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50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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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G와 민병대 지도부가 위치한 판지셰르에는 남극에서 들어온 절망적인 소식이 이미 아랫사람들에게까지 모두 퍼져 있었다.
사실 최근 몇 년간 민병대는 교단의 강력한 압박에 눌려 변변한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꼽히던 민병대 제일의 영웅 오르마즈까지 잃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크게 술렁인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베흔 소령으로부터 그 충격적인 보고를 전해들은 TSG 지도자 파냐드 리쿠의 반응은 고작 얼굴을 살짝 찡그려 보인 것이 전부였다.
“확실히 말해라. 전사냐? 생포냐?”
파냐드가 가는 눈을 매섭게 치며 뜨며 베흔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길에 압도당한 베흔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표독한 인상, 자그만 키의 이 여인은 기원 원년, 남극성당에서 거열형을 당해 죽은 유학자 리 리쿠의 장손녀였다. 하지만 의협심에 넘친 그 할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학자나 혁명가라기보다 음험한 책략가라는 편이 더 어울릴 사람이었다.
그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적이건 죄 없는 민간인이건, 심지어 자신의 수족들도 가리지 않고 제거하는 잔혹한 여인이었고, 그렇다보니 그는 제니안의 유학자들과도 걸핏하면 충돌을 빚곤 했다. 어떤 유학자들은 ‘파냐드가 골방에서 몰래 죽인 목숨이 교단이 처형장에서 대놓고 죽인 것보다 더 많을 것’이라며 대놓고 비판을 퍼붓기도 했다.
이제 겨우 65세에 수명개조 후세대인 그였지만 항상 얼굴 펼 날이 없던 생활 때문인지 그동안의 힘겨운 삶이 얼굴 군데군데에 찌들어 언뜻 당대 40세 정도의 나이는 되어보였다.
“전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베흔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 무서운 지도자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근거는?”
파냐드가 밋밋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할룩스 코드를 해제하라 말씀하셨으니 아마도 적에게 잡히기 전에 자살캡슐을 터뜨리셨을 겁니다.”
파냐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워낙에 표정이 없는 사람이다보니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 그저 작전실패에 아쉬워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다른 뜻이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유가족은 없는 걸로 아는데?”
“미혼이고 약혼자, 자녀도 없습니다. 아버지인 제니안의 투르케스크 카파키 운영위원이 있고, 모친과 형제자매는 교단 수용소에 갇혀있다고 합니다.”
‘투르케스크’라는 말에 파냐드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구성원 전체가 ‘민병대의 위기’로까지 인식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도무지 맞지 않는 그의 이런 대응에 베흔의 눈가가 살짝 가늘어졌다.
“그 아비에게 유류품을 모아 전해주게, 중령에게 어떤 훈공을 내릴 건지는 최고회의에서 따로 결정하도록 하지. 수고했으니 돌아가 쉬도록.”
파냐드는 베흔이 가져온 서류를 비서에게 넘기며 기계적으로 말했다. 이 순간, 베흔은 지도자가 이 일에 대한 논의 자체를 꺼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문득 받았다.
어머니의 옆에서 참담한 얼굴로 서 있던 장남 에르네스토가 막 마무리되려던 이 일에 다시 불을 붙였다.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투르케스크 카파키 위원을 찾아가 직접 사정을 설명하고 위로하겠습니다.”
아들의 말에 파냐드는 다른 서류에 눈을 가져가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까지 없다. 애석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전시에 영관급 장교 하나가 죽은 게 대단한 일도 아니지. 형평성이 있는데 후계자인 네가 직접 조문까지 간다는 건 격이 맞지 않아. 내 아랫사람을 따로 보낼 테니 넌 이 일에 더 이상 신경쓰지 마라.”
“하지만 카파키 중령은…….”
“그만 하라니까.”
파냐드의 목소리가 갑자기 한 옥타브 높아지자 순간 집무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에르네스토 역시 입술을 깨물며 더 이상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에르네스토가 어머니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는 아니었지만 도덕관념이라고는 실종된 어머니에게 무조건 정면으로 대들 바보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냐드의 무자비함에서는 식솔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첫째남편 ‘입실론’까지도 죽였다는 소문은 민병대 내에서도 알 사람은 다 알 정도였고,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3명의 남매 중 장남 에르네스토를 제외한 동생 2명은 아버지와 함께 목숨을 잃어야 했다.
물론 ‘설마 친엄마가 자식들을 죽였을까’하는 세간의 동정론도 없지 않았지만 그의 평소 언행을 보아 자식들을 손수 죽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에르네스토는 기지를 발휘해 얼른 주제를 돌렸다.
“전사가 확인된 것이 아니니 만일을 대비해 교단에 포로교환을 제의하겠습니다. 사로잡은 모간 5명 정도와 교환하자고 하면…….”
“신경쓰지 말라니까.”
파냐드가 아들에게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베흔이 그 광경을 곁눈질로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이 여자는 누구도 상상 못했을 짓을 충분히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이었고, 이번 일의 저면에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0여년 전, 27살의 젊은 파냐드가 지도자에 오른 것도 기원 3년, 군사조직인 민병대와 유학자집단 제니안의 ‘전략적 제휴’ 때문이었다. 당시 통합을 추진했던 지도부는 순교자 리 리쿠를 상징할만한 얼굴마담이 필요했을 뿐 애당초 이 나이어린 아가씨를 정말 조직의 리더로 떠받들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당시 리 리쿠의 장남인 63세의 유학자 오렌 리쿠가 살아 있었고, 그들이 정말로 지도자감을 원했다면 충분한 경륜을 쌓은 온화한 성격의 그가 훨씬 더 적임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민병대가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첫 번째 S’ 입실론과 결혼을 해 그의 핏줄을 낳을 젊은 여자가 필요했고, 동시에 군사조직인 민병대에도, 유학자집단인 제니안에도 너무 치우치지 않은 인물이 필요했다. 유학자인 오렌은 그래서 배제되었고, 결국 낙점된 것이 그의 딸 파냐드였다.
“베흔 소령.”
파냐드의 뜬금없는 부름에 베흔이 지레 놀라 움찔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팀장이 전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팀원을 모두 수습해 무사히 돌아온 그 공이 가상하구나. 내 널 중령으로 승진시키고 새 1팀장으로 삼겠다. 무라드 준장에게 말해서 X출신 부팀장 한 명을 보강해 주도록 하지.”
“망극하옵니다.”
베흔이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한 발 물러났다. 지도자의 의도가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그로서는 이제 이러쿵저러쿵 따져들 이유가 없어진 셈이었다.
어쨌든 그는 팀장 오르마즈의 죽음 덕에 만년 2인자의 자리에서 벗어났고 X-5세대에서 첫 번째로 중령을 달았고, 파냐드는 베흔의 입막음을 제대로 한 것이었다.
“무슨 꿍꿍이지…….”
보고를 마친 베흔은 지도부 회의실에서 물러나오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다른 민병대 사람들처럼, 베흔 역시 파냐드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하여간, 순발력 하나는 대단한 년이야.”
판지셰르의 험한 바위언덕을 걸어 내려가던 베흔은 새로 받은 중령 계급장, 그리고 팀장을 뜻하는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게 지 발목을 잡고 있다는 건 알까.”
베흔이 평가하는 파냐드는 지도력보다는 공포심에 기대 사람들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사실 민병대 사람들 중 파냐드를 지도자로서 존경하거나 개인적인 충성을 바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어느 상황에서도 탁월한 임기응변과 정치력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가 그의 한계였다.
파냐드는 도무지 원칙이라는 것이 없었고 그가 내세운 정책 방향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타고난 잔혹함과 임기응변을 통해 매번 ‘가장 쉬운 길’을 귀신같이 찾아냈지만 그것이 ‘옳은 길’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아니, 그는 애당초 장기적인 계획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그는 뜬구름잡는 ‘이상’ 혹은 ‘믿음’을 전혀 믿지 않았고 술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이용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협박하거나 조종했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는 교단과의 정정당당한 정책대결을 통해 민심을 끌어들이기보다 무자비한 테러와 암살에 기대어 세를 불리는 편을 택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한때 민병대를 동정하던 여론도 등을 돌려버렸고, 오르마즈를 비롯해 몇몇 젊은 장교들은 그런 지도자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기도 했다. 특히나 파냐드가 의욕적으로 키운 암살조직 ‘특무대’의 핵심멤버이고 민병대 최고의 전사로 꼽히던 오르마즈의 반발은 그에게 큰 정치적 타격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파냐드의 선택은 정책수정이 아니었다. 그가 선택한 건 부패한 지방 군벌과 손을 잡아 불만세력에 맞서게 하는, 책략가다운 방법이었다. 그들이 불만세력인 ‘온건파’의 적수가 되어준다면 부패했건 아니건, 훗날 그들이 내분을 조장하고 ‘제국’의 건국과정에서 지독한 불협화음을 일으켜 후손들의 목에 칼을 들이댈지 따위는 파냐드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는 항상 지금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특무대 병영으로 내려온 베흔은 사교클럽 쪽에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두 사람과 마주쳤다. 이번에 어렵게 함께 살아 돌아온 그의 팀원들, 와헷과 이트닌이었다.
“무슨 일 있냐?”
베흔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그 둘에게 건성 물었다. 하지만 그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혈질의 성질 급한 와헷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들으셨어요?”
“뭘?”
“포로들이 돌아왔다고요!”
“포로?”
와헷이 계곡 아래를 손으로 가리켰다. 몇 대의 화물차량들이 계곡 아래쪽 연병장에 세워져 있었고, 그 주변에 전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있었다. 화물차에서는 사뭇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 줄줄이 뛰어내려 모인 민병대 동료들과 반가움의 포옹을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돌아온 전사들은 대체로 여윈 모습들이었지만 혈색이나 표정이 아주 나빠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포로송환?”
그때까지도 새 계급장을 쥐고 있던 베흔의 표정에 순간 당혹감이 번졌다. 송환된 당사자들에게는 이만한 경사가 없겠지만 리더를 잃은 암살1팀, 특히 그를 대신해 새 리더가 된 베흔에게는 뒤통수를 치는 충격이었다.
“포로가 100명이나 돌아왔다고요! 3명은 빌어먹을 리쿠 가 놈들이고요!”
“조용히 해. 제발 말조심해.”
흥분한 나머지 막말을 쏟아내는 와헷을 이트닌이 급히 말리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다른 부대 전사들이 영내에서 ‘유일하게’ 분개하고 있는 1팀원들을 곱지 않은 눈길로 쏘아보고 있었다. 비극은 1팀에나 해당되는 것이지 동료들을 되찾은 다른 부대 전사들에게는 해당이 없었다. 아니, 설사 안다고 해도 그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담지 못하겠지만.
“지금 조용히 하게 생겼어? 어떻게 된 건지 빤히 보이잖아! 빌어먹을! 우리가 뭣 하러 남극까지 가서 목숨을 걸었냐고!”
베흔은 한 손에 계급장을 쥔 채 말없이 서 있었다. 흥분한 와헷이 쏟아내는 이런저런 욕지거리, 이트닌의 깊은 한숨이 귓가를 스쳤지만 그의 머리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부대장님,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부하를 팔아먹은 것이 뻔한데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하냐고요?”
“조용히 해.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베흔이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와헷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소령님까지 왜 그러십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야합이라고요. 생각해보세요, 우리도 언제 작전이랍시고 투입되었다가 팔려갈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포로송환도 좋고 다 좋지만 최소한의 원칙은 있는 것 아닙니까? 이건 몇 명이 돌아오고 말고의 머릿수 문제가 아니라고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도대체…….”
“언제 그런 거 따지는 양반이었나.”
내내 조용히 있던 이트닌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기뻐하고 있는 다른 전사들 중간에서 1팀원들만 마치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침울함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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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을 뚫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수장고 직전, 12갈래길이 있는 작은 홀에 도착한 이트닌이 일행들에게 짐을 내려놓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에키트 족 일행의 표정은 창백했지만 타고난 전사들답게 죽음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결연한 표정들이었다.
에스더 역시 긴장감에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지만 이곳까지 오는 내내 황제의 소매를 꼭 붙들고 놓은 일이 없었다.
“혹시라도 안에 인화가스나 독가스를 넣는다면…….”
“그래도 명색이 성전 유물이 있는 박물관 수장고인데 그런 짓은 못 할 겁니다.”
이트닌이 입구와 통하는 구멍 쪽에 랜턴을 고정시킨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명령하신대로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이젠 어쩌죠?”
“밖에서 우리가 제 발로 나오기만 기다릴 수도 있고, 아니면 적극적으로 문을 뚫고 들어올 수도 있겠지. 문을 뚫고 들어온다고 해도 몇 번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가 낭패를 겪고 나면 포기하고 물러나 밖에서 기다릴 가능성도 있고…….”
카렐 역시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어라 지시하시든, 폐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에스더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긴장한 표정에 어색한 웃음을 덧씌웠다. 말없이 서 있던 카렐은 락시 대장에게서 예비용 도끼를 건네받아 허리춤에 끼웠다. 자신의 존재가 적에게 드러난 것을 꿈에도 모르는 그로서는 자칫 신분을 드러낼 수도 있는 자신의 무기들을 아직 꺼낼 수가 없었다.
“어쨌든 적 본대가 멀어져야 하니 여기서 최대한 오래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가야겠지. 낮보다 밤이 나을 테니 새벽녘 동트기 전에 내가 앞장서서 나가지. 이곳은 통신이 불가능하고 내 감각이 훨씬 유리하니 놈들이 채 알기 전에 덮치면 잘만 하면 잡히지 않고 입구까지 갈 수 있을 게야. 잠깐 쉬면서 영양보충이나 하자고.”
카렐은 조금은 지친 표정으로 돌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키트 족 전사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태연하게 비상식량을 꺼내 입에 물었지만 에스더만은 그렇지 못했다. 물론 그는 전사들처럼 따로 먹을 것을 챙겨오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먹어두는 게 남는 거야. 배고프면 신경이 더 날카로워지거든. 에스더 경과 이트닌 하산 부장에게도 먹을 걸 좀 주게나.”
카렐이 락시 대장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라며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에스더가 이 야만족에게 건네받은 건 바싹 말라비틀어져 이가 들어갈까 싶은 순록고기였다. 고기를 받아든 이트닌은 능숙하게 고기를 비틀어 결을 따라 찢어냈지만 별 생각 없이 고기를 씹으려 했던 에스더는 덩어리가 너무 단단한 데 기겁을 하며 얼른 이를 떼었다.
“턱 조심해요.”
에키트 족들이 키득거리는 모습에 그가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 거구의 전사들은 고기조각을 적당히 비벼서는 마치 종잇장처럼 손으로 죽죽 찢어 입에 넣었지만 에스더가 아무리 용을 써도 고기는 여전히 단단했다.
“그 돌덩이에 귀족님의 여린 이가 들어갈 리가 있나.”
카렐은 고기조각을 넘겨받아서는 돌 위에 올려놓고 도끼 뒤쪽으로 탁탁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 옆에 쪼그려 앉은 에스더는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느라 잠시나마 공포심을 잊은 듯 보였다.
“자.”
카렐은 결이 풀리면서 거의 2배는 넓게 펴진 육포를 내밀었다. 고기를 받아든 에스더는 먹기 좋도록 몇 갈래로 죽죽 찢어서는 황제에게 다시 내밀었다.
“먼저 드시옵소서. 방법을 알았으니 직접 하겠습니다. 상하가 있사온데 어찌 감히 아랫사람이 먼저 입을 대겠습니까.”
에스더를 잠시 쳐다보던 카렐은 결국 장갑을 벗고 그가 내민 육포를 그 큰 손에 받아들었다. 고기조각을 내주던 에스더는 갑자기 그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흐음.”
그 둘의 모습을 생각 없이 보고 있던 락시 대장이 얼른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하고는 함께 있던 에키트 족들에게도 그만 먹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는 황제가 고기조각을 입에 넣은 후에야 비로소 다시 먹기 시작했다.
“저 여자분은 폐하와 무슨 관…….”
눈치 없이 물으려는 이트닌에게 락시 대장이 입을 다물라며 눈짓을 보냈다. 사실 황제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건 공식석상에서는 흔한 예법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어딘지 많이 어색했다. 에스더는 황제의 놀란 시선을 짐짓 못 본 척 서투른 손길로 다른 고기조각을 두들겨 펴기 시작했다.
고기를 씹으며 짧은 휴식시간을 가지고 난 카렐이 갑자기 이트닌을 손짓해 불렀다.
“짬이 좀 났으니.”
“예?”
“여길 잠깐 둘러봐야겠어.”
그가 이트닌에게 가리킨 건 수장고로 통하는 문 외에, 카렐의 눈에만 이상한 기류가 느껴지는 바로 그 구멍이었다.
“폐하, 거기는 함정…….”
“무언가 이상해. 내 잠시 둘러보고 올 테니 그대들은 여기 있도록. 어차피 적이 금세 들어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혼자 구멍 안에 들어서려는 황제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트닌이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저 고집쟁이가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휴우, 차라리 저와 같이 가십시오.”
단검과 랜턴 하나만을 들고 카렐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가던 이트닌은 마치 자신의 젊은 시절, 암살 1팀의 일원으로 콜로니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 ‘좋던 날’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잠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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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 The Iron Vein [출판본] - 제1부 : 세상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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