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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35화 (632/1,132)

< -- 635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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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군 원정부대의 출정을 준비하던 사람들 중 나이가 많은 북부 출신들은 황제의 모습에 적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입은 검은 갑옷은 가슴의 황룡 문장이 덧붙여졌지만 오르마즈가 입었던 바로 그것이었고, 그의 등에는 양쪽에 돋은 날로 유명한 ‘하메스타의 창’과 베흔에게서 빼앗은 플람베르주가 서로 경쟁하듯 X자로 비스듬히 자리잡고 있었다. 게다가 당당한 가슴과 어깨 아래로 이어지는 날씬한 허리와 팔다리, 심지어 얼굴과 인상까지도 흡사했다.

물론 지금의 황제는 오르마즈와 닮았을 뿐, 그는 아니었다. 오르마즈도 꽤 장신이었지만 황제는 그보다도 5촌(15cm)이나 더 컸고, 큰 손은 함께 있는 황비 네페티의 자그만 머리 정도는 한 번에 쥐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리고 몽골리안인 할머니 유평대제가 물려준 긴 눈꼬리와 살짝 각이 진 턱은 갸름하던 오르마즈보다는 더 강인하고 매서워 보였다.

원정군이 모인 황궁 앞 광장에 나선 카렐은 자신을 오르마즈처럼 바라보는 북부 사람들의 시선이 영 못마땅한 듯, 언젠가 솔이 만들어 주었던 검은 황룡 문장 망토와 여우털 케이프를 어깨에 휙 둘렀다. 워낙에 넓은 어깨에 갑옷과 여우털까지 덧대어지면서 황제의 큰 체구가 유독 더 두드러져 보였다. 아케메니아 항구에서 있을 출정을 앞두고 카렐은 자신이 가져갈 무기와 장비들을 하나하나 직접 손보기 시작했다.

“돌아왔습니다.”

카렐은 해쓱해진 우베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탄현성의 감옥에 갇혀있던 하룻밤새 맘고생이 심했는지 두 눈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수고했습니다. 마르코스 비서관. 고생이 많았군요.”

창백해진 우베의 등을 먼저 두드려 준 건 황제가 아닌, 황비 네페티였다. 깜짝 놀란 우베의 얼굴이 테이블 위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에 환송을 나온 황후 아메스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우베가 네페티의 미모에 매번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는 굳이 따지자면 아메스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니 반응이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은데.”

카렐은 우베의 고생을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짓궂게 물었다.

“말도 마십시오. 간이 제자리에 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뭔 놈의 고함소리가 그렇게 크던지…….”

“베흔이 고함을 질렀다고?”

“고함 정도가 아니고 무슨 천둥이라도 치는 줄 알았다니까요. 세상에 그렇게 미쳐 날뛰는 건 처음 봤다니까요.”

“그래, 어쨌든 내 뜻을 바로 읽기는 읽었군.”

카렐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거에 근위대장이 왜 그렇게 펄펄 날뛰죠?”

우베의 섣부른 물음에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카렐도 자신이 왜 우베를 보냈는지 뒤늦은 후회와 나름대로의 계산을 번갈아가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카렐 역시 자신의 핏줄에 그 원수같은 작자의 피가 함께 흐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가 모렌 박사에게서 ‘확답’을 듣지 않은 건 만에 하나라도 그의 끔찍한 예상이 사실로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였고, 진실이야 어쨌든 이제는 ‘적’인 그와 전장에서 마주할 때 자신이 흔들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정말로 혹시라도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였을 때,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에 기대 죄책감을 피해 보고픈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나름대로 스스로에 대한 안전망을 만들어 놓았던 자신이 왜 한편으로는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려 했는지, 카렐은 스스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혼자만 이렇게 괴로워하기는 싫다는, 그리고 받은 만큼 그를 괴롭히고 싶다는 자신의 악마성 때문이라고도 생각했고, 그가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오는, 가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얼토당토않은 기대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어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살아 돌아온 것이 내겐 충성이야. 나와 함께 떠나야 하니 빨리 채비 챙겨서 나오게나.”

우베를 위로해 준 카렐은 확인을 끝낸 군장들을 시알피의 안장에 얹었다. 지난 황성 1차 전투에서 쓰러졌던 이 말도 그 주인, 그리고 주인의 부하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명색이 황제가 안장에 무기와 허름한 비상식량 주머니, 물통에 갖은 잡다한 군장들을 직접 챙기는 모습에 아메스가 다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아랫사람들에게 시키시지요. 원정 가서까지 그러실 건가요.”

아메스가 시알피의 고삐를 대신 잡아주며 불만스레 말했다. 이전 같았으면 원정 전날 사람들과 한바탕 말술을 펐을 그가 오늘은 웬일로 얼굴이 비교적 멀쩡했다. 물론 그가 딱히 술을 끊기로 해서는 아니었고, 원정 전 황궁에서의 마지막 밤, 황제와 침소를 함께 한 때문이었다.

그는 네페티 앞에서 그 사실을 과시하려는 듯 황제의 가슴을 살며시 파고들며 속삭였다.

“이젠 가디언이 아니시라고요. 어젯밤에도 좀 더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되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다른 건 몰라도 군장만은 직접 챙깁니다. 황후.”

카렐이 한 팔로 아메스를 안고 다정하게 입을 맞춰주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네페티는 여유만만한 것인지, 비웃는 것인지 입가에 살며시 웃음을 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후인 아메스는 궁에 남을 테고, 네페티는 서부최고제후의 자격으로 원정군을 따라갈 예정이었다. 오늘 그의 몸에는 평소같은 화려한 드레스 대신 서부연합군의 정복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황비를 꼭 데려가야 하는 거야?”

네페티를 불만스레 쳐다보던 또 한 사람이 카렐을 붙들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싸움을 할 줄 아나, 병법을 아나, 말이나 탈 줄 알아? 설마 가마에 태워 ‘모실’ 건 아니겠지? 어차피 짐덩이만 될 텐데 뭣 하러…….”

“이미 눈치 챘을 걸로 생각했는데?”

카렐이 페로를 쳐다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페로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대꾸했다.

“최고제후 이름지어주기?”

“지금껏 이름만 최고제후였지 한 번도 이름값 해 본 일이 없잖아. 섭정공이 있을 거지만 어쨌든 공식적인 최고제후는 황비라는 걸 확실히 못박아야지. 지금이야 어쩔 수 없다손 쳐도 섭정공 손아귀에 오래 놔둘 수는 없잖아?”

페로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감추었다. 중앙귀족으로서의 ‘실리’와 ‘황제의 유일한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보기 좋게 충돌한 상황이었다.

“대군이 자라면 그네들에게 서부를 맡기려고?”

“솔직히는 그 이상이지.”

카렐의 위험천만한 발상에 페로가 움찔했다. 황제는 황비인 네페티를 통해 장기적으로 서부를 황제의 영향권 아래 완전히 흡수해버릴 속셈임이 분명했다.

준비를 모두 마친 카렐은 말 등에 훌쩍 뛰어올랐다.

“아참, 귀인 문제는 오늘까지 결정하기로 했잖아?”

함께 말에 오른 페로가 그의 고삐를 덥석 잡으며 물었다. 카렐은 말을 돌려 한쪽에 있는 밀리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밀리타 레즐린 부장 문제는 조금 전에 승인해서 넘겼어. 아직은 모르고 있지만 출정과 동시에 알려줄 거야. 첫 번째 귀인으로 삼기로 했어.”

“에스더인가 그 여자는?”

페로의 물음에 카렐은 네페티 쪽을 눈짓해 가리켰다. 네페티 옆에 서부 군복 차림으로 서 있는 건 그새 네페티의 측근이 된 에스더 라슈트라 이쟈크였다.

“황비의 기술고문으로 따라갈 모양이야. 북부 사람이 서부연합군 고문인 것도 좀 웃기지만……콜로니 아카데미 토목학 박사에 실무 경험도 꽤 있던걸.”

“너 은근히 즐기는 것 같다?”

“뭘?”

“밀리타 레즐린 부장을 귀인으로 승인했으면 에스더에 대한 결론도 함께 냈어야 하는데 아무 언급도 없잖아?”

페로의 시비에 카렐이 쓴웃음을 지으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페로가 끝까지 결론을 듣겠다는 듯 그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고도의 계산이냐? 아니면…….”

“네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혼인 문제도 결국은 정치적인 거래일뿐이야.”

“그 정도는 나도 생각하고 있어.”

페로가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카렐은 여전히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적당한 혼인정책은 내 편을 끌어들일 수 있지만 너무 남발해서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도 현명치 못하지. 지금 상황에서는 에스더가 귀인 후보로 여전히 남아있다는 게 중요해. 오늘 저녁에 타르서스의 라슈트라 가가 지난번 타르서스 사태에서 내 숙청에 대한 지지를 선언할 예정이라지.”

“그럼 오늘 저녁에 승인하려고?”

“그 정도만으로 내가 감지덕지해가면서 덜컥 귀인으로 삼아 줄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라슈트라 가는 기존의 10개 호족가문이 무너지면서 그것만으로도 득 본 게 많은 놈들이야. 호랑이 없어진 숲에 여우가 주인이 될 테니까. 안 그래도 황비가 라슈트라 가문에 ‘좀 더 내놓으라고’ 채근하고 있는 모양이니까 두고 봐야지.”

페로가 뒤에 따라오고 있는 황비 네페티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럭저럭 익숙한 자세로 말을 몰고 뒤따르고 있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히잡 속에 ‘정숙하게’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간 폭군같은 남편에 눌려 전혀 빛을 보이지 못했던 그의 야심이 그 베일 아래에서 조금씩 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아메스 저놈이 이름값을 해야 하는데…….’

문득 경계심이 솟구친 페로는 그제야 카렐 곁에 말을 타고 따라붙은 딸 아메스 황후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어린 시절, 네페티는 친구 수우의 자애로운 어머니였지만 따져보면 페로, 아니 자이센 가와는 그다지 편할 수만은 없는 관계였다. 가족을 몰살시키고, 친어머니 마하 부인을 바로 눈앞에서 윤간하고 살해한 조부 투모카프의 원죄가 쉽사리 씻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출발!”

사방에서 울리는 지휘관들의 함성과 함께, 황궁에서 출발하는 황제 직속부대가 하나둘씩 황제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차례로 합류하면서 지휘부의 뒤로 조금씩 굵고 긴 꼬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중장기병들의 번쩍이는 갑옷과 각 부대의 화려한 깃발, 경기병들의 경쾌한 말굽소리, 거친 가디언들과 에키트 보병들의 왁자지껄하는 엉터리 노랫소리가 황성에서 아케메니아 항구로 이어지는 대로를 따라 길게 늘어져갔다.

이런저런 페로의 고민 속에서, 황성을 출발한 행렬은 얼마 전, 반란군과 근위대, 보안국 헌병대간의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던 아케메니아 항구에 접어들었다. 항구에는 먼저 도착한 제후군 병력 일부와 기사단 본대가 배에 오르는 가운데 시끌시끌했고, 황제와 지휘부 일행이 탈 대형 수송선이 이미 도크를 열어놓은 채 대기 중이었다.

먼저 기다리던 카나르 플라칼 경, 예르마크 세닉 경이 황제에게 경례를 올렸다.

“항로 주변 점검과 수색은 끝났습니다. 상륙 지점은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겠지?”

카렐은 지금껏 지나온 길을 문득 뒤돌아보았다. 지난 전투에서 불타고 부서진 황궁은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그럭저럭 건재했고, 황도는 여전히 민간인이 거의 없는 유령도시였다.

“아니, 내가 돌아올 자리를 든든히 지켜 줄 거지?”

카렐이 페로의 어깨를 힘 있게 짚으며 물었다. 페로가 너털웃음과 함께 그의 손목을 잡았다.

“여긴 멀쩡하게 남겨놓을 테니 너나 멀쩡하게 돌아와.”

카렐이 손을 뻗어 페로를 한 팔로 다정하게 안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황제와 총리의 일상적인 포옹으로 여겼겠지만 페로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재수 없는 소리 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솔직히 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

페로의 속삭임에 카렐이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날 잘 알면서 그 따위 소리 하기냐?”

카렐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페로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는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손을 흔들며 배 쪽으로 멀어져갔다.

“휴우.”

페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네르와 베아트릭스, 카나르 경과 예르마크 경 같은 든든한 무장들을 거느리고 배에 오르는 황제의 당당한 뒷모습을 향해 항구에 남은 사람들이 환호성과 박수를 쳐 주었지만 페로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네 어깨가 무거워 보여…….”

페로의 속삭임이 카렐의 예민한 귀에 들어갔을지, 아닐지 알 수는 없었지만 트랩에 막 오르던 그가 문득 페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미소를 짓고는 갑판 위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큰 진료가방과 장비를 든 몇 명의 수행의사를 동반한 주치의 니사 라말라 박사가 황제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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