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64 회: 파트 9.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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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긴장이 풀린 베흔이 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시체를 더듬던 그는 죽은 자의 목에 걸린 길쭉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언뜻 보기에도 바로 그 자신이 목에 걸고 있는 캡슐과 너무도 흡사한 어떤 것이었다. 베흔은 여전히 묘 중앙에 서 있는 카렐을 휙 돌아보았다.
“폐, 폐하, 베흔입니다. 베흔이 두 번째 놈을 죽였습니다.”
에스더가 황제의 다리를 짚은 채로 급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카렐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날 구하러 온 거요?”
카렐이 아직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뜨며 베흔을 제대로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날 죽이려 든 싸가지없는 놈들을 때려잡으러 온 것뿐이야. 널 구하려던 게 아니고.”
베흔이 퉁명스레 둘러댔지만 어차피 카렐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때, 아프라시아의 석상 뒤쪽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스더의 얼굴에 비로소 붉은 홍조가 감돌았다. 석상 뒤쪽 구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십니까? 폐하? 무사하십니까?”
“여기! 여기요! 빨리 내려와요!”
재빨리 대꾸한 에스더가 황제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들이 돌아왔어요!”
에스더의 감격스런 한 마디에도 카렐은 웃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카렐은 에스더의 랜턴이 향하고 있는 베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칼을 집에 꽂아 넣고는 피투성이가 된 두 손을 베흔에게 뻗었다.
“나와 같이 갑시다.”
카렐이 입가에 엷은 미소까지 지었다. 하지만 베흔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세력이 꿈틀대고 있소. 교단 세력의 조짐이 이상하오. 날 도와줄 사람은 그네들을 잘 아는 당신뿐이요.”
카렐이 여전히 비무장인 채로 베흔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대는 혈통을 잇는 데 성공했고, 난 이미 황제가 되었소. 더 무얼 바라시오? 핏줄끼리 싸우는 거? 아니면, 내분으로 제국이 자멸하는 걸 원하시오?”
카렐은 비틀거리고 있는 베흔의 두툼한 어깨를 꽉 짚었다. 그는 맞받아 안아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칼부터 뽑아들지도 않았다.
“나와 같이 나갑시다.”
베흔은 카렐의 부탁에 별 대답도 않은 채 그의 어깨를 천천히 밀어내며 뒷걸음쳤다. 하지만 카렐은 이 정도로 낙담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이 정도도 충분했다.
“장비만 제대로 있다면 올라가는 데 15분이면 충분할 거요.”
석상 위쪽에서 다시 기척을 느낀 베흔이 어두운 기단 뒤로 급히 몸을 감추었다.
잠시 후, 온통 뿌연 먼지투성이가 된 웬 가디언이 몸에 로프를 걸고 아프라시아의 석상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폐하! 무사하십니까?”
석상 어깨에 앉아 묘 안을 랜턴으로 비춰본 가디언은 중간에 서 있는 황제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입가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석상을 타고 원숭이처럼 재빨리 내려왔다.
“황빈 마마의 명을 받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황제에게 경례를 올리던 그 동맹군 가디언은 묘 안에 벌어져 있는 끔찍한 광경에 기겁을 하며 말을 멈추었다. 그에 뒤이어 3명의 가디언이 더 내려와 바닥을 디뎠다.
“괜찮으십니까?”
가디언들이 달려와 비틀거리는 황제를 급히 부축해 주었다. 그들의 손길을 느낀 카렐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탈진한 황제의 몸에 급히 하네스를 묶어주었다.
“안쪽에 넓적한 상자 8개가 있다. 잊지 말고 그것들을 챙겨 나가라.”
“알겠습니다.”
“의무대에 항독소를 준비하라고 일렀습니다. 라말라 박사님 소개로 페이 코다 박사라는 병리학자가 오겠다고 알려왔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그들이 무어라 계속 말했지만 거의 듣지 못하는 황제는 멍한 표정으로 엉뚱한 말을 이었다.
“나간 후에 로프는 철거하지 말고 그냥 놔둬라.”
“예?”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황제는 그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가디언 1명이 황제를 업고 아프라시아 석상 밑으로 급히 향했다. 그들을 따라가던 에스더는 베흔이 숨어 있을 기단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올려! 빨리 빠져나간다! 너희 둘은 앞서가면서 폐하를 끌어올리고, 넌 에스더 경을 모셔라. 넌 나와 함께 무기들하고 저 상자들을 올리고!”
카렐과 동맹군 일행이 대신관 묘에서 하나둘씩 빠져나가면서 묘 안은 다시금 정적에 빠져들었다. 그때까지도 기단 뒤에 숨어있던 베흔은 복잡해진 머릿속을 가다듬으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잘 한 거야.”
시계를 본 그는 바닥을 짚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카렐이 나간지도 20분 가까이 지난 후였다. 조금 쉰 덕분인지 쿡쿡 쑤시던 늑골 자리도 이젠 별로 아프지 않았다.
“나도 할 일이 있으니.......”
그는 바닥을 뒹구는 끔찍한 시체들 사이를 가로질러 아프라시아의 석상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카렐의 명령으로 철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는 로프가 석상 뒤쪽 통풍구에서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쯤 카렐은 지상으로 나가 가디언들의 호위를 받으며 펜지켄트 시내로 돌아가고 있을 터였다.
“도대체 이 위에 지상은 어떻게 생겨먹은 곳이야?”
얼굴을 찡그리고 구멍 안을 들여다보던 베흔은 하는 수 없이 양손검을 등에 둘러멨다. 굴을 야투 일당이 차지했으니 그 역시 이곳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베흔은 로프를 붙들고 통풍구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만 나간다면 자신을 감쪽같이 속여넘긴 야투 박사를 당장 붙잡아 죽도록 심문해야겠다고 맘먹었다.
지하 환풍구는 베흔 같은 거구가 빠져나가기는 지독하게도 좁았다. 켜켜이 쌓여 있던 먼지층은 다행히 먼저 빠져나간 일행들이 다 닦아내어 준 덕분에 숨 쉬기가 아주 고역스럽지는 않았지만 이러다가 몸이 끼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뭐 이렇게 깊어?”
베흔이 짜증을 내며 계속 로프를 올랐다. 오르기 시작한지 제법 되었지만 머리 위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 3시니까……병신, 안 보이는 게 당연하지.”
베흔이 멍청한 스스로를 탓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느껴지는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보아 바깥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빌어먹을, 더럽게 춥네.”
베흔이 젖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이 고인 곳을 헤엄치고 바로 달려온지라 그의 몸이 아직 젖어있었다. 새벽 시간이니 바깥은 살을 에는 차가운 공기일 것이 뻔했다. 그는 이런 젖은 몸으로 나가도 될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빌어먹을.”
베흔은 꽁꽁 얼어붙은 손을 가슴 안에 밀어 넣으며 다시 혼자 욕을 내뱉었다. 그렇게 힘겹게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온 베흔은 왜 밤하늘 별도 보이지 않았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뭐야?”
손을 뻗어 구멍 위를 더듬거린 베흔은 환풍구 꼭대기 개구부에 웬 천 비슷한 것이 덮여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펄럭이지 말라는 것인지, 그 위에는 무언가 묵직한 것도 얹혀있었다. 천을 신경질적으로 걷어내고 밖에 머리를 내민 베흔은 갑자기 몰아친 칼날같은 황소바람에 온몸을 확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우읍.”
베흔이 얼른 몸을 움츠렸다. 구멍이 있는 곳은 펜지켄트 박물관에서 제법 떨어진 한 야산 골짜기였다. 환풍구 꼭대기는 인적도 없는 야산의 바위틈새에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었다. 멀리 황량한 눈벌판에 자리 잡은 13선지자의 묘와 박물관, 그 주변에 휘황하게 불을 켜 놓은 근위대와 남부연합군의 병영이 보였다. 거리는 언뜻 보아도 20스타디아(3km)는 되어보였다.
젖은 몸으로 구멍에서 기어나온 베흔은 이 구멍을 누가, 왜 덮어놓았는지를 깨달았다. 구멍을 덮어 안쪽으로 찬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막아주고 있던 건 있던 건 카렐이 걸치고 있던 털가죽 망토였다. 그리고 그의 소중한 플람베르주, 카렐의 큰 손에 맞게 만들어진 털장갑과 털신이 칼과 함께 놓여있었다.
베흔은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도 잊은 채 카렐이 놓고 간 물건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후우.”
몸이 굳어가는 것을 깨달은 베흔은 카렐의 망토를 두르고 그의 장갑과 털신을 신었다. 마치 맞춘 것처럼 꼭 들어맞는 장갑을 보며 그가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꽤 오랫동안 품을 떠나 있던 그 정든 칼을 집어 등에 둘렀다.
“옛날로 돌아간 걸 환영한다, 베흔. 제2개국공신.”
베흔은 할룩스를 빼들었다. 지하에서 애물단지였던 이 기계도 더 이상 먹통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믿는 최측근 쿠베의 호출번호를 급히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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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암살자에게 머리를 얻어맞은 오르마즈는 나즈라가 난입한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건 짧게 토막난 기억들 뿐이었다. 그의 팔을 껴안고 지혈하던 나즈라의 애타는 표정, 어디선가 불려온 신경외과 여자 의사의 당혹해하는 모습, 흰 로브 차림의 웬 키 큰 여자가 자신을 가리키며 나즈라와 무어라 귓속말을 나누던 광경 정도가 그의 뇌리에 짧은 토막처럼 남아있었다.
애써 고개를 가눈 오르마즈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빡빡 깎은 머리에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두개골 아래 혈종을 제거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자그만 체구의 여자 신경외과 의사가 짧은 머리털이 붙은 면도칼을 털어내며 머쓱하게 웃음을 지었다. 임무라는 대의명분에도 절대 깎지 않고 버티던 오르마즈의 보물같은 다갈색 머리칼이 이제 한 오라기도 보이지 않았다.
“굳이 필요하다면 일부만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더…….”
그 의사가 키득거리며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오르마즈 역시 머리 일부만 번쩍거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우리라는 것에는 동감이었지만 이렇게 웃음이 헤픈 성직자도 본 일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실 아침만 해도 마치 부분탈모처럼 이곳저곳 짧은 머리칼이 남아있었지만 그럴 바에는 아예 다 밀어버리라며 신경질을 부린 덕분에 이젠 정말로 한 올도 남아있지 않았다.
거울을 다시금 쳐다본 오르마즈가 자조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훗, 귀 밑에 문장만 새기면 이제 진짜 성직자로군.”
말을 해 놓고 생각해보니 삭발한 사람이 흔해빠진 이곳에서 그의 모습이 특별난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옆에 있는 이 자그만 신경외과 의사 역시 삭발을 하고 있었다.
“아세요? 저랑 같은 날 삭발하셨다는 걸요.”
오르마즈가 살짝 눈동자를 움직여 이 명랑한 성직자를 돌아보았다. 이마에 박힌 문장을 보아 이 의사는 다하카르 교단이 아니고 트라카 교단 사람이었다. 하지만 왜 다른 교단 사람이 다하카르 교단 성소인 이곳에 와 있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흘 전에……그러니까 오르마즈 님이 사고당한 그날 아침에 정식 성직자로 임명식이 있었어요. 모간이 되면 새벽에 쿠트라스에 있는 우리 교단 성소에서 서품식을 갖고요, 그게 끝나고 나서 대신관님께 인사를 드리는 절차가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로 왔어요.”
‘대신관’이라는 말에 오르마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신관이 여전히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성직자는 자신이 얼마나 큰 정보를 흘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지 계속 수다를 떨었다.
“그래서 동기들하고 대신관님 기다리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와서 신경외과 전문의가 빨리 필요하다고 해서 얼떨결에 잡혀왔어요. 여기 부설 병원에 있는 다하카르 교단 베테랑 박사님들도 많은데 어쩌다가 제가 왔는지는 모르겠어요. 거 참 별난 인연이죠?”
‘적’인 자신에게 이렇게 쉴 새 없이 할 말 안 할 말 떠들어대는 이 여자를 쳐다보며 오르마즈는 ‘성직자 중에도 정말 별놈이 다 있군.’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의 짧은 기억에도 이 여자에게 나즈라가 ‘큰 보상이 있겠지만 입단속 잘못하면 죽을 각오를 해라’라며 무섭게 협박을 하던 모습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그 협박도 까맣게 잊었는지 거의 한 시간 전부터 이렇게 신나게 정보를 흘려대고 있었다.
오르마즈는 여자의 가슴에 붙어 있는 ‘의학박사 니사 라말라’라는 이름표를 흘끔 쳐다보았다. 막 정식 모간이 된 성직자라면 아마도 오르마즈와 비슷한 나이일 테고, 의사로서도 이제 갓 박사 딱지를 붙인 햇병아리일 터였다.
이런 햇병아리 박사님이 자신의 머리를 열고 뇌를 만졌다고 생각하니 오르마즈의 온몸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처음 수술을 받고 나즈라 한 명만 제한적으로 만나던 때와는 달리 지금의 그는 마치 평범한 환자라도 된 것처럼 이곳의 많은 사람들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하나둘씩 안면을 늘려가고 있었다.
그것이 오르마즈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씩 누그러들어서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이든지간에 지금의 오르마즈는 자신이 정말로 포로인지, 이곳에 입원해 있는 교단 손님인지조차 혼동될 정도였다.
게다가 이젠 그의 손목을 묶은 비단끈도 없었고, 자해를 막기 위해 마우스피스를 채우지도 않았다. 물론 달아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몸 상태였지만 나즈라도 최소한 그가 자해는 포기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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