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49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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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미럴, 재수 없게 이런 데서 적군을 만나냐.”
베흔은 눈과 흙으로 뒤범벅이 된 무릎을 털어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의 앞에는 얼굴에 도끼가 박힌 경비대장이 흉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하지만 당장 문제는 이곳 경비대원들이었다. 적군을 보호해 주려 한 이 ‘공신’들을 응징해야 할지 모른 척 넘어가야 할지는 정치적으로도 예민한 문제였다.
“나도 공신이야. 그걸 잊었냐? 살아있는 사람 중에 가장 높은 2개국공신이란 말이다.”
말을 해 놓고 난 그는 ‘괜한 소리를 했나’ 싶었다. 생각해보니 유일한 제1개국공신이던 오르마즈를 죽인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어쨌든 베흔은 죽은 경비대장의 주변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는 이곳 경비병들을 일단 설득해 보기로 했다.
“반역도당들을 보호해 준 것까지는 넘어갈 테니까.”
베흔이 경비병들을 향해 최대한 너그러운 척을 했다.
“안에 있는 게 어디 소속 몇 명인지나 밝혀. 우리도 여기 오래 붙들려 있기는 싫어. 도끼를 보아하니 에키트 족 같긴 한데.”
베흔의 반 설득 반 협박에 서로 눈치를 보던 경비병들이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참배를 온 여자 군속 상급귀족 1명과 에키트 족 5명입니다.”
“고작 6명? 이런 제기랄.”
베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 합치면 5천이 넘는 근위대와 기병들의 발목을 붙든 건 우습게도 고작 보병 5명, 그리고 배신해버린 한물 간 공신이었다.
“1개 소대하고 기병 1개 분대만 남겨놓고 계속 가야겠다.”
베흔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참배탑에서 돌아섰다.
“괜히 이런 데 붙들려 시간만 끌 수는 없지. 난 이만 갈 테니까 남은 놈들은 저 빌어먹을 철창 빨리 때려 부수고 안에 들어가서 모조리 잡아와. 야만족들은 다 죽여도 상관없지만 상급귀족하고 이트닌 녀석은 꼭 사로잡아서 내 앞에 끌고 와라.”
그때, 그를 뒤따라 이 성지에 슬쩍 들어온 누군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상급귀족이 전선까지 넘어서 이곳까지 왔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반푼짜리 사명감에 불타는 유학자님들은 사방에 많아.”
베흔은 자신의 분야를 넘어 참견을 하는 이 군의관, 아프라스 야투 박사를 살짝 째려보았다. 야투 박사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유학자 자격으로 이곳에 참배를 왔다면 무명포 차림으로 왔겠지요. 저들은 ‘군속’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베흔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의심스런 노인을 살짝 쏘아보았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소인 같은 일개 의사가 무얼 알겠습니까. 그저 이곳은 저희 교단의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고, 5세대 이전 가디언의 유전자 샘플을 비롯해서 나름대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다는……혹시라도 다른 속셈으로 찾아왔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뭐라고?”
무심하게 밖으로 걸음을 옮기던 베흔은 ‘5세대 이전 가디언’이라는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야투 박사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평온한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혀지지 않았다. 이자의 말을 듣는 것이 어딘지 기분이 나빴지만 당장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야투 박사의 말에 바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기는 했다.
‘자그룰라 모렌 그년이 왔었나?’
베흔은 경비병 중 선임자를 붙들고 다시 물었다.
“그 여자 상급귀족이 누군지는 조사했냐? 혹시 자그룰라 모렌 박사……흑인이냐? 군의관이나 의사 같지는 않았고?”
“흑인은 아니었습니다. 보통 키에 미인형 얼굴이고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에 이목구비가 강한 것이 서부 사람 같기도 하고 북부 사람 같기도 하고……체격이나 차림새나 언행이 군인 같지는 않았습니다. 나긋나긋하고 얌전한 목소리였습니다.”
“도대체 누구라는 거야?”
베흔이 버럭 짜증을 냈다. 선임자가 말한 대로라면 말 그대로 가장 ‘특색 없는’ 외모였다.
“같이 온 에키트 족들의 차림새는 어땠습니까?”
야투 박사의 차분한 목소리에 선임자가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야만족들이라 덩치 엄청나게 크고……키가 근위대장님만한 거인이 둘이나 있었습니다. 무슨 추장이라는 사람은 여자 같고 좀 날씬해 보이던데 스코프하고 털모자 때문에 얼굴은 못 봤지만 눈이 빨개 보였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어깨가 떡 벌어져서 수염이…….”
“나하고 비슷한 키에 뭐라고? 눈이 빨개? 목소리는? 목소리는 들어 봤나?”
순간 눈이 번쩍 뜨인 베흔이 박물관을 휙 돌아보았다.
“목소리요? 에키트 족 사투리가 워낙 심해서……그다지 고운 목소리는 틀림없이 아니었고 걸걸한…….”
주절주절 대답하며 근위대원들을 둘러보던 선임자는 보란 듯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야투 박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그의 목 밑을 확인한 선임 경비병은 그제야 자신에게 처음 질문을 던진 이 ‘군의관’의 정체를 알아챘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 더러운 발짝을 들여놓아!”
선임자의 찢어지는 고함소리에 깜짝 놀란 40여 이곳 경비병들이 일제히 석궁을 치켜들었다. 그들의 적대적인 반응에 놀란 베흔이 급히 손을 저었지만 이미 때가 늦은 터였다. 야투 박사의 귀 밑으로 다하카르 교단의 고위 신관임을 뜻하는 검은 문장이 분명히 찍혀 있었다.
베흔은 그제야 ‘성지’인 이곳에 야투 박사를 들여놓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분위기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해져 있었다.
“빌어먹을! 그거 치우지 못해! 지금 이 까짓게 문제가 아니야!”
다급해진 베흔이 석궁 앞을 몸으로 가렸지만 눈앞의 이 경비병들에게는 ‘이까짓 것’이 그 무엇보다도 큰 문제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들어올 곳이 아니었는데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야투 박사는 담담하게 돌아섰지만 그의 표정에는 ‘할일 다 했다.’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의 생각대로, 지금 베흔의 관심사는 박물관 안에 들어간 ‘에키트 족들’의 정체에 온통 쏠려 있었다.
“똑바로 대답해라. 나만한 키에, 날씬한 체격에, 목소리 걸걸하고, 손은? 손은 크냐?”
베흔이 선임 경비병의 멱살을 붙들고 물었지만 감히 사교 성직자 따위를 이곳에 들였다는 데 부아가 난 그는 더 이상의 대답을 거부하며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나가 주시오! 여기는 우리의 성지…….”
“썅! 성지건 개뿔이건 이 새끼들 다 잡아넣고 저 철창 빨리 부수란 말이야!”
반쯤 이성을 잃은 베흔이 보안용 철창을 부수고 있는 근위대 병사들에게 고함을 버럭 질렀다.
“죽이지만 말고 다 묶어버려!”
명령을 받은 근위대 가디언과 남부기병들, 이곳 40여명의 경비병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지만 숫자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놈들! 개국공신들에게 뭐 하는 짓이냐!”
몇몇 경비병들이 악을 쓰며 저항했지만 이미 상황은 틀어져 있었다. 베흔의 명령을 받은 남부기병들과 가디언들은 석궁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경비병들, 아니 제국의 개국공신들에게 무자비하게 돌진해 자리에 때려눕혔다.
“잡아서 끌고 와!”
팔다리가 꺾이고 얼굴이 주저앉아 피투성이가 된 경비병들이 자신들이 지금까지 명예로서 지켜 온 유학자들의 눈 덮인 무덤 위에 피를 흘리며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몇 명의 근위대원들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지만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제국 제일의 성지 중 한 곳인 ‘13선지자의 묘’에서 이곳을 지키는 소수의 수비대와 황실근위대와의 짧은 충돌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끝났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정치적인 파장이 될는지는 이제 아무도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부쉈습니다!”
경비병들을 모두 제압한 순간, 철창을 부수던 엔지니어의 큰 고함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울렸다. 박물관 안에 막 들어서려던 베흔이 뒤따라오는 4군단장 힐러에게 일렀다.
“힐러, 난 여기에서 1개 중대 4백하고 가디언 1백을 데리고 놈들을 잡을 테니 넌 예정대로 나머지 4군단 주력군을 이끌고 전진해서 동맹군 놈들을 조여.”
어두운 박물관 안쪽을 힐끔 쳐다보았던 힐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흔은 이번에도 카렐을 직접 상대하는 일에서는 그를 철저하게 배제하려는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저 뒤쪽 언덕에서 진지공사 하고 있는 부대 놈들까지 불러오면 한 1천쯤 될 테니 그놈들을 모조리 동원해서 이 박물관 주위를 철통같이 포위해라.”
가디언들에게 따라오라 손짓한 베흔은 야투 박사가 챙겨준 독약 병을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허리춤에 챙겼다. 그리고는 엔지니어가 부순 문을 통해 을씨년스런 박물관 안에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5세대 가디언?”
격한 흥분에서 조금씩 빠져나온 베흔은 그제야 자신의 판단력이 제대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무언가가 모순이었다. 카렐이 5세대 가디언 유전자를 확인하러 이곳까지 위험천만한 행차를 감행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 텐데 자신이 왜 야투 박사의 말에 바로 카렐을 떠올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베흔, 이 멍청한 놈.”
베흔은 스스로를 욕하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렐과 자신이 아무런 혈연이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반사적인 판단은 그가 자신과의 연계를 찾고 있을 것이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결론을 내렸던 터였다.
“어쨌든 그놈이 있으면 된 거지, 뭘.”
베흔은 잡생각을 애써 떨쳐내며 칼을 쥔 손에 바싹 힘을 주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 제일 안쪽까지 들어간 가디언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리가 없다! 안으로 뛰어드는 걸 봤단 말이야!”
베흔이 신경질을 내며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박물관 자체가 그다지 크지 않다보니 둘러볼 곳도 많지 않았다. 가디언들이 전시장의 전시대 뒤, 탁자 밑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시선이 향할 곳은 딱 하나, 제일 안쪽에 있는 큰 철문이었다. 그 위에는 ‘지하 수장고-외부인 출입 엄금’ 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붙어 있었다.
잠시 후, 이곳에서 일하는 민간인 직원을 심문한 가디언이 바깥으로 급히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베흔에게 열쇠를 내밀었다.
“경비대장 놈이 갖고 있던 열쇠입니다. 3중문 중에서 앞의 2개는 이 열쇠만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마지막 문은 비밀번호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비밀번호는 누가 아는데?”
“경비대장, 하산 부장, 관장의 3사람이라고 하는데 관장은 출장 중이라 없다고 하니…….”
“뭐야? 그럼 지금 남은 건 이트닌 한 놈뿐이라는 거냐?”
베흔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럼 마지막 문을 때려 부숴야 한다는 거 아냐?”
“그것도 그것이지만 지하 수장고 자체가 거대한 미로 같아서 길을 아는 사람이 하산 부장과 관장뿐이라고 합니다. 깊이도 어마어마하고…….”
‘미로’라는 말에 그 지긋지긋했던 황궁 지하를 떠올린 베흔은 뒷골이 확 당기는 기분이었다.
“씨발. 단단히 걸렸네.”
베흔이 머리를 싸쥐며 돌아섰다. 가디언들이 열쇠로 조심조심 수장고 문을 열었지만 문 2개를 모두 열 때까지 역시나 그곳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두 번째 문을 지나 계단을 급히 달려 내려간 베흔의 앞에는 이제 3번째 금속제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문을 여는데 얼마나 걸리나?”
베흔이 철거장비를 가져온 엔지니어에게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 금고처럼 두꺼운 금속제 문을 두드려 본 엔지니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부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30분에서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습니다.”
“차라리 밖에서 땅을 파는 건?”
“아마 더 걸릴 겁니다.”
베흔이 엔지니어를 문 앞에 동댕이치며 거의 협박조로 말했다.
“무조건 빨리 열어. 빨리. 그러면 안에 있는 배신자 놈 대신 네놈 이름을 역사책에 올려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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