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57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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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아득했다. 자신이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베흔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급히 랜턴으로 사방을 비춰보았지만 그가 쓰러져 있던 곳은 처음 물에 뛰어들었던 그곳이 아니었다. 물론 같이 뛰어든 부하들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옆에 둥둥 떠 있는 토사물은 아무래도 베흔 자신이 뱉어놓은 것 같았다.
“이런, 씨발.”
그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움켜쥐고 시계를 확인했다. 물에 뛰어들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지만 천장을 놓친 이후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굴이 가파른 오르막인 것을 보아 이곳에서 가장 낮은 지점의 V자 모양 굴에 물이 고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다 어떻게 된 거지.”
베흔이 물 속에 얼굴을 집어넣어 부하들의 흔적을 찾았지만 보일 리가 없었다. 그가 나온 곳 옆으로 원래 있던 자연굴인지, 아니면 파다가 실수를 발견하고 방향을 돌린 것인지 알 수 없는 크고 움푹한 구멍이 보였다. 베흔이 급히 그 구멍까지 뒤져보았지만 그 안도 역시 비어있었다.
“다 뒈졌나.”
베흔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네들이 건너다가 질식사했든, 중간에 포기하고 되돌아갔든, 어쨌든 이제 베흔 역시 혼자였다.
“젠장할.”
그는 물에 뛰어들기 전 벗어서 허리띠에 묶어놓았던 신발을 풀어 다시 신었다. 부하들이 장비를 갖추고 와 주기를 하릴없이 기다리기도 불안했다. 이곳부터 오르막이라면 뒤집어 말해 지면으로 올라가는 길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지독하리만큼 질긴 생명력을 자랑해 온 카렐을 이번에도 살려서 보내줄 수는 없었다.
베흔은 단검을 꺼내들고는 조금 전 들어간 구멍 위의 바위를 긁어 크게 글씨를 썼다.
-나는 살아있다. 먼저 올라가서 놈의 머리를 갖고 올 테니 따라 올라와라.-
메시지를 남긴 베흔은 어질어질해진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며 눈앞의 오르막 굴을 비틀비틀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거웠던 머리도 조금씩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정말일까.”
한 손에 칼을 쥐고 걷던 베흔은 어느새 또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야투 박사가 다른 생각을 품고 근위대에 지원한 것이 확실해진 이상, 자신과 주페가 아무 혈연이 없다는 그의 보고서가 사실일지 아닐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 불확실성을 그대로 떠안은 채 그는 ‘어쩌면 혈육일지도 모르는’ 한 사람을 죽이겠다며 광분해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모습이 갑자기 한심하다고 느꼈다.
“으읍?”
꽤 긴 오르막길을 바삐 올라온 그는 눈앞의 광경이 달라지자 반사적으로 온몸에 힘을 주었다. 앞에는 먼지가 뿌옇게 앉은 긴 계단이 보였다. 그리고 웅웅거려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오고 있었다. 굴 안의 빛과 진동 흡수기능도 이제 다했는지 이곳에선 작은 소리도 벽을 타고 웅웅거리며 울렸다.
“카렐 네놈 좋은 곳도 끝났군.”
적개심으로 재무장한 베흔은 양손검을 뽑아 손에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계단을 조심조심 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정말로 끝내야지, 정말로.”
황제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던 에스더는 그의 손끝이 움직이는 느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재빨리 황제의 심장박동을 살폈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부터 카렐은 앞을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이트닌이 나간 출구 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기다림에 지친 카렐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적이 여기까지 온다면 날 놔두고 이트닌이 간 길을 따라가게나.”
“제발, 말씀을 줄이십시오. 지금은 무조건 가만히 계셔야…….”
에스더가 무의식적으로 말했지만 생각해보니 황제는 지금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심지어 어렵게 말을 하는 그의 발음도 많이 어눌해져 있었다.
“난 후손이 없어.”
에스더는 이번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황제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리쿠 학장하고 장난삼아 얘기했었어……내가 전쟁 중에 죽으면 어쩌겠냐고.”
에스더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난 학장에게 황제가 되라 했는데……”
카렐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고집불통은 남아있는 내 세포로라도 2세를 만들겠다더군. 아이가 클 때까지만 황제 자리에 있겠다고. 빌어먹을 고집불통 같으니.”
카렐이 짧게 입가에 웃음까지 지었지만 곧 고통에 일그러들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지.”
카렐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못 가져가게 된다면 저 맨 위의 상자는 태워 없애버리게나.”
“예?”
황제가 못 듣는다는 것을 또 잊어버린 에스더가 무심코 되물었다.
“저 안 어딘가에 내 아버지의 아버지 세포가 있을 거야…….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지만.”
순간 놀란 에스더가 황제의 가슴을 짚은 손에 힘을 꽉 주며 한쪽에 쌓아놓은 상자를 돌아보았다. 황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왔던 이유였지만 그는 황제가 말하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으읍.”
그때, 에스더는 자신을 향해 반대편에서 겨눈 랜턴 불빛을 느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 있던 그는 얼굴에 바로 꽂히는 불빛에 깜짝 놀라 얼른 눈을 가렸다. 그곳에는 한 손에 양손검을 든 누군가가 눈가를 씰룩거리며 서 있었다.
“내 핏줄을 꼭 밝히고 싶었는데……그러고 싶었는데…….”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 카렐은 여전히 혼잣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랜턴을 겨눈 베흔은 쓰러진 카렐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는 예리한 양손검이 날을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었다.
“오지 말아요, 오지 말라고요.”
당황한 에스더가 옆에 풀어놓은 황제의 벨트에서 단검을 뽑아들고 베흔의 앞을 막아서려 했지만 얼토당토않은 짓이었다.
“꺼져, 이년아.”
베흔은 단검을 휘두르려는 이 귀족 아가씨의 얼굴을 건틀렛 낀 손으로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그리고는 얼굴을 강타당하고 휘청거리는 에스더의 뒷덜미를 팔꿈치로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목과 머리에 충격을 입은 에스더는 바닥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어. 당신이 누구의 피를 받았는지……그런데 왜 유언장에도 제대로 남기지 않으셨을까……. 못난 양반 같으니……내가 고작 그 정도로 상처 입을 줄로 아셨을까.”
베흔은 카렐의 발밑에 우뚝 멈춰 서서는 무기력하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적 황제’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카렐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 꼴이라면 카렐을 찔러 죽이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지금이야말로 그의 꿈을 이룰 때였다.
카렐은 보이지도 않는 눈을 껌벅거리며 혼잣말을 이었다.
“아니면……아비가 아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할 걸 염려해서 아예 비밀로 묻히길 바라셨을지도 모르지.”
베흔의 두 손에 다시 힘이 꽉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흔들리는 감정을 감추려는 듯 입술을 꾹 깨문 채 여전히 카렐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옆에 풀어놓은 황제의 무기 꾸러미에서 칼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도 애타게 되찾고 싶었던 그의 플람베르주 ‘헤크마의 검’이었다.
베흔은 도무지 손에 익지 않는 새 양손검을 옆에 내버리고는 그 정든 날을 죽 뽑아들었다. 날을 아래로 향해 두 손으로 플람베르주를 쥔 베흔은 그 끝을 카렐의 허벅지를 향해 겨누었다. 하임달의 전장에서 쓰러진 오르마즈를 난도질했을 때처럼, 그는 원한맺힌 적수의 심장을 바로 찔러주는 자비 따위에는 익숙지 않았다.
“이 새끼야, 좀 쳐다봐.”
베흔이 이를 빠득 갈았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스스로가 칼날 밑에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이젠 맘이 바뀌었어……. 모든 내 핏줄을 지워버리고 싶어.……내 2세에게 자손들을 죽인 멍청하고 수치스런 조상을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래, 아버지도 이런 생각이셨을 거야. 틀림없어.”
‘멍청하고 수치스런’이라는 말에 베흔이 콧수염을 씰룩거렸다. 하지만 그는 칼날을 내리꽂을 수가 없었다.
“찔리고 나야 알 거냐, 이 멍청아.”
베흔이 저주섞인 말로 스스로의 적개심을 북돋웠다. 홧김에 발길질을 하려 했던 베흔은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한 귀로 흘렸을 카렐의 독설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그는 칼을 든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눈썹이 닮았군.”
생각없이 중얼거렸던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지 바로 후회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다 큰 이 녀석의 얼굴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카렐의 뺨을 툭 건드려 보았다.
“아냐, 안 닮았어.”
카렐 역시 낯선 손의 감촉에 모든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하지만 이미 감각이 둔해져 있는 그는 이 낯선 손의 주인을 바로 알아채지는 못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이 사람의 이런 식의 손길을 느껴 본 기억 자체가 없었다.
“에스더……이게 뭐냐.”
카렐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베흔이 그의 가슴을 거칠게 내리눌렀다. 이 숙적을 노려보던 베흔은 그와 자신이 가장 닮았다고 생각했던 한 곳을 찾아냈다. 그는 바닥을 짚은 카렐의 큰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보았다. 똑같은 크기의 손바닥, 손가락과 마디 길이도 자로 잰 듯 같았다.
“안 닮았어. 하나도.”
베흔이 카렐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전장에 가끔 나가기는 했지만 성전 이후 별다른 고생을 하지 않은 그의 손은 크기는 해도 나름대로 부드럽고 통통했다. 하지만 카렐의 손은 관절 마디마디 옹이가 진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거칠었다. 푸엘 숲에서 모진 고생을 겪으면서 몇 번이나 부러지고 지독히도 맞아가며 생긴 후유증이었다. 그 때의 망가진 손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었다.
“안 닮았다고, 이년아.”
“누구냐. 누구냐니까?”
카렐은 가슴을 누른 ‘정체불명의 손’을 더듬더듬 붙들었다. 그곳에서 만져지는 것이 익숙한 가디언 팔찌임을 깨달은 카렐의 표정이 조금씩 얼어붙기 시작했다.
“날……따라왔소?”
베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카렐은 계속 물었다.
“나도 수십 번 난도질할 거요?……난 좀 오래 버틸 텐데?”
카렐의 빈정거리는 물음에 베흔의 속이 다시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하지만 이 건방진 적이 아닌,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그는 조금 전 카렐이 ‘태워버려라’고 말했던 상자를 문득 쳐다보았다. 카렐을 바닥에 동댕이친 그는 그곳에 쌓여 있는 8개의 상자 중 봉인이 뜯겨 있는 제일 위의 것을 열어 보았다.
“여기 계셨구려, 파냐드.”
베흔이 중얼거렸다. 민병대 시절, 정보참모 베흔이 X들에게서 수거해 파냐드에게 바쳤던 눈에 익은 ‘목걸이 인식표’들이 그곳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뜯긴 상자 안에는 바로 그가 속한 5세대 X들의 인식표가 각자의 순번에 따라 꽂혀 있었다.
“오랜만이군.”
베흔은 제일 구석에 있던 검은 캡슐을 집어들었다. 초급장교 시절, 그가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가며 칠했던 검은 위장은 세월을 타서인지 이젠 거의 벗겨져 있었다. 선배와 동기들에게 구박받던 무렵 그의 소박한 꿈은 이 인식표를 선배들처럼 멋있고 화려하게 치장해 보는 것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캡슐 뚜껑에 손을 가져갔던 그는 잠시 망설였다. 당시 뚜껑을 여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고, ‘열면 염산과 독가스가 확 나온다’느니 하는 허황된 소문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었다. 물론 그 역시 이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뚜껑을 비틀었다.
안에는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베흔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바로 옆에 있는 동기 즈바크의 캡슐을 집어 다시 뚜껑을 열었다.
“흐읍.”
안을 들여다보았던 베흔은 멍한 얼굴로 카렐을 돌아보았다. 그가 쥔 즈바크의 캡슐 안에는 3개의 바늘만한 세포 보관용 튜브가 틀림없이 제 위치에 꽂혀 있었다.
“여기 있던 세포는…….”
튜브의 용도를 누구보다 잘 아는 베흔은 표정, 감정마저도 잃은 채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득한 느낌에 그는 힘없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검은 때가 뒤덮인 돔 천장 위에서 검은 용 다하카르의 머리 3개가 누군가의 수치가 된 이 멍청한 남자를 비웃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황제, 그보다 더 무기력한 모습으로 멍하니 서 있는 베흔 사이에 마치 천년같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굴과 연결된 출구 쪽에서 여러 명의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웅웅거리는 것을 보아 아직은 감이 좀 멀었다. 베흔의 부하들이 물을 건너 따라온 모양이었다.
빈 캡슐을 목에 건 베흔은 기껏 다시 건진 플람베르주를 다시 카렐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카렐의 모습을 잠시 눈에 담고는 힘없이 돌아섰다.
“제기랄, 고작 건진 게 목걸이 하나라니.”
베흔은 조금 전 내던진 보기 싫은 양손검을 다시 집어들고 비틀비틀 묘 입구로 향했다. 조금 전 물에 빠져죽을 뻔했던 때문인지, 속이 계속 울렁거렸다.
“제기랄, 찔러죽이든 어쩌든 뭐라고 대답을 좀 주란 말이다!”
뒤에 남겨진 카렐은 그가 떠난 것도 모른 채 혼자 악을 썼다. 정신을 차린 에스더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와 그의 손을 집어 옆에 그대로 놓인 플람베르주 위에 얹었다.
“베흔? 베흔?”
카렐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 붉은 머리칼의 남자는 양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묘 밖으로 힘없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베흔.......내 말이 맞소?”
문을 나서던 베흔이 마지막으로 안쪽을 돌아보았다. 카렐은 아프라시아의 기단 묘석에 기댄 채 눈동자를 출구 쪽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 것도 보이지는 않겠지만.
“빌어먹을, 왜 하필 그년하고 엮였냐.”
베흔이 투덜대며 다시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등 뒤에서 들려 온 작은 웅얼거림에 또다시 자리에 멈춰 섰다.
“살아있어 줘서 고맙소……할아버지.”
베흔은 그 자리에서 잠시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가 살아 온 그 긴 세월들이 지금 이 한 순간에 모두 수렴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치한 신파극 같은 별의별 감격적이고 눈물겨운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 어떤 상황의 주인공에도 자신같은 사람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언젠가 어린 카렐을 걷어차는 세네피스를 한쪽에서 통쾌하게 비웃어주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죽기 직전, 형장에서 자신을 올려보던 주페의 처량한 시선이 뒤이어 뇌리에 스쳤다.
베흔은 힘없이 방향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멍했고,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지조차 희미했다. 계단 제일 아래까지 내려온 그의 두 다리가 갑자기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는 랜턴을 앞으로 향하고 계속 걸었다.
합리적인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지금은 카렐이 있는 곳에서 최대한 빨리, 멀리 떨어져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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