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48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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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단장 힐러와 함께 펜지켄트 시내로 진군하던 베흔의 눈에 어둠 속에 멀리서도 유달리 반짝이는 펜지켄트 박물관의 은빛 유리벽이 비치기 시작했다. 13선지자의 묘가 보인다는 건 이제 시가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지금 그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건 근위대 4군단 보병 3천 5백과 남부기병 1천이었다. 선봉대로 나아간 보병 5백은 이미 13선지자의 묘 북쪽 야산에 진지공사를 시작했고, 그가 이끄는 부대는 이대로 계속 전진해 시가전을 벌일 참이었다.
“기분이 확 트이는군.”
베흔은 오랜만에 타 보는 전차의 고삐를 직접 붙들고는 갑자기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다쳤던 몸이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지만 펜지켄트의 찬바람이 그의 굳었던 몸을 확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그는 어깨에 두른 망토를 펄럭거리며 큰 소리로 말을 독려해가며 바람 속을 질주해 지휘부 주변을 괜스레 한 바퀴 빙 돌았다.
“10군단은 어디쯤 가 있나?”
“1개 연대가 남서쪽에서 항구를 향해 전진중이고 나머지 2개 연대는 남쪽에서 도하를 준비 중입니다. 아직은 별다른 저항이 없습니다.”
“저놈들도 날벼락 맞은 기분이겠지.”
베흔이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었다. 카렐이 행여 자신의 핏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일단 떨쳐냈고, 이젠 자신의 존재가 들통났는지도 모르는 그 멍청한 사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 떨어뜨리는 일만 남아있었다.
“기왕 온 김에 저기 참배라도 하고 갈까나.”
베흔은 함께 있는 아프라스 야투 박사 들으라는 듯 지휘부 전체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군의관 계급장을 달고 무개(無蓋)차량에 올라 있던 야투 박사는 그의 뜬금없는 심술에 살짝 눈가를 찡그렸을 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최대한 빨리 시가지로 진입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베흔은 말끝마다 한 마디씩 붙이는 힐러 군단장을 돌아보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혹시 아나, 저기 묻힌 13명의 귀신들이 축복이라도 내려 줄지.”
베흔의 ‘공신답지 못한’ 표현에 몇몇 무장들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야투 박사의 굳은 시선은 이 와중에도 13선지자의 묘, 아니 정확히는 펜지켄트 박물관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베흔은 정말로 말에 속도를 붙여 박물관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돌진에 다른 지휘부도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붙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위대의 야전지휘관 모두가 가디언들이다보니 수십 대의 전차들이 얼어붙은 눈밭을 가르며 흰 눈보라와 함께 달려가는 모습도 나름 장관이었다.
“정지!”
‘13선지자의 묘’ 앞에 도착한 베흔이 손을 들어 지휘부를 정지시켰다. 함께 오는 근위대 보병들은 한참 처져 있었고, 남부기병과 몇 대의 전차들이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전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베흔은 가디언들, 말에서 내린 남부기병들을 대동하고 이미 여러 번 와 본 일 있는 이 성지의 출입문에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이, 오랜만이야.”
베흔은 잔뜩 굳은 표정의 경비대장에게 마치 친구처럼 손을 흔들었다. 그도 성전 출신인 만큼, 이곳을 지키는 웬만한 공신들과는 모두 친분이 있었다. 굳게 닫힌 출입문 앞에 선 경비대장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바싹 얼어붙어 있었지만 베흔은 그저 거듭된 전투상황에 신경이 곤두섰기 때문이려니 생각했다. 사실 지금같은 정황에서 싱글벙글하고 있는 편이 도리어 더 이상하겠지만.
“오랜만입니다. 여길 직접 지나가실 줄은 몰랐네요.”
경비대장이 당혹스러운 기색을 애써 감추며 베흔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는 상대를 꿰뚫어보는 듯 매서운 베흔의 눈길을 얼른 피하며 시내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동맹군 새끼들 잡으러 가시는 모양이죠? 듣자하니 시내 쪽으로 꽁지빠지게 내빼는 것 같던데.”
“불편한 건 이해하지만 빨리 가라고 그렇게까지 재촉할 건 없어.”
베흔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라고 손짓을 보냈다. 지레 놀란 경비대장이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이미 문 닫았는데요?”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베흔의 눈짓에 경비대장이 마지못해 문을 열었지만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친근한 태도에도 그가 계속 이상한 태도를 보이자 베흔의 눈길도 비로소 조금씩 의심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내게 뭐 할 말 있나?”
“예? 제게 그런 게 어딨겠습니까.”
경비대장이 갑자기 과장된 웃음을 지었다. 베흔의 걸음은 추모탑을 향했지만 그의 시선은 어딘지 의심스러워 보이는 이 경비대장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들른 건 ‘성전 멤버’로서의 유별난 의무감 때문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역시 전후세대인 카렐처럼 성전의 정신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지 오래였다. 그저 자신을 따르는 연합군 병사들에게 자신들이 ‘정의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한 그럴싸한 쇼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누가 다녀간지 얼마 되지 않았군? 이 한밤중에?”
베흔은 향로에 남아있는 재를 만지작거리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문을 닫는 저녁이면 보통 향을 꽂은 모래를 싹 치우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지금은 흰 재 찌꺼기 약간이 남아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이곳 야근자 중 누군가가 참배했으려니 했겠지만 경비대장의 전전긍긍하는 태도가 영 마음에 걸렸다. 베흔은 뒤따라온 4군단 지휘관들에게 뒤로 물러나라며 눈짓을 보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베흔이 입가에 씨익 웃음을 지었다.
“혹시 내게 할 말이…….”
덜덜 떨고 있는 경비대장을 노려보던 베흔은 박물관 문이 확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칼을 쥐며 옆으로 휙 돌아섰다.
“웬일이십니까, 대장? 이 외진 곳까지?”
큰 소리로 먼저 말을 건넨 건 그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옛 부하, 이트닌이었다. 그의 등장에 베흔은 경비대장을 잠시나마 머릿속에서 잊었다.
“눈이 많이 와서 언덕에 있는 무덤 중에 2개가 주저앉았어요.”
이트닌이 머쓱한 표정으로 삽에 묻은 눈을 신발바닥에 툭툭 털었다.
“몰래 땜빵하려고 했는데, 빌어먹을, 하필 오늘 딱 걸렸네. 웬만하면 눈감아 주시죠. 유학자 양반들 까다로워서 절차가 어떻고 의례가 어떻고 난리칠 게 뻔한데.”
삽을 든 이트닌이 다가오자 잔뜩 경계한 남부 병사들이 그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베흔이 병사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저지하며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됐다, 네놈들보다 제국에 한 일이 훨씬 많은 사람이니 막을 거 없다. 명색이 제5개국공신이시다.”
베흔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화로의 재를 만지작거리며 이트닌에게 장난스레 손가락을 저어보였다.
“그래서, 이 한밤중에 분향에 삽질로 땜빵하려고? 에이, 그렇게는 못 하지. 자네 지금부로 해임할 테니까 벌로 내일부터는 근위대 보안국에 출근해.”
“아, 그 살벌한 동네는 싫다니까요.”
이트닌이 반가움을 표시하며 옛 민병대 식으로 베흔에게 팔을 벌려 보였다. 베흔 역시 그런 그에게 팔을 벌려 다가가려 했다.
“동맹군이 와 있습니다.”
뒤통수에서 들려 온 귀엣말 한 마디에 베흔이 움찔했다. 물론 아무리 놀라운 말이라 해도 바로 티를 낼 정도로 서툰 베흔이 아니었다.
“저놈도 한패거리입니다.”
경비대장의 속삭임에도 베흔은 못 들은 척 입가에 웃음을 품은 채로 팔을 벌리고 이트닌에게 그대로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앞의 옛 특무대 부하가 모두 해석해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이트닌.”
베흔의 교묘한 대처 덕분에 아직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이트닌은 한 손에 삽을 든 채 베흔의 가슴으로 스스럼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베흔이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이라 생각한 경비대장이 베흔의 뒤로 급히 다가와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려 했다. 하지만 베흔의 재빠른 손은 이미 단검이 있는 허리춤으로 내려와 있었다.
“대장! 앞에서…….”
허리춤에서 단검을 막 뽑아들려던 베흔이 힐러의 고함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딘가에서 그의 눈앞을 향해 작은 손도끼 한 개가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고 있었다.
“으악!”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른 베흔은 뽑아든 칼을 미처 써 볼 새도 없이 기겁을 하며 자리에 엎드렸지만 경비대장은 그렇지 못했다. 베흔의 정수리를 비껴난 도끼는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려 다가오던 경비대장의 눈과 뺨을 대번에 두 토막을 내며 거의 자루까지 깊숙이 박혀버렸다.
“뭐, 뭐야!”
베흔이 칼을 뽑아드는 모습에 그제야 상황을 알아챈 이트닌은 자신의 뒤로 2명의 남부 병사들이 뛰어든 것을 깨달았다. 뒤가 막힌 것을 깨달았지만 특무대 암살팀 출신인 만큼 순순히 당해 줄 그가 아니었다.
“에잇!”
당황한 이트닌은 뒤로 휙 돌아서며 손에 들고 있던 삽을 힘껏 휘둘렀다. 거의 본능적으로 휘두른 일격이었지만 그의 뒤를 차단하려던 병사의 목덜미에 치명타를 가하기는 손색이 없었다. 막 칼을 뽑아들던 그 기병은 이트닌이 휘두른 삽날에 목이 절반 찍혀버린 채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이놈이!”
동료가 쓰러지는 모습에 당황한 다른 병사가 이트닌에게 칼을 내지르려 했지만 기합소리를 내며 몸으로 돌진해 온 이트닌에게 손목과 발꿈치를 채이며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젠장!”
동료의 바보짓으로 얼떨결에 쫓기는 신세가 된 이트닌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를 밀고한 경비대장은 이미 얼굴이 조각난 채 죽어 있었고 사방에서 남부 병사들과 가디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아직 문이 열려있는 박물관을 향해 허겁지겁 뛰어갔다.
“잡아! 못 들어가게 해!”
정신을 차린 베흔이 도망치는 이트닌의 뒤에 대고 힘껏 단검을 던졌다. 하지만 뒤에서 단검이 날아오리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이트닌은 정확한 타이밍에 방향을 휙 틀었다. 그는 귀 옆을 스치는 단검의 서늘한 바람을 느끼며 박물관의 열린 문을 향해 내달렸다.
“서! 서라니까!”
발빠른 가디언이 눈 깜짝할 새 그의 뒤에 따라붙어 그의 목도리를 덥석 움켜잡았지만 이트닌은 잽싸게 목도리를 풀어내고 박물관의 문 안으로 몸을 붕 날려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뭐, 뭐야.”
머플러를 쥔 가디언이 어어 하는 새 그는 문 바로 옆에 있는 비상잠금장치를 힘껏 후려쳤다. 순간 삐이 하는 날카로운 경고음과 함께 이 작은 박물관의 사방으로 둘러진 유리벽 위로 금속제 보호막이 덧씌워졌다.
“괜찮나? 다친 데 없고?”
옥상에서 내려온 카렐이 넘어져 있는 이트닌에게 급히 달려왔다. 아직 모든 것이 얼떨떨한 표정의 이트닌은 카렐의 큰 손이 얼굴을 짚을 때까지도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명도 꺼진 박물관 안쪽은 보호막이 덧씌워지면서 어느새 암흑천지가 되어 방향조차 잡기가 어려웠다.
“어쩌죠? 이제 어쩌죠?”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 생각한 이트닌은 차마 카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바깥에서는 이곳을 당장 포위하라는 근위대들의 거친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근위대들이 보호막을 부수고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상황을 안전하게 피하려던 것이 도리어 최악으로 꼬여버린 셈이었다.
“어쩔 수 없지.”
카렐이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이트닌의 뺨을 툭툭 두드려주며 자리에서 일으켜 주었다.
“놈들이 내 정체를 모르니 야만족 5명을 잡자고 여기 계속 붙들려 있지는 않을 거다. 저놈들도 시간이 없거든. 일단 시간이라도 버는 게 좋겠다. 이곳 수장고 구조를 아는 사람이 자네 말고 관장이 있댔지? 관장은 지금 어디에 있지?”
“서부 파예드 아카데미에 출장을 나가 계십니다.”
카렐은 할룩스를 빼들고 사령부에 ‘이곳에서 한동안 못 움직일 것 같다. 연락이 안 되어도 염려하지 마라. 파예드에 있는 박물관 관장을 억류해라.’는 내용으로 짧은 전문을 보냈다. 그리고는 에키트 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수장고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놈들이 53만분의 1의 확률을 뚫지 못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이트닌은 무기를 불끈 짊어지고 앞장서는 이 ‘황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지금 바깥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그의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그 사람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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