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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43화 (640/1,132)

< -- 643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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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군의 기습부대가 펜지켄트를 사실상 거의 장악했다는 보고를 전해 들었지만 베흔은 별로 놀라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는 애당초 펜지켄트를 지켜내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고, 설사 그랬다고 해서 딱히 기뻐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런 그가 뒤늦게 격분한 건 펜지켄트를 빼앗겼다는 것이 아니고 시내에 있는 보루를 빼앗겼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탈환은 글렀군.”

베흔은 지도에서 시선을 돌리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한쪽에서 4군단장 힐러가 무안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지만 베흔은 이번에는 그를 쥐 잡듯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사실 그동안 자신이 그를 괜스레 들볶아 온 것을 아는 베흔이 의도적으로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편이 더 정확했다.

“알로 언덕에 이어서 그 북쪽의 제2보루가 조금 전 함락되었습니다.”

“별 수 없지.”

베흔이 씩씩거리던 숨을 가다듬었다. 북쪽 판산에서 시작되어 남쪽의 시내로 뻗은 고개 줄기를 따라 3개의 보루가 차례로 위치해 있었고, 알로 언덕은 그 중 제일 남쪽 끝부분, 시내 중심에 가까운 곳이었다. 알로 언덕을 빼앗겼으니 적들은 언덕 줄기를 따라 북진하며 나머지 보루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테고,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1개도 언제 적의 손에 넘어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제2보루는 모두 불태워 버리고 퇴각하라고 명했습니다. 덕분에 퇴각한 병력과 합쳐 마지막 제3보루에 5백의 병력을 둘 수 있었습니다. 제3보루는 판산에 인접해서 지세도 험하고 병력도 충분하니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힐러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베흔은 내심 ‘제법 똑똑한 놈이군.’하고 생각했지만 기분 탓인지 그다지 칭찬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정대로 오후에 남부연합군이 도착할 예정이다. 펜지켄트까지는 하루쯤 걸릴 테니 내일 10군단과 임무교대하고 너희 부대는 물러나라.”

“……알겠습니다.”

힐러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예정되었던 이동이었지만 그에게는 더 씁쓸했다.

무어라 더 말하려던 베흔은 옆에서 어딘가와 통화중인 보안국장 쿠베를 슬쩍 흘겨보았다.

“뭐냐?”

중요한 회의 중에 딴청을 피우는 그에게 베흔이 짜증을 냈지만 쿠베의 표정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쿠베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베흔의 귀에 입을 가져갔다.

“지난밤에 붙잡은 군의관놈 말입니다.”

“그놈이 왜?”

“카렐 놈의 주치의 수행의사라고 합니다.”

순간 베흔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펜지켄트의 지도를 힐끔 쳐다보았던 그는 쿠베와 함께 재빨리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게 무슨 뜻이냐?”

“카렐 놈이 펜지켄트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확실합니다. 그놈의 주치의가 배에 함께 타고 있었다고 진술했다는 보고입니다.”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정보지?”

신중한 베흔은 이번에도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만큼이나 신중한 성격의 쿠베가 이렇게까지 자신있게 말할 정도라면 굳이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잠시 대답이 없던 베흔이 갑자기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졌다.

“잡힌 의사 놈이 혹시 교단 출신이냐?”

“예?”

베흔의 엉뚱한 물음에 당황한 쿠베가 급히 자료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뇨, 콜로니 아카데미 출신의 보통 의사입니다. 다만…….”

“다만?”

“고문하던 도중에 놈이 무언가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정확치는 않지만 바람 어 같다는 메모가 있습니다.”

쿠베는 베흔의 표정에 갑자기 묘한 어둠이 드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베흔은 그에게 속내를 내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베흔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러면 진짜 정확한 정보일지도 모르겠군.”

테이블로 돌아온 베흔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연결되어 있는 힐러에게 갑자기 뚱딴지같은 명령을 내렸다.

“너희 군단의 이동을 취소한다.”

“예?”

“5만의 남부연합군도 예정대로 그곳에 투입한다. 남부연합군이 펜지켄트를 완전히 포위하고 퇴로를 차단하겠다. 2개 근위대 군단 모두를 총동원해 도시에 들어온 적들을 몰살시키겠다. 내 직접 가서 토벌군을 지휘해야겠다.”

갑자기 적극대응을 하고 나온 베흔의 모습에 힐러가 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베흔이 직접 그곳까지 온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님에 틀림없었다.

“힐러 군단장, 너의 능력을 보아 지금까지보다 훨씬 큰 중임을 맡겨도 충분할 것 같다. 시가지에서도 현명한 선택을 했다.”

베흔의 느닷없는 칭찬에 힐러는 기쁘기보다는 도리어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칭찬이야 어쨌든, 베흔이 직접 온다는 건 그가 더 이상 펜지켄트의 지역사령관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베흔이 굳이 4군단을 이동시킬 필요성이 없어진 것도 따져보면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 힐러의 뇌리를 스쳤다.

“오늘 중으로 도착할 테니 최대한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내가 그곳에 간다는 건 비밀로 하고.”

“알겠습니다.”

베흔은 고개를 꾸벅 숙이는 힐러 군단장과 일단 통신을 끊고 펜지켄트에 갈 준비를 서둘렀다. 카렐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도 다행이었지만 상대가 ‘들통난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도 중요했다.

“흐음.”

서랍을 뒤지던 베흔은 지난번 아프라스 야투 박사에게서 건네받은 독약 병을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약간의 기포가 맺혀 있는 황금빛의 독액은 언뜻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병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베흔은 자신이 지난번 맡긴 ‘유전자 검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복제방지처리가 된 X의 유전자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당연했지만 이제 슬슬 결과가 나옴직한 때였다. 사실 제국에서 복제방지처리가 된 X의 유전자를 풀어 세세하게 검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젠 적진에 있는 자그룰라 모렌 박사와 야투 박사를 비롯해 모두 합쳐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래, 알고 나서 홀가분하게 가는 게 낫지.”

자신과 주페 사이에 절대로 혈연이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던,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그로서는 어딘지 꺼림칙한 것을 그냥 놔둔 채로 전장에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자신의 선택이 카렐과는 정반대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베흔의 호출을 받은 아프라스 야투 박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깨끗하게 정리된 보고서를 들고 단 5분만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의 지나치게 완벽한 준비가 베흔에게는 도리어 어딘지 못마땅해 보였다.

“지난번 준 그 검사는…….”

“안 그래도 막 보고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마치 각본처럼 완벽한 타이밍에 베흔이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이군. 어디로 좀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줘 봐.”

“설명 필요 없겠습니까?”

“웬만한 건 볼 줄 알아. 모르면 물어보지.”

베흔이 퉁명스레 대꾸하며 그가 내민 자료를 받아들었다. 세세한 내용은 없는 결과분석 뿐이었지만 어차피 그 정도로 충분했다.

자료를 끝까지 죽 읽어 내려간 베흔이 살짝 눈을 흘겼다.

“확실하냐?”

“보시다시피, 넘겨주신 혈액은 X의 것이고, 부패된 조직은 두말할 나위 없는 100% 시민의 것이었습니다. 양쪽 사이에 어떻게 혈연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야투 박사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양쪽 사이에는 같은 인간 종이라는 정도의 유사성이 전부입니다.”

베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그가 원했던 결과였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알 수 없는 아쉬움 또는 혹시나 하는 미련이 남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잘됐군.”

베흔이 무심결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짧은 아쉬움이야 어쨌든 이것이 그의 본심이었다. 카렐의 지난번 통지는 결국 그를 흔들기 위한 선무공작임이 확실히 밝혀진 셈이었다.

“내가 준 샘플들은?”

베흔이 그 큰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의 느닷없는 물음에 야투 박사가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특별한 생체조직이라면 모를까 모발이나 혈흔 같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샘플들은 실험실에서 보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직 실험실에 있습니다.”

“결과를 의뢰했으면 샘플은 돌려줘야 할 것 아냐.”

베흔이 버럭 화를 냈다. 야투 박사가 표정을 가다듬으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보고서를 챙기느라 미처 그것까지는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따 출발할 때까지 가져와.”

베흔이 보고서를 한쪽에 치우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리고, 그대에게 특별히 부탁할 게 하나 또 있는데.”

베흔이 표정을 돌변하며 그에게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말씀만 하십시오.”

“내 지금 펜지켄트로 갈 예정이야. 어쩌면 그대가 준 독을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베흔이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바로 알아들은 야투 박사가 잔뜩 굳었던 지금까지의 표정에 살짝 웃음을 덧입혔다. 사실이 밝혀진 이상, 베흔도 이 음흉한 자가 건네준 독을 사용하는 데 괜히 거리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난번에 준 독을 조금 더 생산할 수 있나? 내 가는 길에 함께 가져갈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느 정도를 원하십니까?”

“가능한 많이.”

“가진 원료로 최대한 만들어 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이번 원정에 그대도 함께 갔으면 좋겠어. 놈을 잡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군. 여기 사오시안트에 중요한 일이 없으면.”

베흔이 품 안의 독병을 꺼내며 야투 박사를 힐끔 올려보았다.

전장에 함께 가자는 말에 펄쩍 뛸 줄로 알았던 그는 생각 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최대한 많은 양을 만들어서 근위대장님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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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개인적으로 액땜(?) 건수가 있었습니다. 님들은 액땜같은 거 없이 깔끔하게 즐거운 새해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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