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40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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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들어온 사람을 압도하는 웅장한 지하 홀의 모습은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크기를 늘리고 모양을 맞추려 벽을 깎아 낸 곳도 있었지만 원래부터 지하 동굴이었던 듯 방금 지나 온 복도처럼 따로 마감을 하지 않은, 자연석 상태의 벽과 천장이 그대로 보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매끄럽게 갈려 있는 바닥의 검은 대리석은 이곳을 지배하는 ‘다하카르 신’의 위엄을 나타내듯 칼날처럼 눈부시게 반짝이며 기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후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오르마즈가 급히 몸을 낮추었다.
그가 방금 나온 곳은 홀의 꼭대기 3층 정도에 뚫린 작은 테라스 구멍이었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경비 위치 혹은 귀빈석인지 모르겠지만 홀 전체를 빙 둘러 비슷한 테라스가 꽤 여러 개 만들어져 있었다. 테라스 밑으로 바닥까지 내려가는 거친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움직이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오르마즈가 스코프의 감도를 조절하고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군데군데 인공조명도 보였지만 지금 켜 있는 건 홀 중앙부의 횃불이 전부였다. 덕택에 그가 있는 이 높고 구석진 테라스는 홀 안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문제라면 오르마즈 역시 다른 테라스를 잘 볼 수가 없다는 것이지만.
홀 내부 광경을 구석구석 눈에 담던 오르마즈는 자신의 건너편 벽에 있는 꽤 큰 테라스를 발견했다. 오르마즈가 있는 곳은 고작해야 서너 명 서 있으면 가득 찰 조그만 공간이었지만 그곳은 마치 무대처럼 꽤 커 보였다. 하지만 어두운 데다가 홀 자체가 워낙에 크다보니 스코프의 감도를 최대한 높여도 그 안쪽까지는 정확히 보이지를 않았다.
‘어차피 제단은 저기겠지.’
그곳까지 보는 것을 포기한 오르마즈는 다시 홀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교단의 예배소는 원래 제일 중앙에 제단이나 석상을 두고 성직자와 신도들이 그곳을 에워싸고 앉는 배치가 보통이었다. 이곳 역시 4단 정도쯤 되는 제단이 있고, 그 중간에 마치 돌침대처럼 길쭉하게 만들어진 대리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성직자들이 알면 기절하겠지만 나즈라와 함께 한밤중에 몰래 이곳에 들어왔던 어린 시절의 오르마즈가 그와 함께 누웠던 곳이 바로 저 돌침상이 있는 자리였다. 아무도 없었기를 망정이지 그날 행여 운 없이 잡히기라도 했다면 불경죄로 그 자리에서 둘 다 처형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먹잇감이 널렸군.’
오르마즈가 혼자 중얼거렸다. 제단을 둘러싸고 서성거리고 있는 십여 명의 다하카르 교단 고위 신관들 하나하나가 모조리 오르마즈의 눈에 익은 민병대의 ‘암살 타겟’들이었다. 저 많은 자들 중 ‘고작 하나밖에’ 죽일 수 없다는 생각에 오르마즈가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드십니다.”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지하 홀 안을 마치 메아리처럼 울렸다. 오르마즈는 스코프의 감도를 최대한 높이고 그곳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홀 반대편 어둠 속에서 금빛의 형상이 조금씩 일렁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교단의 고위성직자, 신관들이 입는 금줄이 새겨진 로브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긴 케이프에 허리부터 무릎까지 덮는 빳빳한 앞치마, 화려한 보석 장식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지금껏 신관들을 여러 번 눈앞에서 보았던 그였지만 저런 복장은 난생 처음이었다.
‘누구지?’
오르마즈가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 눈과 코를 용 모양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머리를 빡빡 깎았다보니 얼굴 형태를 어느 정도 추측하는 건 가능했다. 주름을 보아 수명개조 당대 40대 정도 되었을까, 중키에 군살이 제법 붙은 큰 체구, 그리고 이마 중앙에 박힌 다하카르의 푸른색 문장이 선명했다. 목 밑에 두둑하게 잡힌 살집과 약간 뒤틀린 입매는 남자의 인상을 꽤나 고약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어쨌든 오르마즈가 이미 아는 19명의 다하카르 교단 고위신관 중에는 저런 외모를 한 사람은 없었다.
“저자인가.”
오르마즈는 단검을 쥔 손에 자기도모르게 힘을 꽉 주었다. 나이대로 보나, 다른 사람을 오만하게 내려보고 있는 인상과 중간 정도의 키에 크지 않은 골격, 그리고 보통의 신관을 훨씬 능가하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보아 저자가 대신관 야푸르 빈 다하카르가 분명했다.
‘훗, 유전자가 좋아도 결국은 저렇게 망가지는군.’
확인 차원에서 계속 그를 응시하던 오르마즈는 남자의 계란형 둥근 얼굴에서 ‘한때 곱상한 꽃미남’이었던 흔적을 어렵게나마 찾을 수는 있었다. 중년에 수명개조되었고, 외부에 모습조차 감춘 채 하렘의 여자들에 파묻혀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며 살 테니 나이가 들며 저렇게 주름과 군살만 덕지덕지 늘어난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자존심 강한 마구스 혈통이 보통 사람들을 ‘다른 종’ 취급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마구스들은 성욕이 유달리 강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렇다보니 전 대신관이던 자하크 빈 다하카르 같은 경우는 19명의 신관들 중 무려 6명이 그의 첩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물론, 마구스들은 그들을 안기만 할 뿐, 2세는 절대로 두지 않았다. 실수로 생겨났다고 해도 어차피 제거되었을 테지만.
그들 중 일부는 아예 마구스의 하렘에 들어가기도 했고, 일부는 가정을 가진 채로 ‘몸만 바치는’ 정도였지만 유교식 사상에 물든 민병대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대신관의 품에 안기는 것은 성스러운 은혜를 받는 차원이었지 결코 불륜이 아니었고, 심지어 그 배우자들조차 자신의 아내 혹은 남편이 마구스에게 ‘은총’을 받는 것을 대놓고 자랑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보니 마구스들의 여자 혹은 남자관계는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신관인 야푸르 빈 다하카르만은 여자관계와 가족까지도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7명의 딸들은 마구스 가문의 그 망측한 전통에 따라 아버지의 첩이 되었을 테고, 9명의 아들들도 경쟁자인 형제자매들을 의식하며 어딘가에서 감시를 받으며 살고 있겠지만 정확히 누군지 알려진 건 없었다.
수명개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영원히 살 것이라 믿는지, 야푸르 대신관은 아직 후계자 신탁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16명의 자식들은 아마도 아버지의 선택만을 기다리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 죽이지?’
오르마즈가 단검을 더듬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거리도 먼데다가 주변에 저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그의 특기인 근접암살이나 단검투척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계속 뒤를 추적해 ‘혼자 있을 때’를 노릴 수 있을는지도 확신이 없었다. 워낙에 사전 정보나 계획조차 없이 시작한 암살이다 보니 모든 걸 이 자리에서 임기응변으로 결정해야 했다.
‘빌어먹을.’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자 그는 하는 수 없이 허리띠 뒤에 꽂아두었던 작은 석궁을 꺼내들었다. 두 뼘 정도 길이의 이 장난감같은 단발 석궁은 무장한 병사에게는 무용지물이었지만 비무장한 사람의 살갗은 100보(60m) 정도의 거리에서 한발에 꿰뚫을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살갗만 뚫으면 그 뒤의 살상은 촉에 묻은 독액의 몫이었다.
“제발 움직이지 마라.”
오르마즈는 석궁 끝을 살며시 내밀고 제단과 자신과의 거리를 조심스레 가늠했다. 어두워서 조준이 쉽지 않았지만 아주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휴우.”
오르마즈가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저들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렸을 때를 골라 석궁을 쏠 정확한 타이밍을 잡는 것이 관건이었다. 저들이 놀라 혼비백산하는 동안 재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베흔이 기다리고 있을 남쪽 복도까지 갈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려면 반드시 한 발로 끝내야 했다.
대신관의 뒤에는 헐렁한 흰색 원피스를 걸친 웬 여자 성직자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하지만 오르마즈를 놀라게 한 건 그 여자의 가늘게 뜬 눈꺼풀 아래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무지개빛 광채였다.
“그레이오팔?”
오르마즈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눈을 더듬었다. 순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진 오르마즈는 석궁의 방아쇠를 당길 타이밍을 재는 것을 깜박 잊고 말았다.
‘도대체 뭘 하는 거지?’
대신관의 손짓에 그 여자 성직자가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기 시작했다. 여자의 미끈한 알몸이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나자 신관들이 일제히 무슨 주문 비슷한 것을 외우며 자리에 꿇어앉았다.
오르마즈는 자신이 임무 중이라는 것조차 잠시 잊은 채 그 여자의 아름다운 몸에 순간 정신을 놓고 말았다. 뽀얀 피부에 아름답게 굴곡진 그 몸은 누가 본다 해도 순간 이성을 잃기에 충분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본능을 억누르도록 다져진 오르마즈조차도 자신의 호흡이 갑자기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별꼴이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르마즈가 혼잣말로 어렵게나마 이성을 되찾았다. 나름대로 교단에 대해 많이 공부했다는 오르마즈도 난생 처음 보는 해괴한 의식 장면이었다. 하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어야 할 이 순간에 그는 아직 자신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지 못했다.
‘엇.’
오르마즈는 순간 몸을 잔뜩 움츠렸다. 천하의 암살자인 그를 전율하게 만든 건 대신관의 손에 들려 있는 구불구불한 크리스 단검, 그리고 제단 위에 알몸으로 천천히 드러눕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인신공양?’
오르마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알기로 교단에서는 인신공양은 물론이고 산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나 자해를 동반한 종교 행위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저들이 이곳에서 인신공양을 한다면 교단의 통합교리를 정면으로 어기는 셈이었다.
오르마즈가 다시 눈에 힘을 주었다. 정말로 인신공양이라면 저 여자의 운명은 보나마나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구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대신관은 오른손에 쥔 단검 끝, 그리고 4개나 되는 커다란 반지가 빽빽하게 끼워진 왼손으로 여자의 몸을 천천히 더듬기 시작했다.
“헉, 헉.”
오르마즈의 귀에 꽂은 감지장치로 여자가 내뿜는 긴장된 숨소리가 그대로 흘러들어왔다. 대신관의 칼끝은 여자의 눈 사이부터 콧날을 따라 내려와 목, 가슴, 명치를 거쳐 배꼽까지 천천히 스쳐 내려가고 있었다. 저 칼날에 조금이라도 힘이 들어간다면 여자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신관’의 손끝은 여자의 팔다리, 젖가슴은 물론이고 다리 사이의 예민한 부분까지 어디 한 군데 빠짐없이 마치 무언가를 찾듯 꼼꼼히 더듬었다.
“네 운명이 지금 널 지켜보고 계시다.”
대신관의 굵은 목소리가 순간 홀을 흔들었다.
“제발, 절……너그러이 받아들여 주시옵고, 그 일부처럼 사랑해 주시옵고……”
여자는 정말로 긴장한 듯 손끝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여자를 응시하던 오르마즈는 그의 눈꼬리에서 가는 눈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신관이 여자의 왼쪽 젖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이마의 다하카르 조각에 입술을 가져갔다.
“델타, 밀리타는 부여받은 운명대로 신의 그림자가 될 것이니…….”
순간, 모든 것을 깨달은 오르마즈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정황, 그리고 저들이 말하는 것을 보아 지금의 이 괴상한 집회는 어쩌면 단 한 번도 보고된 일 없던 ‘대신관의 결혼식’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대신관의 신경이 그간 잔뜩 곤두서 있었다는 것도, 이곳에 와 있는 이유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일이었다. 여자의 아름다운 자태에 잠시나마 홀렸던 오르마즈는 내심 ‘대신관도 할 만하군.’하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떠올렸다.
“신께서 이 여인을 받아들이셨다.”
그의 입맞춤에 제단에 누워있던 여자는 안도한 듯 큰 숨을 내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기쁜 일이라도 있는 듯, 여자의 눈꼬리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뒤에서 기다리던 신관 한 명이 검은빛 고운 실크 원피스를 두 팔에 들고 제단에 조심스레 다가왔다. 오늘의 신부인 저 여인에게 입힐 결혼 드레스인 모양이었다.
여자를 놔둔 채, 그 대신관이 갑자기 두 팔을 벌리며 오르마즈에게서 뒤로 확 돌아섰다. 오르마즈가 기다리던 그 순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대신관 그리고 그가 쳐다보고 있는 반대편 벽을 향해 확 쏠렸다.
‘이때다!’
“전능하신 힘의 제왕, 다하카르께서 이 여인을 선택하셨나이다! 이 여인의 운명을 찬미해주시옵소서!”
오르마즈의 귀에는 이제 대신관의 외침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기회를 본능적으로 포착한 오르마즈는 석궁의 방아쇠를 그대로 당겼다. 그리고 같은 순간, ‘대신관’의 마지막 한 마디가 울렸다.
“위대한 대신관 바즈라마구스이시여! 이제 이 여인을 축복하소서!”
“엉?”
자신이 날린 볼트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짧은 충격을 느낀 순간, 오르마즈의 머릿속이 순간 아찔했다. 조금 전보다 어둠에 익숙해지며 시야가 밝아진 그는 그제야 진실을 깨달았다. 그가 있는 건너편 큰 테라스의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여러 개의 화려한 금빛 로브들, 그리고 그들 중앙에 쳐져있는 반투명한 베일 속 누군가, 위풍당당한 실루엣의 누군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모습을.
‘맙소사.’
지금까지 오르마즈가 대신관이라 믿고 있던 이 사람이 그 베일을 향해 몸을 낮추며 두 팔을 가슴에 X자로 교차시켰다. 그렇다면 그는 대신관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르마즈가 쏜 볼트는 그의 뒷목에 명중하며 숨골을 정확히 꿰뚫었다.
‘시, 실패다.......’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난 오르마즈는 방금 전 들어온 지하터널로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잘못 짚은 표적이 피를 뿜으며 제단 옆에 쓰러지는 모습도, 그 광경에 놀란 신관들, 헤네티들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지하 홀도 이젠 돌아볼 필요조차 없었다. 임무 실패였다.
“저놈 잡아!”
등 뒤에서 경비병 혹은 헤네티들이 외치는 고함소리가 째지듯 지하를 울렸다. 오르마즈는 석궁을 내던지고 결사적으로 달렸지만 물이 고인 어두운 굴 바닥을 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르마즈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하며 악을 쓰고 발을 내디뎠다.
“실패다! 와헷! 이트닌! 너흰 절벽으로 먼저 퇴각해! 베흔! 터널 반대편 입구에서 날 기다려!”
“알았음.”
여전히 침착한 부팀장 베흔의 든든한 목소리에 오르마즈가 잠시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득 뒤를 돌아본 오르마즈는 그새 뒤를 쫓고 있는 5명의 헤네티 경호원들을 발견하고는 순간 경악했다. 나름대로 발이 빠르다고 자부하고 있던 그였지만 적들은 그의 위치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눈 깜짝할 새 그의 뒤에 붙어 있었다. 헤네티들을 피해 여러 번 도주해본 그였지만 이렇게까지 발 빠른 대응은 처음이었다.
‘매복?’
오르마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잡기 위한 교단의 치밀한 덫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도망칠 곳이 거의 없는 이 지하공간이야말로 괘씸한 암살자를 앞뒤로 틀어막고 토끼몰이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라는 것도.
오르마즈는 어금니에 물고 있던 독약 캡슐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이곳에 오기 직전, 암살 명령을 내리던 지도자 파냐드가 직접 건네준 것이었고, 두 사람 모두 이것의 용도를 잘 알고 있었다.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갈기갈기 찢겨죽을 바에는 이편이 그나마 고통 없는 선택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오르마즈는 자신의 목에서 흔들리고 있는 로켓과, 그곳에 박힌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 아지드 레즐린을 떠올렸다. 24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 이 순간 왜 갑자기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멀리, 열려있는 터널의 입구와 그 앞에서 기다리는 누군가의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흐흡!”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부팀장 베흔이 아닌, 헤네티 경비병들이었다. 가망이 전혀 없음을 깨달은 오르마즈는 할룩스를 켜고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내 할룩스코드를 해제해라.”
순간, 살을 찢는 고통이 그의 등을 엄습했다. 무언가 그의 등을 파고들어 옆구리 살을 찢고 튀어나와 있었다. 가파른 내리막 앞에서 다리가 엉켜버린 오르마즈는 공중을 붕 날아올라 돌바닥에 거칠게 팽개쳐졌다. 그는 바닥에 떨어지며 어금니 사이의 독약 캡슐을 꽉 깨물었다. 아드득 부서지는 감촉과 함께 무언가 화끈한 느낌이 그의 목구멍에 불을 붙이는 것 같았다.
“병신새끼! 다치지 않게 사로잡으라고 했잖아!”
누군가의 욕지거리가 뒤에서 울렸지만 오르마즈의 귀에는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입을 막아! 입! 빨리!”
독을 삼킨 오르마즈는 옆구리로 튀어나온 볼트 끝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부르르 떨었다. 독을 삼키며 즉시 정신을 잃어야 했지만 웬일인지 의식은 여전했다. 입 안에 남은 독약까지 모조리 삼키려던 그의 입을 누군가 덥석 붙들더니 강제로 벌리고는 칼자루를 푹 쑤셔넣었다.
“우, 우우욱!”
아직 의식이 남은 오르마즈가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상처 입은 맹수처럼 거칠게 날뛰었지만 그의 사지를 하나씩 붙든 거친 헤네티 경호원들은 오르마즈의 온몸을 꼼짝도 하지 못하게 힘껏 내리눌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조금씩 희미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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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연말선물로 이번 연재는 좀 길게 올립니다......도 있지만 실은 크리스마스 이후 개인 업무 문제로 다음 연재가 좀 늦어질 것 같아서...^^;;;>
크리스마스에 연말인데 코멘트나 추천 안 쌔려주시면 작가 의욕저하입니다아~~~
(협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