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75 회: 파트 9.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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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마즈는 이런 옷을 입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아직 사지가 자유롭지 못했고, 걷는 것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런 상태에서, 게다가 일개 포로 주제에---최소한 오르마즈 스스로의 믿음으로는--- 옷이 맘에 들지 않으니 다른 것을 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헤네티들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일어난 오르마즈는 밀리타가 손수 입혀 준 자신의 새 옷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울에 비치는 지금 그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잘 어울리십니다.”
밀리타가 금실이 수놓인 오르마즈의 로브 위에 바닥까지 늘어지는 긴 망토를 덮어주며 입가 가득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오르마즈는 고개를 숙인 채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포로들 앞에서 진짜 설교까지 하신 일 있다죠?”
“그런 척 한 것 뿐이다. 훈련이었을 뿐이야.”
“교리공부도 이미 꽤 하셨다고 들었고요.”
“그래 봤자 가짜는 가짜지.”
멀쩡한 행동을 가짜였다고 둘러대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 좀 황당하다고 여겼지만 오르마즈는 자신이 진짜 성직자처럼 행동하기 위해 익혔던 교리가 이런 식으로 ‘적’들에게 이용되리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못했던 터였다.
“빨리 나오지 않고 뭐 하나.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문 밖에서 나즈라, 아니 야푸르 대신관의 반쯤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모시고 나갑니다.”
밀리타는 오르마즈를 부축하려는 헤네티들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손짓하고는 직접 그의 팔을 부축하고 문을 열었다. 보름 가까이 갇혀 있던 이 작은 방에서 처음으로 바깥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후우.”
가늘게 뜬 오르마즈의 눈에 살기도, 무기력함도 아닌 지독한 혼란이 스쳤다. 그의 앞에 있는 제법 넓은 응접실에는 천장과 벽의 큰 창을 타고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 가득 비치고 있었다. 지금껏 그가 있던 곳은 ‘아프라시아 관’ 옥상에 위치한 작은 펜트하우스였다.
“나와 함께 교단을 이끌 13번째 보석, 아르잔 오르마즈 빈트 다하카르입니다.”
볕이 가득한 환한 응접실 중앙의 긴 소파 주변에는 한때 그가 ‘나즈라’로 알고 있던 야푸르 대신관을 비롯해 7명의 사람들이 각자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흩어져 오르마즈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지난번 만난 ‘흰 베일의 여자’와 ‘해적두목님’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한구석에는 지난번 오르마즈를 치료해 주었던 니사 라말라 박사와 미남 교리학자 요아킴 같은 몇몇 사람들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그림처럼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이들을 바라보는 오르마즈의 입에서 ‘왜 하필 나입니까?’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아직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야푸르가 왜 자신을 뜬금없이 후계자로 선언했는지, 자신이 도대체 다하카르 마구스 가문과 무슨 관계인지, 명색이 대신관 후계자를 소개하는 자리에 12명의 마구스들 중 왜 7명만 모였는지, 모두가 의문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오르마즈에게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단 한 명, ‘흰 베일의 여인’만은 예외였다. 얼굴 가득 차가운 기운이 잔뜩 드리운 그 여인만은 오르마즈를 대할 때마다 지금처럼 어딘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보이곤 했다.
소파 중앙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한 깡마른 남자가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허어, 이 정도면 다하카르 가문이 조상님들 ‘이쁘장한’ 형질에서 완전히 환골탈태한 셈이군요? 야푸르?”
그의 말을 듣는 것인지 아닌지, 야푸르는 오르마즈의 모습을 지켜보며 입가 가득 흐뭇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체격에 딱 어울리게 큼직한 술잔을 들고 있던 ‘해적두목님’이 킬킬대며 그 깡마른 남자에게 냉큼 대꾸했다.
“그건 이미 야푸르 대에서 이루어진 거 아니었나? 전임 자하크 양반만 해도 젊었을 때 말 그대로 꽃 같았으니까. 잘 자네도 본 일 있던가?”
“나야 그 양반 늙고 나서야 봤지. 엥, 생각해보니 스피타마 자네도 젊을 때 직접 본 일은 없잖아? 잘난 체 좀 하지 말라고.”
오르마즈는 마치 사교클럽같은 분위기의 이들이 누구인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이전의 그였다면 바로 칼부터 뽑아들고 달려들었을 ‘표적’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들 모두는 각각 다른 색의 로브를 차려입었지만 로브의 색과 문장을 빼면 차림새는 거의 비슷비슷했다. 다만 한쪽에 선 야푸르의 어깨에 걸린 긴 금빛 머플러가 그의 ‘유독 특별한 신분’을 상징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젠 오르마즈의 어깨에도 길이만 조금 짧을 뿐 같은 것이 걸려있었다.
오르마즈는 이런 것 따위 필요 없으니 제발 자신을 놓아 달라고 애원했지만 야푸르는 ‘차차 알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면서 그에게 제대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그가 알려준 건 ‘반대하는 세력이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가 전부였다.
오르마즈에게는 자신을 내버린 민병대에 돌아가고픈 마음도, 야푸르가 원하는 대로 교단에 있어 줄 마음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하기도 싫은 현실을 어떤 식으로든 떠나고픈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당장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때 그의 연인이었지만 이젠 ‘지배자’가 되어버린 야푸르는 슬슬 두 얼굴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오르마즈를 찾아와 안아주고 다정한 말을 건넸지만 매번 그가 꺼내는 ‘운명을 거부한다면 죽음을 맞는 건 너 혼자만은 아닐 거다.’라는 말은 그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네 얼굴도 알렸으니 이제 아케메니안 궁으로 가자. 앞으로 네가 있을 곳이니.”
야푸르는 오르마즈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안았지만 오르마즈는 여전히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요?”
오르마즈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 운명이니.”
야푸르가 이마에 다시 입을 맞추었지만 오르마즈는 매몰차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야푸르는 짐짓 낙담하지 않은 척 쓴웃음만 지었다.
야푸르는 오르마즈의 어깨에 팔을 걸었지만 그는 이 ‘적’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야푸르의 무지막지한 힘은 오르마즈를 바로 떨쳐내고 그의 손목을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우읍.”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던 오르마즈가 입술을 꽉 다문 건 암살수로서 훈련받은 반사동작이었다.
“타고난 근력에 비해 손힘이 약하구나. 하긴, 회복이 아직 덜 되었으니.”
빈정거리는 것인지, 걱정해주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오르마즈는 손목이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에 이를 빠득 악물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자신을 잡아끄는 야푸르를 따라 옥상 밖으로 나서야 했다.
그리고 6명의 ‘하마타’ 마구스들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옥상에는 평범한 셔틀 한 대가 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도 정말 좋군. 아케메니안 궁에 돌아가기 딱 좋은 날이야.”
야푸르가 맑은 하늘을 올려보며 입가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바깥바람에 오르마즈와 야푸르의 망토자락이 가볍게 펄럭였다.
“자.”
야푸르는 품에서 목걸이 펜던트 하나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언뜻 펜던트로 보이는 그 안에는 자료들을 보관하는 칩이 꽂혀있었다.
“당장은 아니어도 좋으니.”
야푸르는 그 펜던트를 어머니 아지드와 오르마즈가 찍은 사진이 들어있는 로켓 옆에 함께 걸어주었다.
“앞으로 네가 알아야 할 것들을 모두 정리했으니 언제든 마음의 준비가 되면 열어보도록 해. 크바르나 회의에서 경연을 통과하고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으려면 꼭 알아야 할 것들이니. 그리고 내 오른팔로 살아가기 위해서 알아야 할 기초적인 것들도 모두 정리했고.”
야푸르가 낮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후계자 검증에 실패하면 본인은 물론이고 그 혈족과 동반자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건 대신관인 나도 막아줄 수 없어.”
오르마즈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바로 이것이 지난 며칠간 계속 그를 괴롭혀 온 끔찍한 현실이었다. 코윈의 수용소에 있는 가족들은 지금까지는 그저 반역도인 아버지와 맏이 때문에 격리 수용되어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행여 그가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거나, 운명에서 탈락한다면 수용소에 있는 가족들 또한 ‘합법적으로’ 제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정만 받고 나면 할 일이 많다. 마구스들은 대대로 군 문제에 관해 문외한이었지만 네가 그쪽에 전문가인 게 정말 다행이다. 이제 코메트를 네가 맡아줬으면 좋겠구나. 테번 그놈은 믿을 수가 없어 보인다. 아케메니아에 코메트의 본부가 있으니 경연 이후로는 그곳의 내 처소를 네게 주마.”
오르마즈는 입술을 꽉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줄곧 차가운 그에게 야푸르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코윈에 있는 네 가족들도 불러올 참이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아지드와 세네피스를 그곳에 계속 둘 수는 없으니. 아케메니아 궁의 하렘에 그네들이 살 곳도 만들라고 명했다.”
오르마즈는 자신에게 던져진 첫 번째 ‘당근’임을 깨달았지만 최대한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너무도 오랜 세월 그리워한 어머니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린 순간, 울컥하며 마음이 약해진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세네피스도 아직 어리니 최대한 아껴줘라. 밀리타와 함께 너와 네 핏줄만 바라보고 살 여린 아이니.”
야푸르가 말했지만 얼굴조차 본 일 없는 세네피스의 존재는 아직 그에게 그다지 절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오르마즈는 ‘세네피스’라는 말에 뒤따르는 밀리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눈치챘다.
야푸르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모두를 살리려면 네가 경연을 통과해야 해.”
오르마즈는 아무 대답도 않은 채 목에 걸린 칩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이 안에는 신학도들이 배우는 갖은 경전, 교리해석과 교단의 역사와 구성이 담겨있을 터였다. 대신관 후계자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 경연에서 늙은 신관들과의 논쟁을 이기지 못한다면, 혹은 자제력을 잃고 ‘룰’을 어긴다면 야푸르의 말대로 그는 여지없이 끌려나가 산 채로 불에 태워질 판이었다.
“교리 쪽에는 스피타마 마구스가 데려온 이오타 요아킴 박사가 큰 도움이 될 거다. 네가 교리 문제에서 경연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동반자가 되어 줄 거다. 기본적인 의학 지식 또한 필요할 것이니 그건 수나 마구스가 보내 준 니사 라말라 박사가 도움이 될 것이고…….”
오르마즈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6개 ‘하마타’ 교단에서 붙여 준 6명의 ‘동반자’가 배정되어 있었고, 그들 모두는 각자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는 젊은 전문가들이었다.
언뜻 들은 바로는 이 ‘동반자들’은 자신이 받들 대신관 후계자와 비슷한 또래에서 선발하고, 그가 경연 통과에 실패한다면 함께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다. 물론 성공한다면 평생 대신관 아래에서 최고의 지위를 구가할 특권을 부여받는 셈이니 그들에게도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결국 야푸르가 말했던 ‘너 혼자만은 아닐 거다’에는 가족 외에 이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신학교는 고사하고 기초적인 정규학력조차 전혀 없는, 말 그대로 ‘무학력’의 암담한 처지였다. 그가 아는 건 군사에 관한 것, 아니면 암살수 훈련을 받으며 익힌 잡다하고 체계 없는 지식이 전부였다.
게다가 지금 오르마즈에게 온 ‘동반자’는 6명이 전부였다.
셔틀 문 앞에 선 오르마즈는 멀리 남쪽의 언덕 위에 있는 창문도 없는 건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금껏 민병대에는 ‘정체불명의 건물’로 알려져 있던 기이한 시설물이었다. 하지만 오르마즈에게는 더 이상 아니었다.
“네게 충성할 새로운 헤네티들이 이미 합성이 끝난 상태로 저곳에서 착상될 날만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 날 실망시키지 마라.”
야푸르는 오르마즈의 어깨에 끊임없이 부담을 계속 얹었다. 이렇게 몰아붙이는 그의 속내는 아마도 오르마즈가 ‘딴생각’ 따위에 헛되게 신경을 쓰느니 자신에게 주어진 막중한 운명에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자신의 자리에 익숙해지기를 원하는 것일 터였다.
“저 헤네티들이 자라면 어차피 민병대는 몰락한다. 다 만들어놓은 개량종 헤네티 세포까지 5천개나 훔쳐가 놓고도 제대로 못 써먹는 한심한 놈들 아니냐.”
야푸르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오르마즈의 손등에 핏줄이 확 곤두서는 것을 보았지만 짐짓 모른 척했다. 그리고는 오르마즈에게 따라 들어오라고 손짓하고는 먼저 셔틀에 올랐다.
“들어가세요.”
머뭇거리는 오르마즈를 밀리타가 재촉했다. 아직 제대로 걷지조차 못하는 오르마즈는 그에게 밀려 마지못해 셔틀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는 제일 중앙, 야푸르가 앉아있는 큰 좌석 바로 옆의 의자에 힘겹게 몸을 앉혔다. 비록 야푸르보다는 아래였지만 뒤이어 들어오는 나머지 마구스들을 내려다보는, 틀림없는 상석이었다. 마지막으로 밀리타가 문가의 작은 자리에 두 손을 모으고 자리를 잡았다.
“아케메니안 궁으로 출발합니다.”
셔틀이 움직이는 순간, 다시 옛 모습으로 돌변한 야푸르가 오르마즈의 손등을 다정하게 잡았다. 지난 며칠간의 끔찍한 기억이 남아있는 남극성당과 ‘아프라시아 관’이 발밑으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셔틀은 오르마즈에게 ‘아르잔 빈트 다하카르’로서의 새로운 운명을 선사하게 될 교단의 중앙본부 아케메니안 궁---이후 제국의 황궁이 위치하게 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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