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32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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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르직스 경의 빈자리는 제 손자놈이 맡아야 하겠군요.”
샤자한 공은 아직도 얼굴에 반쯤 붕대를 두르고 있는 장손자 보벤을 손짓해 불러들였다.
욱리하의 도하전에서 중화상을 입고 가까스로 목숨만 건졌던 보벤도 이제 그럭저럭 몸이 나아져 있었지만 아직 치료가 덜 끝난 얼굴의 지독한 흉터만은 여전히 남아 적에 대한 그의 뼈저린 적개심을 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자신을 구해주지 않은 할아버지 샤자한 공에 대한 묘한 원망도 아울러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일그러져 있던 표정도 기병사령관 지명에 잠시 밝아지는 듯 보였다.
베흔이 재빨리 이 상황에 끼어들었다.
“보벤 경은 아직 몸이 덜 나았으니 기병사령관으로는 적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보벤의 부상 타령을 했지만 사실 베흔의 걱정거리는 그의 거친 성격과 경험부족이었다. 그는 샤자한 공이 무어라 대꾸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경륜을 보아 그보다 동부 5제후이신 구디엔 카나 경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베흔의 속내를 눈치 챈 샤자한 공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지금껏 변변한 승전 한 번 거둬보지 못한 보벤에게 대군의 지휘권을 맡기는 것이 그로서도 영 꺼림칙한 건 사실이었다. 그도 이번만은 자존심을 접기로 했다.
“하긴, 저 몸으로 사령관은 무리일지도 모르겠군. 그러면 구디엔 경을 사령관으로 하고 보벤을 부사령관으로 삼으면 되겠군.”
순간, 잠시 기대에 들떴던 보벤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이번 중임은 꼭 제대로 수행해 내도록 해라.”
할아버지 샤자한 공이 그에게 별 것 아니라며 격려의 눈짓을 보냈지만 붉어진 피부와 쭈글쭈글해진 주름 밑에서 어색하게 일그러져 있는 그의 표정은 틀림없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 대강 논의는 끝났으니 이제 슬슬 이동 준비를 시작해야겠군.”
베흔은 어딘지 어색해진 샤자한 공과 보벤을 자리에 놔둔 채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남부 지휘관들 역시 그를 따라 급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저 둘 아무래도 잘 살피는 게 좋겠습니다.”
회의실을 나선 베흔은 함께 나온 보병사령관 마누엘 경과 카산드라 경에게 일렀다. 셋은 이미 어두워진 탄현성 성벽 위를 걸으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보벤 저놈 지금 보아하니 불만이 폭발직전인 것 같은데.”
“샤자한 공이 워낙에 눈치 하나는 빠른 놈이니 어떻게든 달래 놓겠지.”
마누엘 경이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뭐 그렇기야 하겠지……. 저런 놈을 사령관으로 삼았다가는 괜히 남부까지 피 볼 수도 있으니. 샤자한 저놈도 내심 골이 아픈 모양이던데.”
쓴웃음을 짓던 카산드라 경에게 베흔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부탁 좀 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
“이번에 의사 면허를 소지한 군의관 120여명이 근위대에서 무더기로 이탈했습니다. 가뜩이나 의무대 요원이 부족해서 죽을 지경인데.”
“거기도?”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산드라 경의 물음에 베흔의 머릿속이 잠시 아찔해졌다. 카산드라 경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우리도 40명 정도가 갑자기 이탈해서 혹시 적의 공작이 아닌지 내사중이야.”
“맙소사, 남부도요? 요즘 의무관들 분위기가 좀…….”
베흔이 이마를 싸쥐었다. ‘훈장’까지 수여받은 의무대 중랑장이 바로 그날 저녁 도망을 친 것도 황당한 일이었지만 탄현성 성벽에 교수되었던 루이제 대군의 ‘시체’를 후송하다가 사라져 버린 건 더 기가 막힌 사건이었다. 물론 죽은 줄 알았던 그가 적 진영에 멀쩡하게 나타난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그것도 전부 비장급 이상의 간부급 임상요원들이야. 간부급 의료요원들이 없어지면서 야전병원들에서 난리들이야. 그런데 근위대는 120명이나 된다고?”
카산드라 경이 정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야전 군의관 120명이면 근위대에는 치명적인 전력손실이었다.
“그러니 환장하겠지요. 중랑장급 서너 명이 없어지더니 며칠 전에는 유전자연구소 책임자 놈까지 행방불명이 되어서 난리입니다. 훼손이 심한 전사자 시신 분석이나 신규 지원자 신원 확인도 그쪽 소관인데 말이죠. 저희도 이탈자들을 내사 중인데 의사라는 것 외에는 출신지역에서도, 전력에서도 별다른 공통점이 없습니다. 아참, 하마타 계열 의학교 출신들이 대다수라는 것하고.”
“허, 거기 출신들이면 정말 치명타겠군.”
마누엘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같은 의사여도 12개의 교단 부설의학교 출신은 공립인 콜로니 아카데미 출신보다 권위도 높았고, 실제로도 실력이 우수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상당수가 사교도이거나 심지어는 성직자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공직보다는 개업의가 되거나 교단 병원에서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군의관 중에서도 교단 의학교 출신들은 ‘모셔오기’ 경쟁이 벌어질 정도로 귀한 몸들이었다.
“일단은 민간 의사들을 징발할 예정입니다만 아무래도 전문성이 떨어지는 게 문젭니다. 다행히 이번에 다하카르 교단 병원에서 종군 경험이 있는 간부급 의사 30명 정도가 지원해 왔습니다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제롬 공께서 군의관 40명 정도를 지원해 주겠다고 동의하셨으니 호지 가에서도 30명 정도만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산드라 경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의관만 30명이면 병원 1개를 차리고도 남을 숫자겠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게. 난 이 지독한 곳에 아직 더 있어야 할 테니.”
마누엘 경이 베흔에게 손을 저었다. 카산드라 경 역시 이곳까지 따라온 남편과 함께 성 안쪽으로 사라져갔다.
“휴우.”
황도가 있는 남서쪽을 잠시 허탈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베흔은 힘없이 터벅터벅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황도를 처음 되밟는 주역이 어쩌면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머릿속에도 이런저런 복잡한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번 건 오래가는군.”
그는 여전히 욱신거리는 명치 옆을 짚으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황궁에서 카렐과 난투극을 벌이다가 갈비뼈가 부러진 곳이었다. 부상 후 바로 쉬었다면 괜찮았겠지만 그 뒤로도 무리를 해 가며 통제실에서 싸움을 벌이느라 내상이 커졌던 모양이었다. 전투가 끝난지 꽤 되었는데도 당시의 상처는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대장님, 잠깐만.”
셈이 조금 불편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황도의 1차 전투에서 카렐 손에 다리를 잘렸던 그도 다행히 잘린 다리를 건졌던 덕분에 비교적 빨리 회복해가고 있었다.
“응? 왜?”
“적진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사자’라는 말에 베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조금 전 헤어진 남부 지휘관들 쪽을 급히 돌아보았다.
“설마……나한테?”
“예.”
셈이 목소리를 더 낮추고는 재빨리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베흔은 묘한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수괴 카렐이 무언가를 보내온 것 같습니다. 직접 만나시겠습니까?”
카렐이 직접 보냈다는 말에 베흔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누가, 무얼 가져왔는데?”
“우베 놈입니다. 그놈도 내용물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베흔이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숙소에 막 들어선 베흔은 이미 몇 번이나 마주했던 이 땅콩만한 녀석의 얼굴에 대고 보란 듯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의 이런 습관적인 협박이 통할 우베가 아니었다. 우베는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제국의 지배자이신 세나우스 4세 카렐 카파키 리쿠께서 황실근위대장이며 제국 제2개국공신인 가디언 베흔에게 내릴 물건이 있다 하셔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허, 그놈도 많이 컸네?”
찡그리는 베흔의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우베는 가방에 가져간 작은 단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내민 붉은빛 단지에는 무언가 대단한 물건이라도 들었는지, 용과 뱀이 사방으로 섬세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내용물이 내용물인지라, 황제의 하사품일지라도 절을 하는 단계는 생략해도 무방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카렐의 어마어마한 오만인지, 허세인지에 베흔이 혀를 끌끌 차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이 정도에 괜히 화를 내거나 맞받아 허세를 부릴 유치한 사내는 아니었다.
“이런, 성은이 망극해서 어찌할꼬?”
베흔의 대꾸에 셈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다른 분들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근위대장님 혼자서만 보셨으면 좋겠다는 상의 하명이 있으셨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베흔이 셈과 경호 가디언들에게 나가 있으라며 눈짓을 보냈다.
“무어가 들었는지 네가 직접 열어 봐라.”
우베와 단둘이 남은 베흔이 탁자 위에 두 다리를 척 걸치며 단지를 가리켰다.
“난 겁쟁이라 안에서 뱀이나 악어새끼라도 확 튀어나올까봐 너무 무섭거든?”
베흔의 말에는 파충류 피가 섞인 카렐에 대한 묘한 비하가 묻어있었지만 우베는 별다른 반응 없이 단지에 손을 가져갔다.
“돌아가서 황상께 그렇게 전해드리지요.”
살짝 찡그리는 베흔의 표정을 무시하며, 우베가 단지 뚜껑을 조심스레 열었다.
“음?”
내용물을 처음 본 우베 또한 움찔거리며 놀랐다. 그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처음으로 베흔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베흔이 그에게 짜증스레 손짓했다.
“빨리 꺼내 봐.”
우베가 사뭇 굳은 표정으로 단지 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안에서 손가락만한 병 하나를 조심스레 꺼냈다.
“그게 뭐냐?”
베흔이 눈살을 찡그렸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눈이 다시금 휘둥그레졌다. 단지 안에 들은 건 썩은 살점 조각이 들어있는 아주 작은 보존병이었다.
“그년이 먹다 남긴 사람고기 조각이냐?”
“폭발물이 아닌 건 확인하셨으니 이제 직접 확인하시죠.”
우베가 베흔에게 병을 내밀고는 옆에 붙은 라벨을 베흔 쪽으로 돌려놓았다. 잔뜩 의심어린 눈으로 우베를 노려보던 베흔은 비로소 시선을 병으로 움직였다.
“……뭐 하자는 수작이냐?”
베흔이 우베에게 험악한 표정으로 이를 드러냈다.
“네 황제라는 년이 지 애비의 시체를 갖고 이렇게 장난을 칠 정도로 무도한 놈이었나? 게다가 이름까지 멋대로…….”
베흔이 입놀림을 멈추며 이를 빠득 갈았다. 병의 라벨에는 'SX-6-2, 주페 카파키 리쿠‘라는, 베흔에게는 무언가 생소한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베흔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눈치 챌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다.
잠시 멍하니 앉아있던 베흔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생각으로 이걸 보냈는지 모르지만 이놈의 목을 일찌감치 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퍼뜩 드는 건 왜일까나? 어쩐지, 오르마즈 그놈이 초대장을 받고도 처형장에 안 나왔던 게…….”
신나게 떠들던 베흔이 갑자기 입놀림을 멈추었다. 그의 초록색 시선은 ‘SX-6-2'라는, 괴상하기까지 한 코드에 잠시 멎어 있었다.
“직접 검사를 해 보시면 크게 놀라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번 개인적인 만남에서는 훨씬 좋은 분위기에서 애장품인 플람베르주도 돌려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우베는 이 차가운 사내의 턱과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모습에 문득 말을 멈추었다.
“듣고 계십니까?”
우베의 물음에 베흔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의 멍해진 뇌리에는 목이 잘리기 직전, 단상의 그를 쳐다보던 주페의 애처로운 시선이 맴돌고 있었다. 무슨 이유엔지 그리도 피하고 싶었던 그의 슬픔어린 마지막 눈동자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기억 속에 지긋지긋하리만큼 끈질기게 남아있었다.
“나가라.”
“예?”
“당장 꺼지라고!”
베흔의 고함소리가 방 안을 마치 우레처럼 쩌렁하며 울렸다. 대담한 우베였지만 이번만은 기겁을 하며 놀라 의자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나뒹군 우베는 입도 열지 못한 채 두 손을 벌벌 떨기만 했다. 베흔의 고함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밖에 있던 셈과 경호원들까지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뛰쳐들어와 넘어진 우베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대장?”
셈은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악물고 있는 베흔과, 그의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우베를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들도 나가! 이놈도 당장 감방에 쳐 넣어 버려!”
베흔의 무시무시한 호통에 기겁을 한 셈이 넘어져 있던 우베를 질질 끌고 밖으로 사라져갔다.
“빌어먹을, 개 같은 년이 도대체 무슨 수작을…….”
방에 혼자 남은 베흔은 문제의 작은 병을 손에 덥석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병을 박살내 버릴 듯, 그의 팔뚝에 힘줄이 불끈 곤두섰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의 큰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갔다.
“후우.”
베흔은 가빠졌던 숨을 최대한 가다듬었다. 그는 그렇게 병을 쥔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닐 거야. 베흔. 절대로.”
베흔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방 한쪽의 거울을 돌아보았다. 큰 키에 누구보다 당당한 체구, 여느 때처럼 단정하게 빗어넘긴 붉은 머리칼과 깔끔한 콧수염, 부리부리한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는 잘생긴 미남자가 그 안에 있었다. 베흔은 자신의 굵은 팔, 그리고 마치 불꽃처럼 붉은 머리칼을 무심코 만지작거렸다.
베흔은 자기도 모르게 생전의 주페 모습을 머리에 떠올렸다. 적갈색 반곱슬머리, 키는 크지 않았지만 가디언에 못지않게 단단한 근육질이던 그의 몸이 차례대로 뇌리를 스쳤다.
“머리칼이……왜 적갈색이었을까?”
베흔은 새삼 품어보는 의문에 순간 전율했다. 유평대제 주변의 그 많은 남자들 중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붉은빛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아니, X들 중 붉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아니, 이젠 카렐까지 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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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아임 유어 파더~ 그르르릉~~ 분위기로 나가지는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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