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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55화 (652/1,132)

< -- 655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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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트닌과 에스더, 살아남은 2명의 전사들과 함께 급히 걸음을 옮기던 카렐은 갑자기 굴이 크게 흔들리는 느낌에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지진?”

영문을 모르는 일행들이 허겁지겁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 엎드렸다. 하지만 카렐은 자꾸 흐려지는 시야를 애써 추슬러 뒤쪽, ‘흑요석 방’을 급히 돌아보았다. 크지 않은 출구 너머, 뜯겨나간 그물과 함께 거의 사람만한 바위들이 그 안으로 우루루 쏟아지는 끔찍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 학.”

놀란 카렐의 턱 밑으로 땀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케이블에 매달려 있던 근위대 가디언들의 찢어지는 비명소리, 운 좋게 아직 들어서지 않은 다른 가디언들의 다급한 고함소리가 바위 쏟아지는 굉음 사이로 짧게 들려왔다. 내리막이다보니 그쪽에서 몇 개의 집채만한 바위가 굴러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른쪽 벽에 붙어!”

카렐은 바로 옆에 있던 에스더와 이트닌을 급히 잡아당겼다. 2명의 전사들도 재빨리 벽에 붙어 돌덩이를 피했다.

“부지우루그우미드 야즈디기르드…….”

카렐의 입에서 죽은 자의 긴 이름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그 아름답고도 치명적인 방은 마지막까지 임무를 다한 한 전사의 시체를 품은 채 뿌연 흙먼지를 뿜으며 거대한 바위무덤이 되어 있었다. 무너진 방 쪽에서 짙은 흙먼지와 피냄새를 품은 탁한 공기가 확 몰려왔다.

“정말로 가디언 10명을 죽였구나.”

카렐이 뿌연 먼지 속에서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웃고 있는 것인지, 울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천장이 무너지면서 쌓인 바윗덩어리로 구멍은 이제 완전히 막혀 있었다.

막혀버린 굴을 뒤로하고 다시 일어나려던 카렐이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폐하?”

깜짝 놀란 에스더가 막 넘어지려는 황제를 와락 껴안았다. 이 추운 굴 안에서 황제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는 것이 어딘지 심상치 않았다. 에스더는 목의 머플러를 급히 풀어 땀을 닦아주려 했지만 카렐은 그를 저지하며 목덜미를 다시 더듬었다.

“뭔가 이상해. 천 말고 물로 적셔서 얼굴과 목을 다 닦아주게나. 물통 좀 있으면 줘 봐.”

“예? 날이 춥습니다. 피부가 젖었다가는 자칫…….”

“베흔이 뿌린 액체가 뭔가 수상해. 아무래도 독인 것 같아.”

카렐이 끄응 하며 몸을 비틀었다. 창백해진 이트닌과 전사들이 쓰러진 황제를 빙 에워쌌다.

“독이요?”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은 에스더는 머플러에 물을 뿌려 황제의 얼굴과 목, 옷 사이로 반쯤 드러난 쇄골과 어깨까지 꼼꼼하게 닦기 시작했다.

눈과 귀 위에 깨끗한 물을 붓고는 몇 번 껌벅거린 카렐은 에스더가 닦아 준 목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상처가 날 죽였다가 살렸다가 하는군.”

“예?”

카렐이 가리킨 건 지난번 다친 상처에 아직 조금 남아있는 피딱지였다. 드레싱이 떨어지며 피딱지도 함께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베흔 놈이 내 상처를 보고 독을 뿌린 모양인데 딱지하고 드레싱이 떨어지면서 독을  많이 닦아낸 것 같아. 몸이 으슬으슬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닐 거다. 옛날에 푸엘 숲에서 독충에 많이 물려 봐서 느낌을 알아. 이보다 더한 적도 있었지만 며칠 심하게 앓고 나니 나았어. 그런데 도리어 문제가…….”

카렐이 고개를 저으며 눈을 꼭 감고 억지로 눈물을 흘렸지만 따끔거리는 느낌이 가시지를 않았다.

“눈하고 양쪽 귀에 좀 들어간 것 같아. 빌어먹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은 빨아내 보겠습니다.”

이트닌은 카렐을 바닥에 눕히고는 드레싱이 떨어져나간 상처를 피가 나도록 칼로 깊숙이 갈랐다. 상처에 입술을 가져가려는 그를 에스더가 살짝 가로막았다.

“내가 하겠소.”

이트닌을 밀어낸 에스더는 피가 번지는 카렐의 목 상처에 스스럼없이 입술을 대고 힘껏 빨아냈다. 카렐은 고개를 젖힌 채 귀와 눈의 따끔거리는 통증, 가벼운 경련과 피와 독기운이 빠져나가는 따끔함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할머니도 마지막에 이런 느낌이셨을까.”

카렐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씩 둘러보며 나름대로 가볍게 말했다. 에스더가 입에 머금은 피를 뱉어내며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상께서 농이라도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아니되옵니다.”

몇 번이나 피를 뱉어내고 이제 더 이상 빨아도 피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황제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래, 가긴 가야지. 여기서 나가야지.”

카렐은 등에 멘 무기 묶음에서 오르마즈가 쓰던 ‘나즈라의 검’을 뽑아 손에 쥐었다. 어차피 정체가 드러난 이상, 무슨 무기를 쓰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칼을 짚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바닥을 디디고 섰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에스더 대신 이트닌이 이 거구의 황제를 부축해주려 했지만 카렐이 손을 저었다.

“됐어, 이 정도는 혼자 갈 수 있어.”

“움직이시면 독이 더 빨리 퍼집니다.”

“정말로 힘들어하면 그때 도와주게나.”

카렐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시야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지만 벽을 타고 흐르는 기류는 이상하리만큼 똑똑히 보였다.

‘흑요석 방’ 조금 앞에서 다친 가슴을 응급치료받고 있던 베흔은 갑자기 앞에서 들려 온 우르릉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닥의 진동에 놀라 움찔거리던 그는 앞쪽에서 확 밀려오는 거친 흙먼지 바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확 숙였다. 흙먼지와 함께 날아드는 돌조각과 흙가루가 그의 헝클어진 머리 위를 확 덮쳤다.

“피하십시오!”

누군가 소리쳤지만 너무 좁다보니 피할 공간도 없었다. 그는 바닥에 뒹굴던 부서진 방패 조각을 급히 들어 앞을 가렸지만 ‘흑요석 방’쪽에서 갑자기 굴러든 돌덩이가 방패를 후려치고 뒤이어 그의 머리와 뺨까지 사정없이 가격하고 나서야 옆으로 굴러갔다. 머리에 충격을 받은 베흔은 뒤로 벌렁 쓰러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방패가 아니었다면 머리가 부서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무서운 폭풍이 스쳐 지난 후, 베흔이 벽을 짚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머리는 다쳤고, 뺨은 찢겨 피가 흘렀고, 옆구리는 여전히 쑤셔왔지만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랜턴을 들고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가다가 함정에 발이 확 빠지고 말았다.

“읍!”

중심을 잃고 앞으로 맥없이 나동그라졌던 그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나아갔지만 그런 그의 앞을 웬만한 어른 몸통만한 큰 바위가 딱 가로막고 있었다. 넓지도 않은 이 통로는 흑요석 방 쪽에서 굴러온 바윗덩이들로 꽉 막혀 이제 더 이상 나갈 수도 없었다. 게다가 뿌연 흙먼지로 가득 차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도대체 몇 명이 당한 거냐? 카렐 그놈은??”

바윗덩이를 붙들고 울부짖는 베흔을 다른 가디언들이 급히 잡아끌었다.

“상황이 안 좋으니 일단 물러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얼마나 당한 거냐고!”

베흔이 악을 썼지만 아무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곁에 살아서 서 있는 가디언들이 고작 서너 명 뿐인 것을 보아 저 안에서만 10명 가까이가 당한 것이 분명했다.

“일단 나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도 보이지 않고 숨도 쉬기 어렵습니다.”

가디언들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베흔을 급히 들쳐 업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워낙 어두운 데다가 온몸에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썼다보니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별 것 아냐, 머리를 맞아서 가벼운 뇌진탕인 것 같아.”

“밖에 야투 박사가 있습니다. 먼지라도 가라앉고 나서 다시 돌아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베흔은 ‘야투 박사’라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드는 것 같았다. 물론 그 군의관 덕택에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 때문은 아니었다. 이곳에 죽어도 못 들어온다고 버티던 야투 박사, 저 바위에 깔려죽었을 카렐, 그리고 이곳에 들어왔다가 죽을 위기에 처한 자신까지. 눈치빠른 그의 뇌리에는 무언가 불길한 직감이 바로 흘러갔다.

“아리아노 경의 직감이 생각보다 더 무서운 것을 짚어냈던 것인지도 몰라…….”

베흔이 피를 털어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가디언들의 등에 업힌 베흔은 야투 박사가 기다리고 있는 12갈래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위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곳에서 기다리던 야투 박사는 피를 흘리며 돌아온 베흔의 상처와 몸 곳곳을 다급히 살폈다.

“제기랄! 안에서 뭐가 무너져서 떼죽음당할 뻔했어!”

“그럼 그 가짜 황제놈은 잡으신 겁니까?”

이 상황에서 카렐의 생사부터 묻는 야투 박사의 눈빛을 재빨리 살피며 베흔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상처 위에 독을 왕창 뒤집어썼어. 저 돌무더기 속에 파묻혀 있겠지. 빌어먹을, 저놈의 먼지만 아니었어도 수급을 잘라오는 건데.”

“그럼 죽은 겁니까?”

“당연하지.”

베흔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야투 박사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수고하셨습니다. 경사가 따로 없군요. 가벼운 뇌진탕 같지만 외상도 있고 혹시 혈종이라도 생겼을지도 모르니 나가서 치료를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래된 지하공간이니 혹 곰팡이에 의한 독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항상 걸고 다니는 작은 숄더백을 뒤적뒤적 뒤진 야투 박사는 붕대와 주사약 한 개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베흔은 귀찮다는 듯 붕대를 쳐내며 자신의 두 발로 일어섰다.

“됐어, 필요 없어. 붕대감고 웃긴 꼴로 나가느니 그놈 수급 들고 멋지게 나가서 가짜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게 더 드라마틱해. 줘 봐. 근육주사야? 정맥주사야?”

베흔은 야투 박사의 손에서 주사기를 거칠게 낚아채서는 박사 반대편, 그가 볼 수 없는 자신의 한쪽 엉덩이 위에 서슴없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약을 직접 죽 짜 넣고는 빈 주사기를 옆에 내던졌다.

야투 박사가 빈 주사기를 얼른 주워 가방에 도로 챙기며 물었다.

“혼자 수습하시긴 어려운 상황 같은데, 사역병들 불러들여서 카렐 놈 시체를 파낼까요?”

“나가서 몸 좋은 사역병 20명 정도 들여보내. 곧 카렐 놈 시체를 가지고 나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알리고. 혹시 부상자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외과의하고 의무병 좀 들여보내고 넌 나가서 행정일 처리하고 있어.”

‘행정일’이라는 뜬금없는 지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야투 박사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는 내과의였고, 당장은 중환자가 나온다고 해도 손볼 수 있는 의약품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야투 박사가 나간 것을 확인한 베흔은 함께 온 정규군 장교를 바싹 불러들였다.

“이거 받아라.”

베흔이 조심스레 내민 건 그의 벨트에 달려 있던 작은 가죽주머니였다. 원래는 작은 소품들을 담는 낡은 주머니였지만 지금 그것을 다루는 베흔의 손길이 유달리 조심스러웠다. 장교는 조금 전, 베흔이 ‘직접 놓은’ 주사약이 그의 살 대신 이 주머니를 찔렀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챘다.

“안에 아직 약물이 들었을 거다. 1군단 의무대로 가져가 당장 확인하고 야투 박사는 모르게 해. 무슨 뜻인지 알겠냐?”

장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는 근위대장의 말뜻을 바로 눈치 채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저 안쪽을 계속 뒤지고 있을 테니 결과가 나오는 대로 내게 직접 가져와라.”

잠시 내리막 굴을 걷던 카렐이 당혹스런 얼굴로 이트닌을 돌아보았다.

“아까는 이렇지 않았는데.”

카렐이 랜턴을 겨눈 곳에는 어디서 들어온 것인지 물이 잔뜩 고여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급하게 내리막이었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꺾이는 지점이었다. 천장 높이와 언뜻 비교해 보아도 깊이가 웬만한 사람 목까지 찰 것 같았다. 조금 전 굴러 내려간 바윗덩이가 물에 잠겨 있는 것을 보아 이곳이 가장 낮은 지점인 것 같았다.

물의 상태와 수위를 잠시 확인한 에스더가 말했다.

“맑고 미지근합니다. 조금 전 일 때문에 균열이 생겨서 지하수가 흘러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수위가 조금씩 오르고 있지만 어느 정도 차면 멈출 겁니다. 곧 이 길이 완전히 막힐지도 모르겠습니다.”

“균열 때문인지, 처음부터 염두했던 것인지는 모르지. 아직 깊지 않으니 그냥 지나가자. 이 뒤로는 계속 오르막이었어. 이트닌, 자네는 헤엄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전 특무대 요원 출신입니다.”

카렐은 키가 작은 에스더를 한 팔로 번쩍 안아들었다.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도 헤엄은 칠 줄…….”

“짐이 있잖아.”

카렐이 조금 어눌해진 발음으로 느릿느릿 대답했다. 에스더는 그의 얼굴에서 계속 흐르는 식은땀을 다시 소매로 닦아주었다. 하지만 나른해진 표정의 황제는 눈이 반쯤 감김 채 마치 졸린 사람처럼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10척 정도 되는 웅덩이를 걸어서 비틀비틀 건넌 카렐은 에스더를 다시 내려놓고 걷기 시작했다. 이트닌과 2명의 전사들이 차례대로 그 뒤를 따랐다.

카렐의 말대로, 웅덩이를 지난 후로는 끝도 없이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고 있었다. 헐떡이며 한참동안 걷던 에스더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계속 올라가는 걸 보니 출구가 가까워진 모양이지요?”

“응.”

카렐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공기가 조금씩 차가워지고 있었다.

웅덩이를 지난 후 시작된 오르막길은 제법 길었다.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되면서 일행들의 숨에 턱에까지 닿았지만 지면에 가까워진다는 안도감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힘든 길이 이어질수록 호흡과 맥박이 가빠지면서 독기운에 황제가 점점 더 힘들어한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거의 숨이 넘어갈 듯 헐떡대던 일행의 앞에 위로 향하는 계단이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앞으로 랜턴을 비추던 에스더가 깜짝 놀란 듯 황제를 돌아보았다.

“이 위에 뭐가 있죠?”

이번에 만난 계단, 그리고 앞으로 보이는 굴은 지금까지의 공간과는 완전히 달랐다. 굴 사방은 조각이 새겨진 매끈한 대리석으로 마감이 되어 있었고, 나무와 대리석으로 마감된 이 계단도 비록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는 있었지만 옻칠이 된 검은 빛깔 목재 난간 하나하나에 화려한 조각과 바람 문자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후우.”

카렐이 갑자기 숨을 가다듬으며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리, 계단 위로 조금 전, 이곳에 처음 온 그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넓은 공간이 희미하게 보였다.

카렐은 마치 개선장군처럼 어깨를 곧게 펴고는 칼을 짚고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씩 위로 가까워지면서 습하고 따뜻했던 지하의 공기가 점점 차가워져갔다. 그리고 일행은 이 지독한 지하공간의 끝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하아.”

계단의 꼭대기에 선 카렐은 눈을 감으며 맑고 선선한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켰다. 그의 앞에는 직경 200척(60m)이 넘어 보이는 원형의 거대한 홀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갑갑하던 공간과는 달리 랜턴 불빛이 훤하게 앞을 비췄지만 워낙에 홀이 크다보니 반대편 벽까지는 웬만한 시력으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벽에는 먼지와 세월의 때가 잔뜩 앉아있었지만 랜턴 불빛에 희미하나마 광택을 반사시킬 정도로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검은 대리석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돔 형태의 천장도 빛이 겨우 닿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았다.

“세상에.”

상상을 넘어서는 규모에 놀란 에스더가 무심결에 황제의 손을 잡았다. 보통의 다른 예배당들은 중앙에 1개의 제단이, 곡면의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파인 벽감(Niche)에 각 교단 마구스들의 등신(等身) 석상이 위치해야 했지만 이곳은 무언가 달랐다.

이곳에는 중앙의 제단도 없었고 벽감에는 사람 키의 3,4배에 달하는 위압적이고 거대한 석상이 30여개 가까이 세워져 있었다. 각 석상의 앞에는 제단 하나씩이, 그리고 그 위에는 사람 크기의 상자, 아니 석관이 하나씩 위치해 있었다. 석관 뚜껑에는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섬세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역대 대신관들의 무덤……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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