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70화 (667/1,132)

< -- 670 회: 파트 9.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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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냐.”

베아트릭스가 옷차림새를 가다듬고 창고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베레트라가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알려왔다.

“큰일입니다. 해안가의 보급 선박(船舶)에서 연락입니다. 30분 전에 만나기로 한 수송선이 도착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베아트릭스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황제를 돌아보았다. 펜지켄트 주둔군의 보급품은 물품에 따라 황도 혹은 3번 도시, 때로는 북부에서 오는 동맹군 수송선에 의존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 어디서 들어오는 선박인데?”

“3번 도시에서 오던 식량 수송편입니다. 그런데 북부에서 오는 수송선단과도 연락이 끊겼다고 합니다.”

카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잠깐, 두 노선은 모두……새 수송선을 투입한 곳이 아닌가?”

황제의 재빠른 지적에 베아트릭스와 베레트라가 놀라 입을 가렸다.

“생각해보니…….”

“그 두 노선이면 작년에 북부 상공조합에서 무상으로 기증한 15척의 신형 수송선이 들어간 곳 아니냐고!”

황제의 물음에 베레트라가 허겁지겁 자료를 뒤졌다.

“마, 맞습니다. 우리 선단에서 성능이 가장 우수한 것들이라 제일 중요한 노선들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아군 병기의 주 보급선인 북부-황제령 노선과 그리고 이곳 펜지켄트 보급선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15척 모두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카렐의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그 15척의 중, 대형 수송선을 인수하면서 이전에 쓰던 몇 척의 구형 수송선은 매각해 버렸고, 이젠 몇 척의 소형 수송셔틀을 빼면 그것들이 사실상 황제 직속부대 모두의 목줄을 책임지고 있었다. 물론 제후군 보급선이 있기는 했지만 자기 지역과의 보급을 담당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카렐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추적도 되지 않고?”

“보안국에서 필사적으로 찾고 있습니다만……모두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납치되었거나 공중 폭발한 것 같습니다.”

“그럼, 황제인 내 손에……이제 중, 대형 수송선은 하나도 없다는 뜻인가?”

황제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북부에서 오는 선단에 실린 건?”

“기병대에 지급할 새 갑주와 마구, 2번 도시 공성과 사오시안트 별궁 공격에 쓸 공성장비 일체입니다. 지난 황도 수성전에서 기병대 갑주 중 절반 가까이가 못 쓰게 되었고 대형 공성장비도 황도 수비에 모두 투입되어서 지금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번에 입고되지 않으면 사실상…….”

베레트라의 대답에 카렐의 숨이 탁 막혀왔다. 장기적으로 입는 타격은 접어두고라도, 이곳 펜지켄트 공략군의 목구멍은 물론이고, 적의 숨통을 마지막으로 끊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2번 도시 사오시안트 별궁에 대한 공성전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말이었다.

“누군가 전쟁을 이대로 끝내지 못하게 만들려고 해…….”

카렐이 힘없이 이마를 짚었다.

“어디 너희놈들 맘대로 되나 두고 보자.”

카렐이 이를 갈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송선 문제는 총리보고 알아서 해결하라고 해. 수송선단 선원들이 집단으로 매수당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 불손한 놈들이 동시다발로 테러를 저질렀을 수도 있지. 어쨌든 이미 망가진 일 붙들고 골머리 썩기 싫다. 어떤 놈이 배후인지 심증이 없는 것도 아니고. 펜지켄트 주둔군은 최악의 경우 한두 달은 자력으로 버틸 수 있도록 편성했으니 당장은 상관없다.”

대범한 것인지, 거듭된 절망적인 소식에 놀랄 기운조차 잃은 것인지, 황제는 거의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만은 이곳 주둔군의 일선 지휘관 베레트라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황제의 고충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럼 2번 도시 공성전은 어쩌시게요? 장비가 없이는…….”

“카토에게서는 연락이 없나? 이렇게 된 이상 베흔을 반드시 구해내야 한다. 이제 다 필요 없다. 근위대만 건지면 된다.”

“예……에?”

황제의 극단적인 반응에 베레트라가 적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근위대라뇨?”

베레트라는 황제가 지금 제정신인가 싶었지만 황제는 계속 쉴새없이 물었다.

“근위대 4군단이 공세를 개시했나?”

“근위대는 13선지자의 묘 부근에서 전진을 멈추었습니다. 대신 북쪽 산악에서 남부연합군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습니다.”

“훗, 예상했던 대로군.”

카렐이 이번에도 과장된 코웃음을 쳤다. 그런 황제에게 베아트릭스가 짧게 덧붙였다.

“근위대만 움직이지 않으면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막을만합니다.”

“베흔과 힐러에게 이제 모든 게 걸렸군.”

카렐이 복잡해진 머릿속을 일단 정리하며 눈을 감았다.

보급선이 끊긴 동맹군이나, 분열의 목전에 다다른 연합군이나 모두에게 위기가 닥쳐 있었다. 둘 중 어느 쪽이 이 위기를 현명하게 빠져나가느냐에 따라 누가 승자가 될지, 아니면 불순한 그 누군가가 원하는대로 둘 다 패자가 된 채 제국이 파멸의 길을 밟아갈지가 결정될 터였다.

‘베흔을 구해라’라는, 엉뚱하기까지 한 명령을 받고 달려가는 카토의 머릿속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제국이 분열될지 모른다는 황제의 얼토당토않은 걱정부터 시작해서 요즘 부쩍 ‘이상한 쪽’에 관심을 두는 태도까지, 무언가 그가 제대로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저 능선만 넘으면 바로야.”

이트닌이 헐떡거리며 이 6명의 가디언들을 인도했다.

“골짜기 바위틈에 지하에서 나오는 구멍이 있었어.”

“알겠습니다. 이제 기도비닉을 유지해야겠습니다.”

카토와 가디언들은 재빨리 위장포를 걸쳤다. 황제의 바람대로 베흔이 우호적인 태도라면 모르겠지만 안 그럴 가능성도 미리 생각해야 했다. 작은 야산 골짜기를 넘은 6명의 가디언과 이트닌은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덤불 사이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저깁니다.’

카렐과 함께 이곳을 나왔던 가디언이 수화로 한 바위틈을 가리켰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베흔은?’

카토가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베흔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구멍을 덮었던 망토가 없어진 것을 보니 베흔이 나온 건 틀림없습니다. 어딘가로 이동한 모양입니다.’

‘혼자 귀환하고 있으려나?’

카토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베흔의 몸만 성하다면 이곳에서 근위대 본대가 있는 13선지자의 묘까지는 고작해야 20~30스타디아 내외니 걸어서 30분이면 닿을 가까운 거리였다. 물론 카토는 저체온증에 걸린 베흔이 지금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라는 것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베흔이 죽은 것으로 믿고 있는 근위대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그의 모습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의문이었다.

그때, 조금 전 가디언이 가리켰던 그 ‘바위틈새’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왔다.

“응?”

가디언들이 재빨리 몸을 감추었다. 잠시 후, 구멍 안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불쑥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 모자, 몸통만 가린 경갑주를 보아 근위대 사역병이 틀림없었다. 주변을 재빨리 둘러본 그 ‘사역병’은 구멍에서 기어 나와서는 안쪽에 대고 빨리 나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뒤이어 근위대 사역병단, 혹은 보병대, 때로는 의무병 차림새를 한 사병과 장교들이 안에서 줄줄이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저놈들은 또 뭐냐?’

카토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오는 모양새와 구성으로 보아 누구와 싸우러 가는 전투부대이거나 정찰대도, 그렇다고 지원부대도 아니었다. 그들은 별다른 순서조차 없이 잡다하게 뒤섞여 있었고, 심지어 이상한 자루에 싼 짐까지 한 꾸러미씩 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움직임이 유난히 둔해 보이는 수명 당대의 한 노인이 다른 ‘병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구멍에서 힘겹게 기어 나왔다.

‘중랑장급 의무관인데요?’

부하의 말에 카토가 눈가를 찡그렸다. 중랑장이면 제후군에서는 장군에 해당했고, 의무병과에서 그 정도라면 거의 꼭대기에 해당하는 높은 계급이었다.

‘사교 신관이야.’

망원경으로 그를 유심히 살피던 이트닌이 카토에게 손짓했다. 그의 말대로 그 노인 군의관의 귀 밑에 사교 성직자를 나타내는 문장이 찍혀있었다. 그에 뒤이어 검은 봉지에 싼 무언가가 줄줄이 끌려나왔다. 카토는 직감적으로 그 내용물이 ‘시체’임을 바로 깨달았다.

‘도대체 저놈들은 뭐죠? 베흔은 어디로 갔고요?’

카토가 이트닌에게 다시 물었지만 사교도들과의 싸움에 익숙한 그조차도 저 정체불명의 ‘사교도 근위대 일행’이 이번 혼란사태를 모두 뒤에서 조장해놓고 도망치고 있는 주범들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약 20명에 달하는 그 정체불명의 일행은 나오자마자 지도를 꺼내들고 방향을 살피기 시작했다.

‘일단 덮칠까요?’

‘우리 임무는 베흔을 보호하는 거지 저런 놈들을 잡는 게 아냐.’

카토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상대가 입은 제복처럼 정규군 혹은 사역병이라면 6명의 가디언들로 공격해 몰살시키는 건 식은 죽 먹기였지만 카토는 어딘지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음?”

사역병 중 한 명이 몸을 돌린 순간, 카토가 움찔했다. 반쯤 풀어헤친 그자의 옷깃 사이로 캡슐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맙소사, 사교 헤네티?”

얼마 전, 타르서스 별궁에서 코리온을 습격한 헤네티들에게 호된 맛을 보았던 카토가 순간 전율했다. 늙은 군의관을 제외한 대부분이 헤네티였지만 그들은 체격이 보통 사람과 비슷하다보니 외모부터 일반인과는 다른 X와는 달리 언뜻 구별이 되지 않았다.

‘조심해라. 가디언에 육박하는 고수들이다.’

카토가 몸을 더 움츠리며 부하들에게 급히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후방으로 물러난 황제에게 급전을 보냈다. 상황이 돌변한 이상, 황제의 결정이 필요했지만 헤네티들의 감각이 어느 정도 예민한지 알 수가 없다보니 황제와 세세한 내용까지 통신상으로 보고를 올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황제에게서 짧고도 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트닌이 뒤를 쫓도록 하고 너는 계속 베흔을 찾아라.’

카토는 황제의 의중을 바로 깨달았다. 저들을 쫓는 데는 교단을 상대하는 데 익숙한 이트닌이 제격이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디언 한 명을 남겨드릴 테니 저놈들을 계속 감시해 주십시오. 저희는 베흔이 갔을만한 방향으로 수색하도록 하겠습니다.”

카토에게서 무기를 받아든 이트닌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사교도 일당을 이트닌에게 맡긴 카토는 가디언 1명을 놔둔 채 4명의 가디언들만을 거느리고 골짜기 아래로 바삐 내려가기 시작했다. 베흔의 행선지가 근위대 본대라면 이 지형에서 갈 만한 길은 골짜기를 타고 죽 내려가 평지로 가는 것뿐이었다.

“이 길로 갔다면 곧 따라잡을 수 있겠지.”

“빌어먹을, 얼어 뒈지겠네, 씨발.”

카렐이 놓고 간 털망토를 등에 덮은 베흔은 얼어붙은 발끝에 힘을 주어 어렵게 걸음을 내디뎠다. 감각이 죽어가는 발끝을 느끼며, ‘차라리 카렐을 따라갈걸 그랬나’하는 말도 안 되는 미련이 들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쌓아 온 적개감과 자존심의 찌꺼기는 그렇게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몸에서 자꾸 힘이 빠지면서 등에 멘 두 자루의 칼도 그를 땅바닥으로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지하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이후로 계속 머리도 어질어질했고, 거기에 차가운 기온까지 계속 그를 괴롭혔다.

다행히 쿠베가 말한 작은 분지는 원래 나온 ‘구멍’에서 그다지 멀지는 않았다. 덕택에 베흔도 ‘갈 테니까 빨리나 나와 있어’라고 대답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영 실수 같았다. 그래도 4군단에 함께 있는 보안국 요원들과 남부기병들이 그를 데리러 와 준다고 했으니 곧 따뜻한 실내에서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시며 기분좋게 두 다리 뻗고 쉴 상상에 자꾸 곱아가는 손끝도 일단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쿠베가 준 ‘조언’ 때문에 내려오는 내내 기분은 그다지 편치 않았다. 4군단장 힐러가 ‘베흔이 죽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오보’와 연계되어 있거나, 혹은 ‘딴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고, 그동안 힐러를 신뢰하지 않고 따돌림해왔던 베흔으로서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내용이었다.

어쨌든 쿠베의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일단 자신이 4군단에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돌아만 가면 다 해결될 일이었다.

“저긴가.”

베흔이 둔해진 발끝을 일단 멈추고 얼굴을 찡그리며 앞을 응시했다. 수풀 너머 어둠 속에 보이는 목적지는 말이 분지지 골짜기 2개가 만나는 작은 공터였다. 다행히 10기 정도의 남부 근위기병들이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아무도 타지 않은 빈 말 한 마리도 한쪽에 그럴싸하게 매여 있었다. 베흔이 탈 말을 미리 마련한 모양이었다.

“쿠베 이 한심한 놈.”

이곳까지 오는 내내 승용차의 따뜻한 실내만 고대했던 베흔으로서는 내심 실망스러웠지만 사방이 숲과 골짜기로 둘러싸인 험한 지형을 보니 차가 들어오기도 영 고약해 보였다. 그쪽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나아가려던 베흔이 순간 멈칫했다.

“왜 하필 이런 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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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다시 연재를 재개합니다. 연중기간 동안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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