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76 회: 파트 9.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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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을 구해냈다는 연락을 받은 카렐은 맥이 풀렸는지 큰 숨을 내쉬며 자리에 힘없이 축 늘어졌다.
베흔은 힐러가 있는 4군단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몸조리중이라는 연락이었다. 비록 그에게서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확답까지 받은 건 아니었지만 수송선과 반격을 위한 중요한 보급품을 모조리 잃고, 최악의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그가 받은 두 번째 희소식이었다.
첫 번째 희소식은 이곳에 도착한 직후, 황궁에 있는 페로와 코리온에게서 온 것이었다. 카렐이 죽은 것으로 착각한 보벤이 또 한 번의 배신극을 준비하려 한다는 말에 카렐은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하나’라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정작 이 소식을 알려준 페로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를 못했다.
아마 단둘이 통화하고 있었다면 페로도 ‘이번엔 얼마나 위험한 데서 날뛰었길래 그 모양 그 꼴이 되었냐’며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무슨 이유엔지 그의 말투에는 함께 있는 코리온을 의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카렐도 이 꼴이 된 자신을 대하는 두 사람의 표정을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구분할 수 있었던 건 성질을 애써 죽이고 있는 페로의 사무적인 음성과 ‘화학식을 알려주시면 제가 해독약의 제법을 알아보겠습니다.’라는 코리온의 언뜻 차분한 음성이 전부였다.
물론 그 정도로도 카렐은 두 사람의 표정이 어떨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는 있었지만.
“상의 시력은 언제쯤 되찾을 수 있겠나.”
베아트릭스가 황제에게 항독소를 주사하던 니사에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니사도 이번만은 변변한 대답을 못한 채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능력 밖입니다. 곧 진짜 전문가께서 오실 테니 그때까지 차분히 몸 관리하시며 기다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치의의 이런 대답이 영 못마땅한지 베아트릭스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그가 채 무언가를 따질 여유도 없이, 황제의 할룩스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카렐은 할룩스를 손에 쥐고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냐.”
“폐하? 무사하십니까?”
조금은 차갑게 들리는 유난히 가는 그 여자 목소리는 카렐에게도 퍽이나 오랜만이었다. 카렐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워달라며 눈짓을 보냈다.
“세상에, 살아 계셨군요.”
“마스터 케스난? 복잡하니까 나중에 말하지. 일단은 내가 죽은 걸로 해 둬.”
카렐은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후에야 영상 기능을 작동시켰다.
간만에 황제와 마주하기 위해 그 여자도 유별난 복장을 하고 있겠지만 지금의 황제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붉은 톤의 화려한 침실에 기대앉아 있던 북부 길드마스터 케스난 오나시스는 입에 물고 있던 긴 담배를 왼손의 황금 갈고리로 눌러 끄고는 황제의 흐릿한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런데 보아하니, 신경독인가요?”
“북부 길드마스터인 그대가 내게 직접 연락을 해 오다니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모습이 많이 안 좋으시군요.”
이 차갑고 고혹적인 여인의 목소리는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몸도 기분도 모두 엉망이다.”
“수송선단이 모조리 증발된 것을 말씀하시는지요?”
“보안국만 아는 소식을 그대가 이미 알고 있다? 훗, 내가 한심해지는군.”
“그것 말고도 두 가지 소식이 더 있습니다.”
“방금 들은 것과 연관이 있나?”
“아마도요.”
케스난이 가늘고 긴 다리를 반대로 꼬고 앉으며 눈을 치켜떴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습니다.”
“지금 말장난할 기분이 아니니 빨리 말해라.”
마음이 급해진 카렐이 버럭 화를 냈다.
“저희 길드가 그 수송선편에 ‘사소한’ 물건들을 구매하고 있던 것만 살짝 눈 감아 주신다면 말입니다.”
“뭐라고?”
“아시다시피, 북부는 간접세율이 꽤 센 편이라서 말입니다. 게다가 291년에 북부제후들이 몰락한 이후로 4개 조합 놈들이 모든 유통을 독점하고 있어서 물가가 살인적이지요. 북부 노동자들이 제법 높은 임금을 받는 것 같아도 사는 꼴은 그 모양 그 꼴인 것도 따져보면 그 때문이고요.”
“변명 따위는 접어라, 요는 황제령에서 빈 채로 북부로 가는 수송선을 이용해서 그동안 밀수와 탈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 아니냐?”
카렐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당장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케스난이 냉큼 황제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었다.
“저 역시 이번에 큰 손해를 보게 생겼습니다. 그러니 저로서도 폐하의 진노를 감수하고 이렇게 털어놓는 것이지요. 앞으로는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미리 상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좋게만 말하면 ‘유통 다변화’라고도 볼 수 있지요.”
“어쨌든 털어놓는 건 해결책을 갖고 있다는 뜻이냐?”
카렐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케스난이 꺼진 담배를 옆으로 치워내며 비로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물건만 실을 바보는 아닙니다. 수송선마다 제 사람 한둘씩은 심어놓았죠.”
케스난이 형상 속의 황제에게 살며시 눈을 흘겼다.
“그런데 출발 1시간쯤 전에 이상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북부에서 황제령으로 가는 화물은 대부분 고가의 금속제품이나 기계장비 위주라 적재중량의 한계까지 차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화물은 적재중량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무슨 뜻이지?”
무언가 머리에 퍼뜩 떠오른 카렐이 보이지도 않는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보고대로라면 이번에 올 화물은 공성장비와 갑주, 각종 중장비였고, 그런 것들을 실은 수송선이 적재중량에서 절반도 채우지 않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수송선이 처음부터 비어 있었다고?”
“제게 정보를 준 그 무식한 놈 생각은 혹시 황제령으로 보낼 물건이 있으면 실어주겠다는 뜻이었겠지만……다시 생각해보니 이번 선단에는 애당초 값나가는 물건을 거의 싣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카렐의 눈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 말은, 이번 실종이 선단 내에서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는 말이냐?”
“아마도요.”
케스난이 침착하게 대답하며 불 꺼진 빈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수송선에 있는 제 수하들과는 하임달에서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제 수하들은 만일을 대비해 생체 추적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 제 아랫놈들이 그 뒤를 쫓는 중입니다. 수송선이 실종된 것인지, 아니면 집단으로 어딘가에 숨은 것인지 파악하는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로 올 중장비들이 실제 어디로 갔는지도 알아내라.”
“물론이지요, 어떤 분의 명이신데.”
케스난이 큰 손해를 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이제 안 좋은 소식을 이제 전해드려야겠군요.”
케스난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북부 상공조합장인 아스탈 레즐린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이번 일의 후폭풍에서 도피하려는 수작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카렐이 이에 힘을 꽉 주었다. 아스탈이라면 카렐이 알고 있는 한 밀리타의 아버지였고, 황실과 북부상공조합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사실 그 역시 이번 일의 배후에 북부 상공조합이 어떤 식으로든 연계된 것 같다는 짐작을 하고 있던 차였다.
케스난이 복잡해진 황제의 머릿속을 바로 정리해 주었다.
“아스탈 그자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모르지만 상공조합이 관련된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폐하의 수하에도 그곳 출신들이 꽤 있으니 그네들을 조심해서 살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어떻게 사방팔방 그놈들의 손길이 가지 않은 데가 없다는 말이냐.”
케스난이 황제의 넋두리에 들은 의미를 바로 집어냈다.
“‘그놈들’이라는 건 어딜 말씀하시는지요?”
“사교도들에 관해 잘 아나?”
“글쎄요, 그쪽은…….”
케스난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대로 넘어갈 사람은 아니었다.
“원하신다면 그쪽에 조직을 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래, 그런데…….”
카렐이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보니 무엇이 우선순위이고 무엇부터 손을 대야할지도 막막했다.
그때, 짧은 생각 하나가 카렐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곳에 오기 직전, 그가 귀인 책봉을 하기로 선언을 했던 사람, 아스탈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직 황궁에 남아있었다.
“맙소사, 그럼 밀리타는?”
황제가 펜지켄트로 떠난 후, 군수부장 밀리타는 곧 있을 정식 귀인 책봉만을 기다리며 사뭇 긴장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아스탈에 대한 공포만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그는 차라리 황제의 몰락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만은’ 절대 그의 품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아스탈과 그의 교단은 배신한 밀리타와 일체의 연락을 끊었고, 밀리타도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번 마지막으로 그의 처소까지 찾아온 아스탈에게 당했던 기억은 끔찍했다. 그는 자기 발로 서기도 힘들 정도로 무참하게 유린당했지만 변변한 저항도, 심지어 비명 한 마디 지를 수가 없었다.
아스탈은 ‘나니까 이 정도 만족시켜주지.’라며 히죽거렸지만 그가 저항을 못 한 건 아스탈과의 관계가 여자로서 만족스러워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저 저항할 수 없도록 프로그램된 자신의 혐오스러운 본능 때문이었다.
그렇게 욕구를 채운 아스탈은 기진맥진해진 밀리타를 ‘과로로 탈진한 것 같으니 병원에 데려가겠다’며 천연덕스럽게 궁에서 데리고나왔지만 내명부 법도를 제대로 모르는 아스탈의 이 행동은 생각지도 않은 사람의 훼방으로 이상하게 흘러가 버렸다.
그날 주차장에서 공교롭게 딱 마주친 건 황후 아메스 일행이었다. 가뜩이나 밀리타 일가에 감정이 좋지 않던 아메스는 ‘명색이 귀인이 될 사람이 외간남자 등에 업혀 있다니!!’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가며 주차장을 한바탕 뒤집어놓았다.
심지어는 아스탈이 ‘아버지’라며 둘러댄 후에도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그 철없는 황후는 ‘그럼 아버지는 여자더냐’라며 진노를 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덕택에 아스탈은 밀리타를 강제로 데려가려는 계획을 일단 접어야 했고, 밀리타는 바로 엄격한 내명부로 처소가 강제로 옮겨지고 말았다. 게다가 2명이나 되는 깐깐한 시녀가 각각 그의 기사와 비서가 되어 24시간 감시자로 달라붙게 되었지만 아메스의 그 철딱서니 없는 ‘처벌’이 밀리타에게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물론 지금 그의 곁에도 기사, 아니 아메스 편의 시녀가 가까운 곳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당장의 업무에 지장을 주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일에 열중하며 자리를 잡아가던 밀리타는 북부에서 오는 수송선단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에 허겁지겁 항구부터 달려나왔다.
그가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건 어차피 들어오지도 못할 화물 때문은 아니었다.
아스탈의 속내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이번에 실종된 선단이 이전에 실어다놓고 간 군수물자들 역시 문제였다. 그 물품들 중 일부는 이미 전장에 보내어졌지만 대부분은 아직 아케메니아 항구의 하역장에 쌓여있었고, 곧 일선 부대에 보내어질 예정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밀리타가 내린 결정은 화물의 발송을 모두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군수부 직원들을 모조리 거느리고 달려나와 지난번 입고된 화물들을 모두 풀어 재조사하라는 극단적인 명령을 급히 내렸다.
워낙에 물동량이 많다보니 그동안은 첫 입고물품만 제외하면 별다른 검수도 거치지 않은 채 각 지역으로 보내지곤 했었다. 그랬어도 북부에서 워낙 신용 있게 발송을 해 준 덕분에 북부에서 온 물품에서 큰 문제가 보고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는 열흘도 더 걸립니다.”
밀리타의 황당한 명령을 받은 하역장 인부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상자들을 가리키며 볼멘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많은 걸 어느 세월에 다 전수검사를 합니까.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한동안 들어올 게 없으니 너희 할일도 없어. 그 며칠 일거리 준 게 불만이냐?”
밀리타는 자신의 족히 2배 덩치는 됨직한 작업반장에게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였다. 인부들은 하는 수 없이 행선지별로 각각 따로따로 작업해놓은 짐들을 모두 풀어놓기 시작했다.
“식자재를 최우선으로 샘플채취해서 보건국으로 보내고, 개인지급품을 두 번째로…….”
“부장님!”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밀리타는 식자재를 검사하던 부하 직원의 다급한 부름에 급히 한쪽으로 달려갔다.
“이익.”
밀리타가 입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군수부 직원이 강제로 뜯어놓은 곡물 컨테이너에는 온통 시커먼 곰팡이가 잔뜩 올라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항균 보관상자에서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어디서 보낸 거냐!”
“남부 루게에서 발송한 밀입니다. 이번에 전향하고 처음 보내 온 건데 세닉 가가 불량품을 보낸 걸까요?”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밀리타가 급히 자료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상자도 이번에 실종된 수송선 편에 실어 온 것이었다. 뜯어놓은 상자 뚜껑을 살피던 밀리타는 그 한쪽에 뚫린 작은 바늘구멍을 발견했다. 심지어 뚜껑의 공기조절장치도 고장이 나 있었다.
“누군가 상자를 훼손하고 곰팡이 포자를 일부러 넣은 게 틀림없어.”
밀리타가 난감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앞에서 밀을 시커멓게 버려놓고 있는 이 정체불명의 곰팡이는 그도 언젠가 실험실에서 본 일이 있는 것이었다.
“이거 하나 뿐만이 아닐 거야.”
밀리타가 바닥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식자재가 이 꼴이라면 북부에서 들어온 다른 물품들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의 할룩스가 윙윙거리며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직원들의 다급한 목소리를 알려왔다.
“부장님! 22구역의 보리가 모두 곰팡이가 슬었습니다.”
“18구역의 육류도 변질된 것 같습니다. 악취 때문에 작업이 불가능합니다!”
“1구역에 있는 중장기병용 스코프가 이상합니다. 5개나 검사했는데 하나도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앞다투어 들어오는 암담한 소식에 밀리타의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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