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54화 (651/1,132)

< -- 654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

.

.

“씨이!”

당황한 카렐이 방패 위에 도끼를 걸어 강제로 떨구려 했지만 굴이 너무 낮아 도끼의 가장 큰 장점인 상단세(上段勢)를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불꽃을 튀기고 천장을 스치며 힘을 잃은 도끼가 방패의 상단을 내리찍어 한 뼘 가까이를 쪼갰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계속 밀어붙여!”

계속 밀어붙이는 적의 기세에 당황한 카렐은 방패에 박힌 도끼자루를 힘껏 잡아당겨 하나를 걷어냈지만 그 안에 또 한 겹의 방패가 있었다. 카렐은 너덜거리는 방패가 매달린 도끼를 뒤로 내던지고 허리춤의 단검을 대신 뽑아들었다. 하지만 허리를 펴면서 그의 중심이 흔들린 그 짧은 순간은 도리어 베흔의 편이었다.

“밀어!”

기회를 잡은 베흔이 앞 가디언의 방패를 함께 쥐고 카렐을 힘껏 밀어붙였다.

“아읍!”

카렐이 허리를 숙이며 그들이 밀어붙이는 힘을 가까스로 버텼지만 미끄러운 돌바닥에서 거의 1척 가까이를 뒤로 죽 밀려나고 말았다. 그의 큰 키, 길고 날씬한 하체에 비해 떡 벌어진 넓은 어깨가 이 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낮은 중심에서 힘을 다투는 것에서는 도리어 독이었다.

그때, 베흔이 방패와 벽의 틈새로 카렐의 종아리를 향해 칼을 힘껏 내리꽂았다. 깜짝 놀란 카렐이 재빨리 발을 뒤로 옮겼지만 바로 베흔이 바라는 것이었다. 발을 움직이며 중심이 흔들리자 천하의 카렐도 근위대 가디언들이 밀어붙이는 그 어마어마한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는 다리를 뒤로 뻗어 최대한 버텨보려 했지만 그대로 뒤로 죽 밀려나며 구덩이 한쪽에 발이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읍!”

짧은 비명과 함께 완전히 중심을 잃은 카렐은 뒤로 한 바퀴를 굴러 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모자가 벗겨진 채 바닥을 한 바퀴 굴러 가까스로 몸을 세웠지만 지금까지 그를 밀어붙인 근위대 가디언들 역시 그에게로 우루루 몰려오고 있었다.

“아악!”

카렐이 단검을 들어 제일 앞에서 그를 몸을 덮치는 가디언의 옆구리를 힘껏 찔렀지만 바로 그 뒤에 베흔이 내지르는 칼날이 있었다.

“걸렸다!”

다급해진 카렐은 단검에 찔려 있는 적 가디언의 몸을 방패삼아 재빨리 몸을 움츠렸다. 베흔이 내지른 칼이 가디언의 옆 목을 베고 카렐의 귀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십년감수한 카렐은 단검에 찔려 신음하는 가디언의 몸으로 정면을 가리고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빨리! 빨리 물러나!”

카렐이 뒤에서 도망치고 있는 락시 대장 일행에게 악을 썼다. 저들만 없다면 카렐 혼자 적들을 떨치고 도망이라도 칠 수 있겠지만 저들이 ‘흑요석 방’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버티어야 했다. 그때, 또다시 공격을 느낀 카렐이 고개를 휙 돌렸다.

“앗!”

무언가 물벼락 비슷한 것이 얼굴로 날아들자 순간 카렐은 염산이나 수산인 것으로 생각하고 반사적으로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모자가 벗겨져 스코프 아래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응?”

무언가 노르스름한 액체가 소매의 털가죽에 튀겼지만 별 냄새는 나지 않았다. 기겁을 했던 카렐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도리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너만 돌진하는 줄 아냐!”

그때, 베흔이 다시 무섭게 쇄도해 카렐의 칼에 찔려 있는 가디언의 등을 힘껏 들이받았다. 얼떨결에 이 둘 사이에 끼어버린 가디언이 늑골이 산산조각나며 비명을 질렀고 카렐이 두 팔을 앞으로 모아 기를 쓰며 베흔, 그리고 그 뒤에서 밀어붙이는 다른 가디언들의 힘을 막았다.

“내 보낸 걸 못 받았소? 내게만 왜 이러는 거요?”

카렐이 기를 쓰고 밀어붙이는 베흔을 막으며 쥐어짜듯 말을 건넸다. 베흔은 매번 욕부터 시작하던 그의 말투가 이전과는 달라진 것을 눈치 챘지만 ‘사실’이 드러난 이상 물러나 줄 생각은 없었다.

“물론 받았지.”

베흔이 냉큼 대답했다. 가슴이 부서져 숨이 끊어진 가디언의 시체를 사이에 둔 채 카렐과 필사의 힘싸움을 벌이던 베흔이 이를 드러내고 낮게 속삭였다.

“왜? 감격해서 널 껴안고 울어주기라도 바랐냐? 내 귀한 손녀님?”

카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무어라 다시 따지려는 카렐에게 베흔이 침을 퉤 뱉었다.

“이게 내 대답이다. 이 거짓말쟁이 년아.”

베흔은 독약 병을 확 열고는 홀로 기를 쓰며 버티고 있는 카렐의 얼굴을 향해 힘껏 흩뿌렸다. 적당히 희석해 놓은 그 금빛 액체는 탁한 지하의 공기 사이로 튀겨올라 카렐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독을 막으려 급히 몸을 비틀던 카렐은 또다시 중심을 잃고 뒤로 확 밀려나고 말았다.

“아앗!”

갑작스레 뒤로 넘어지는 카렐 때문에 마찬가지로 중심을 잃은 베흔이 앞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뒤에서 밀어붙이던 가디언들의 대오가 우루루 무너지며 쓰러지는 베흔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등과 어깨를 밟으며 앞으로 확 밀려났다.

“야, 이 새끼들!”

부하들에게 짓밟힌 베흔이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다.

얼굴에 묻은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카렐은 바닥에 넘어진 자신의 눈 사이 급소로 꽂히는 가디언의 칼날을 단검으로 힘껏 쳐냈다.

“새끼!”

카렐의 주먹에 명치를 가격당한 가디언이 뼈가 으스러지며 옆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 뒤로 또 다른 가디언이 그의 가슴 위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카렐은 그의 칼날을 피해 고개를 재빨리 움직였지만 가슴과 한쪽 팔이 상대의 육중한 체중에 깔리고 말았다.

“여럿이 덮쳐서 못 움직이게 해! 좁아서 제대로 힘을 못 쓴다!”

후미의 베흔이 그 경황없는 와중에도 악을 쓰는 고함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아읍!”

카렐이 가슴에 얹힌 가디언을 힘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같은 순간, 그의 왼팔 바로 옆에 내리꽂히는 또 다른 적의 칼날이 있었다. 이미 2명이나 되는 가디언들에게 깔려있던 카렐이 버둥대며 결사적으로 움직이려 했다.

“이놈들! 감히!”

그때, 쩌렁쩌렁한 울림과 함께 카렐의 왼팔 위에 무언가 육중한 것이 쿵 하고 떨어졌다. 카렐의 왼팔을 공격하려던 가디언이 누군가의 도끼질에 뒤통수가 두 조각나 카렐의 어깨 위로 힘없이 굴렀다.

그 사이, 카렐의 가슴을 누르고 있던 다른 가디언이 바닥에 박힌 단검을 뽑아 그의 얼굴에 내리찍으려 했다. 하지만 락시 대장의 굵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하아, 가디언도 별것 아니구나!”

이미 가디언 한 명을 죽인 그는 황제를 공격하려는 적의 손목을 도끼로 힘껏 후려쳤다. 상대의 손목을 끊어내고 계속 날아간 그의 투박한 도끼가 벽에 부딪혀 이가 빠지며 노란 불꽃을 튀겼다.

“돌아오길 잘했네!”

그는 기쁨의 괴성을 지르며 이가 빠져버린 무딘 도끼로 손목을 잃은 가디언의 옆머리를 다시 후려쳤다. 기습을 당한 그 가디언의 머리가 이 거인의 괴력에 빡 소리를 내며 부서져 버렸다.

“나오십시오! 폐하!”

락시 대장이 무뎌진 도끼를 내버리고 가디언 3명에게 깔려 있던 카렐을 힘껏 끄집어냈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카렐이 근위대 가디언들을 피해 락시 대장과 함께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왼쪽 벽으로 붙어!”

카렐의 지시에 락시 대장이 재빨리 함정을 피해 바닥을 디뎠다. 감각에서 유리한 이상, 일단 속도만 붙여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 짧으나마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도망치게 놔두지 마!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카렐을 쫓아 막 달려가던 2명의 가디언들이 몇 발짝 못 가 함정에 발이 쑥 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바람처럼 잽싼 카렐과 락시 대장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가디언들이 랜턴을 겨누었지만 이 기괴한 공간 속에서 불빛은 그렇게 멀리까지 나아가주지는 않았다.

“대장, 괜찮습니까?”

가디언 한 명이 쓰러져 있는 베흔을 급히 살폈다. 어둠 속에서 짓밟혀 군데군데 멍이 들고 자잘한 상처가 있었지만 겉으로는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던 베흔이 끄응 소리를 내며 가슴을 붙들고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지난번 황궁에서 카렐에게 받혀 늑골이 부러졌던 자리였다. 지금껏 계속 속을 썩이더니 이번에 힘싸움을 하면서 또 탈이 난 모양이었다.

베흔은 자신의 몸을 살피는 가디언을 앞쪽으로 확 떠밀며 악을 썼다.

“제기랄! 저놈만 잡으면 되니 빨리 쫓아가!”

베흔의 재촉에 가디언들이 카렐을 쫓아가기 시작했지만 잘 보이지도 않는 함정이 사방에 가득한 바닥을 마주하고는 본능적으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

베흔을 일으켜 세워 준 가디언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런 부하에게 베흔이 고통이 어린 표정에 짧으나마 만족스런 미소를 덧붙였다.

“걱정 마라. 곧 바닥에 뒹굴고 있는 그년 시체를 발견할 테니. 도망은 갔어도 그 정도면 충분히 치사량이니.”

“돌아보지 말고 가라니까. 제기랄.”

가까스로 도망쳐 온 카렐은 락시 대장에게 칭찬 대신 핀잔부터 퍼부었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건 둘 다 알고 있었다.

“적이 어디쯤 있죠?”

락시 대장이 굴 쪽을 돌아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등 뒤에서는 함정 사이를 어렵게 지나고 있는 근위대 가디언들이 신경질적으로 지르는 고함과 종종 들리는 비명소리가 이 동굴의 축축한 공기를 울리고 있었다.

“목을 다치셨군요.”

락시 대장이 카렐의 목을 가리켰다. 자신의 부상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카렐은 그제야 목을 더듬으며 따끔함을 느꼈다. 지난번 알로 언덕의 전투에서 다쳤던 자리에 감았던 드레싱이 어느새 떨어져나가 있었다. 밀려 넘어지면서 긁힌 것인지, 아니면 몸을 덮치던 가디언을 쳐내다가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별 생각 없이 더듬은 상처에는 많지 않은 피와 조금 전 베흔이 얼굴에 뿌린 이상한 액체가 함께 묻어 있었다.

“뭔지 몰라도 느낌이 좋지 않아.”

카렐이 소매로 목과 얼굴에 묻은 그 ‘정체불명의 액체’를 급히 닦아내고 ‘흑요석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제일 선두의 이트닌은 ’흑요석 방‘을 거의 건너 반대편에 도착해 있었고, 무거운 짐을 진 3명의 전사들이 중간에,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있던 에스더가 좁은 발판에 막 매달리던 참이었다.

“저놈들 시야에서만 벗어나면 돼. 이 방 앞에서 한참 헤맬 테니. 먼저 가게, 내가 뒤에 가는 게 나아.”

카렐은 락시 대장에 이어 마지막으로 벽에 매달리며 조금 전 지나온 구멍을 돌아보았다. 특유의 감각을 잃은 가디언들이 온통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 채 그 함정들 사이를 비틀비틀 쫓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가디언인 이상, 보통의 전사들보다는 빠를 테고,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조심해서 나아가라. 맨 끝에 있는 밧줄은 절대 건드리지 말고.”

“알고 있습니다. 이미 주의를 받았습니다.”

락시 대장이 발판에 오르고, 마지막으로 카렐이 발판에 급히 발을 올려놓았다. 카렐까지 오른 순간, 벽에 고정된 발판이 끼익 소리를 내며 출렁였다.

“아앗!”

가뜩이나 덩치 큰 에키트 전사 3명에 무거운 짐, 에스더까지 올라 있는 상황에서 유난히 무거운 두 사람까지 얹히면서 이 오래된 발판이 결국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놀란 락시 대장이 급히 움직임을 멈추었고 카렐은 손을 뻗어 재빨리 벽에 매달렸다.

문제는 짐을 진 3명의 전사들이었다. 앞의 2명과 에스더가 버둥거리며 운 좋게 벽을 붙들었지만 제일 후미에 있던 전사는 결국 중심을 잃고 비명과 함께 옆으로 미끄러졌다.

“아아악!”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전사의 큰 몸이 쿵 소리를 내고 부딪치면서 발판이 또 한 번 크게 출렁거렸다. 그 충격에 반쯤 삭아 있던 발판의 고정 핀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판을 무조건 잡아! 잡아!”

벽에 매달린 카렐이 악을 썼지만 멀리 나가지를 못했다. 발판은 중간이 꺾이며 V자로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우읍!”

등에 진 짐 때문에 중심을 잃은 전사는 공중을 한 바퀴 빙 돌아 흑요석이 가득 박힌 끔찍한 바닥에 얼굴부터 내리꽂히며 사방에 피를 뿌렸다. 발판을 필사적으로 안고 있던 에스더와 락시 대장 역시 벽에 한 번 부딪히고는 흑요석 더미 위로 죽 미끄러졌다.

“하, 아아악.”

먼저 떨어져 즉사한 전사의 위로 떨어져 목숨을 건진 에스더가 다리를 움켜쥐며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어깨와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아래까지 떨어진 락시 대장이 문제였다.

“제엔장!”

카렐이 손끝으로 돌을 부수며 벽을 짚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봐, 이봐, 괜찮나?”

“폐, 폐하.”

흑요석 더미 위에 비스듬하게 떨어진 그는 가슴 옆과 무릎이 찢긴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직 벽에 매달려 있는 카렐을 우두커니 올려보았다. 찢겨진 무릎 안쪽으로는 슬개골이 훤히 드러났을 정도였다.

자신의 상처를 쳐다보던 락시 대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성한 에스더 경을 데려가십시오…….”

“닥쳐라.”

카렐이 한 손으로 기를 쓰고 중심을 잡으며 그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무슨 이유엔지 정신이 몽롱해지며 손에서 힘이 죽 빠지는 것 같았다.

“으읍!”

카렐이 돌 위에서 미끄러지며 흑요석더미 위로 곤두박질쳤다.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든 카렐은 벽의 우둘두둘한 홈을 가까스로 쥐고 자리에 멈추었다.

“여길 나가도 어차피 못 움직입니다.”

흑요석 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락시 대장이 고개를 저으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찢긴 허파에서 공기가 새고 있는지 숨소리를 따라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 옆을 타고내린 그의 진득한 피가 바닥을 따라 방 중심으로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락시 대장이 고통을 참으며 다시 침을 삼켰다.

“가디언을 둘이나 죽였다고 전해 주십시오. 아들놈이 자랑스러워 할 겁니다.”

카렐이 손을 뻗어 버둥거렸지만 락시 대장에게는 도저히 닿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구해낸다고 해도 어차피 곧 숨이 끊어질 판이었다.

“꼭, 꼭 전해 주십시오.”

락시 대장이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숨을 몰아쉬며 황제에게 애써 미소를 지었다. 카렐에게도 이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족은……걱정 마라.”

그는 죽어가는 락시 대장에게서 어렵게 시선을 돌리고 혼자 나아가기 시작했다.

“에스더 경! 움직이지 말고 있어!”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죽은 전사의 시체를 딛고 있던 에스더는 먼저 떨어져 시체의 등에서 짐을 벗겨내 자신이 급히 짊어졌다. 넓적한 상자는 구석이 약간 부서져 있었지만 전사가 앞으로 떨어진 덕분에 형태는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었다.

“으읍.”

에스더를 향해 벽을 타고 움직이던 카렐은 자신의 눈앞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젠장, 이게 뭐지.”

카렐은 애써 정신을 차리며 에스더에게 다가가 팔을 뻗었다. 죽은 전사의 짐을 대신 진 에스더가 황제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순간 두 사람분의 무게를 받치게 된 카렐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카렐은 자신의 뺨으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팔에 힘을 주어 에스더를 힘껏 잡아올려 등에 업었다.

“내 목을 안아.”

갑자기 어깨에 걸리는 힘에 놀란 에스더는 앗 소리와 함께 황제의 목을 뒤에서 꽉 안았다. 카렐은 이 와중에도 상자를 챙긴 그의 모습에 조금 놀랐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못 받쳐주니 목을 꽉 안고 있게.”

“조심하십시오.”

에스더가 카렐의 어깨에 턱을 걸며 몸을 바싹 움츠렸다. 카렐은 에스더를 등에 진 채 이트닌이 기다리는 반대편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이 흑요석 방에는 암흑 속에 홀로 남겨진 락시 대장이 꿈틀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마치 넋 나간 듯 중얼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디언 셋, 넷.......아니 열 명을 죽였다고 전해주십시오.”

잠시 후, 함정들을 돌파한 근위대 가디언들이 이 흑요석 방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두에 달려오던 가디언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모서리의 흑요석을 밟은 가디언이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뻔했지만 동료들이 급히 그의 허리를 추슬렀다. 발이 찢어진 동료가 고통에 몸을 비트는 모습에 전율한 근위대 가디언들이 차마 나아가지 못한 채 이 컴컴한 방 안에 랜턴을 비추었다. 하지만 그들의 불빛도 이 암흑의 방 안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어디로 간 거지?”

주변을 구석구석 뒤지던 가디언들은 잠시 후, 벽 한쪽에서 부서진 발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래대로 설치되어 있었다면 벽에 바싹 붙어 눈에 잘 띄지 않았겠지만 중간이 꺾이면서 끄트머리가 튀어나와 환한 랜턴 불빛에 바로 드러나고 말았다.

눈치 빠른 가디언 한 명이 발판 위를 손으로 짚어 보았다.

“이걸 타고 건너간 게 틀림없어.”

“망가진 것 같은데? 놈들이 망가뜨려놓고 갔나?”

“리프트케이블 걸면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구 가진 사람?”

동료들의 눈빛에 머뭇거리던 가디언 중 한 명이 허리에 건 리프트케이블을 하는 수 없이 꺼내들었다. 그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동료들의 무언의 압박에 하는 수 없이 이 발판이 향하고 있는 곳을 향해 리프트를 쏘았다. 첫 번째는 허공으로 날아갔는지 허탕이었지만 방향을 조금 바꾼 두 번째는 어디엔가 딱 소리를 내며 박히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가자!”

의욕에 넘치는 가디언 한 명이 걸린 케이블에 즉시 매달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중간쯤 나아가던 그는 무심코 랜턴으로 바닥을 비춰 보았다. 순간 그는 이곳에 매달린 것을 바로 후회해야 했다.

“씨발, 빌어먹을, 저게 뭐야? 떨어지면 완전히 골이잖아?”

투덜대던 그는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에 깜짝 놀라 랜턴을 휙 돌렸다. 빛이 멀리 나가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누구냐!”

“썅, 날 버리고 갔어.”

‘흑요석 방’의 거의 끄트머리에 웬 야만족 거인 한 명이 쓰러져 당장 죽을 듯 떨며 신음하고 있었다. 옆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아 이미 죽음을 코앞에 둔 모양이었다.

“에키트 족이냐?”

가디언의 물음에 그 거인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당초 발판 중간쯤에서 떨어진 모양이었지만 나름대로 동료들을 따라가 살아보려 기어간 것인지 방의 끄트머리까지 흥건한 핏줄기가 이어져 있었다. 치명적인 흑요석더미 위를 기어간 그 거인의 온몸은 갈가리 찢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살려……줘요.”

락시 대장이 불빛을 비추는 근위대 가디언에게 누더기가 된 팔을 뻗었다. 케이블을 타고 건너던 가디언이 이 죽어가는 거인의 얼굴에 불빛을 비추며 물었다.

“카렐 놈은 어디로 도망갔나? 대답하면 구해주겠다.”

“제발, 제발.”

락시 대장이 희미해져가는 의식을 어렵게 붙든 채 고개를 저으며 계속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디언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말 하라니까! 어디로 갔냐고! 대답하면 올려줄 테니!”

“빨리 날…….”

락시 대장이 신음하며 시간을 끄는 사이, 근위대 가디언들이 하나둘씩 케이블에 매달려 이 ‘흑요석 방’에 들어섰다. 그새, 케이블을 붙들고 방을 건너는 가디언들은 어느새 7, 8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쳇, 그냥 뒈져.”

이 야만족이 가망이 없음을 눈치 챈 가디언은 다시 랜턴을 움직였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뚫려 있는 작은 굴을 어렵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봐, 여기…….”

그는 뒤로 고개를 돌리며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했다. 그 순간, 밑의 거인이 중얼거리는 짧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 혼자?”

불길함을 느낀 그 가디언이 거인을 휙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의 ‘죽음의 미소’를 난생 처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

락시 대장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벽에 늘어진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던 가디언은 무언가 투둑 하며 끊어지는 소리에 천장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

<이번 파트는 나누기가 정말 고약하군요......이번 편도 자르기가 뭣해서 엄청 길어졌습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