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52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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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고까지 가라는 베흔의 명령을 받은 야투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베흔은 이 노인네가 혹시 방금 병사가 돌아온 ‘틀린 길’로 접어들지 시험삼아 놔둬 보았지만 그는 이런 함정에 걸려들지는 않았다.
교단 세력이 이곳에서 떠난 것이 꽤 옛날인데도 불구하고 야투 박사는 마치 어제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듯 정확히 방향을 찾아 나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굴 천장이 유난히 낮은 곳에서 ‘머리 조심하세요’라는 친절한 조언까지 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억력이 꽤 좋군. 야투 박사.”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흔의 말을 정말 칭찬으로 여겼는지,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것인지, 야투 박사는 낄낄 웃음까지 지으며 근위대 일행을 안내했다. 두 번째로 세 갈래길을 만났지만 박사는 전혀 머뭇거림도 없이 한 구멍을 가리켰다.
베흔은 지난 황궁 지하에서 힐러가 그랬듯이 자신이 온 구멍과 갈 구멍 옆을 칼로 긁어 표시를 남기고는 정규군 병사들을 손짓해 불러들였다.
“혹시 모르니 길목에 병사 2명씩 남아서 지키고 있어. 혹시 놈들이 일부러 틀린 길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양쪽으로 한 놈씩 도망가서 나하고 본대에 알려.”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한 베흔은 다시 야투 박사의 뒤를 따랐다. 이 페이스대로라면 몇 분 걸리지 않아 바로 수장고에 도착할 듯 보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기억력이 좋은’ 저 노인이 어딘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함께 가는 가디언 중 하나에게 ‘저놈에게서 떨어지지 말고 계속 지키고 있어’라며 수화를 보냈다.
그때, 함께 걷던 간부급 가디언 하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대장, 그런데 옛날에 대장 심복이었던 이트닌 하산 상사가 왜 갑자기 카렐 놈 편을 들었을까요?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요?”
부하의 물음에 베흔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저들로서는 나름대로 궁금증을 가질 만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베흔으로서는 남에게 절대 말해주고 싶지 않은, 수치스런 과거사였다.
어찌보면 이곳의 많은 갈래길들처럼, 그가 ‘그릇된 길’로 접어들게 된 시작점이 바로 그와 함께하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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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송환에 격분한 와헷과 이트닌의 모습에 당황한 베흔은 파냐드에게서 막 받아온 중령 계급장과 팀장의 리본을 살며시 주머니 속에 감추었다.
원래는 술 한 잔과 함께 ‘이제 다 잊자’며 팀장의 죽음에 상심한 부하들을 달래 줄 참이었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내가 새 팀장이다' 따위의 말을 하기도 적당하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의 눈치 없는 참견이 이런 그의 침착한 대응을 완전히 구겨놓았다.
“베흔 중령.”
“예?”
‘중령’이라는 호칭에 베흔은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얼른 와헷과 이트닌의 눈치부터 보았다.
그에게 말을 건넨 건 지도자의 아들인 에르네스토였다. 마르고 큰 키, 죽은 아버지 입실론을 그대로 닮은 선하고 큰 눈의 이 청년은 어느 모로 보아도 그 어머니와는 영 딴판이었다.
S라는 별난 유전자를 가진 그였지만 사실 일상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대여섯살 연상의 청소년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을 정도로 탁월한 학습능력을 지녔지만 너무 별나서 위화감을 자아낼 정도는 아니었고, 그것으로 누군가를 무시하는 일도 없었다. 어머니의 닦달에 결혼도 제법 일찍 했지만 아내 파란기스를 누구보다 아끼는 자상한 남편에 가정적인 아버지였다.
파냐드는 이런 맏아들이 ‘너무 물러서 탈’이라고 매번 투덜대곤 했지만 그건 그의 기준이었을 뿐, 민병대 사람들 모두 ‘아들이 어머니보다 확실히 낫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찾으시는군. 조금 전 못 전한 내용이 있으신 모양이야.”
에르네스토는 분을 못 이기고 씩씩대고 있는 와헷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의 표정 역시 멀리 계곡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당혹감에 물들었다.
“100명의 포로가 송환되었답니다.”
어딘지 가시가 돋은 이트닌의 한 마디에 에르네스토가 입을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 역시 어머니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바로 눈치 챘음에 틀림없었다.
‘불쌍한 놈.’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이 남자의 모습에 베흔이 속으로 혀를 찼다. 흥분한 와헷이 이번엔 에르네스토에게 화살을 돌렸다.
“부장님,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우리 대장님은 도대체…….”
“제발 그만 좀 하라니까.”
보다못한 이트닌이 와헷을 급히 잡아끌었다. 그는 못 간다며 버둥대는 와헷을 질질 끌고 술집이 있는 언덕 아래쪽으로 끌고 갔다. 격앙된 그의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 일을 에르네스토에게 터뜨리는 것도 어린애같은 바보짓이었다.
“카파키 중령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에르네스토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베흔은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그의 옆을 지나 온 길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죄책감에 침울해진 에르네스토는 그곳에 멍하니 선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지도자의 사무실에 든 베흔은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만큼, 파냐드는 자리에 혼자 있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는 항상 십여 명의 경호원을 대동했고, 그나마도 완전히 믿지 못해 여러 부대에서 차출해 온 사람들로 매번 바꿔가며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지금 그는 휑한 집무실 굴 안에 혼자 앉아있었다.
‘이년이 날 믿을 리가 없는데.’
베흔은 어딘가에서 보내 온 메모를 읽고 있던 파냐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메모를 다 읽은 이 표독스런 인상의 여인은 그것을 책상머리의 촛불에 태워 그 자리에서 없애버렸다.
“내게 뭐 하고 싶은 말 없나? 베흔 중령?”
“예?”
파냐드가 두 손을 깍지끼며 베흔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베흔도 적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팀원 단속 정도는 잘 해 주는 유능한 지휘관인 줄로 알았는데.”
할 말을 잃은 베흔이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누군가의 밀고였든, 아니면 이 여자의 정보망에 걸렸든, 와헷의 서툰 행동이 그새 그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와헷은 일선 전투원 출신이라 워낙에 성격이 직설적인 편입니다. 술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조금 하다 보면 곧 마음이 풀어질 것이니…….”
베흔이 급히 둘러댔지만 속으로는 ‘도둑이 제 발 저리는군.’이라며 이 여자의 과민반응을 비웃고 있었다.
“입놀림만큼 무서운 게 없다는 걸 자네도 알 텐데?”
“배운 것 없는 무지한 전사의 넋두리 정도로 그냥 넘어가 주심이…….”
“아무래도 암살 1팀을 해체해야 하겠다.”
순간 베흔은 뒷골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에게 파냐드가 다시 눈동자를 굴렸다.
“이번 일 때문은 아냐. 자넬 내보내고 다시 생각해보니 카파키 중령을 추모하는 뜻에서 ‘1팀’이라는 이름을 비워두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일 뿐이야.”
“…….”
베흔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이 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1팀장이라는 그럴싸한 명예는 채 1시간도 되지 못한 채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 터였다. 베흔의 혈압이 순간 확 치솟는 것 같았다.
“사령부 정보참모 자리가 비어있어.”
파냐드가 다시 입을 연 순간, 베흔은 자신이 무얼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정보 업무의 총괄책임자인 정보참모는 대령급이 맡는 핵심요직이었고 그나마도 ‘무식한’ X들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엘리트들의 자리였다. 그것도 어린 시절부터 ‘불량품’으로 놀림을 받아 온 베흔에게는 너무도 먼 자리였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베흔은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진리를 머리에 재빨리 떠올릴 사람이었다.
“제게 무얼 원하십니까.”
베흔의 물음에 파냐드가 정색을 하며 정보참모의 리본을 내밀었다.
“원하다니? 자네의 능력이 아까워서일 뿐이야. 자네같이 똑똑한 사람을 필드에서 매번 목숨을 걸도록 내버려두긴 아까워서 말이야. 내 자네를 미래의 특무여단장으로 여기고 있다네.”
베흔은 파냐드의 빤한 거짓말을 일단 들어주는 척 하기로 했다. 사실 지금 그에게 더 중요한 건 ‘민병대가 이 꼴로 잘 흘러갈 수 있을까’ 하는 계산이었다. 그가 뜬금없이 민병대의 장래 걱정을 하는 건 어떤 큰 이상 때문은 아니었다. 더 이상 충성을 바칠 가치가 없는 조직으로 판정난다면, 그는 이 조직 자체를 기꺼이 떠나버릴 참이었다.
그런 그의 속셈을 놓칠 파냐드가 아니었다.
“아참, 정보참모니 한 가지는 알고 있는 게 좋겠어.”
“예?”
“곧 중요한 발표가 있을 예정이야.”
파냐드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른 서류에 눈을 댄 채 말을 이었다.
“전쟁은 곧 끝날 거고,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변할 거다.……어느 정도는.”
베흔의 숨이 탁 막혀왔다. 파냐드가 무언가 더 큰 일을 물밑에서 꾸미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카파키 중령에게 벌어진 일은 유감이지만 녀석은 어차피 순교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파냐드가 살짝 눈동자를 움직여 베흔을 응시했다.
“네 미래가 걱정되겠지? 그건 신경쓰지 마라. 새 시대에도 넌 충분히 대우받게 될 테니. 넌 그럴 자격이 있으니.”
베흔은 파냐드의 이 말이 퍽이나 그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파냐드는 ‘미래’ 따위는 입에 잘 담지 않는 사람이었고 누구를 격려하는 데도 인색한 사람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베흔에게 지도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본심을 드러냈다.
“신임 정보참모로서 몇 가지 처리해 줬으면 좋겠어.”
“말씀하십시오.”
베흔이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 X들이 인식표로 쓰고 있는 목걸이 말이야.”
“네.”
베흔은 자신의 목에도 걸려 있는 캡슐을 힐끔 쳐다보았다. 새끼손가락만한 그 캡슐은 ‘X의 자존심이 담겼으니 어느 경우에도 풀어놓지 마라’며 어린 시절부터 단단히 세뇌를 받았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반짝거리는 재질 때문에 실전에 나갈 때는 위장무늬를 칠하기도 했고, 어떤 녀석들은 이름을 새기거나 노끈으로 칭칭 감아놓기도 했었다.
사실 다 똑같은 모양의 캡슐이었지만 말 그대로 X들 나름의 개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바로 그 캡슐이었고, 소위 말하는 ‘짬밥’이 오래된 X들일수록 요란스레 장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열어 본 적 있나?”
“봉인이 되어 있습니다. 열어봤다가는 군법회의에 회부된다는 말이 있어서 손대지 않는 것이 규정입니다.”
“다행이군.”
파냐드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곧 새 인식표를 지급할 테니 X들의 인식표들을 모두 수거해 오도록 해. 모두,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사자에게서 수거한 것들도 다 가져와.”
“예?”
베흔이 기겁을 하며 자신의 인식표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는 X 사이의 서열로는 거의 바닥이다 보니 인식표를 요란스레 치장할 ‘짬밥’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눈에 안 띄도록 검은 위장크림을 덕지덕지 칠해놓은 것이 전부였지만 그에게는 40년 가까이 지녀 온 소중한 분신 같은 물건이었다.
“이런 걸 여쭈면 안 되는 줄은 알지만……이유가 있습니까?”
‘감히’ 이유를 묻는 베흔을 파냐드가 살짝 째려보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대놓고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원래 그렇게 쓸 물건이 아니었어. 멍청한 우리가 엉뚱한 용도로 썼던 거지. 그걸 제대로 된 용도에 쓸 사람이 나타났어.”
베흔은 파냐드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 받은 명령이니 수행해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탁자 위의 참모부 리본을 막 집으려는 베흔을 파냐드가 다시 손짓해 불렀다.
“그리고, 또 하나.”
“예.”
“오르마즈 카파키 중령의 일로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는 걸 원치 않아. 내겐 적이 많아. 그네들에게 억울하게 꼬투리 잡히긴 싫다네.”
짧게 한 마디 던진 파냐드는 다른 서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자네가 알아서 최대한 빨리 차단해 줬으면 해. 깨끗하게. 뒤는 내가 알아서 책임질 테니.”
파냐드는 그에게 나가라며 손짓하고는 다른 용무를 보기 시작했다. 지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팀원들과 함께 해 온 오랜 기간이 머릿속을 흘러가면서 그의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책상 위에 놓인 정보참모의 리본, 아니, 출세의 보증수표를 이대로 놓아버릴 생각도 없었다. 복잡해진 그의 기억 속에 ‘불량품’이라는 동기들의 놀림, 선배 교관들의 무자비한 폭행, 그들에게 잘려나가던 자신의 붉은 머리칼, 아니 자존심이 하나둘씩 흘러갔다.
“감사합니다.”
베흔은 탁자 위에 놓인 리본을 집어들고 뒤로 휙 돌아섰다. 이번 결정이 앞으로 자신의 운명, 아니, 지금은 죽은 줄로 알고 있는 전 팀장 오르마즈와의 다음번 만남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이트닌과 술 한 잔을 걸친 와헷은 탁자에 엎드려 몇 시간째 펑펑 울고 있었다. 이트닌은 그런 동료의 등에 손을 얹은 채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와헷은 오르마즈가 말단 소대장이었을 때부터 그의 휘하였고, 그를 따라 특무대에까지 지원했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물론 그도 다른 대다수의 민병대 전사들처럼 시골 출신에 별반 배운 것도 없는 거친 사내였다. 하지만 시원시원하고 유쾌한 성격에 오르마즈의 명령이라면 어떤 것이든 무조건 해내는 우직함, 게다가 큰 덩치 덕분에 사람들이 ‘1팀장의 돌쇠’라고 장난삼아 부를 정도였다.
몇몇 사람들은 와헷이 ‘침대 위에서도 돌쇠’일지 모른다며 묘한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고, 이트닌 생각에도 와헷이 내심 팀장에게 연모를 품고 있는 건 틀림없어 보였다. 물론 오르마즈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겠지만.
“고향으로 돌아갈까봐.”
울다가 지친 와헷이 밑바닥에 남은 술찌꺼기를 들이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동안 모은 돈도 있으니 땅 사서 농사나 지어야겠어. 이제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그런 건 한숨 자고 내일 아침에 생각해.”
이트닌은 비틀거리는 와헷을 힘껏 일으켜 술집 밖으로 부축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축 처진 와헷은 풀린 다리를 힘없이 내디디며 마치 어린애처럼 눈가에 남은 눈물자국을 훔쳐냈다.
“정말 여기 있기는 싫어. 그분도 없는데…….”
“제발 정신 좀 차려. 가서 좀 자. 내가 업어 줄 테니…….”
“싫어, 내 발로 갈 거야.”
와헷이 이트닌의 등을 밀어내며 비틀비틀 혼자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술집을 나선 이트닌은 큰 덩치의 와헷을 낑낑대며 겨우 부축해 어렵게 숙소로 향했다. 만취한 와헷은 자꾸 비틀거리며 목도리를 바닥에 흘려놓았다.
“하여간 칠칠맞기는…….”
그가 떨어뜨린 물건을 주우려 몸을 숙이던 이트닌은 멀찍이 앞에서 눈에 익은 모습을 발견했다. 이트닌이 구세주라도 얻은 듯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소령……아니, 중령님, 좀 도와주십시오. 이놈 덩치가 워낙 커서…….”
어둠 속에 말없이 서 있던 베흔은 휘청거리는 와헷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한쪽 어깨에 불끈 짊어졌다. 와헷이 싫다며 그의 등을 두드렸지만 베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놈은 내가 데려다놓을 테니 중사도 가서 쉬어. 집에서 마누라하고 자식이 기다리고 있을 거 아냐.”
“휴우, 알겠습니다.”
이트닌은 바닥에서 주워든 목도리를 와헷의 목에 걸어주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와헷을 짊어진 베흔이 독신자 숙소 쪽으로 멀어져가는 광경을 잠시 넋 놓고 지켜보았다.
“불쌍한 놈 같으니.”
그는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마누라와 딸자식 생각을 떠올리며 뒤로 힘없이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그는 누군가 뒤쫓아오는 느낌에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요! 하산 중사님!”
어둠 속에서 나타난 클럽 바텐더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무기벨트 놓고 가셨어요.”
깜짝 놀란 이트닌이 허리춤을 살폈지만 평상시 무장인 소형 석궁과 단검까지 모두 제대로 있었다.
“있는데?……이런, 빌어먹을, 와헷 거잖아.”
무기벨트를 받아든 이트닌이 지금 가져다줄까 말까 갈등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가뜩이나 술에 쩔어 잠들었던 녀석이 기상나팔소리에 잠에서 깨서 비몽사몽간에 장비 찾는답시고 허둥대는 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칠칠맞은 놈, 못살아.”
이트닌은 벨트를 들고 왔던 길로 터벅터벅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워낙에 험한 화산 계곡의 동굴을 뚫어 만든 숙소다보니 거리에 상관없이 움직이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몇 분만에 독신자 숙소에 도착한 이트닌은 벌집처럼 뚫려 있는 몇 개의 문을 지나 와헷이 묵는 동굴 숙소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내가 너 때문에 못…….”
벨트를 내밀려던 이트닌은 자리에 바싹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그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차마 믿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소, 소령님…….”
겁먹은 이트닌이 벨트를 쥔 채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베개로 와헷의 얼굴을 누르고 있던 베흔 역시 그의 느닷없는 등장에 당황한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침대 옆으로 축 늘어진 와헷의 손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호흡이 멎어서 인공호흡을 하던 중이었다.”
베흔이 베개를 치우고 와헷의 가슴을 누르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연극에 속아 넘어갈 이트닌이 아니었다. 베흔 역시 그 눈치를 챘는지 이미 차갑게 식은 와헷의 가슴에서 손을 떼며 허탈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1팀은 오늘부로 해체되었다.”
“예?”
“자넨 날 따라 내근으로 옮겨질 거야. 내일부터는 정보참모실로 출근하게. 자네에겐 귀한 식솔들이 있지 않나? 응? 가장이니 그네들의 생계도 생각해야지?”
잔뜩 힘을 준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이트닌의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다. 베흔은 벌벌 떨며 서 있는 이트닌의 어깨를 툭툭 쳐 주며 밖으로 향했다.
“돌아가 자게나. 그럼 내일 보세.”
베흔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와중에도, 이트닌의 멍한 시선은 이미 숨이 끊어진지 오래인 와헷의 마지막 모습을 우두커니 향하고 있었다. ‘1팀장의 돌쇠’는 그가 평소 하던 대로, 이번에도 먼저 간 팀장의 뒤를 이렇게 운명처럼 따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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