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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36화 (633/1,132)

< -- 636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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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도시의 사오시안트 별궁으로 돌아온 베흔이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2번 도시 시장인 남편과 함께 머물고 있던 법무대신 아리아노 라자루스였다.

타르서스에서 페로에게 한바탕 당하고 돌아온 아리아노는 자신이 적의 포로가 될 뻔했다는 수치심과 아들을 인질로 남겨둔 채 혼자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외출도 하지 않은 채 며칠째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 밝은 성격에 짓궂은 면도 있는 재미있는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존심도 워낙 세다보니 자신의 실수에 큰 상처를 받는 예민한 면도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사오시안트에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혼자 속앓이만 하고 있는 것도 주변의 쓸데없는 걱정, 그리고 아들을 적진에 인질로 두고 온 그에 대한 묘한 의심을 아예 차단해버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렇게 처박혀 얼굴도 안 내밀고 있는 아리아노에게 ‘특효약’이 무언지 잘 알고 있는 건 결국 친분도 있고 사려도 깊은 베흔뿐이었다. 제롬이 장모 문병을 가는 차에 그도 술과 꽃 등등을 챙겨 나름대로 선물이라고 들고 함께 찾아가기로 했다.

“훗, 내가요? 아들놈 안전 따위에 흔들린다면 천하의 종장 아리아노가 아니지.”

침소에서 막 나온 데데한 얼굴의 아리아노는 베흔이 내민 커다란 꽃다발 선물을 받아들며 짐짓 대범하게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당연한 말 아니겠소. 누가 감히 아리아노 경을 의심하겠소. 말이야 바른 말로 경만큼 의지가 곧은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베흔은 상대방이 거북살스러워하건 말건 그를 잔뜩 추켜세워 주었다. 방법이 좀 유치하더라도 일단은 의욕을 상실한 그를 최대한 북돋워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이고, 속 보이는 소리 마시구요.”

아리아노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지만 아주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솔직히 내가 별로 할 일도 없고…….”

잠시 후, 아리아노의 과장된 자신만만함이 갑자기 무너지며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그의 말대로, 황도를 빼앗긴 이후 그를 비롯한 법무부 사람들의 할 일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아리아노가 법무대신으로서의 본 업무 대신 정치적인 협상에 더 열심히 뛰어다닌 것도 따져보면 ‘할 일이 적어서’이기도 했다.

“듣자하니 혼자 뭔가 열심히 조사하고 계시다면서요?”

베흔의 물음에 아리아노가 죄라도 지은 양 어깨를 들썩했다. 그는 함께 있는 사위 제롬의 눈치를 힐끔 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 안 그래도 근위대장님께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었는데.”

“예? 저요?”

베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지금 현역에 있는 사람들 중에 근위대장님만큼 교단에 관해 잘 아시는 분이 없을 것 같아서요.”

“교단이 왜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일들에 호기심이 당긴 베흔이 아리아노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실은 아들놈 꺼내 올 흥정거리를 만들어 보려고 개인적으로 코나 시디크 놈의 옛날 자료들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베흔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아리아노의 아들을 붙잡고 있는 것이 페로라면 코나 시디크의 정보를 찾아내서 아들을 놓고 거래를 해 보려는 아리아노의 생각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물론 카렐이 이미 그 ‘전설적인 악당’을 붙잡아놓고 있다는 것은 그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지만.

“코나 시디크 놈하고 교단하고 무슨 관계인데요?”

“아직 페로 놈한테는 밝히지 않은 내용이지만……코나 시디크를 보호하고 있던 놈들이 북부의 교단 잔당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법무관 시절에 알아낸 내용이지요. 하지만 그 단계에서 외압 때문에 수사를 중단했고요.”

“훗, 그놈이야 원래 코메트 장교 출신이었고, 포로가 된 후에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해서 노예 신세가 되었으니, 남아있는 교단 찌끄레기들이 그놈을 보호할 생각을 했을 수도 있지요. 뭐, 괘씸한 수작이기는 하지만 이상할 건 없군요.”

베흔은 ‘그런 걸 왜 이제와 골 아프게 들추냐’는 말이 혀끝까지 튀어나왔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하지만 아리아노의 생각은 베흔의 이런 단순한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고 있었다.

“맞습니다. 그 정도는 이상할 게 없지요. 그렇다고 조용히 살고 있는 사교도 놈들을 이제와 들쑤셔 놓는 건 정치적으로도 현명치 못하죠. 이제와 코나 시디크를 잡는 것도 원수 갚는 데 눈먼 자이센 가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사 밖이고.”

“그런데요?”

다른 주제로 돌릴까 했던 베흔은 일단 계속 들어주기로 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지난 타르서스 사건에서 코나 시디크 놈이 호족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놈이 북부에서 데려온 용병들이 적 헌병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죠. 다른 곳도 아니고 ‘북부’입니다. 카렐 놈의 지지기반인데도 놈에게 맞서고 있는 겁니다. 지금 제 걱정은 코나 시디크를 보내어서 타르서스 호족들이 적들을 배신하도록 부추긴 배후가 도대체 누구냐는 겁니다.”

베흔은 조금 흥분한 듯 보이는 아리아노 경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계속 듣고 있기로 했다.

“제가 놈의 뒷조사를 하다가 막혔던 곳도 북부였고, 심증으로는 쿠트라스에 있는 다하카르 교단 같았습니다. 어쩌면 그네들이 이번 제위싸움에 개입하려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타르서스 건에 개입한 건 실패로 돌아갔지만요.”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북부의 사교도들이 지금 우리 편을 보이지 않게 지원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베흔의 머릿속에 근위대에 지원한 40여명의 다하카르 교단 의사들의 존재가 스쳤다. 그리고 아프라스 야투 박사의 귀 밑에 새겨져 있던 성직자의 상징도 역시.

아리아노 경이 베흔의 이런 섣부른 예측을 재빨리 차단했다.

“그걸 ‘돕는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집권해서 놈들이 얻을 이익이 별로 없거든요.”

“그럼?”

베흔의 눈꼬리가 길어졌다. 하지만 아리아노 경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무언가 다른 속내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력이 없으신 건 잘 알지만 근위대 정보망이나 근위대장님 인맥을 동원해서 사교도 놈들의 동향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 정도야…….”

별 성의 없이 대답하는 베흔을 불만스레 쳐다보던 아리아노가 색이 잔뜩 바랜 옛날 자료 사본들을 내놓았다.

“당시 제가 조사했던 바에 따르면 다하카르 교단 지도자인 ‘람다’와 ‘시그마’라는 자가 코나 시디크를 보호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람다’의 측근 ‘델타’가 있지만 이자 역시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트라카 교단은 ‘감마’라는 자가 이끌고 있는데 이 역시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름들이 도대체 왜 그 모양…….”

베흔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24체(體)입니다.”

“뭐라고요?”

“놈들에게 잡혀갔다가 기억을 잃고 돌아온 수사관이 기억하는 딱 한 마디가 그것이었습니다. ‘24체’.”

“그게 뭔데요?”

“수사관이 모든 것을 잊어버려서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무언가 특별한 24명이 있다는 정도가 짐작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놈들이 코드로 쓰는 그 괴상한 문자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 그 문자는 아마도 교단 이전…….”

베흔의 궁금증에 아리아노가 냉큼 대답했다.

“고문서를 뒤져보니 예상대로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정확히 24개의 문자더군요. 24체는 아무래도 그 이상한 이름을 가진 자들을 뜻하는 코드 같습니다. 24체가 정확히 누구인지, 왜 코드까지 붙여가면서 특별하게 관리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입실…….”

순간 황실에 S를 남긴 ‘입실론’을 떠올린 베흔이 입술을 꾹 다물며 옆에 있는 제롬의 눈치를 보았다. 교단에 관해서도, 이제는 쓰이지도 않는 24개의 별난 문자에 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제롬이 옆에서 지루하다는 듯 크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아리아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근위대장님의 짐작이 맞을 겁니다. ‘입실론’은 그 중 5번째 문자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노출된 첫 번째 24체인지도 모르지요.”

“알겠습니다. 짬을 내서 조사해 보도록 하지요.”

베흔은 아리아노가 내민 사본들을 뒤적거리며 일단 이 문제에 관한 대화를 접었다.

“놈들의 원정군 함대가 출발했다는 연락은 받으셨나요?”

베흔은 아리아노와, 함께 있는 남편 2번 도시 시장에게 물었다.

“문제는 놈들이 어디에 상륙하느냐인데.”

그제야 할 말이 생긴 제롬이 지루함을 털고 입을 열었다. 베흔이 펼친 지도에는 마치 코끼리 머리를 옆에서 본 것 같은 형상의 2번 도시가 그려져 있었다. 바로 그 ‘코끼리 코’인 사오시안트 반도의 끝부분, 2번 도시의 최남단에 사오시안트 별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별궁 주변 해안은 이미 완전히 봉쇄해서 아무리 대군이 동원되어도 상륙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접근도 못 하고 모조리 수장될 겁니다.”

2번 도시 시장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손끝으로 별궁 자리에 흰 바둑돌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제롬이 고개를 저으며 검은 바둑돌을 그 옆에 올려놓았다.

“워낙에 좁고 길쭉한 반도니 반대편 해안선으로 상륙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장인어른.”

“상륙한다고 해도 겁날 건 없지요.”

베흔이 배실배실 웃음을 지으며 제롬을 말렸다.

“후방의 ‘13선지자의 묘’에 근위대 4, 10군단이 대기 중입니다. 여기서 적당히 버티어 주는 동안 그네들로 후방을 막아버리면 놈들은 좁은 반도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됩니다.

베흔이 흰 바둑돌 2개를 ‘코끼리의 눈동자’ 자리에 올려놓았다. 제국 최대의 성역인 ‘13선지자의 묘’는 리 리쿠를 비롯한 초기 제니안의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거대한 묘와 사당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지리적으로는 황궁과 꽤 먼 춥고 외진 곳이었지만 초기 제니안과 TSG 유물을 모아 전시하는 박물관까지도 함께 위치해 있다보니 워낙에 참배객과 방문객들이 많았고, 그 일대에 자연스레 중소규모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럼 놈들이 13선지자의 묘부터 칠 가능성은?”

“없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돌아가는 길이 되겠죠. 사오시안트에서 거기까지는 거리가 상당하니까.”

베흔이 그 위에 몇 개의 검은 바둑돌을 올려놓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게다가 여기는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입니다. 기병 위주로 조직된 적군에게는 가장 불리한 지형입니다. 제 발로 들어와만 준다면 우리 입장에서야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 줘야 할 판이겠죠.”

“하긴, 적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여기도 공격하기 꽤나 난감한 곳이기는 하네. 아니, 사오시안트 별궁의 입지가 절묘한 건가?”

제롬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검은 바둑돌을 손 안에서 빙빙 돌리기만 했다.

그의 말을 들은 순간, 베흔은 사오시안트를 지은 생전의 유평대제를 문득 떠올렸다. 그의 여자로서, 아니 인간적인 매력은 빵점이었지만 최소한 황제로서는 그렇지 않았었다. 베흔은 그 콩알만한 배짱 덩어리를 어지간히도 무서워했지만 세나우스1세에게처럼 감히 반역을 도모한다는 건 꿈에도 상상해 본 일이 없었다.

베흔은 새삼 제롬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큰 덩치, 힘만 빼면 이 최고제후는 친아버지인 그보다는 도리어 ‘키워 준 아버지’인 테번을 더 닮아가고 있었다.

베흔은 항상 떠올리곤 했던 생각, 자신에게도 똑똑하고 현명한, 그러면서도 자신을 어느 정도 닮은 핏줄이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묘한 아쉬움을 삼켰다. 그리고 유평이 만약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할 건 없을지도 모른다며 혼자 공상에 빠졌다. 물론 그것이 자신이 죽인 주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기를 쓰고 있었다.

“뭐 해?”

또다시 엉뚱한 생각에 빠진 베흔을 제롬이 이상한 듯 돌아보았다.

“아, 아닙니다.”

베흔이 재빨리 표정을 추슬렀다. 바로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베흔이 뒤를 재빨리 돌아보았다. 문을 열고 뛰어들어온 건 잔뜩 긴장한 표정의 셈이었다.

“적의 이동이 포착된 것 같습니다. 일군의 선단이 도시 서북쪽 해안, 13선지자의 묘 쪽으로 접근 중입니다.”

“풋.”

제롬이 베흔을 돌아보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빨리 카렐 놈 앞에 가서 절하고 오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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