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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44화 (641/1,132)

< -- 644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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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터널에서 헤네티들에 붙들려 정신을 잃은 오르마즈가 깬 곳은 차가운 지하 감방도, 소름끼치는 고문대 위도 아니었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오르마즈는 이것이 천상의 빛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짙푸른 바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새파란 하늘이 그의 희미한 시야에 천천히 드러났다. 오르마즈는 지금 자신이 살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어서 저승을 보고 있는 것인지 한참동안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방 안을 감도는 따스한 온기와 부드러운 일랑 향취가 그의 아득한 감각에도 조금씩 스며들어왔다.

벗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보송보송하고 매끄러운 침대 시트의 감촉은 그에게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 시력을 제대로 되찾은 후에야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곳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누운 건 찬 바닥이 아닌,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화려하고 큰 침대였고, 몸을 감싼 건 용 문장이 수놓인 비단 시트와 이불이었다. 머리맡에서 타고 있는 고급스런 천연 향료가 희미한 연기와 함께 공중으로 퍼지는 모습이 보였다.

짧게나마 그는 이곳이 정말로 저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으음?”

어딘가에서 인기척을 느낀 오르마즈는 본능처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찢어질 듯한 복부의 통증으로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혀에도 무언가가 끼워져 있는지 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승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뻣뻣해진 고개를 기를 쓰고 치켜든 그는 침대 옆 창 밖 풍경을 어렵게 내다보았다. 투명한 창 밖으로 먼 수평선이 아슬아슬하게 내다보였지만 누운 자세로는 그 이상 보이지 않았다.

“끄윽,”

몸을 더 일으키려 했던 오르마즈는 지독한 아픔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애써 고개를 들어 확인한 그의 몸에는 환자들이 입는 소매 없는 흰 원피스가 걸쳐져 있었다. 팔다리는 침대에 묶여 있었지만 차가운 수갑이나 족쇄가 아닌, 매끄러운 비단 천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움직일 수 있도록 길게 매여 있었다.

주사바늘에 연결된 몇 개나 되는 약병들을 쳐다보며 그는 조금씩 현실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하 터널에서 쓰러지고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가 당초 원했던’ 저승은 아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조금 전 인기척을 느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 반대편, 방 안쪽에 긴 의자가 놓여있었고 데데한 모습의 한 남자가 얄팍한 군용 담요를 몸에 돌돌 만 채 그곳에 불편한 자세로 웅크려 자고 있었다.

“맙소사…….”

오르마즈의 반쯤 굳은 혀끝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앞모습을 굳이 보지 않아도, 그는 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뒤척거리는 모습에 오르마즈가 얼른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리고 눈을 감으며 자는 척했다. 하지만 떨리는 입술과 메어오는 목구멍 때문에 도무지 제대로 연기가 되지를 않았다. 잠에서 깬 남자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오르마즈는 그쪽을 돌아보고픈 마음에 가슴이 마구 울렁였지만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깼어요?”

남자가 잔뜩 낮춘 목소리로 물었지만 오르마즈는 여전히 자는 척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놔둔 채 오르마즈가 어설픈 연기를 하고 있는 침대에 허겁지겁 다가왔다.

“깬 거 맞죠?”

웬 손이 이불 속으로 불쑥 들어와 오르마즈의 차가운 손등을 짚었다. 나무껍질처럼 갈라지고 거친 오르마즈의 손에 비해 그의 손은 놀랄 만큼 부드럽고 따뜻했다. 오르마즈는 그의 숨결이 이마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움직이지 말아요.”

오르마즈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여전히 자는 척하며 짧게 속삭였다. 그의 이마에 막 입을 맞추려던 그 남자가 순간 움찔했다.

“누군가 감시하고 있으니.”

오르마즈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짐짓 냉담하게 말했다. 오랜 기간 너무도 그리워했던 남자의 온기였지만 지금은 서푼짜리 감성에 굴복할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오르마즈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한때 그의 첫사랑이었던 이 남자, 나즈라 라카드 박사를 위해서도.

“미안합니다. 내 생각이 짧았군요.”

나즈라가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침대에서 천천히 물러났다. 오르마즈는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6척이 넘는 큰 키에 다부지고 단단한 체격, 짧고 단정한 갈색 머리칼, 짙은 눈썹과 움푹 팬 눈, 도드라진 광대뼈는 첫 만남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강인함이 물씬 풍기는 이 크고 잘생긴 남자는 옛날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즈라는 반대편의 출입문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문 틈새로 안을 엿보던 누군가가 찰칵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재빨리 사라졌다. ‘감시하고 있으니 허튼수작 말라’는 무언의 경고인 모양이었다.

오르마즈에게 다시 다가온 나즈라가 자해를 막기 위해 혀에 채워놓았던 마우스피스를 빼 주며 그제야 조금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됐어요. 감시 카메라는 없으니 안심해요. 그런 거 있는 곳에는 못 가겠다고 했으니. 위험한 포로라 내 안전을 보장 못 한다고 주의를 줬지만 차마…….”

나즈라가 말꼬리를 흐렸다.

“죽어도 상관없으니 제가 오겠다고 떼를 썼죠.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셨지만…….”

“그분?”

오르마즈의 눈가에 순간 살기가 감돌았다. 나즈라가 헛기침을 하며 방문을 잠갔다.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 안심해요. 아무도 안 볼 테니.”

“‘그분’이 누굽니까?”

오르마즈는 당장이라도 이 남자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픈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최대한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어쨌든 그는 사로잡힌 암살수 신분이고, 이 남자와의 지난 사적인 감정은 어떡해서든 묻어야만 했다.

나즈라는 오르마즈의 말을 짐짓 못 들은 척 다가와 수액 병을 살피는 시늉을 했다.

“다행히 캡슐이 제대로 터지지 않아서 독액이 얼마 나오지 않았어요. 거기까진 좋았는데 넘어지면서 옆구리를 관통한 볼트가 밀려서 내장과 혈관이 파열됐거든요. 내출혈과 쇼크 때문에 의식을 잃은 거였어요. 부설 병원 중환자실에서 4일이나 사경을 헤맸죠. 다행히 상태가 안정되어서 어제 여기로 옮겼어요.”

나즈라는 조금 전 잠근 문을 다시 돌아보았다. 문 상태를 확인한 그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오르마즈의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가져갔다.

“괜찮아요. 날 믿어요.”

내내 쌀쌀맞게 굴었던 오르마즈도 차마 이번만은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나즈라는 여전히 힘겨운 숨을 몰아쉬는 오르마즈의 가슴 위에 살며시 손을 얹으며 그의 이마에 박힌 다하카르 조각 위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머리 뒤를 받쳐준 그의 손길이, 가슴을 타고 스며드는 온기가 놀랄 만큼 따뜻했다.

“당신이 돌아오기만 기다렸어요.”

나즈라의 속삭임을 타고 따뜻한 입김이 오르마즈의 귓가를 덥혔다. 오르마즈는 누군가의 온기를 느껴 본 것이 언제였는지 이젠 기억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남극에 돌아오지 않아서 코윈까지 찾아갔어요. 그런데 당신 아버지가 반군에 강제로 입대시켰다는 말에……”

나즈라의 눈가에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제 기도에 다하카르께서 이제야 은총을 내리신 모양입니다.”

“그 기다림도 이제 끝이군요.”

괜한 거부감에 오르마즈가 그의 손을 쳐내고 냉담하게 고개를 돌렸다.

“기다려야 할 존재가 곧 사라질 테니.”

나즈라는 차마 대답을 못 한 채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 벌어질 일을 빤히 아는 오르마즈에게는 이 남자를 쌀쌀맞게 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말해 봐요, 날 왜 안 죽이고 이런 데 놔뒀는지, ‘그분’은 누구죠? 그리고 여긴 어디죠?”

문득 시선을 돌린 오르마즈는 그의 옷깃에서 아케메니안 교구를 상징하는 전갈 문양을 볼 수 있었다.

나즈라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당신이 죽이러 온 ‘그분’ 말입니다. 전 그분의 주치의거든요.”

“젠장.”

어느새 너무도 커진 이 남자와의 거리감에 눈앞이 캄캄해진 오르마즈가 이를 빠득 갈았다.

“전 그분의 의학교 동기이고 어린 시절부터 형제처럼 가까운 친구 사이였어요. 제가 이렇게 직접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분과의 친분으로 특별히 허락받은 거니까. 그러니 괜한 의심 가지지 말아요.”

나즈라가 장황하게 이번 일을 설명했지만 오르마즈는 듣고 있지도 않았다. 몸이 어느 정도 풀린 오르마즈는 기를 쓰고 몸을 조금 더 일으켜서는 창밖을 다시 내다보았다. 순간, 그는 굳이 나즈라의 대답이 없이도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창 너머로 아름다운 백사장, 그리고 그 한쪽으로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처형장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붙들렸던 ‘아프라시아 관’에 여전히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각도로 보아 적어도 6,7층 이상의 높은 곳이 틀림없었다.

“내 갈 곳이 말 그대로 빤히 보이는군…….”

처형장을 쳐다보던 오르마즈가 눈을 감았다. 바로 얼마 전 또 처형이 있었는지, 그곳의 시체 태우는 소각로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서 죽으면 그나마 다행인가. 제기랄!”

오르마즈는 홧김에 주사바늘을 뽑아 동댕이치려 했지만 그의 손은 비단끈에 묶여 제한된 범위밖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저 소각로 안에서 타고 있는 건 누구죠? 내 부하들인가요?”

“아뇨.”

슬픔에 잠긴 오르마즈에게 나즈라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이번 일로 헤네티 한 명이 종교재판에서 사형에 처해졌다고 하더군요. 재판이 끝나자마자 바로 집행되었어요. 포로는 아니니 안심해요. 당신 부하들은 도망간 것 같아요. 그러니…….”

나즈라가 오르마즈의 축축해진 뺨에 손을 얹었다. 오르마즈는 그의 이 대답이 실의에 잠긴 자신을 달래주려는 선의의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훗, 귀한 헤네티를 재판이 끝나자마자 바로 죽여 버리다니, 당신의 ‘그분’이 나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군요.”

오르마즈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즈라가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날 언제 고문실로 넘길 거죠? 대신관 최측근이 되었으니 이제 웬만한 건 다 알겠군요.”

오르마즈가 눈물을 삼키며 물었다.

“시한을 줬을 텐데요, 언제까지 심문 가능하게 고쳐 놓으라고.”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런 말은 없다……천하의 대신관께서 이 조무래기 암살수의 처분에 꽤 관심이 많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이 호사스런 방도 그렇고.”

“바로 여기가 그분의 처소이니까요.”

나즈라의 다정한 속삭임에 순간 오르마즈는 머리를 무언가로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퉁퉁 부은 눈동자를 다시 나즈라를 향해 움직였다. 나즈라가 무슨 비밀스런 것을 알려주듯 작은 목소리로 다시 속삭였다.

“안 계신 날이 많지만 그분께서 남극성당에 오실 때 머무시는 숙소입니다. 그분께 특별히 허락을 받아서 당신을 이곳에 데려왔어요.”

순간 오르마즈는 이 와중에도 ‘이걸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면 성공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는 방 안을 새삼스레 다시 둘러보았다. 따뜻한 느낌의 초록빛 실크 벽지와 아름다운 호두나무 마루, 수제 카펫이 깔린 방은 구조만으로는 꽤나 고급스런 인테리어의 일부였다. 가구나 장식품들은 일부러 모두 치워버린 듯 보였지만 그것들만 제대로 갖춰 있었다면 나즈라의 말대로, 대신관의 처소 일부라고 해도 전혀 손색없을 곳이었다.

“당신의 ‘그분’이 내게만 이렇게 너그러운 이유가 뭐죠? 난…….”

“전 주치의일 뿐이지 그런 세세한 건 몰라요. 하지만 걱정은 말아요. 내가 어떡해서든 구해 줄 테니.”

나즈라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당황한 눈빛에서 오르마즈는 그가 무언가 그 이상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그를 추궁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큰 착각을 했군요. 잠깐이나마 날 포로교환에 써먹으려는 줄 알았는데.”

오르마즈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한 건 당신의 ‘그분’이 포로교환으로든 뭐로든 날 민병대에 돌려보낼 생각은 없다는 것이겠군요. 그럴 생각이라면 전향도 하지 않은 내게 이런 정보를 노출시킬 리가 없으니. 그렇죠? 그런데도 절 살릴 수 있다고요?”

나즈라가 또다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오르마즈는 모든 것을 각오한 듯 반쯤 넋이 빠진 모습으로 창밖의 처형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즈라는 그런 오르마즈에게 다시금 다가와 품에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걱정 말아요, 다 잘 풀릴 테니. 나만 믿어요.”

오르마즈는 그의 살내음이 풍겨오는 옷깃 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이를 꽉 악물었다. 헝클어진 오르마즈의 갈색 머리칼을 말없이 쓰다듬어주던 나즈라가 이번엔 그의 입술에 살며시 다가왔다.

“날 아직 사랑하나요?”

막 입을 맞추려던 나즈라는 오르마즈의 갑작스런 물음에 잠시 자리에서 굳었다. 그는 이 옛 연인이 새삼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를 충분히 눈치 챌 만큼 똑똑했다. 오르마즈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최대한 애처롭게 말했다.

“그렇다면 날…….”

“그만.”

오르마즈를 그대로 눕혀놓은 그는 성난 표정으로 머리맡의 주사기와 이런저런 약품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르마즈가 그를 붙들려 했지만 묶인 손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제발, 빈 주사 한 방이면 돼요. 아니면 아무 거라도, 당신한테 책임이 안 가게 자연스럽게 죽는 거라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것도 고맙게 감내할 테니.”

“저녁때 다시 올 테니 푹 쉬고 있어요. 너무 걱정 말고요.”

진료가방을 모두 챙긴 나즈라는 그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는 조금 전 빼낸 마우스피스를 다시 혀에 끼워 넣었다.

“제발, 날 좀 죽여줘요.”

무뎌진 발음으로 애원하는 오르마즈를 말없이 지켜보던 나즈라는 아무 대답도 없이 휙 돌아서서는 문 밖으로 사라져갔다. 닫힌 문 안쪽, 환한 햇살이 드는 따스한 방 안에는 이제 오르마즈 혼자만 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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