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61화 (658/1,132)

< -- 661 회: 파트 9.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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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카렐과 근위대장 베흔이 13선지자의 묘 지하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동맹군과 연합군 양 진영 모두에 퍼져나갔다. 당초 근위대에서는 그 소식을 한동안 숨기려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펜지켄트 지역 근위대 선임자인 4군단장 힐러가 ‘베흔의 시체’를 확인하고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근위대 수뇌부의 할룩스가 불이 날 정도로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이야? 사실이냐고!”

힐러를 호출한 제롬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근위대의 긴급 회의석상에 있는 건 특등급인 보안국장 쿠베와 셈, 그리고 1등급인 각 군단장들이었다. 그들과 대응방안을 상의하던 4군단장 힐러는 난감한 표정으로 상급자들의 눈치부터 살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소식이 이렇게 빨리 제롬의 귀에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인 것 같습니다.”

머뭇거리던 쿠베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제롬의 미묘한 표정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읽어내려 애썼다.

“시체는? 사망을 완전히 확인한 거야?”

제롬이 눈에 잔뜩 힘을 주며 물었다. 이번에는 힐러가 대답했다.

“펜지켄트 박물관에 일단 모셔두었습니다. 군의관이나 본부 참모진들, 그리고 제가 확인했습니다. 물에 조금 불었지만 그분의 시체가 틀림없습니다. 1차 DNA조사결과도 일치합니다.”

“흐음.”

잠시 당혹스런 표정을 짓던 제롬은 알았다는 짧은 대답만을 남긴 채 급히 모습을 감추었다.

“가식이야.”

셈의 짧은 한 마디에 쿠베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롬의 표정을 읽던 쿠베였지만 같은 순간, 눈앞의 누군가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 인간 속으로는 좋아 죽겠지. 표정 관리하느라 죽을 맛이겠어. 대장이 없으면 제 세상일 테니.”

쿠베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4군단장 힐러 역시 똑같은 말을 그에게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베흔에 이어 2인자인 제파가 적의 포로로 잡혀 있으니 원칙대로라면 이제 근위대의 1인자는 셈보다 선배인 보안국장 쿠베의 몫이었다. 지금껏 베흔의 오른팔로 갖은 비밀스런 일을 모두 처리해 온 만큼 그만큼 근위대 사정에 능통한 사람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 명이 또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쨌든 지금은 전시니, 야전부대 위주의 체계를 계속 유지해 나가는 게 좋겠어.”

셈의 한 마디에 자리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정규군을 이끌던 제파가 포로가 되면서 가디언부대와 정규군 모두를 사실상 관리하고 있는 것이 셈이었다. 전형적인 야전무장인 만큼, ‘밀실 정보장교’인 쿠베와는 생각하는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휘하에 거느린 병력 수만으로 보자면 셈이 틀림없는 실권자였다.

두 특등급의 묘한 신경전을 눈치 챈 힐러가 헛기침을 하며 동료 군단장들을 돌아보았다. 사실상 군단장들의 지지 향방이 이 둘 중 ‘새 근위대장’을 뽑는 지렛대가 될 터였다. 하지만 정치감각에 편중된 쿠베와, 야전감각에 편중된 셈 둘 중 누가 된다 해도 이전같이 ‘제국을 떡 주무르듯’ 했던 베흔의 장악력을 따라가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였다.

“적은 황제가 죽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해. 적이 곧 분열될 테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남부와 함께 밀어붙이면 손쉽게 승리를 따낼 수 있을 거야.”

“누구 좋으라고요?”

쿠베의 제안에 아니나다를까 셈이 바로 반격을 하고 나섰다.

“황제가 부실하다면 근위대의 권위 또한 부실해집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연합군이 승리한다면 우리는 근위대의 자존심도 지키지 못한 채로 제롬 공과 남부의 수족이 되어 존폐위기에 몰리게 될 겁니다.”

셈의 발언에 몇몇 군단장들이 바로 수긍하는 표정을 보였다.

“사오시안트의 황제는 어차피 산 송장이나 마찬가지고 실권자는 어차피 제롬 공이 될 텐데 그자가 대장이 있을 때처럼 우리를 대우해 줄 것 같습니까?”

“대장의 인맥은 내가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으니 염려할 것 없어. 날 뭘로 보는 거야?”

발끈한 쿠베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야말로 베흔의 제대로 된 후계자임을 부각시키려 했지만 일선 군단장들은 쉽사리 동조해 주지 않았다.

“감히 제가 나설 자리는 아니지만…….”

4군단장 힐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는 잠시 침을 삼키며 다른 군단장들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 하려는 발언 자체가 정치색이 짙은 만큼, 한때 카렐의 부관이었다는 무거운 짐을 진 그에게는 생명을 거는 도박이었다.

“셈 대장의 말대로, 지금이야말로 근위대의 몸값을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핑계거리도 생겼으니 제위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 ‘중립’을 선언하고 추이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긴 지금은 어느 쪽도 딱히 유리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뭐라고? 이 새끼가 지금…….”

쿠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말은 셈보다 한발 더 나아가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힐러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샤자한 공이 동맹군에서 등을 돌린 것이 카렐 때문이라면, 이제 그가 없어졌으니 동부가 또다시 말을 갈아타려 할지도 모릅니다. 적 진영에서 제위 후계자로 자이센 총리를 내세운다면, 연합군 또한 분열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지적에 쿠베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의 죽음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은 연합군과 동맹군 모두가 갈가리 찢어질 불씨일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힐러가 하려는 말은 단순히 누가 승자가 되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었다.

힐러가 두 명의 선배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수우 황제는 나름의 명분이라도 있었고, 베흔 대장이 함께 있다면 다른 지역들도 포용할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제롬 공 단독으로는 모든 지역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가 없습니다.”

쿠베가 발끈하며 신경질을 내려 했지만 힐러가 도리어 더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이대로라면 어느 한 쪽이 승리한다고 해도 다른 쪽이 승복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결국은 국가의 존폐가 위태롭던 세나우스 1세 치세와 똑같이 되고 맙니다. 그 전에 근위대는 누구든 새로운 지도자감을 찾아서 그쪽을 확실히 지지해야 합니다.”

“닥치지 못해? 네놈이 지금 반역을 꾀하자는 거냐? 지금까지 지지한 입장은 어쩌고?”

쿠베가 힐러에게 입을 다물라며 삿대질을 했다.

“세상은 변하는 거고, 언젠가는 새 사람이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 때가 온다. 무슨 잔말이 이렇게 많아?”

“새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 나라의 몰락을 전제한다고 해도 말입니까?”

“이 새끼가 할 말 안 할 말도 못 가리고!”

발끈한 쿠베가 벌떡 일어섰다.

그를 비롯한 보안국 사람들, 그리고 중앙의 참모진들이 일제히 쿠베를 옹위했다. 하지만 셈과 힐러, 다수의 야전 군단장들은 냉담한 표정이었다.

상황이 녹록치 않음을 깨달은 쿠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근위대까지 분열하는 꼴이냐?”

회의석상에 차가운 침묵이 감돌았다. 누구도 원치 않는 결과이지만, 또한 누군가의 양보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사리사욕 때문이건, 대의 때문이건, 그 누구도 물러서고 싶지 않아한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혹은 어떤 세력이 원했던 대로, 제국의 근간이던 그 둘이 ‘죽었다는 소식’은 제국 전체, 심지어 지금껏 이 휘청거리는 제국을 근근이 버티어 온 근위대에까지 분열을 불러온 시발점이었다.

거의 비슷한 시각, 동맹군 쪽에도 황제와 베흔이 펜지켄트의 지하 수장고에서 동시에 죽은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바로 분열 양상이 드러난 연합군에 비하면 일단은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시체’까지 발견된 베흔과는 달리 카렐의 시체가 공개된 것도 아니었고, 사망했다는 주장 자체가 근위대에서 나온 것이다 보니 쓸데없는 대응을 자제하며 황제 일행의 연락이 오기만 애타게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다시 말하지만, 정확한 소식이 들어올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마라.”

파랗게 질린 대신들을 노려보며 총리 페로 대공이 이를 갈았다. 그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사라져 있었지만 대놓고 슬퍼할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30여분간의 회의시간동안 반복한 말은 ‘황제의 죽음’ 따위를 입에 담는 놈들은 잡히는 대로 목을 비틀어 죽이겠다는, 절반 욕설이 섞인 무시무시한 협박뿐이었다.

그때, 펜지켄트 주둔군과 연결이 되면서 시로의 형상이 지직거리며 나타나자 페로가 다시금 버럭 언성을 높였다.

“주둔군 사령관은 어디 가고!”

“지금 나오실 형편이…….”

“형편? 형편은 무슨 형편! 그 정도 분별도 없으면서 대장군 자리 꿰차고 있을 거면 내명부에 조용히 들어앉아 있기나 하라고 해!”

페로의 거친 막말에 대신들의 분위기가 그나마 더 차갑게 식어버렸다. 페로가 국구이고, 황빈을 하대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화를 내는 건 예의에도 어긋날 뿐더러 그 역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 자리에 나왔어야 할 사람들 중 안 나온 건 베아트릭스뿐만이 아니었다. 황후 아메스는 처소에서 울고불고하느라 내명부를 온통 뒤집어놓았고, 황비 네페티 역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세네피스 황태후는 아예 혼절해서 의무실에 누워있다는 연락이었다.

“비키게, 시로.”

벌겋게 변한 눈을 애써 부릅뜨고 시로를 대신해 나타난 건 베아트릭스였다.

“죄송합니다. 보고를 정리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시로 대장군이 무얼 잘못 알았던 모양입니다.”

걱정스런 표정의 시로가 그런 베아트릭스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자리를 일단 비켜주었다. 베아트릭스가 메인 목을 애써 눌러 참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의 시신이 확인되지 않은 이상, 일단은 지금까지 대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가디언 정찰조 10명을 펜지켄트 박물관 일대에 잠입시켜서 적정을 파악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잘했군.”

페로의 대답은 이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때, 누군가가 창백한 얼굴로 회의실에 천천히 들어섰다.

신경이 곤두서있던 페로가 이번엔 그에게도 이빨을 드러냈다.

“여긴 학장님께서 오실 자리가 아닙니다만.”

병실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코리온은 씩씩대는 페로를 힐끔 돌아보았지만 잠시 후 그를 완전히 무시하며 옥좌 옆의 ‘고문역’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황제가 정말로 죽었다면 이제 서로 칼을 겨누어야 할 것이 뻔한 두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분위기를 읽어 낸 코리온은 텅 비어있는 옥좌 건너편, 대공위 자리에서 반쯤 미쳐 날뛰고 있는 이 사나운 남자에게 차갑게 속삭였다.

“지금 나와 싸우는 모습을 아랫사람과 적들에게 보이고 싶으십니까.”

“흐읍.”

자신의 경거망동을 뒤늦게 깨달은 페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코리온의 긴 눈썹과 가는 눈꼬리에는 눈물자국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표정만은 차가웠다. 그는 정면을 응시한 채 페로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총리 각하.”

페로에게 다가온 가디언 킵이 갑자기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당연히 페로의 사나운 시선이 대뜸 움직였지만 킵의 시선은 진지했다.

“급한 연락입니다.”

페로의 눈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급하다니?”

“탄현성에 있는 동부연합군입니다.”

페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카렐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고 채 1시간이 되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약삭빠른 동부가 벌써 움직인 것이었다. 페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을 급히 빠져나왔다.

“망할 늙은이, 갈아타는 것도 잽싸더니 이런 데도 순발력 하나는 대단하군.”

복도를 걷던 페로가 빈정거리자 킵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샤자한 공이 아닙니다.”

“응?”

대전 옆 쪽방 문 앞에서 페로가 자리가 우뚝 멈춰 섰다.

“보벤 경입니다.”

페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내심 짚이는 것이 있는지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며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킵에게 바깥을 지키라며 손짓했다.

“오랜만입니다.”

페로는 얼굴에 잔뜩 드레싱을 감은 이 남자의 능글능글한 인사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쪽 황제가 죽었다지요?”

“닥쳐라, 네놈은 표현을 그 따위로밖에 못 하냐.”

버럭 화를 내는 페로에게 보벤 경이 뻔뻔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얼굴을 온통 드레싱으로 감은지라 애써 화를 죽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뻔뻔해진 것인지 표정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기왕 양쪽의 실질적인 수장이 죽었으니, 슬픔 따위는 일단 접어두고 이젠 판을 새로 짜야 하는 것이 순서 아니겠습니까.”

페로가 눈가에 힘을 주었다. 하필 이 타이밍에 대화를 청한 이 교활한 남자의 속내는 그도 어느 정도 눈치 채고는 있었지만 그는 훨씬 직접적이었다.

“총리께서 궁을 차지하고 계시고, 서부연합군이나 남부 놈들도 모두 멀리 나가있으니 총리의 큰 뜻을 펼치시기에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어딨겠습니까.”

기도의 화상 때문에 보벤의 목소리가 유난히 걸걸했다. 페로는 그의 듣기싫게 갈라진 목소리에서 동부의 배신 당시 마찬가지로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하던 카렐의 모습을 떠올렸다. 순간 그의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닥치지 않으면…….”

“총리께서 원하신다면 저와 동부가 기꺼이 나서서 도와드리겠습니다.”

페로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자의 뜬금없는 제안을 잘만 하면 적에게 치명타를 가할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네 할애비가 아직 동의한 것 같지는 않은데?”

페로의 물음에 보벤이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제 결정이 경솔하게 보일 정도로 성급하다는 건 인정하지요. 하지만 이런 무리수라도 두지 않으면 수명개조도 된 세상에서 제가 언제 큰 뜻을 펼쳐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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