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29화 (626/1,132)

< -- 629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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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황제가 이를 갈았다. 그는 형 샤미르를 배신하고 황제가 되도록 자신을 부추긴 장본인들을 이제와 증오하기 시작했지만 베흔 역시 황제의 우유부단함에 치솟는 분노를 애써 삭이고 있음은 알지 못했다.

당초 베흔은 ‘차라리 이 기회에 주거지에 발리스타를 쏟아 부어서 저 골 아픈 시가지를 다 치워버리자’고 제안했지만 마음약한 황제는 동의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성벽까지 절반 이상 빼앗긴 지금, 황제는 자신의 결정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지만 이젠 되돌릴 수가 없었다.

황제는 성인군자는 결코 아니었지만 민간인들을 몰살시킬 만큼의 잔인한 사람도 되지 못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조카 유평을 아직 죽이지 못한 것이겠지만.

베흔은 2년 전 있었던 유평과 유레트의 사고 소식에 황제가 밤새 가슴아파하며 며칠간 잠도 이루지 못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닌, 틀림없는 진심에서였음도.

하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황제의 곁에는 조강지처 테나스 외에도 자식을 둔 비빈만도 10명이 넘었고, 그 일을 시작으로 비슷한 후사 싸움이 다른 비빈과 자녀들에게 생길 수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일 이후 자신의 비빈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내지도 않았고, 재발을 위한 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저 너무 못되지도, 착하지도 않고 약간 심약하고 게으른 평범한 남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명령대로 불을 낸 걸 보니까 오르마즈 그놈도 돌아오기는 올 것 아냐?”

황제가 갑자기 화를 버럭 냈다. 베흔은 ‘이제와서?’라는 말로 대꾸하고 싶었지만 꾹 참기로 했다.

“옛날 솜씨가 녹슬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베흔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는 성벽까지 빼앗긴 마당에 이제와 저곳에 불을 지르러 나가야 했던 오르마즈의 심정도 퍽이나 참담했으리라 생각했다. 이젠 군인도 아닌 비서실장 오르마즈에게 고작 20여명을 주고 그 짓을 시킨 황제의 선택도 황당하기는 했지만 황후 테나스와 수십의 비빈들, 황자들을 이곳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저들의 주의를 돌리려면 사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황후는 어디쯤 가 있지? 아이들은?”

“모르겠습니다. 도감청을 피하기 위해 일체의 통신을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내일 아침은 되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젠장.”

황제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동쪽 성벽의 항공방어시설을 빼앗기면서 셔틀을 이용한 탈출은 극히 위험해졌지만 다행히 적이 장악한 반대편, 남서쪽의 항구만은 아직 건실하게 남아있었고, 욱리하의 수로 역시 아직은 근위대가 장악하고 있었다. 덕택에 황제의 식솔들이 지하의 에아 신전에서 한밤중에 쪽배를 타고 야반도주나마 할 수 있었다.

황제 역시 가족들과 함께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이 굴뚝이었겠지만 그마저 도망치면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직 황성을 지키고 있는 많지 않은 근위대마저 완전히 붕괴될 것이라는 몇몇 비서관들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접어야 했다.

물론 비서관들도 최소한 황제 정도는 무사히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나름의 예상으로 그런 조언을 한 것이었지만 이 겁 많은 황제는 지금까지도 강 쪽을 계속 힐끔힐끔 돌아보며 퇴로가 무사한지만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탈 배는 무사한 거지?”

“걱정 마십시오. 하루 이틀은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베흔이 힘있게 대답했다. 평소 신중한 베흔이 그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황제가 도리어 의심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북부연합군은 성 바깥의 화재와 주민 통제 문제로 황성 외곽과 동쪽 성벽에 묶여있으니 최소한 황성 안쪽은 아직 그럭저럭 조용한 편이었다. 적들이 붙잡은 ‘인간방패들’이 처음에는 무기였지만 지금은 거치적거리는 걸림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르마즈 그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황제가 다시 무작정 화를 냈다.

“베멜러인지 무슨 잡놈인지 그놈하고 친분이 있다며! 빨리 돌아와야 협상사자로라도 보낼 것 아냐!”

황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여전히 간헐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성벽 위와 적진 쪽을 애타게 쳐다보았다. 황제의 이런 선택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지금 적장인 북부의 베멜러 장군은 민병대 시절 오르마즈의 심복이었고, 이번 일이 터지기 직전까지도 북부에서 ‘친 오르마즈계’ 인맥의 대표격인 사람이었다. 체면 따위는 모두 접어두고라도 오르마즈를 동원해 이번 일을 수습하는 것이 어쩌면 지금의 황제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냈다가 아예 저쪽에 붙어버리면 어쩌시려고요.”

황제가 눈을 흘겼지만 베흔은 이제 말조심 따위는 아예 머릿속에서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오르마즈라면 적진에 가자마자 베멜러 장군에게 옛 친분을 내세워 투항해 버리리라 생각했다.

“대장님! 대장님!”

베흔은 갑자기 문을 확 열고 뛰쳐들어온 부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엄하게 뭐 하는 수작이냐? 지금 황상과 있는 것이 안 보이냐!”

베흔이 황제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부하에 대한 고함으로 대신 터뜨렸지만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파랗게 질린 부관은 대장의 호통 따위는 아랑곳없이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저, 적들이 궁 안에 나타났습니다!”

“마, 맙소사.”

황제의 탄식이 방 안에 울려 퍼졌고, 베흔은 놀라 다리까지 풀리며 휘청거리는 황제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베흔은 눈썹에 힘을 잔뜩 주고 최대한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제대로 보고해라. 적이 확실한지, 어느 부대 소속인지, 어디에 나타났는지 제대로 말해라. 횡설수설하지 말고.”

“지하를 통해 들어온 것 같습니다. 적 특수부대 요원들로 보이지만 규모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지하층 경비병 7명이 전사했고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하? 도대체 어떻게?…….”

베흔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의 머릿속에 언젠가 지도로만 본 일 있는 지하 카타콤베가 퍼뜩 스쳤지만 이제와 그곳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오르마즈나 베흔 자신을 비롯한 두세 명이 전부였고, 출구들은 모두 폐쇄되어 있었다. 물론 그나마 존재하는 자료들도 모두 극비로 분류되어 이젠 보안국에서 보관 중이었다. 그렇다면 지하로 진입 가능한 구멍은 단 하나였다.

‘에아 신전 수로를 통해서 들어온 게 틀림없어.’

일단 결론을 내린 베흔은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며 비틀거리는 황제를 똑바로 일으켜 세워주었다.

“경거망동할 것 없다. X 1개 소대를 보내서 놈들을 추적하게 하고, 이미 들어온 놈들을 쫓도록 해. 혹시 모르니 에아 신전에 대기 중인 배도 확인하게 하고.”

“예?”

부관이 놀라 움찔하는 모습에 베흔이 아차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베흔이 버럭 화를 내며 부하들의 쓸데없는 걱정을 차단했다. 욱리하와 연결된 지하수로가 있는 에아 신전의 배는 황제의 탈출을 위해 남겨놓은 마지막 수단이었다. 부관이 황도를 포기한다는 뜻으로 넘겨짚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하 수로로 적들이 들어왔을지 모르니까 그러는 거지! 행여 나가서 잡소리를 했다가는 네놈의 모가지를 먼저 베어버릴 테다.”

아랫사람들을 다잡는 베흔의 목소리에 유달리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적들이 황제의 탈출로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그곳에 병력을 잠입시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폐하께선 이곳을 안 떠나실 것이니 쓸데없는 생각 마라! 부관인 네놈이 나도 못 믿는 거냐?”

“아, 알겠습니다.”

베흔의 호통에 부관이 어물어물거리며 급히 물러났다.

“누가 그런 걸 멋대로 결정하랬나?”

베흔과 단둘이 남은 황제가 다시 화를 냈다.

“예?”

“내가 피신하고 말고가 네가 결정할 문제더냐?”

베흔의 속에서 순간 욱하며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이번까지만은 참기로 했다. 그는 시계부터 확인했다. 새벽 2시 10분, 북부연합군이 공격을 개시한지 이제 겨우 만 하루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열린 창문 너머로 와아 하는 큰 고함소리가 동쪽 성벽에서 이곳으로 넘어 들어왔다. 특수부대의 진입에 발맞춰 북부연합군이 총공세를 개시하려는 모양이었다.

“하루나 이틀은 갈 거라며!”

겁에 질린 황제가 울부짖듯 소리를 질렀다.

“그저 위협일 뿐입니다. 지금의 기세만 꺾으면 되니 근위대를 믿으십시오. 폐하의 휘하에는 아직 제국 제일의 명장들이 포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할 말이 없어진 베흔이 칼을 찬 허리띠를 조이며 짐짓 냉담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걱정이 되시면 제가 직접 성벽에 나가서 놈들을 막겠습니다. 여기서 지켜보고 계십시오.”

베흔은 황제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뒤로 휙 돌아섰다. 저 또라이와 계속 함께 있다가는 그의 머릿속이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황제의 집무실을 나선 베흔은 바깥에 서 있던 시종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병력 여유가 없으니 시종들이라도 풀어서 에아 신전과 그 부근을 조사해라.”

“저희는 군인이 아니고…….”

“누가 그놈들하고 싸우랬냐?”

베흔이 버럭 짜증을 내며 홀에 옹기종기 모여 자기네끼리 무언가 쑥덕대고 있는 시종과 시녀들을 가리켰다.

“궁 안에 잠입한 적들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경비병들이 모조리 그쪽으로 투입되면 다른 데 구멍이 뚫릴 거 아니냐! 어차피 시종들은 펑펑 놀고 있잖아! 싸울 필요는 없으니 낯선 인기척이 발견되면 무조건 도망쳐서 가까운 경비병한테 알리라는 거 아냐!”

“알겠습니다.”

시종장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흔의 말대로 시종들이 지금 하는 일이라고는 한 군데 모여서 겁에 질린 채로 자기들끼리 떠드는 것이 전부였다. 시종장은 여전히 근심에 싸여있는 그들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자자, 들었지! 모두 흩어져서 각자 위치를 조사해!”

베흔이 자리를 비운 이후, 혼자 남은 황제는 한참을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이젠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막연한 공포심이 그를 계속 괴롭혔다. 오르마즈는 돌아오지 않았고, 베흔이 전장으로 나간다고는 했지만 홀로 남은 지금은 도리어 더 공포에 가까웠다. 황제는 고감도 망원경을 집어 들고 성벽 위에 바글바글하게 모여있는 ‘적병들’을 지켜보았다.

“하악, 학.”

황제는 갑자기 숨조차 쉬기 어려울 정도로 답답해진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껏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의 형상을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본 일은 처음이었다. 북부 군인들의 덩치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커 보였고, 그들의 부리부리한 눈에는 하나같이 살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성벽에는 첫 번째 공격에서 죽인 근위대 무장들과 사로잡혔다가 참살당한 관료들의 잘린 머리가 꼬챙이에 줄줄이 꽂혀 있었다. 그 끔찍한 광경은 모닥불 불꽃과 성 바깥 화재 현장에서 뿜어나오는 시커먼 연기 속에서 유달리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날 죽일 거야.”

황제가 비틀거리며 다시 벽을 짚었다. 전황은 절망적으로 보였고, 아랫사람들 중 누구 하나라도 배신한다면 자신의 목숨은 이제 끝장이라는 근거 없는 공포가 계속 머릿속을 괴롭혔다. 제국 제일의 명장인 오르마즈와 베흔도, 심지어 자신을 지키는 경호원들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문득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순간 자신의 잘린 머리가 황궁 꼭대기에 꽂혀 있는 끔찍한 광경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여길 나가야 돼.”

초조해진 황제가 이마를 싸쥔 채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이곳에 1초라도 더 있다가는 수하의 손에 죽거나, 부하들 사이에서 반란이라도 일어나 졸지에 적의 손에 넘겨질 것만 같았다. 베흔은 하루나 이틀은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직접 나가 싸우겠다고 한 그의 말이 사실인지도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보고대로라면 궁 안에까지 이미 적이 들어와 있었다.

“시종장!”

황제가 바깥에 대고 고함을 버럭 질렀다. 깜짝 놀란 시종장이 급히 들어와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그에게 청천벽력같은 한 마디를 꺼냈다.

“에아 신전으로 가야겠다. 아무 데도 알리지 말고 따라와라.”

“예? 지금 황궁 내부는 아직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베흔 근위대장님의 명으로 지금 궁내를 수색 중에…….”

“이 새끼가! 네 명령권자가 근위대장이냐! 나냐!”

황제의 호통에 시종장이 순간 당황했다. 황제는 시종장을 따라 들어온 시종과 사환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머리에 쓰고 있던 서클렛과 망토를 허겁지겁 벗었다.

“옷을 바꿔 입어야겠다.”

“폐하,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지금 궁 안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적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을 보내서 에아 신전까지 가는 계단의 안전만이라도 확보한 후에…….”

“황제가 그리로 갔다는 걸 동네방네 다 알려서 뭐 하려고?”

불안감에 휩싸인 시종장의 조언에 황제가 망토를 팽개치며 짜증을 부렸다. 지금 그의 머리에는 이곳에서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시종장의 말조차 반란군이 들어와 체포할 때까지 자신을 잡아두려는 수작처럼 느껴졌다.

황제는 자신과 얼추 체격과 생김이 비슷한 한 젊은 사환에게 벗어놓은 자신의 겉옷을 가리켰다.

“이걸 입고 네 옷을 벗어. 빨리!”

창백해진 사환은 평생 입을 엄두도 내어보지 못했을 화려한 옷 앞에서 무심코 고개를 저을 뻔 했다. 하지만 시종장과 동료들의 무서운 눈짓에 어쩔 수 없이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황제는 방에 있던 십여 명의 X 경호원들 중 두 명에게 손짓을 보냈다.

“너희 말고 나머지들은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자리를 지켜. 이놈이 여기서 내 옷을 입고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어. 알았냐?”

나머지 X들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워낙에 명령받은대로 움직이도록 훈련된 이들인지라 바로 평소처럼 전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는 근위대와 아랫사람들을 뒤에 버려둔 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자신의 행세를 할 불쌍한 젊은 사환만을 남겨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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