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69 회: 파트 9.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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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그 노인네 군의관 봤어?”
박물관 앞으로 돌아온 4군단장 힐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십여 분 전까지도 이곳에서 사역병들을 지휘하던 그 군의관의 모습이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글쎄요, 저도…….”
“어디 갈 데도 없잖아? 그런데 할룩스도 안 받고…….”
힐러가 눈살을 찌푸렸다. 13선지자의 묘 주변은 이미 근위대 4군단 장병들과 남부기병들이 철통같이 봉쇄하고 있어서 외부로 나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펜지켄트 주변 반경 500스타디아(75km) 일대에는 일체의 차량통행도 금지되어서 누군가 차량으로 움직인다면 바로 발각될 상황이었다.
“잠깐, 대장 시체는?”
막 돌아서려던 힐러가 고개를 휙 돌렸다. 조금 전까지 베흔의 시체가 놓여있던 추모탑 앞이 텅 비어있었다.
“대장 시체가 어디 갔냐고!”
힐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시체 옆을 지키던 2명의 병사들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조금 전에 야투 중랑장님이 보존처리를 하겠다고 박물관에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박물관에?”
힐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른 건 셈과 신경전을 벌이던 쿠베의 모습이었다. 베흔의 시체를 정말로 보존처리를 위해 가져간 것이라면 모르지만 ‘장례 주관자’와 ‘후계자’가 동일시되는 판국에 다른 목적으로 아예 시체를 빼돌렸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힐러는 십여 명의 호위병들과 함께 급히 박물관 안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도 수십의 사역병들이 침수되는 수장고 물건을 들어낸다며 북적거리던 박물관 안은 지금 텅 비어있었다. 물론 그들이 지하에서 꺼내 놓았던 물건들도 몇 개의 잡동사니를 빼고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워낙에 자그만 박물관인지라 한 번 휙 둘러보는 정도로도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기는 충분했다.
“여기도 없습니다!”
‘보존처리실’을 확인한 병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사무실이나 부속 시설들을 확인한 병사들의 보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야투 박사와, 그가 지휘하는 사역병들이 들끓던 박물관 안은 귀신이라도 휩쓸고 간 것처럼 텅 비어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유령에 홀린 것 같은 느낌에 힐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내부는 정말로 텅 비어있었다. 야투 박사와 사역병들은 말 그대로 ‘증발’해 버리고 자리에 없었다.
“누구 이네들 나가는 거 본 사람 있어?”
“아뇨, 아무도 못 드나들게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호위병 분대장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야투 중랑장 어디 있어! 당장 찾아와! 제기랄! 박물관 지하에 들어간 놈들은 왜 아무도 연락이 없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군단장님! 여길 보십시오!”
수장고와 연결된 지하실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힐러를 불렀다. 지하실로 달려간 힐러 앞에는 웬 근위대 장교의 시체 한 구가 늘어져 있었다.
“뭐야? 이건 또 누구야?”
“베흔 대장님을 따라 들어갔던 정규군 보병장교 중 한 명입니다. 수장고 안팎으로 들락거리는 걸 봤는데……의무대 부근이었던가? 거기서 어슬렁거리는 걸 봤습니다.”
“거기서 왜?”
가디언이 ‘보안국 파견’임을 뜻하는 가슴의 리본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안국에 독극물 분석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의무관이 있냐고 제게 묻더군요. 그래서 야투 박사가 독극물 전문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막 화를 내고는 군단 의무대로 가 버리더군요.”
“이놈이 의무대에서 뭘 했는지 당장 알아봐.”
힐러가 장교의 상태를 급히 살폈지만 사인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힐러의 명령을 받은 가디언이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할룩스로 어딘가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한 번에 목을 꺾었군. 소리도 못 지르고 죽었겠는데? 이 정도 힘이면 가디언 소행이 틀림없어.”
힐러의 숨이 탁 막혀왔다. 무언가 무시무시한 음모가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제3세력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그로서는 야투가 사라진 배후에 보안국장 쿠베가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결론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힐러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체는 이미 빳빳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자는 쿠베와 셈이 다툼을 벌이기 한참 전, 아니 어쩌면 베흔이 죽기 이전에 이미 누군가에게 죽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독극물?”
야투 박사가 독극물 전문가라는 사실을 떠올린 힐러가 순간 전율했다.
‘설마 베흔 대장도……?’
순간,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낀 힐러는 여전히 시체를 살피는 척 눈동자를 굴리며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는 이 짧은 순간, 자신이 이곳에 혼자 내려왔음을, 호위병들은 모두 위층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보안국’ 가디언은 자신이 당초 데려온 놈이 아니라는 것도.
힐러는 등 뒤로 살그머니 다가오는 발소리를 느꼈다.
“이노옴!”
힐러가 호위병들이 있는 위층까지도 들릴 수 있게 최대한 큰 목소리로 지하실을 쩌렁 울리며 재빨리 돌아서며 단검을 힘껏 휘둘렀다.
“으읍!”
강철 와이어를 양 손에 쥐고 그의 목에 걸려 살그머니 접근해오던 그 가디언은 힐러의 번개같은 기습에 허겁지겁 뒷걸음치며 무기를 뽑아들려 했지만 상대는 그보다 훨씬 등급이 높은 베테랑이었다. 힐러는 왼손으로 이 후배의 오금을 재빨리 낚아채 뒤로 쓰러뜨리며 오른손에 쥔 단검으로 그의 손등을 푹 찔렀다.
“아읍!”
뒤로 쓰러지며 힐러의 팔꿈치에 목을 눌린 가디언이 숨이 막혀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군단장님?”
힐러의 고함소리를 들은 호위병들이 위층에서 허겁지겁 달려 내려왔다.
“이놈 포박해! 날 죽이려 했단 말이다!”
명령을 받은 호위병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힐러에게 이미 제압당한 그 가디언을 재빨리 포박했다. 하지만 힐러에겐 더 급한 일이 있었다.
구사일생한 힐러는 숨 돌릴 새도 없이 허겁지겁 할룩스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지금쯤 이곳으로 오고 있을 셈의 호출번호를 눌렀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맙소사, 황도에 연락해! 셈 대장이 무사한지 알아보란 말이야!”
힐러가 뒤따라 내려온 군단 참모들에게 악을 썼지만 그의 명령은 곧 의미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잠시 후 달려 내려온 장교 한 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알려왔다.
“1번 도시의 셈 대장께서 페로 가디언들에게 기습을 당해 목숨을 잃으셨다고 합니다!”
힐러가 멍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베흔에 이어 셈도 죽었고, 힐러 자신 역시 죽을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터였다. 이 배후에는 보나마나 보안국장 쿠베가 있을 테지만 그는 또 다른 세력의 존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제 어쩌지? 어쩌지?”
힐러의 눈앞이 막막해졌다. 셈이 죽었다면 이제 유일한 특등급으로 남은 쿠베가 곧 근위대를 장악할 테고, 힐러 역시 새 근위대장이 될 쿠베에게 무조건 복종하거나, 저항하거나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힐러가 아직 훤히 열려있는 지하 수장고 문을 가리켰다.
“이 수장고 안에는 지금 누가 있나?”
“야투 박사가 이끌던 작업팀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누구 이 안쪽 길을 아는 사람?”
병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베흔 대장을 처음 따라 들어간 정규군 병사들은?”
“아직 이 밑에 있을 겁니다. 내부는 할룩스로 통화가 되지 않아서 내려가야 확인이 가능합니다.”
“뭐라고?”
‘할룩스 통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에 힐러에게 떠오른 다른 한 곳이 있었다. 황궁 지하의 그 지독한 시계 카타콤베에서 유일하게 ‘감’으로 나갈 길을 찾아냈던 것이 당시 1소대장이었던 그였다.
“그럼 여기도 교단 놈들이 만든 구조물?”
무언가 생각이 머릿속을 확 스친 힐러가 군단 참모 중 한 명을 손짓해 불러들였다. 지난번 황궁 지하의 카타콤베에서 그와 함께 길을 뚫었던 ‘선임 가디언’이었다.
“그 늙은이 군의관이 이 안으로 도망쳤을지도 몰라. 이 수장고도 황궁 지하처럼 복잡하겠지만 어쩌면 다른 곳과 또 연결되어 있는 통로인지도 모른다. 알겠지만 그놈은 사교 신관이다. 이미 이곳 구조를 알고 있었을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물론입니다.”
힐러와 마찬가지 상황을 떠올린 그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안쪽도 지난번 그곳처럼 함정 투성이일 거다. 하지만 도망간 놈들 숫자가 워낙 많고 짐까지 지고 서둘러 도망갔으니 어쩔 수 없이 흔적을 남겼을 거다.”
“알겠습니다.”
“가디언 10명과 보병 20명 데리고 당장 들어가라. 뒤따라 보충 병력을 보낼 수 있도록 길에 반드시 표시를 해 놓고 가라. 보병 10명 정도에게 랜턴하고 등반, 잠수장비하고 유선 통신장비를 챙기게 해서 뒤따라 보낼 테니. 너만 믿겠다.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계속 보고를 올리도록 해라.”
“예.”
황궁 지하에서 이미 ‘예방주사’를 맞았던 이 가디언은 군단장이 왜 이리 꼼꼼하게 모든 것을 확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야투 그놈을 반드시 붙잡고 무슨 일이 있어도 베흔 대장의 시체를 되찾아 와라. 알겠나?”
“물론입니다.”
군단장 힐러의 단호한 명령을 받은 그는 가디언, 병사들을 데리고 급히 야투 박사의 패거리를 뒤쫓기 시작했다.
가디언의 등에 업혀 어렵게 펜지켄트 시내의 알로 언덕으로 돌아온 카렐을 기다리고 있는 건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의 황빈 베아트릭스였다. 텅 빈 창고에 서 있던 베아트릭스는 부축을 받으며 들어온 황제에게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모두 나가라.”
베아트릭스가 아랫사람들에게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 황제와 황빈의 나름대로 감격적인 만남을 상상했던 다른 사람들은 황빈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쭈뼛거리며 일단 자리를 비워주었다.
베아트릭스가 자리에 꿇어앉은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상만 아니셨더라면……지금 입술이 터지도록 뺨을 치고 싶었을 것이옵니다.”
“차라리 그랬다면 맘이 편했을지도.”
카렐은 손을 더듬거려 베아트릭스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는 그의 앞에 마주앉아 얼굴과 목을 차례로 어루만졌다.
“지금은 이럴 기분이 아니옵니다.”
앙탈을 부리려 했던 베아트릭스는 황제가 자신을 강제로 잡아당기는 느낌에 저항하려 하며 이를 빠득 갈았다. 하지만 그런 그도 황제의 꺼칠해진 입술이 이마에 닿는 느낌에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카렐이 힘없이 떨어지는 그의 턱을 손을 받치고 다시 뺨에 입을 맞추었다.
“다 끝나갑니다. 이제 안심해요. 앞으로는 절대…….”
“그 거짓말을 또 믿으라고요?”
마지 못하는 척 황제의 목덜미에 얼굴을 기대고 그의 목을 안으려 했던 베아트릭스는 쇄골 부근에 깊게 팬 상처에 움찔하며 그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흐릿하게 초점을 잃은 황제의 눈을 그제야 마주했다. 그는 손끝으로 황제의 눈가를 더듬었지만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별 반응이 없었다. 황제가 앞을 거의 보지 못한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감촉과 소리만으로 누군가를 느끼는 것도 참 색다른 경험입니다, 황빈.”
애써 낙천적으로 말하는 황제에게 베아트릭스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가슴을 더 바싹 붙였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 생각 없이 말한 거…….”
베아트릭스가 황제의 흐려진 눈가를 쓰다듬었다. 카렐은 그런 그의 등을 말없이 쓰다듬고만 있었다.
“어둠 속에 있어 본 경험이 없다보니 이 느낌이 묘하게 관능적이군요. 오늘밤은 잠자리 잘 꾸며두시구려.”
황제의 엉뚱한 한 마디에 지금껏 뻣뻣하려 애쓰던 베아트릭스도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둘의 이런 짧은 행복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밖에서 누군가 창고 문을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급한 소식입니다!”
베레트라의 거친 목소리에 카렐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웬만해서는 호들갑을 떨지 않는 저 대담한 무장이 이렇게까지 당황한 어조로 소리를 지른 것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
베아트릭스가 옷차림새를 가다듬고 창고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베레트라가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알려왔다.
“큰일입니다. 해안가의 보급 선박(船舶)에서 연락입니다. 30분 전에 만나기로 한 수송선이 도착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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