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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53화 (650/1,132)

< -- 653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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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과 이트닌이 정체불명의 구멍으로 사라지고 30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갈림길에 있던 락시 대장과 에스더는 점점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카렐이 ‘적이 오려면 적어도 몇 시간은 걸릴 거야.’라고 말했지만 락시 대장은 적이 올지 모르는 구멍 쪽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일행을 지키고 있었다.

“폐하께선 왜 안 돌아……”

카렐이 사라진 구멍 쪽을 걱정스레 돌아보던 에스더는 누군가 입을 덥석 막는 느낌에 놀라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의 입을 막은 에키트 족 전사가 재빨리 랜턴을 돌리는 모습에 무슨 일인지를 바로 깨달았다. 락시 대장이 이들에게 무어라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수화를 읽을 수는 없지만 적이 오고 있다는 뜻인 것 같았다.

‘벌써?’

에스더는 얼른 시계부터 보았다. 카렐이 떠난지는 50분 정도 지났고 이 밑으로 내려온지는 고작 1시간이 조금 넘은 후였다. 그는 기꺼이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저항이나 탈출시도 한 번 못 해보고 이렇게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터였다.

바로 그때, 굴 너머에서 누군가의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가늘게 웅웅거리고 울려왔다. 밀폐된 지하공간이라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건 분명했다.

“폐하를 따라가야겠습니다.”

락시 대장이 전사들에게 상자를 짊어지라고 눈짓했다. 2명의 전사들이 상자를 등에 멨고 1명에 에스더에게 업히라고 눈짓 했지만 그는 혼자 갈 수도 있다며 짐을 나눠지라며 손짓했다.

“난 광산을 전공한 토목학자야. 여기하고는 좀 달라도 지하 쪽에는 전문가라고.”

도움을 뿌리친 에스더는 직접 랜턴을 들고 제일 앞장서서 굴에 발을 들여놓았다. 에스더를 업으려 했던 그 전사는 하는 수 없이 카렐이 풀어놓고 간 ‘제일 중요한’ 상자를 등에 짊어지고 그를 따랐다. 그리고 도끼를 쥔 락시 대장이 일행의 제일 후미를 지키며 급히 굴에 뛰어들었다.

“곧 12번째 갈림길입니다.”

야투 박사가 지하의 탁한 공기에 벌써 몇 번째 기침을 했다. 늙은 티를 내는 그의 이런 모습에 베흔이 입가를 씰룩거렸지만 워낙에 몸이 약해서 이러는 것이니 뭐라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게는 이자의 부실한 호흡기보다 기침 소리에 적들이 이쪽의 기척을 먼저 눈치 채는 것이 더 문제였다.

하지만 사방에 치명적인 함정이 널린 이곳에서 이 노인을 따라가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갈림길에 거의 다가가면 내가 앞장설 테니 뒤로 물러나도록 해.”

“그러면 물러날 때로군요.”

야투 박사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이런 태도에 베흔은 황당함에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혼동이 될 정도였다. 어쨌든 그의 말대로 조금 더 나아가니 이번엔 10개가 넘는 구멍이 있는 꽤 큰 갈림길 홀이 나타났다. 베흔은 재빨리 독약 병을 꺼내들고 조심조심 홀에 들어섰지만 이곳도 텅 비어 있었다.

“이 새끼들 도대체 어디까지 도망친 거지? 여기가 마지막이라며?”

나름대로 잔뜩 긴장했던 베흔은 허탈함에 고개를 저었다. 또다시 기침을 하며 제일 꽁무니에서 들어온 야투 박사가 수장고가 있는 구멍을 가리켰다.

“저쪽이 창고가 있던 자리입니다. 막다른 길이죠.”

베흔은 마지막으로 마음을 잔뜩 가다듬고 다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만일을 대비해 정규군 병사들과 십여 명의 가디언들을 뒤에 놔둔 채 가디언 10명만을 거느리고 조심조심 문에 가까이 다가갔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 굴 전체에서 가디언 특유의 예리한 감각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이놈!”

한 손에 칼을, 한 손에 독약병을 든 베흔이 수장고의 문을 힘껏 박차며 안에 뛰어들었지만 먼지가 잔뜩 쌓인 그 창고 안은 마찬가지로 비어 있었다. 또다시 밀려온 허탈함에 베흔의 어깨가 축 처졌다.

“제기랄. 그 새끼들 길 잘못 들어가서 이미 뒈진 것 아닐까?”

“이트닌이 길을 안다고 했으니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아니면 뒤에 일부러 틀린 구멍에 숨어 있다가 우리가 지나간 후에 나갔을지도?”

가디언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았지만 베흔으로서는 그 중 어느 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가디언 한 놈 보내서 갈림길에 남겨두고 온 놈들 무사한지 확인해. 빨리.”

가디언을 보내놓고 허탈한 기분으로 돌아 나오는 베흔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스쳤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갈림길마다 표시를 해 두고 병사 한두 명씩도 남겨두고 왔지만 그들에게서 별다른 보고는 없었다.

“없습니까?”

힘없이 돌아나온 베흔에게 야투 박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꼴을 보면 모르냐.”

괜히 심통이 난 베흔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 빌어먹을 구멍들을 하나하나 다 뒤지다가는 병사들만 다 죽어나가겠고…… 도대체 몇 개야?”

“11개 갈림길에서 틀린 구멍이 각각 2개씩이고, 여기에 11개 있으니까 안 가 본 구멍을 다 합치면 33개입니다. 아, 2개는 이미 사람을 보내 보셨으니 31개로군요.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야투 박사의 농담에 가까운 가벼운 응답에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던 베흔이 대번 사나운 눈길을 보냈다.

“네 책임이 아니니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막 역정을 내려는 베흔을 야투 박사의 짧은 한 마디가 막았다. 베흔은 꿀 먹은 사람처럼 입놀림을 딱 멈추었다. 야투 박사의 눈길이 제일 왼쪽의 출구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저기가 왜?”

“좀 ‘특별한’ 구멍이지요.”

야투 박사가 지금까지의 가벼운 표정을 돌변하며 갑자기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었다.

“제대로 얘기해. 지금 나하고 말장난 하자는 거냐?”

순간 욱한 베흔이 이 노인의 멱살을 꽉 움켜쥐었다.

“네 교단의 비밀이 어쩌고 따위는 이제 관심 없어. 네가 원하면 이까짓 쓸모없는 지하실 따위는 네놈. 아니 네 교단에 넘겨줄 수도 있으니까 똑바로 말이나 해. 지금 장난치자는 거 아니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야투 박사는 당장 잡아먹을 듯 눈을 부리라는 베흔을 멍하니 올려보았다. 그리고는 잔뜩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제대로 몰라서 이 정도밖에는 말씀 못 드립니다.”

“몰라? 뭘?”

“저 구멍 안의 구조는 저도 모릅니다. 대, 대신관님과 몇몇 선택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저 같은 보통 사람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만든 놈들은 알 수 있었을 거 아니냐?”

“그네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다 죽었다는 말도 있고…….”

“다 필요 없다. 빨리 앞장서.”

베흔은 이 노인을 그 구멍 앞에 거칠게 동댕이쳤지만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진 야투 박사는 절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못 합니다, 절 죽이신대도 여긴 못 들어갑니다. 제가 들어갈 수 없는 신성한 곳입니다!”

야투 박사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필사적으로 손을 저었다.

“오호, 죽여도 못 들어간다? 그럼 죽어 봐라.”

베흔이 허리춤에서 칼을 번쩍 뽑아들고 야투 박사의 머리에 대고 내질렀다. 박사는 바닥에 꿇어앉은 채 악 소리를 지르며 손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빌어먹을.”

베흔의 욕설과 함께 야투 박사의 흰 백발 몇 가닥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머리에 칼이 날아드는 순간까지도 이 노인은 정말로 베흔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휴우.”

십년감수한 야투 박사는 자신의 머리와 목이 무사한지 더듬거렸다.

“이 새끼 여기서 꼼짝도 하게 못 하게 지키고 있어.”

정규군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린 베흔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칼을 고쳐쥐며 가디언들에게 뒤를 따르라고 손짓을 보냈다. 죽어라고 버티는 이 사교 신관을 당장이라도 짓밟아주고 싶었지만 당장의 기분에 죽여 버리기는 아는 것이 너무 많은 아까운 자였다.

“여기서는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베흔은 정규군 병사들에게 등에 지고 있는 방패를 내놓으라며 손짓했다. 가디언들은 보통 방패를 쓰지 않았지만 이곳처럼 제한된 공간에서는 다름대로 쓸모가 있을 듯 보였다. 그는 가디언들에게 정규군 방패를 집어 들라고 손짓하고는 문제의 굴에 급히 뛰어들었다.

굴을 타고 도망치던 에스더와 락시 대장 일행은 얼마 가지 않아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랜턴 불빛을 발견했다. 잠시 긴장했던 에스더는 앞에서 들려온 황제의 목소리에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누구냐?”

“저흽니다.”

에스더가 최대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뿌연 어둠 속에서 털가죽을 걸친 황제의 소름끼칠 정도로 붉은 눈동자가 제일 먼저 보였지만 에스더에게는 놀라움보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거기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황제가 에스더의 얼굴을 보마자마 물었다.

“적이 그곳까지 들어온 것 같습니다. 어떻게 따라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최대한 빨리 도망쳐왔습니다. 뭣 좀 발견하셨습니까?”

“응.”

카렐은 뒤따라오던 이트닌을 힐끔 쳐다보았다. 상기된 얼굴의 이트닌이 겁에 질린 그들에게 처음으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가 보길 잘했습니다. 잘하면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호,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그나마 희망을 찾은 에스더가 카렐의 팔뚝을 붙들고 이마를 가져갔다. 카렐이 그들에게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트닌, 자네가 길을 아니 앞장서게. 내 락시 대장과 함께 후미를 지킬 테니. 발밑 조심하고.”

카렐의 지시대로, 이트닌이 선두에, 에스더와 짐을 진 3명의 에키트 족 전사들이 중간에, 그리고 카렐과 락시 대장이 제일 후미를 지키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같은 길을 세 번째로 지나서인지, 이트닌의 걸음은 공포에 사로잡혔던 처음에 비해 훨씬 익숙해져 있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조금씩 어두워지는 주변 공기와 묘한 기류에 놀라 걸음을 제대로 떼지도 못했다.

잠시 후, 문제의 ‘구덩이’가 널린 좁은 길이 가까워오자 이트닌이 일행을 정지시켰다. 그리고는 바닥에 곰보처럼 무수하게 뚫린 구덩이를 손과 랜턴으로 가리켰다. 바닥에 이빨을 드러낸 흑요석 날을 눈으로 확인한 에스더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지만 그는 겁내지 않고 그 사이에 조심스레 발을 내밀었다. 그때, 카렐이 벽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랜턴을 끄라’는 신호였다.

“으읍.”

당황한 이트닌이 일단 불을 껐지만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했다. 랜턴을 켜고도 가까스로 나갔던 길을 불까지 끄고 도대체 어떻게 가라는 것인지 따지고 싶었지만 황제에게도 다른 도리가 없었을 터였다. 그는 바로 뒤에 있는 에스더의 소매를 잡고 바닥으로 잡아끌었다. ‘바닥을 기어라’는 뜻임을 깨달은 에스더는 뒤따라오는 에키트 전사들에게도 그의 뜻을 그대로 손짓으로 전해주었다.

“하, 학.”

긴장한 에스더는 황제가 있는 뒤편을 돌아보았다. 실제로 무언가 엷은 불빛이 뒤로 다가오고 있었고, 한 손에 도끼를 쥐고 굴을 막아 선 황제의 검은 실루엣이 마치 든든한 방패처럼 불빛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다. 그는 3명의 전사들이 옆을 지나갈 동안 물끄러미 그 모습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빨리 오십시오.”

앞서가는 전사들의 재촉에 에스더가 제일 마지막에서 천천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바닥을 짚은 손끝과 무릎의 촉감에만 의지해 이 함정 투성이의 굴을 지나가야만 했다.

카렐과 함께 제일 후미에서 물러나던 락시 대장은 황제가 갑자기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스텝을 보아 가디언 같다.”

깜짝 놀란 락시 대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좁은 공간, 무거운 짐, 게다가 널린 함정 때문에 일행의 전진은 더디기만 했다. 그에 비하면 이곳으로 다가오는 적들의 스텝은 거의 맹수만큼이나 빨랐다. 그가 부족에서는 아무리 힘세고 뛰어난 전사였지만 가디언을 상대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이대로는 따라잡힐 것 같다. 이트닌한테 최대한 빨리 가라고 하고 너도 물러나라. 안 될 것 같으면 시간을 끌겠다.”

“구멍이 좁습니다. 제대로 싸우실 수 있겠습니까?”

락시 대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좁은 공간이 숫자의 유리함을 상쇄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문제는 지금 이곳이 적과 제대로 싸우기는 고사하고 맘 놓고 무기를 휘두르기도 버거울 정도로 좁다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키가 큰 카렐은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겨우 서 있었다.

“그러니 혼자 있는 게 낫지.”

머뭇거리던 락시 대장도 하는 수 없이 다른 일행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적의 앞에서 기어서 물러나는 것이 죽는 것보다 수치스러웠지만 황제에게 짐이 될 수도 없었다. 일단은.

‘여길 지나간 게 맞아.’

흙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확인한 베흔이 뒤따르는 가디언들에게 수화를 보냈다.

‘방금 지나갔다.’

쫓는 적의 정체를 확인한 베흔은 독약 병을 열고 자신의 칼날에 조심스레 발랐다. 칼날에 독을 바르고 싸워보기는 그가 암살수였던 민병대 시절 이후 참이나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여분 독약을 꺼내 뒤따르는 가디언들에게도 바르라며 내밀었다. 베흔은 가장 키가 작은 가디언을 골라 방패 2개를 내밀었다.

‘앞장서라.’

베흔의 뜻을 눈치 챈 그 가디언은 무기를 집어넣고 대신 양팔에 방패 하나씩을 끼고 2겹으로 겹쳐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그리고 두 번째에 선 베흔이 한 손에 칼을, 한 손에 뚜껑을 연 독약병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어차피 1대1 대결로는 승산이 적은 이상, 여차하면 이 독약을 뿌려버릴 참이었다.

방패 위로 머리를 빠끔히 내민 선두의 가디언은 이마에 고정시킨 랜턴 불빛이 얼마 나아가지 않자 답답한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옆을 돌아보던 그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무언가 하얀 물체가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흐읍!”

쾅 하는 엄청난 울림이 방패를 가격하면서 한쪽 팔이 그대로 부러져버린 가디언이 비명과 함께 힘에서 밀려 벌렁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베흔을 비롯한 무려 20여명의 가디언들이 그 뒤를 받치고 있었다.

방패가 없었다면 황궁 지하 카타콤베에서 타크마의 일행이 당했듯 온통 쓸려버렸겠지만 카렐의 이 회심의 돌격은 선두 가디언의 한쪽 팔과 어깨뼈를 부서뜨린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공간이 좁아 카렐도 자신의 특기인 속도를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충격만으로도 베흔이 ‘적’의 정체를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카렐 놈이 맞다! 버텨!”

베흔이 쓰러지려는 가디언을 어깨로 받치며 악을 썼다.

“베흔?”

적에게서, 그것도 베흔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이 들려오자 순간 카렐은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순간, 뒷줄 가디언들이 겨눈 밝은 랜턴 불빛에 유난히 붉게 번쩍이는 카렐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두 사람의 놀란 시선이 겨우 몇 뼘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똑바로 마주쳤다. 베흔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훗, ‘소라브 추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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