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71화 (668/1,132)

< -- 671 회: 파트 9.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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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이들과 함께 올 것이라던 보안국 요원들은 보이지 않았고, 공터 주변은 사방이 산과 빽빽한 자작나무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추위와 짙은 어둠에 경황이 없어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었지만, 생각해보니 이곳의 위치도 어딘지 이상했다. 그가 나온 ‘구멍’에서 보통 사람이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지형은 내리막인 남쪽과 오르막인 북쪽 고개가 전부였다. 동서방향은 지형이 험해 그의 몸으로는 움직이기가 어려웠고, 특히나 서쪽은 동맹군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쿠베가 말한 방향은 근위대가 있는 곳과는 반대인 북쪽이었고, ‘이쪽 길이 더 편할 겁니다.’라는 쿠베의 말도 사실과 달랐다. 비록 거리는 짧았지만 언덕 하나를 넘어야 했고 그 뒤의 내리막은 경사가 무서울 정도로 가팔라서 다리에 힘이 빠진 베흔은 몇 번이나 급경사에 구를 뻔했었다.

되짚어보니 차라리 구멍에서 바로 근위대 쪽으로 내려가는 남쪽 루트가 이곳보다는 경사가 완만했던 것 같았다.

그때, 숲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베흔의 인기척을 남부기병들도 알아챘는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베흔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인지 평소 창에 달고 다니는 소속부대 배너도, 가슴의 부대 휘장도 보이지 않았다.

“근위대장님이십니까?”

“잠깐, 거기 멈춰서 관등성명부터 밝혀.”

베흔의 경고에 기병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자리에 말을 멈춰 세웠다. 아직은 기병들과의 거리가 제법 있었다. 짙은 어둠 때문에 아직 베흔을 발견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델루지 가 중장기병 제9연대 소속…….”

‘제롬에게 확인해 보면 되겠지.’

할룩스를 힐끔 쳐다보았던 베흔은 순간 당황했다. 무슨 이유인지, 그의 할룩스가 ‘불통’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베흔의 굳어가는 몸에 차가운 공기보다 더한 냉기가 확 번지는 것 같았지만 그는 겉으로 전혀 티를 내지 않은 채 기병들에게 더 물러나라며 다시 경고했다. 아직 베흔의 속내를 모르는 기병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조금 뒤로 물러나 주었다.

‘어떤 놈이냐.’

베흔의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지금껏 지독히도 구박을 받아 온 힐러가 참다못해 배신을 한 것인지, 아니면 ‘믿는 도끼’인 쿠베가 정말로 배신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날이 추우니 빨리 오십시오. 저 아래에서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흔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기병들이 답답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베흔은 섣불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계속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젠장.’

불안감에 사로잡힌 베흔은 괜한 모험에 나서느니 그냥 두 발로 걸어 본대로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설사 누군가가 배신을 했다고 해도 어차피 ‘정신 제대로 박힌’ 근위대 일선 장병들이라면 자신을 공격할 리가 없었다.

“근위대장님, 날이 춥습니다. 빨리 나오십시오.”

기병들이 다시 그를 재촉했다. 베흔이 평소 말투대로 짜증스레 대답했다.

“알았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베흔이 몸을 움츠리며 숲 더 깊은 곳으로 조금씩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순간, 그의 적외선 시야에 이 공터 주변으로 모여드는 다른 기병들의 희미한 윤곽이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도 족히 30기는 넘어보였다. 그렇다면 이곳에 온 남부기병들은 최소한 40기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제기랄, 설마?’

베흔의 머리에 최악의 상황이 흘러갔다. 남부최고제후 제롬의 명령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남부기병들이 한 번에 몰려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곱아서 말을 듣지 않는 발끝을 살금살금 움직여 계속 물러났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냥 걸어서 귀환하는 편이 안전할 것 같았다.

“근위대장님! 어디 계십니까!”

자작나무 숲을 포위한 기병들이 다시 그를 재촉했지만 베흔의 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장교가 조금 전 베흔의 기척이 느껴졌던 자작나무 숲 안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빨리 찾아!”

명령을 받은 기병들이 요란한 소음을 울리며 숲 속으로 돌진하기 시작했지만 키 작은 자작나무 때문에 수색이 쉽지 않았다. 그 사이 베흔 역시 조금 전 도망친 구멍 쪽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내 꼴이 뭐냐.’

베흔이 분개했지만 하지만 자꾸 식어가는 몸과 굳은 다리는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는 덤불 사이에 몸을 숨기고 엉금엉금 기어 온 길을 다시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작은 자작나무 숲은 어딘가에서 쏟아져 나온 남부기병들이 이미 포위하고 있었다.

‘젠장.’

베흔은 덤불에 몸을 숨긴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젠 움직일 수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최악의 궁지였다.

누군가 자신들을 숨어서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다하카르 교단의 아프라스 야투 박사는 대신관 묘에서 빠져나와 가져온 짐들을 대강 배분하던 참이었다. 베흔이 죽은 것으로 위장해서 연합군을 분열시키는 일도 성공했고, 카렐의 동맹군 쪽은 아스탈이 이미 풍비박산을 냈다고 했으니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이곳 지하에서 훔쳐낸 옛 유물들을 챙겨 안전하게 북부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사실 당초 목적했던 건 이곳에 소장되어 있던 ‘캡슐 8천개’였지만 카렐에게 선수를 빼앗겼으니 당장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접선장소가 어디라고 했냐?”

“남쪽은 근위대가 있으니 북쪽으로 고개를 넘어서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면 됩니다. 남부연합군으로 위장한 동지들이 차를 대 놓고 기다릴 겁니다.”

“제법 멀군.”

야투 박사가 옷깃을 여미며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 늙고 둔한 몸으로 이곳까지 오는 것도 고역이었다.

물론 대신관과 그 후계자 외에는 출입조차 금지된 대신관 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던 것은 영광 중의 영광이었지만 환기구에 매달려 이곳까지 올라오던 도중에도 가슴을 조인 하네스와 탁한 공기에 몇 번이나 질식해 죽을 뻔한 고비까지 넘겼던 터였다.

“저희가 업고 모실 테니 염려 마십시오, 신관님.”

헤네티 대장이 웃으며 말해주었지만 노구의 야투 박사에게는 이 추운 날 밖에 있다는 것부터가 힘든 일이었다.

그때, 헤네티 중 한 명이 ‘구멍’ 안을 급히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지하에서 누가 올라오나 봅니다. 안에서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납니다.”

야투 박사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시계부터 살폈다.

“근위대 놈들? 벌써?”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야투 박사가 경악을 했다. 그도 4군단장 힐러가 눈치가 빠른 자인 것은 알아챘지만 그가 이미 황궁 지하의 카타콤베를 어느 정도 읽어냈을 정도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올라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가디언들이라면 15분에서 20분이면 충분할 겁니다.”

“빨리 빠져나가야겠다. 군단장 힐러인가 하는 놈 어딘지 기분이 나빴어.”

또다시 위기감을 느낀 야투 박사가 헤네티들에게 서두르라며 손짓을 보냈다.

사역병  차림의 헤네티 한 명이 그를 급히 등에 업었고, 나머지 헤네티들이 수장고에서 빼내 온 옛 교단 유물들과 5구나 되는 시체를 급히 챙겼다. 그 중 하나는 ‘베흔의 시체’ 행세를 했던 것이었고 나머지 4개는 지하에서 베흔과 카렐 손에 죽은 헤네티들의 시체였다.

“빨리 가자. 갈 길이 먼데 짐까지 있군.”

야투 박사의 재촉에 그들은 허겁지겁 북쪽으로 언덕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걱정 마십시오. 어차피 우릴 따라오지 못합니다.”

야투 박사를 업고가던 헤네티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능선 위에서는 옛 민병대 암살수 출신의 전사와 가디언이 이들의 뒤를 그림자처럼 조용히 밟고 있었다.

“여길 누가 지나갔나봅니다.”

선두에서 막 고개를 넘던 헤네티가 잠시 일행을 정지시켰다. 그곳에는 나뭇가지가 꺾인 흔적과 누군가 미끄러져 땅이 긁힌 흔적이 남아있었다.

“설마.”

베흔이 앞서 이 길을 지나갔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야투 박사가 정색을 했다. 그때, 바닥을 유심히 살피던 헤네티 대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젠장.”

“무슨 일이냐?”

“이 발 크기 좀 보십시오.”

헤네티가 야투 박사에게 흙에 남은 큰 발자국을 가리켰지만 이 짙은 어둠 속에서 노인의 눈이 그것까지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렐 아니면 베흔이 여길 지나간 게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이런 발 크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 고개 아래쪽 숲에서 누군가 외치는 고함소리와 말굽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원래 그들이 내려가야 할 길목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

야투 박사가 다급히 물었다. 워낙에 고요한 한밤 중이다보니 숲에서 들리는 소리는 헤네티나 가디언이 아니어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번쩍거리는 걸 보니 중장기병 같은데 그럼 남부기병들일 겁니다.”

“남부기병? 그네들이 왜 저기 있어?”

당황한 야투 박사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되돌아가는 건?”

“더 위험합니다. 뒤를 쫓아오는 근위대 놈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보아 자칫 그놈들과 마주칠지도 모릅니다.”

헤네티 대장이 급히 지도를 다시 펼쳤다.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지만 위험해도 일단 숲만 조금 우회해서 돌파해야겠습니다. 다른 길은 더 위험하고 돌아갈 시간도 없습니다.”

야투 박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은 그렇게 하라고 손짓했다. 일촉즉발의 전투가 벌어지는 한복판인 만큼,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진짜 근위대’나 남부제후군, 혹은 동맹군을 만나기가 십상이었다.

“이 아래는 자작나무 숲입니다. 숲만 피해서 능선을 타고 내려가겠습니다.”

방향을 조금 바꾼 교단 일행은 베흔과 남부기병들과의 숨바꼭질이 벌어지고 있는 계곡의 자작나무 숲을 살짝 돌아 능선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찍이에서는 가디언과 이트닌이 이 교단 일행의 뒤를 조용히 밟고 있었다. 교단 일행이 고개를 넘는 것을 확인한 이 둘도 서둘러 고개에 올라 주변을 살폈다.

“저 밑에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디언이 망원경으로 자작나무 숲 안쪽을 살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갑주가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였지만 그 이상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새 헤네티들이 살피던 바닥의 발자국을 재빨리 확인한 이트닌이 이를 꽉 악물었다.

“베흔 대장이 저기 있어.”

“예에?”

“이게 폐하 발자국은 아닐 테니까, 이렇게 큰 발자국이라면 누구 것인지 뻔하지.”

“근위대는 반대쪽인데요? 왜 여기로 왔겠습니까?”

“내 그걸 아나.”

이트닌도 눈에 망원경을 댔지만 빽빽한 자작나무 때문에 숲 안쪽은 잘 보이지 않았다.

“카토 대장이 엉뚱한 데를 뒤지고 있는 것 같으니 이리로 오라는 게 좋겠어.”

가디언을 앞장세운 이트닌은 헤네티들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헤네티들이 지나간 길목은 정말 헤네티나 가디언이 아니라면 한 발짝 디디기도 어려울 만큼 경사가 급했다.

“젠장.”

가파른 능선을 타고 헤네티들을 추격하는 이트닌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 헤네티들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지라 걸음이 그렇게 빠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가디언이나 헤네티도 아닌 이트닌이 이런 지형의 어둠 속에서 그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헤네티 일행은 남부기병들이 버글거리는 자작나무 숲 옆을 숨죽이며 지났고, 이트닌 역시 그들의 뒤를 밟았다.

“아앗!”

발을 헛디딘 이트닌이 앞서가는 헤네티들 쪽으로 갑자기 죽 미끄러지고 말았다. 중심을 잃고 기겁을 한 이트닌이 가파른 내리막을 구르면서 바닥의 바싹 마른 나뭇잎과 돌들이 짓이겨지고 구르면서 고요하던 심야의 산중에 사방으로 요란한 소음을 울렸다.

“이, 이익!”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며 내려가던 이트닌을 가디언이 재빨리 붙들었지만 상황은 이미 수습하기 어려웠다.

“읍!”

고개를 든 이트닌과 가디언은 온몸이 그대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느닷없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던 헤네티들이 이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미끄러지며 굴린 돌조각은 아직까지도 자작나무 숲 안쪽으로 굴러 내려가고 있었다.

‘끝장이다.’

헤네티들과 눈이 마주친 이트닌은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헤네티들이 자신들의 짐을 내려놓고는 등에 지고 있던 무기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때, 자작나무 숲 쪽에서 남부 사투리가 잔뜩 섞인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기서 무슨 소리가 났어!”

이트닌과 가디언을 공격하려던 헤네티가 순간 멈칫거렸다.

순간, 기지를 발휘한 이트닌은 적에 대항해 무기를 뽑아들려는 가디언의 팔을 재빨리 붙들었다.

“옷부터 벗어.”

“예?”

이트닌의 임기응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 가디언은 일단 위에 입은 동맹군 근위가디언의 자켓을 재빨리 벗어던졌다. 그 사이, 숲 쪽을 뒤지던 남부기병 십여 기가 이트닌의 인기척에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젠장! 이 바보새끼들!”

기병들에 당황한 헤네티들이 이트닌 일행을 놓아둔 채 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워낙 좁은 골짜기다 보니 그 기병들이 20여명의 ‘근위대 복장’ 헤네티와 이트닌 일행을 발견한 건 순식간이었다. 남부 기병들은 근위대 복장을 하고 있는 헤네티들, 그리고 이트닌과 함께 있는 가디언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황금색 팔찌에 기겁을 했다.

“뭐야? 이놈들은?”

몰려든 남부기병들은 숲을 우회해 도망치려던 20여명의 근위대 복장 교단 무리, 그리고 그들을 쫓던 이트닌 일행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맙소사, 근위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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