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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31화 (628/1,132)

< -- 631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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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군 원정군의 출발을 앞두고 연합군 역시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탄현성에 집결한 연합군 지휘부 사이에서도 대응책을 놓고 이런저런 설전이 오가고 있었지만 ‘황제’라는 최고 권력자가 독재에 가깝게 이끌고 있는 동맹군과는 달리 자기 목소리를 낼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 이들의 장점이자 동시에 흠이었다.

“아참, 법무대신 아리아노 경은 출근했답니까?”

샤자한 공의 비웃음에 가까운 물음에 제롬에 눈가를 대번 찡그렸다. 아리아노 경이 비록 호랑이같이 무시무시한 장모였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내각과 황제령 중앙귀족가에서 가장 가까운 인맥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샤자한 공이 아리아노의 이야기를 꺼내는 속셈도 뻔했다.

“듣자하니 타르서스에서 돌아와서 자리 펴고 앓아누웠다더니.”

“그 정도나 되는 양반이니 무사히 빠져나오셨지요.”

“‘무사히’라는 말은 좀 어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들을 인질로 주고 풀려나셨다면서요? 게다가 페로 녀석이 그 양반을 풀어준 것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데, 혹시 우리가 모르는 무슨 뒷거래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샤자한 공의 엉뚱한 시비에 발끈한 제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나마 몸이 성치 않기를 망정이지 이전의 그였다면 대번 주먹부터 올라가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두 사람의 의미없는 기세싸움을 지켜보던 베흔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제롬이나 샤자한 공 모두 나름대로 최고제후로서의 자격과 야심, 충분한 학식과 분별력을 모두 갖춘 명장들이었지만 이렇게 ‘붙여 놓기만 하면’ 기세싸움에 으르렁거리곤 했다. 다혈질의 제롬은 일만 생기면 폭발하기가 일쑤였고, 능구렁이같은 샤자한 공은 핑계거리만 생기면 제롬을 비롯한 남부 사람과 그 일파들의 약점만 골라 살살 긁어놓곤 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혼자 있을 때는 승리를 위해 두 지역이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는 원칙론에 있어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상 얼굴만 마주하면 서로의 자존심, 혹은 그간의 피해의식과 종전 이후의 밥그릇 계산이 그런 원칙 따위는 매번 무색하게 만들기가 일쑤였다.

베흔은 이번 황도에 대한 1차 공격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이 둘의 불화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던 차였다.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데 아리아노 경에게서 이전같은 충성을 바랄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응?”

듣다못한 베흔이 막 선을 넘을 뻔했던 샤자한 공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샤자한 공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베흔은 도리어 그에게 험악한 표정으로 바로 응수했다.

“놈들의 원정군이 곧 출발한다고 하니 우리도 2번 도시 주둔군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카렐 그놈이 직접 이끈다고 하니 최고제후 두 분 중 한분께서 직접 가서 저와 함께 수비군을 이끌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름 말이 되는 이유를 붙이기는 했지만 베흔의 가장 큰 속셈은 함께 있기만 하면 싸워대는 이 둘을 어떡해서든 떼어놓으려는 생각이었다. 차라리 따로 있었다면 명장의 이름값을 했을 두 최고제후는 지금은 서로가 서로의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적 원정군의 규모는 파악한 거야?”

제롬이 한쪽만 남은 팔로 더듬더듬 자료를 넘기며 물었다.

“지금까지 입수한 자료대로라면.”

베흔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후군으로는 카나르 플라칼 경이 이끄는 남부보병 6만 5천, 예르마크 경의 남부기병 1만 5천, 아쉬드 하지즈 장군 휘하의 서부 보병 3만과 서부 낙타병 3천입니다. 11만이 조금 넘습니다.”

‘남부’라는 말에 제롬이 뭣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베흔은 그가 성을 낼 시간도 주지 않고 재빨리 다음 내용을 이었다.

“여기에 카렐 놈의 직속병력으로 북부보병 3군단 1만 2천. 에키트 족 경보병 5천, 슈로 기사단과 슬레이프니르 3만 5천, 가디언 여단 3천입니다. 제후군과 모두 합치면 적 원정군의 전투병은 총 16만에서 17만 정도 될 겁니다.”

“16만의 원정군이라, 황제의 친정이랍시고 요란을 떠는 것 치고는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군. 남부하고 별 볼 것 없는 서부보병대 위주고…….”

베흔은 샤자한 공의 망언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아주 틀린 건 아니었지만 제국에서 가장 형편없는 보병을 보유한 동부최고제후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었다. 제롬도 이번에는 화를 내기를 고사하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먼저 지었다.

“별볼 것 없는 적 원정군 정도는 최정예 동부보병들이 나서서 막아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자리의 몇몇 남부 무장들이 웃음을 참느라 얼른 입을 가렸고, 실언을 깨달은 샤자한 공이 붉어진 얼굴을 재빨리 가다듬었다. 그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만회하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적 원정군의 기병은 틀림없이 위협적이지만 약점은 보병이요. 배신한 플라칼 가 보병대는 이미 지쳤고, 섬기는 대상이 바뀌면서 내부적으로도 그다지 안정적이지는 못할 거요. 세닉 가도 마찬가지고. 서부보병대는 기동성은 있지만 장갑보병대를 빼면 견고함에서는 떨어지니 결국 놈들에게 믿을만한 건 황제 직속군의 보병들이 전부요.”

“그러니 황제가 직접 데리고 나왔겠지요.”

베흔의 전혀 다른 해석에 무장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황제의 친정’이라는 이름값이 아니면 그렇게 지치거나 평범한 군대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지는 못할 테니.”

“그래도 한계라는 건 있는 법이지.”

제롬이 침착하게 자료들을 살폈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베흔은 저 녀석이 전장에 나가지 못하는 지금이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했다. 비록 전장을 휩쓸고 다니던 그 무시무시한 위용만은 한동안 보기 어렵겠지만 전같이 걸핏하면 전장에 뛰쳐나가는 바보짓도 하지 못할 테고, 성질도 내지 못할 테니.

“지금 2번 도시에 주둔한 우리 편 병력은?”

“근위대 3개 군단, 4만 정도입니다. 하지만 인근 10번 도시에 3번 도시에서 퇴각한 1개 군단이 예비대로 주둔중이니 바로 동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오시안트에 있는 가디언 여단 5천까지 동원하면 총 6만 정도입니다.”

“훗, 놈들이 뭘 믿고 공격을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군.”

샤자한 공이 휘파람을 불었다. 최정예 근위대가 그 정도면 가디언 여단을 굳이 동원하지 않아도 카렐의 원정군에 편제된 제후군 전부를 상대하고도 남을 전력이었다.

그들의 자신감을 베흔이 적당한 선에서 끊었다.

“적 원정군에 기병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되지는 않으십니까?”

“응?”

“16만 중 5만 이상이 기병입니다. 게다가 부대의 질을 보아도 기병과 경보병 쪽에 무게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제후군의 중장보병은 보조 전력으로만 활용하고 기병과 경보병 위주의 기동전을 벌이려는 속셈이 틀림없습니다.”

“그게 왜?”

“근위대의 가장 큰 약점이 기동력이니까요. 전차대가 궤멸되면서 이제 적 기병을 상대할만한 기동병력이 근위대에는 없습니다.”

베흔이 솔직히 상황을 설명했다.

“가디언들이 기병을 상대해왔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고…….”

‘하임달’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쳐올라왔던 베흔은 결국 그 말을 혀끝에서 꿀꺽 삼켜야만 했다. 제롬이 바로 뒤를 이었다.

“그럼 어렵지 않군. 어차피 보병은 우리가 압도적이니 동부기병들을 그리로 보내서…….”

“아뇨.”

베흔이 딱 잘라 손을 저었다.

“2번 도시의 수비군은 시간만 끌어 줄 정도면 충분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놈들을 막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 황도를 점령하는 겁니다. 괜히 전쟁을 질질 끌 이유가 없지요.”

베흔의 손끝이 황도가 있는 서쪽 샤마시 평원 너머를 가리켰다. 제롬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대꾸했다.

“그렇게 보면 카렐 놈을 죽이는 게 더 빨라.”

“쉽게 죽어 줄 년이면 이미 옛날에 목을 땄지요. 명색이 ‘등급 없는 가디언’이었던 놈입니다. 일이 잘 풀려서 설사 원정군을 막는다고 해서 그놈까지 잡는다는 보장은 어렵습니다. 실력이 실력이라 암살도 쉽지가 않으니 더럽게 골아프지요.”

베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허리춤의 칼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곳에 항상 자리하고 있던 그의 정든 플람베르주는 여전히 그곳에 없었다. 카렐에게 칼을 빼앗긴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아직 허리춤을 만질 때마다 그는 묘한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근위대장이 너무 잘 가르쳐놓은 탓이야.”

마누엘 경의 농담에 좌중에 잠시 웃음이 오갔다. 하지만 비슷한 생각을 베흔 역시도 막 하고 있던 차였다. 카렐이 따져보면 자신의 ‘유일한 수제자’라는 생각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암살이라……제일 싸게 먹히는 방법이기는 하지요.”

베흔의 가망 없는 혼잣말에 샤자한 공 역시 기가 막힌지 고개를 저었다.

“‘등급 없는 가디언’을 암살한다고? 환장하겠군. 어떤 놈이? 피다이를 동원해도 안 될걸? 술이라도 잔뜩 쳐먹일까?”

“쓸데없는 논의는 일단 접고.”

베흔이 곁나가버린 회의 내용을 얼른 제자리로 돌렸다.

“부상을 입으신 몸도 치료하실 겸, 제롬 공께서 2번 도시의 사오시안트 궁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샤자한 공께서는 이곳 탄현성에 있는 우리 원정군을 이끌고 황도를 탈환해 주시고요.”

“응?”

샤자한 공은 베흔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지 자신의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황도 점령이라는 중요한 일을 베흔이 자신에게 넘겨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는 잠시 헛웃음까지 지었다.

베흔의 엉뚱한 제안에 당황했기는 제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베흔의 귀에 입을 대고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소리야? 조금 전까지도 황궁을 차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사오시안트에 있는 수우 폐하와 구르베스 황비 일은 어쩌고요?”

베흔의 대답에 제롬이 움찔했다. 샤자한 공이 사오시안트에 돌아간다면 감금되어 있는 ‘사위’인 황제 수우의 일에 당연히 관심을 가질 테고, 행방불명된 막내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조사하려 들 것이 뻔했다.

“저놈은 궁에 어슬렁거리지 못하게 한동안 여기 묶어두는 편이 낫습니다. 돌아가시거든 그 일도 마무리하시고요. 구르베스 그년도 빨리 찾아 없애야지요. 여기는 3제후 카산드라 호지 경에게 맡기셔도 됩니다.”

제롬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베흔 말대로, ‘늙은 여우’ 남부 3제후 카산드라 경은 음모나 정치놀음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여자였다.

“그럼 황궁을 공격하는 중책은 샤자한 공께서 맡아 주십시오. 나는 근위대장과 함께 사오시안트를 지킬 테니.”

제롬이 생각 외로 순순히 물러나자 샤자한 공이 의심어린 눈길을 보냈지만 일단 그가 ‘상대적으로 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이상, 공치사로라도 물러나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고맙습니다. 제롬 공. 공께서 사오시안트를 든든히 지켜 주시면 내 여기서 황궁을 꼭 손에 넣겠소이다.”

베흔이 자료들을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적 수비군의 진용이 축소되었으니 원칙적으로 황도 공략은 기존 병력을 그대로 활용하고, 남부에서 곧 도착 예정인 증원군으로 2번 도시를 막는 것이 좋겠습니다. 증원군도 모두 퇴역병을 재소집한 부대라 전력에서는 별 차이 없으니까요. 이곳까지 대군의 이동도 어려우니 그편이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당연하겠지.”

두 최고제후 모두 베흔의 안에 별 이의가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이곳 보병대는 그대로 남고……대신 증원군 6만을 모두 2번 도시로 보내겠습니다. 기병은 이곳의 남부기병 2만 5천 중 1만 5천을 데려가겠습니다. 증원군과 합치면 총 3만쯤 될 겁니다. 동부기병대에서도…….”

“우리도 곧 1만의 보충병이 도착할 예정이니 그네들하고 합쳐서 기병 2만을 넘겨드리지요. 여기에 남을 적 기병이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으니 공께서 데려가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유지비용 문제만 부담해 주시면…….”

중책을 맡으면서 기분이 좋아진 샤자한 공이 갑자기 선심을 쓰고 나섰다. 하지만 실상 동맹군의 기병 주력이 모조리 원정군으로 빠지면서, 황도 공성전에서 필요성이 크게 낮아진 기병들의 유지비용을 떠넘기려는 속셈이었다. 제롬도 물론 그런 속셈을 눈치 챘지만 그렇다고 싫다 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면 사오시안트를 지킬 우리 병력은 근위대 6만, 우리 남부보병 6만, 남부기병 3만에 동부기병 2만. 총 18만이니 적들보다 숫자에서도 조금 많고 질에 있어서는 월등하군요. 게다가 수비군이라는 이점까지.”

제롬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파일을 덮었다.

“보병은 나와 근위대장이 직접 이끌고, 기병은 히르직스 타마르 경이 이끌면 되겠지요. 남부 소속이지만 황제령 출신이고 옛날 슈로 기사단에 있은 일도 있으니 동부기병들도 훌륭히 이끌 거요.”

두 최고제후가 처음으로 죽이 맞아 떨어지는 모습에 베흔이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와 제롬은 2번 도시에서 카렐의 원정군과, 샤자한 공은 이곳 황도에서 자신의 종손자이기도 한 페로와 마지막 결전을 벌여야 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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