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34화 (631/1,132)

< -- 634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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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40년 말, 콜로니 수도인 Ursa MB 3번 행성의 남극에 위치한 ‘남극성당’에도 겨울밤의 매서운 추위가 이 거대한 대리석조 예배당의 홀 안까지 꽁꽁 얼려놓고 있었다. ‘남극’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느낌과는 달리, 이 성소가 그다지 추운 곳에 위치한 것은 아니지만 올해의 겨울은 다른 해보다도 유난히 더 추웠다.

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콜로니를 사실상 이끌어 온 다신교단 ‘침묵의 자매들’, 그 중에서도 주신(主神) 다하카르에게 봉헌된 이 거대한 신전에는 들어온 사람을 완전히 압도하고도 남을 무거운 위압감과 엄숙함이 흐르고 있었다. 지름 300척(90m)이 넘는 원형의 웅대한 예배당은 족히 1만명 가까이가 들어갈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그리고 머리 위로도 100척(30m)이 넘는 높이의 석조기둥과 그 꼭대기에 위치한 용머리 조각의 주두가 이 위압적인 공간을 굳건히 받치고 있었다.

해가 지고 4시간이 흘렀다는 종소리가 이 ‘남극성당’ 한쪽에서 울려오자 10척(3m) 정도의 긴 막대를 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나와 이 거대한 기둥마다 사방으로 달려있는 1천 개가 넘을 촛불을 분주히 끄고 돌아다녔다. 푸른 튜닉 위에 후드가 달린 검은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그들은 ‘모간’으로 불리는 일반 성직자들이었다.

얼굴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저들의 괴이한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이 교단의 분위기를 폐쇄적인 사이코 광신도 집단 정도로 넘겨짚을 수도 있겠지만 이 ‘침묵의 자매들’ 12신은 기본적으로 흉포하거나 후안무치한 존재들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세상을 제어하는 12명의 신이 있고, ‘침묵의 자매들’이라는 그 이름이 상징하듯 각각의 신이 내리는 신탁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교리로 삼고 있었다.

이들 12개 교단도 ‘권력과 정의’를 상징하는 소위 ‘하마피타’와, ‘자애와 용서’를 상징하는 ‘하마타’로 양분되어 있기는 했지만 사실 둘의 성향은 정책상의 작은 차이를 빼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이 이렇게 둘로 나뉜 건 교단의 교리 자체가 빛과 어둠, 응징과 용서 같은 극단적인 요소의 ‘조화’를 중시하다보니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일 뿐, 신도들이나 성직자들의 성격까지 반영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콜로니가 명목상 신정일치의 사회이기는 했지만, 마구스라는 공통의 수장을 두고 있을 뿐, 종교조직과 통치조직은 엄연히 별개로 나뉘어 있었다. 물론 중요한 정책은 12명의 마구스들이 ‘신탁’의 형식을 빌어 결정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결정은 대체로 공정했고, 감정이나 사리사욕에 휩쓸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콜로니 사람들에게 마구스와 교단은 세속적인 권력이 엇나가지 않도록 바로잡아주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근 수십 년간 TSG와 제니안을 상대로 벌여 온 피의 학살도 그 대상은 이렇게 ‘너그러운’ 교단 자체를 부정하는 그 괘씸한 자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을 뿐, 그들의 교리에 관심조차 없는 대다수의 콜로니 사람들을 탄압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의 콜로니 시민들은 ‘유교’라는 것을 받들고 사람들을 인위적인 틀 안에 얽어 넣으려는 그 답답한 인간들이나, 아니면 먼 옛날 ‘고향행성’에서 들어온 오염된 유전자를 콜로니에 받아들이자는 천하의 미친 놈들이 이곳에서 수십만씩 죽어도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배정받은 촛불을 다 끈 성직자들은 거추장스러운 후드를 벗으며 후우 하고 한숨들을 내쉬었다. 그들이 이렇게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촛불을 끄는 건 불을 유난히 신성시하는 이 교단의 교리와 살을 에는 오늘 밤의 유별난 추위 때문일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웃음 띤 얼굴로 옷을 갈아입는 그들은 오늘의 일과 후 마실 한 잔의 가벼운 술 이야기, 그리고 마누라와 남편, 자식 타령으로 대화를 채우는 보통의 콜로니 시민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 성직자들은 콜로니의 특권층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화려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위로는 마구스부터 아래로는 견습성직자까지, 성직자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사람들은 일체의 수익 행위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교단에서 지급하는 생활비만으로 살아야 했다. 물론 그 생활비가 보통의 중산층에 비해 약간 높은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받아야 하는 길고 혹독한 교육과정과 많은 의무를 생각해보면 딱히 고소득도 아니었다.

그들은 일상에서는 과하지 않은 정도에서 술과 오락도 즐겼고, 모두 결혼해 가정도 가진 보통의 시민들이었다. 이들을 ‘성직자’라는 이름으로 묶어두는 것은 그들만이 가진 도덕적 의무, 그리고 콜로니를 이끌어가는 성직자로서의 자부심일 뿐 세속적인 특권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직자 신분은 신의 간택을 받은, 심신이 훌륭한 남녀만이 될 수 있고, 교단에서 일생을 보장해 주는 나름대로 안정적인 직업인만큼 이성에게도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수다를 떨며 옷을 갈아입은 그들은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혹은 술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이제 예배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솔직히 성직자들이 저 까까 삭발머리만 빼면 스타일이 나쁘지는 않은데.”

아무도 남아있어서는 안 될 이 예배당 한구석에서 누군가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코윈의 사투리 억양이 잔뜩 섞인 그 거친 여자 목소리는 예배당 한쪽의 높은 기둥 꼭대기, 용머리가 새겨진 주두(柱頭) 위 어두운 구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뒤이어 빈정거리는 듯한 남자 목소리가 같은 곳에서 새어나왔다.

“허, 그래. 넌 기껏 그거나 보고 있었구나. 말이야 바른 말로, 성직자들 대머리라도 벗겨놔야 이성들이 좀 덜 꼬이지 않겠어? 차마 금욕의 제한을 두지는 못하겠고, 저렇게라도 매력을 줄여놔야 성직자들이 콜로니 남녀들 다 후리고 다닌다는 소문도 막지?”

“허, 대머리도 나름대로 섹시하다는 걸 모르는구나?”

여자가 킬킬대며 주두 한쪽으로 머리를 빠끔히 내밀었다.

“그래, 네가 누구는 안 섹시해 보이겠냐.”

여자 옆에서 이번에는 남자가 고개를 내놓았다. 마치 불이라도 붙은 듯 붉은빛 머리칼에 매서운 푸른빛 눈동자를 번득이는 그 남자는 콜로니 시민의 평균 신장에 비해 한 뼘도 넘게 큰 대단한 장신의 소유자였다.

“슬슬 내려가야겠다.”

100척 아래 까마득하게 보이는 바닥을 향해 가는 와이어를 늘어뜨린 남자는 자그만 고리를 걸고 주두 위에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잘 다져진 남자의 근육이 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그래, 그래서 오늘은 너도 다 섹시해 보인다.”

뒤이어 여자가 고리를 걸며 먼저 내려가는 남자를 놀리듯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네.”

일찌감치 바닥에 도착한 남자가 아직 내려오고 있는 여자를 올려보며 대뜸 쏘아붙였다. 바닥에 도착한 여자는 주두 위의 먼지가 뽀얗게 묻어난 푸른 튜닉을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그 옆 기둥에 함께 숨어있던 2명의 전사들도 바닥에 내려와 이들 둘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좋아. 현재시각 10시 39분이다. 11시 정각에 움직인다.”

그제야 진지한 표정이 된 여자가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며 작게 입을 열었다. 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불빛은 예배당 높은 제단에 위치한 주신 다하카르의 신상(神像)에서 뿜어나오는 노란 불꽃뿐이었다.

“저 신상을 살아서 제 눈으로 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카파키 중령님.”

따라온 전사 중 한 명인 와헷이 제단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손짓에 지휘관 여자, 민병대 특무대 제1팀장 오르마즈 레즐린 카파키 중령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저게 바로.......”

머리가 세 개 달린 그 거대한 대리석 용의 형상에 마치 압도당한 듯, 멍 하니 선 그의 그레이오팔 눈빛이 신상의 불꽃을 따라 무지개빛 안광을 반사시켰다. 여자의 이마에는 그 용의 형상과 똑같이 세공된 보석조각이 기이하게 반짝이며 마치 그 대리석상과 보조를 맞추듯 형형한 파란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중령님.”

“으, 응?”

함께 내려온 그 장신의 남자가 어깨를 탁 짚자 오르마즈는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렸다. 민병대 특무대의 최고 암살요원이며 교단에는 공포의 대상으로 꼽히는 이 대단한 여자가 작전 도중 이렇게 넋을 놓는 모습은 그와 오랜 기간 전우로서 함께해온 부팀장 베흔 소령도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냥, 신기해서.”

오르마즈가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며 바닥에 지도를 작동시켰다. 방금 전까지 농담따먹기를 하던 동갑내기 동료에서 하급자의 위치로 되돌아간 베흔은 갑자기 불안정해 보이는 이 상관의 눈빛을 걱정스레 살폈다.

“지난번 이미 말했지만,”

베흔의 의심에 찬 눈빛을 의식하며 오르마즈가 짐짓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작전은 불확실성이 크다. 하지만 지난 계획대로만 따라준다면 신관들의 숙소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접근까지야 그렇겠죠.”

오르마즈의 자신 없는 표현에 베흔이 입을 씰룩거렸다.

“이번 작전목표가 신관 숙소에 접근해 스토커질을 하는 것이었던가요?”

베흔의 농담에 팀원들이 터지려는 웃음을 얼른 참았다.

“됐다, 베흔. 그 뒤는 어차피 우리의 기량에 달렸어.”

힘든 작전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오르마즈도 난감한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관 숙소에 접근, 그리고 그 후가 문제였다. 이들에게는 신관 숙소의 위치, 그리고 오늘 밤 대신관 야푸르 빈 다하카르가 이곳에 머물 것이라는 조금은 미심쩍은 첩보 외에는 그 이상의 정보가 없었다. 심지어 암살 임무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무언가마저도.

“그런데, 대신관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라도 알아야 뭘 하지 않습니까."

전사 중 나머지 한 명인 이트닌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부하의 이런 당연한 불만에 사실 오르마즈도 별반 해 줄 말이 없었다. 그의 팀은 지금껏 교단과 코메트 수뇌부를 상대로 숱한 암살임무를 성공시킨 최고의 베테랑들이었지만 ‘표적’의 얼굴조차, 아니 최소한의 인상착의 정보조차 없이 나온 황당한 암살임무는 난생 처음이었다.

“누가 초짜라고 안할까봐, 젠장할, 아랫놈들만 죽어나지.”

부팀장 베흔이 지도에서 얼굴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명색이 지도자 후계자에게 대놓고 퍼붓는 그의 원색적인 불평에 오르마즈도 이번만은 별다른 핀잔 없이 쓴웃음만 지었다.

따져보면 베흔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기원 3년부터 37년여간 조직을 이끌어 온 현 지도자 파냐드 리쿠는 연초에 있었던 교단의 암살시도로 중상을 입은 이후, 요즘 부쩍 기운을 잃은 모습이었다. 암살수의 손에 차량 사고를 당한 그는 양쪽 다리와 팔을 잃고 허리와 두개골까지 부서져 무려 10개월 정도를 자리에 누워 꼼짝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남편들과 자녀들의 정성스런 간호 덕분에 몸의 상처는 이제 그럭저럭 나은 상태였지만 사고로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 도리어 문제였다. 그 일로 거의 한 달을 넘게 사경을 헤맨 후, 그는 자신의 자리가 너무 무겁다는 말을 요즘 항상 입에 달고 있었다. 어찌보면 지금까지 10번이 넘게 사선을 넘나든 그가 지금껏 버티어 온 것만도 대단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정말로 지도자에서 물러날 생각인지, 아니면 단순히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그간 후계자수업을 받아 온 장남 에르네스토를 조금씩 조직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어쩌면 지도자 파냐드는 장남에게 조직을 물려주기 전, 적에게서 가장 무서운 존재를 서둘러 없애고 그 짐을 혼자 다 떠안으려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빈약한 준비, 믿을 수 없는 부실한 정보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성급하게 일을 벌이는 것도 어쩌면 그런 정치놀음의 한 조각이라는 생각이 오르마즈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런 복잡한 정치적인 목적에 관계없이, 이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 오르마즈를 위시한 아랫사람들 몫이었다.

이들이 오늘 죽여야 할 사람은 야푸르 아르잔 빈 다하카르, 공포의 신 다하카르의 현신이며 교단의 최고지도자인 대신관 바즈라마구스였다. TSG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에르네스토의 ‘데뷔전’으로는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의 거물이었다.

알려진 대로라면 그 거물은 기원전 90년, 29대 대신관 자하크 야푸르 빈 다하카르와 그 딸 마샤나그 빈트 다하카르 사이에서 태어난 수명개조 당대의 남자였다. 그는 형제들 중 비교적 어렸지만 수명개조 기술을 개발한 공을 인정받아 기원전 35년, 아버지에 이어 30대 대신관에 올랐고, 그들의 전통대로 아버지의 중간이름이며 아명인 ‘야푸르’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선임 이후, 그는 아버지 자하크가 시작한 TSG학살과 제니안 탄압을 한층 가혹하게 강화시켰고 지금까지 수십만에 달하는 ‘이단자’들을 이곳 남극성당의 종교재판소에서 처단하면서 ‘남극의 도살자’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 오고 있었다.

오르마즈가 여전히 불만투성이인 부하들을 달래며 지도를 접어 넣었다.

“불평들 그만 해. 고위 신관 20명 중에서 19명 얼굴은 다 외웠지? 그놈들 빼고 신관같이 생긴 놈 있으면 대신관이겠지, 뭐. 그리고 콜로니를 휘어잡는 바즈라마구스 정도면 숙소나 옷 입는 것부터 보통 신관하고는 다르지 않겠어? 자자, 불평들 그만하고 이제 움직여.”

오르마즈의 재촉에 전사들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깁니다.’

선두에 선 와헷의 수화에 오르마즈와 베흔이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예배당 쪽문으로 조심스럽게 나선 그들은 찬 기운이 내리깔린 이 해안가의 웅대한 성소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거대한 예배당을 중심으로 해안 쪽 저지대에는 지금껏 수십만을 고문하고 학살한 악명높은 종교재판소와 처형장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동쪽 절벽에는 교단의 견습 성직자들이 머물고 교육받는 수도원과 장서관이, 그리고 내륙인 남쪽에는 아직 그 용도가 밝혀지지 않은 기괴한 건물 하나가 창문조차 달리지 않은 폐쇄적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서쪽 절벽에는 성직자와 신관들이 머무는 숙소인 ‘아프라시아 관(館)’이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지금, 오르마즈의 팀이 들어가야 할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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