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30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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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십시오, 메인 파워를 성벽의 방어시설로 돌리느라 불을 꺼서 좀 어둡습니다. 폐…….”
랜턴을 들고 앞장서던 시종장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텅 빈 계단실을 타고 황제와 2명의 X 경호원, 6명의 시종, 사환들이 녹슨 철제 계단을 딛는 거친 발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웅웅거리며 되돌아왔다.
“25층입니다. 아직 한참 더 내려가야 합니다. 녹슬어 약해진 곳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중간께에서 사환 차림새로 함께 가고 있던 ‘진짜 황제’가 모자를 벗고 식은땀을 닦아냈다.
물론 엘리베이터와 홀을 이용하는 더 안전한 길도 있었지만 황제는 도망치는 자신의 모습이 다른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환들이 쓰는 납작한 모자를 쓰고는 있었지만 궁의 경비병이나 장교, 관리들은 어차피 모자 따위에 상관없이 어렵지 않게 황제를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그가 최소한의 인원만을 거느리고 몰래 내려온 것이 그 때문이었다.
“으익.”
정신없이 내려가던 시종 중 한 명이 벽에 달라붙은 큰 거미줄에 기겁을 했다.
“안 죽으니까 요란 떨지 마라.”
지레 놀랐던 시종장이 버럭 화를 냈다.
황제 집무실이 있는 고층에서 지하의 에아 신전까지 한 번에 내려갈 수 있는 직통 계단은 이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오래된 철제 계단 하나뿐이었다. 지금의 황제 집무실이 한때 에아 교단이 쓰던 곳이었던지라 이 계단도 궁의 건립 당시부터 있던 계단이었지만 그간 보안을 위해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용접까지 되어 있던 철문을 뜯고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이었다.
에아 신전에서 올라오는 습기 때문인지, 계단실 안은 유달리 후텁지근했다.
“아직 멀었군.”
22층을 나타내는 오래된 표시를 지나며 황제가 퍽퍽해진 무릎을 두드렸다. 교단 시절 만들어져서인지, 공용어 말고도 군데군데 바람 어로 쓰인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보니 22층의 이 문 너머에 무슨 시설이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앞장서는 X경호원은 이미 21층 계단참을 디디고 있었다.
“움?”
21층 계단참에 선 X가 움찔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바로 옆, 실내를 향해 난 철문은 이 계단의 다른 층 철문과 마찬가지로 용접이 되어 있어야 했지만 무슨 이유엔지 가늘게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그는 뒤따라오는 일행에게 정지하라며 손짓을 보냈다.
“흐음.”
X경호원은 한 손에 칼을 쥐고 달그락거리는 문에 조심스레 다가갔다. 계단에 서 있는 시종들과 황제의 공포어린 시선이 21층의 이 미심쩍은 문에 온통 쏠렸다. 순간, 무언가 철문을 들이받는 쾅 하는 굉음이 이 밀폐된 계단실 안의 공기를 쩌렁 뒤흔들었다.
“아읍!”
놀란 황제와 시종들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울렸지만 웅웅거리는 진동 때문에 그들은 소리가 난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악!”
1초도 지나지 않아 울린 찢어지는 비명소리는 뜻밖에도 전방이 아닌, 제일 후미를 지키던 경호원의 목소리였다. 바깥에서 22층 철문을 때려부수고 들어온 복면을 한 거구의 괴한이 쓰러진 경호원의 목 뒤에 사정없이 칼을 꽂아 넣었다. X경호원이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모습에 시종들, 그리고 황제가 순간 경악했다.
“제게로 내려오십시오!”
21층 철문을 살피던 경호원이 크게 당황해 반사적으로 황제에게로 달려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막 돌아선 그의 뒤에서 21층 철문까지 확 열렸다. 깜짝 놀라 다시 뒤돌아보는 경호원의 앞으로 또다른 검은 옷차림의 괴한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왔다. 마치 표범처럼 빠른 상대의 몸놀림에 성전 출신의 이 베테랑 X는 적이 그냥 평범한 북부 특수요원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헤네티냐?”
경호원은 이 ‘21층 괴한’을 향해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지만 상대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소름끼치는 마찰음을 내며 상대의 칼을 옆으로 흘려버리고는 몸을 뒤로 휙 돌려 칼자루로 경호원의 턱을 힘껏 올려쳤다. 괴한의 칼자루 끝, 폼멜에 얼굴을 얻어맞은 경호원이 중심을 잃으며 뒤로 비틀거렸다.
“욱!”
중심을 잃은 X의 목 바로 옆 어깨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짧은 볼트가 날아와 꽂혔다. 몸을 움츠리며 공중을 올려보던 경호원은 위층, 22층 계단참 쪽의 괴한이 자신을 향해 볼트를 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위에서는 석궁으로, 앞에서는 칼로 동시에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위를 쳐다보던 그의 가슴 앞에서 이번엔 ‘21층 괴한’이 휘두른 칼이 번쩍 하며 공중을 갈랐다.
“휴우.”
경호원을 쓰러뜨린 21층의 괴한이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의 발밑에는 가슴이 두 조각난 채 죽어가는 X 경호원이 바닥에서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서, 설마…….”
자신을 쓰러뜨린 ‘21층 괴한’을 잠시 노려보던 X의 눈이 주먹만하게 커졌지만 괴한은 그가 입을 열 순간조차 주지 않았다. 긴 칼이 꽂힌 경호원의 목에서 진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괴한의 눈을 가린 스코프의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맙소사, 맙소사……”
겁에 질린 황제가 마찬가지로 공포에 휩싸인 시종장의 뒤로 급히 몸을 숨기려 했다. 22층과 21층 계단참에는 방금 X를 죽인 괴한이 이 6명의 시종들과 황제를 위아래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숫자에서는 그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두 층 중간의 계단참에 몰린 채 바싹 얼어붙어 버렸다.
그때, 21층의 괴한이 얄미울만큼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철문을 닫았다. 이 둘은 지금껏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 살려주세요, 우린 그냥 시종들입니다…….”
시종장이 자리에 꿇어앉으며 애원하려 했지만 이 무자비한 두 괴한은 시종들과 말싸움 따위를 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21층 괴한의 손짓에 22층 괴한이 칼을 뽑아들고 그들에게 달려 내려왔고, 21층 괴한 역시 머뭇거림 없이 계단을 달려올랐다. 그리고 이 좁은 계단참은 순식간에 끔찍한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시종들의 도살장으로 돌변했다.
“학, 학.”
마지막까지 남은 황제가 시종들의 시체 중간에 파묻힌 채 바들바들 떨었다. 시종들을 쳐 죽이던 이 둘의 모습에서 일말의 머뭇거림이나 자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를 마주하고 있는 이 둘은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미루는 것인지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이 황제를 알아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황제는 이 둘 중 최소한 한 명이 누구인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너, 너…….”
황제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22층 괴한’을 가리켰다. 다른 것은 감출 수 있었지만 7척에 가까운 키와 떡 벌어진 체격만은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도 ‘동료’의 눈치를 보고 있던 그 괴한은 그제야 당황한 듯, 황제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칼을 치켜들었다.
“제발! 제발, 내가, 내가 잘못했으니…….”
황제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렸지만 그의 넓적한 칼은 황제의 뽀얀 손을 무자비하게 꿰뚫고 얼굴에 그대로 꽂혔다. 그리고 황제의 나머지 한 손은 힘없이 계단 위로 축 늘어졌다.
“죽은 꼴까지 추하군.”
‘22층 괴한’이 칼에서 손을 떼며 낮고 굵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40여년간 제국을 통치, 아니, 계속 나락으로 몰고 갔던 무능한 황제 세나우스 1세 마시야스는 시종과 사환들의 시체더미 한쪽에서 겁에 질린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이렇게 추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석궁 실력은 녹슬지 않았더군.”
황제가 죽은 것을 확인한 ‘21층 괴한’이 침착하게 칼을 허리춤에 챙기며 중얼거렸다. 굵은 음성에 거친 억양의 북부 사투리였지만 남자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 역시 6척이 훨씬 넘는 큰 키에 다부지고 넓은 어깨를 하고 있었지만 함께 선 ‘동료’의 건장한 체구 때문에 조금은 작아 보이기까지 했다.
‘22층 괴한’이 21층 계단참에 죽어 있는 X 경호원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래도 X까지 잡다니, 저 녀석은 실력도 제법 좋은 놈인데, 제법이군요. 이렇게 손을 맞춰 본 게 얼마만이죠?”
“50년쯤 됐나…….”
날씬한 몸매의 ‘21층 괴한’은 할룩스를 켜고는 안에 들어있는 이런저런 보고 내용을 살폈다. ‘22층 괴한’이 그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이렇게 몰래 도망치려 할 것을 예상하셨습니까?”
“예상이 틀렸으면 이 칼이 내 목에 박혀 있었겠지? 넌 역적을 잡아낸 공로로 충신이 되었을 테고.”
“……이놈이 죽었으니 황도는 버릴 수밖에 없겠군요.”
“중요 물품과 자료들을 이송할 동안만 성벽을 버텨내라. 서너 시간쯤 걸릴 것 같다.”
“제가 졸지에 아랫사람이 된 느낌이군요. 지금은 같은 품계 아니던가요?”
‘21층 괴한’은 잠시 할룩스를 닫고는 항명을 하고 있는 덩치 큰 ‘22층 괴한’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그 기세에 눌린 항명자는 얼마 가지 않아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22층 괴한’이 답답한 듯 눈에 쓰고 있던 스코프를 벗어 툭툭 털었다. 그의 부리부리하고 큰 초록색 눈동자와 붉은 머리칼이 시종장이 떨어뜨린 랜턴 불빛에 반짝거렸다.
“퇴각은 내가 지휘하겠다. 황실 전체가 일단 타르서스로 가야겠다.”
보고를 모두 확인한 ‘21층 괴한’이 할룩스를 허리춤에 챙기며 냉담하게 말했다.
“시체는 네가 발견한 걸로 해 두지. 퇴각 완료 전까지는 황제의 죽음은 비밀로 해 둬. 마지막 퇴각선단은 새벽 6시에 에아 신전에서 출발할 테니 놓치지 않게 시간 잘 맞추고.”
“젠장, 이런 일은 하기 싫었는데.”
“네가 죽였으니 네가 처리해야지.”
‘21층 괴한’은 ‘22층 괴한’을 뒤에 남겨둔 채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런 그의 뒤에서 ‘22층 괴한’의 짜증스런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어차피 공범 아닙니까? 먼저 제안한 게 누군데…….”
“공범? 우리가 무슨 짓을 했기에?”
‘21층 괴한’의 뻔뻔한 대꾸에 ‘22층 괴한’의 초록색 눈가가 살짝 찌그러들었다. ‘21층 괴한’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난 성 밖에 불을 지르고 귀환하는 중이고, 자넨 성벽으로 싸우러 나가려다가 잊어버린 게 있어서 급히 돌아오는 길이야. 곧 황궁 22층에서 황제의 시체를 발견하겠지.”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22층 괴한’이 ‘21층 괴한’의 앞을 막으며 잔뜩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황궁 지하로 어떻게 몰래 잠입하셨죠? 에아 신전 수로로 들어오는 건 역류인데다가 물살이 거세서 아무리 체력이 좋은 시민도 헤엄쳐서는 절대 못 들어옵니다. 죽은 7명의 경비병들도 당신 소행입니까?”
상대를 물끄러미 올려보던 ‘21층 괴한’은 그를 밀치며 말없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런 그를 쳐다보며 ‘22층 괴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유평 옹주에게는 직접 알리시겠죠?”
“내가 자네같이 비열한 사내에게서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무언지 아나?”
“예?”
“늦게라도 아니다 싶으면 스스로 세운 황제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결단력이지.”
책망인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말에 ‘22층 괴한’이 뭣 씹은 듯 표정을 찡그렸지만 ‘21층 괴한’은 뒤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21층 철문을 나섰다.
한때 황실이 제후 지역에서 거둬들인 고가 수장품 전시장으로 쓰였던 21층은 황실의 바닥난 재정, 몰락한 위엄을 나타내듯 이젠 텅 비어 있었고 심지어 천장의 감시 카메라마저 이젠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답답한 스코프와 복면을 벗어던지고 큰 전창 앞에 잠시 멈춰 섰다.
“너희가 이겼다고 여겼었겠지.”
성벽 밖에서 솟구쳐 오른 큰 불꽃이 그의 맑은 회색빛 눈동자에 선명하게 반사되었다. 45년 전, 성전으로 폐허가 되었던 이곳은 이제 또다시 불길에 휩싸인 채 파괴의 순환을 반복하고 있었다. 오르마즈는 거친 바람, 곳곳의 찢어지는 비명 속에서 불타고 있는 황도를 물끄러미 지켜보며 낮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또 그럴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오르마즈는 창밖의 처참한 광경에서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너흰 그저 조금 거친 바람이었을 뿐이야.”
핏빛 불꽃에 드리운 그의 그림자 꼬리가 유난히 길었다. 그는 어머니 유레트의 죽음 이후 바보 행세를 하며 혼자 어렵게 살고 있는 유평에게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21층 복도를 걸었다. 이제 곧 불타고 무너져 역사 속으로 사라질 ‘아케메니아 궁’을 발밑으로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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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후기]
이번 편을 끝으로 [파트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는 마무리를 짓습니다. 과거 이야기의 시점도 이젠 전혀 다른 시대로 옮겨갑니다.
2부 3,4권 개인지 원고작업과 1부 3,4권의 재판작업을 함께 하고있다보니 많이 바쁘군요. ^^
다음 편부터는 [파트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그리고 2부 엔딩인 [파트9.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때] 가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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