 빈민들과 시장 상인들의 거친 항의 속에서 매번 실패하곤 했다. 그렇다고 그곳들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외성(外城)을 쌓는 것 역시 황실의 가난한 재정, 혹은 근위대의 부실한 전력을 고려하면 실현 가능성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 이후 유평대제가 황도에서 벌인 첫 번째 토목공사가 황도 외곽에 대한 무자비한 철거작업이었던 것도 결국은 그 때문이었다.
5만의 원정군으로 황제령을 공격할 임무를 맡은 북부연합군 사령관 바스토프 베멜러 장군은 성전 당시 교단의 손에서 지금의 황도를 빼앗았던 민병대 공략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하나였다. 그런 만큼, 황도의 지리와 특성은 물론이고 현재의 문제점까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경보병 1만을 우선 상륙시켜 황성 외곽의 빈민가를 눈 깜짝할 새 장악해 바로 전날까지도 ‘생존권을 위해 못 물러난다’고 버티던 그곳의 거주민들을 인간방패로 삼아 버렸다. 그리고 2차로 투입된 2만의 중장보병은 민간인을 희생시켜서라도 황도를 지켜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방책을 찾아야 할지 우왕좌왕하고 있던 근위대들을 뚫고 빈민가 돌담으로 전락한 동쪽 성벽을 단 하루만에 장악해 버렸다.
사실 당시만 해도 북부연합군은 오합지졸 수준의 한심한 전력이었지만 베멜러 장군의 효율적인, 혹은 무자비한 인간방패 전술 덕분에 훨씬 정예부대인 황실근위대를 무기력하게 황도 안으로 몰아넣어 꼼짝도 못 하게 포위해 버릴 수 있었다.
“오르마즈는 돌아왔나?”
베흔은 파랗게 질려 있는 이 한심한 황제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불길 속에서 타들어가고 있는 성벽 외곽 빈민가를 지켜보며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서는 한때 그와 근위대가 그토록 없애버리고 싶었던 눈엣가시같은 지역이 정말로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이젠 별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가기는 제대로 나간 모양인데…….”
“이제와 불을 질러 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르마즈는 돌아왔냐고?”
황제가 이를 갈며 베흔을 노려보았다.
“카파키 비서실장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베흔이 성벽 밖을 가리키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지거리를 꿀꺽 삼켰다.
“그 정도 똘똘한 놈이면 안 돌아와도 할 말은 없지요.”
베흔이 가시 돋친 한 마디로 분노를 대신 표현했다. 그는 너무 무기력한 황제 밑에서는 2인자인 자신의 몫 역시 줄어든다는, 뼈아픈 진실을 비싼 수업료를 내 가며 배웠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역시도 가라앉아가는 이 배에서 뛰어내릴 적당한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 무기력한 황제에게 계속 충성을 바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다만 뛰어내린 후,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느냐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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