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77 회: 파트 9.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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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30구역으로 와 보십시오!”
이번 목소리는 그저 상황만 알려오던 다른 직원들의 톤과는 완전히 달랐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 챈 밀리타는 힘이 빠져 휘청거리는 다리로 허겁지겁 차에 올라 14구역으로 향했다. 항구 남쪽, 성벽 아래 강변에 위치한 30구역은 건초나 건자재처럼 따로 포장되지 않는 벌크 물품들을 쌓아놓고 직접 가공하는 거대한 야적장이었다.
흙먼지를 마시며 허겁지겁 차에서 내린 밀리타의 앞에는 기병대 보급품으로 반입된 압축 건초와 곡물사료 더미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비막이용 덮개가 치워져 있는 거대한 무더기는 언뜻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어보였다.
“무슨 일이냐?”
다급히 묻는 밀리타에게 군수부 검역관이 조금은 쭈뼛거리며 무언가 시커먼 것을 내보였다. 정체를 확인한 몇몇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실험실 생활을 오래 한 밀리타에게는 아주 익숙한 동물이었다.
“시궁쥐 아니냐?”
“예, 맞습니다. 군마 사료를 보관할 때 가장 속 썩이는 놈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놈들이 전혀 없다는 것도 이상한 조짐이지요.”
“그런데?”
“사료더미 사이사이에 시궁쥐들이 무더기로 죽어 있었습니다.”
순간 경악한 밀리타가 입을 가렸다. 검역관이 가리킨 곳에서는 인부들이 사료더미 안에 죽어있는 수십, 수백 마리의 쥐들을 파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죽은 쥐를 넣은 거야? 아니면…….”
“쥐의 상태를 보아 길어야 죽은지 하루나 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숨이 붙은 놈들도 많습니다. 사료에 있는 곡물을 먹고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일단 시료를 보건국에 보냈지만 아무래도 장시간에 걸쳐 효과가 나타나는 독극물이 포함된 것 같습니다.”
검역관으로부터 사료의 이력이 적힌 서류를 넘겨받은 밀리타가 턱에 힘을 꽉 주었다. 이번 사료도 서부 수베르에서 황제령으로 문제의 수송선편에 가져온 것이었다. 게다가 일부는 황제의 원정군으로 나가 있는 슈로 기사단과 슬레이프니르가 원정 선단에 이미 가져가 말에게 먹이고 있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밀리타는 눈을 감으며 잠시 머릿속을 가다듬었다. 그가 아는 한은 황제도 이미 죽었고, 이젠 말 그대로 황제 세력의 몰락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난 여기 사람이야. 난 이제 황제의 사람이라고. 전처럼 사느니 죽고 말지.’
그는 아랫사람들을 불러 단호하게 일렀다.
“지금이라도 수습해야 하니 일선 부대에 이 사실을 알리고 당장 사료 공급을 중단하라고 해. 내 총리 각하께 가서 새 사료 반입건을 상의드릴 테니 이놈들은 모두 소각할 준비를 하고.”
지시를 마친 밀리타는 다급한 걸음으로 다시 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기사, 아니 시녀에게 급히 고함을 질렀다.
“빨리! 황궁으로 가라!”
“알겠습니다.”
그때, 냉큼 대답하는 그 목소리는 여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누, 누구냐?”
기사의 굵은 목소리에 밀리타가 기겁을 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문을 열고 급히 뛰쳐나가려 했지만 순간 목에 줄이 감긴 밀리타는 문에 손도 대지 못한 채로 악 소리를 내며 차 뒤에 맥없이 굴렀다.
“아, 아으윽.”
차 바닥에 쓰러진 밀리타는 바닥 한구석에서 목에 철사가 감긴 채 괴상한 자세로 구겨진 시녀와 경호원의 시체가 밖에서 안 보이도록 처박혀 있는 것을 그제야 발견했다. 바로 지금껏 그를 감시, 혹은 보호해오던 내명부 사람들이었다.
“3일이나 뒤를 쫓았는데, 제법 철저히 피해 다니시더군요.”
기사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옆에 던져놓으며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타르서스 직할군의 해체 이후로 이곳 항구의 경비를 맡고 있던 북부보병 경비부대 장교 차림새였고, 어쩌면 정말로 그 부대 소속인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익.”
씩씩대던 밀리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 죽어 있는 시녀의 시체를 힐끔 돌아보았다. 내명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아메스가 붙여 준 저 시녀의 벨트에는 비상시 보안국에 긴급한 구조요청을 할 수 있는 작은 장치가 붙어있었다.
보안국을 믿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버둥거리는 척, 시녀의 시체 쪽으로 발을 뻗던 밀리타는 옆에서 들려온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바싹 굳어버렸다.
“내가 그리워서 밤마다 몸을 꼬고 있을 줄로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지? 내가 돌아오라고 틀림없이 경고했건만.”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대신관의 차림새를 한 아스탈이 밀리타에게는 끔찍한 곳, 하마피타 교단의 총본부인 크테시폰 궁 연회실에 여유롭게 앉아있었다.
“어차피 황제도 뒈졌으니 널 누가 건드릴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거기 놔두는 건 기분이 나빠. 어쨌든 넌 내 소유물 아니던가?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도 내가 판단하고, 제거해도 내가 제거해야지?”
아스탈은 테이블 위의 작은 거치대에 걸어놓은 금제 서클렛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맑은 소리를 내 보았다. 이마 부분에는 다하카르 교단을 상징하는 큰 사파이어가, 그리고 얼굴 양쪽으로는 긴 다이아몬드 사슬이 늘어져 이마와 관자놀이, 뺨을 감싸는 화려한 세공품이었다.
아스탈이 쓰고 있는 대신관의 서클렛보다 사슬의 개수가 적고 길이가 짧은 것을 빼면 거의 비슷한 모양이었다.
“내 이걸 일단 씌워줬으면 최소한 내 새끼 서넛 정도는 낳아주고 뒈져야 정상이지.”
아스탈의 미소에 밀리타가 바들바들 떨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절 놔 주세요, 이제 더 이상은…….”
“너?”
아스탈이 키득거리며 밀리타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걱정 마라. 내일 밤 내 침대에 들 년은 네가 아니니까.”
“뭐, 뭐라고요?”
“운명의 상대를 모조리 잃은 불운한 여인네는 이제 마지막 남은 내가 거둬야 하지 않겠나?”
창백해져 있던 밀리타의 눈가에 지금까지보다 더한 공포와 분노가 맴돌았다. 그런 밀리타에게 아스탈이 다시 눈웃음을 지었다.
“지금 배를 타고 자식새끼 시체 거두러 가는 중이라지?”
밀리타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아스탈이 노리고 있는 상대는 분명했다. 조금 전, 그가 이곳으로 나올 때 배 한 척이 항구를 막 떠나던 광경이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로서는 꼴도 보기 싫은 여자였지만 최소한 아스탈의 노리갯감이 되는 꼴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대로 끌려간다 해도 그 여자와 함께 있는 끔찍한 상상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날 이대로 놔 주지 않으면…….”
“그러면 어쩔 건데?”
아스탈이 싱글벙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당신도 그 대가를 치를 테니…….”
“오호, 무섭기도 해라. 어떻게 대가를 치를지 한 번 설명 좀 해 주겠나.”
부들부들 떨던 밀리타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며 미친 사람처럼 버둥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밀리타의 발이 죽은 시녀의 벨트 버클을 몇 번이나 힘껏 걷어찼다. 그러면서 그는 바닥을 짚은 손톱 끝을 바싹 세우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저년 좀 조용히 시켜.”
좌석 뒤에서 밀리타의 목을 조르고 있던 누군가가 밀리타를 거칠게 내리눌렀다. 순간, 뚝 하며 손톱 부러지는 느낌에 밀리타가 악 소리를 냈다.
야적장을 벗어난 차는 2번 도크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멈춰 섰다. 그곳에는 여러 지역으로 떠나는 교체병력과 보급품을 실은 크고작은 선단이 막 출항을 앞두고 있었다.
“이, 이익.”
목이 얽힌 밀리타는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좌석 뒤에 미리 숨어있던 또 한 명의 괴한은 낮은 숨소리만 들릴 뿐 정체도 알 수가 없었다.
밀리타의 차가 선 곳은 선단을 호위하는 쾌속 경비정 앞이었다. 병사들이 타는 배 주변과는 달리 경비정이 세워져 있는 선착장에는 불도 모두 꺼져 있었다. 차에서 끌어내려진 밀리타는 배 주변에 북부 경비병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내심 ‘마지막 기회구나’라고 생각했다.
“레즐린 부장님?”
배 옆을 지키던 눈에 익은 북부보병대 경비장교가 싱글벙글 아는 척을 하며 들어가라 손짓을 보냈다. 눈을 부릅뜬 밀리타가 눈동자를 움직여 그 장교에게 자신의 위험한 상황을 전하려 했다. 그때, 그 장교가 눈가에 초승달처럼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절 보고 어쩌라고요?”
그의 기이한 표정을 본 순간, 밀리타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사방에 아스탈의 사람들 투성이였고, 누굴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태워진 고속 경비정은 평소처럼 병력수송 선박에 조금 앞서 도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케메니안 궁의 야경이 밀리타의 눈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최소한 그에게는 상황이 절망적이었다.
시녀에게서 들어온 ‘긴급호출’을 받은 보안국에서는 조금 전 입수한 ‘사료 건’에 뒤이어 들어온 긴급한 상황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밀리타에게 일이 생겼음을 알게 된 보안국장 루토는 당장 항구의 헌병대에 연락을 취했고, 그곳에서 뜻밖의 얼굴을 마주했다.
“거긴 언제 가 있었나?”
움찔한 루토가 화면 속에 나타난 차가운 표정의 이 귀족 여자에게 물었다.
자이납과 함께 항구에 나와 있던 사에나가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10분쯤 전에 폐하께서 밀리타 레즐린 부장을 각별히 살피라고 명령을 주셨습니다. 항구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나온 참입니다. 시녀가 죽었다면 혹시 위치추적이 됩니까?”
“발신지가……2번 도크 남쪽 끝 선착장이다.”
“알겠습니다.”
사에나는 별다른 말조차 없이 바로 운전석에 직접 올라 차를 몰기 시작했다. 저 별난 보안비서관은 명목상 보안국 소속이고, 그의 하급자였지만 사실 루토로서도 함부로 하대하기가 영 껄끄러웠다. 가문도 가문이려니와, 평소 행동도 보통 사람 같지 않았고, 황제의 최측근이 된 요즘 들어서는 부쩍 더 이상했다.
물론 딱히 오만하게 굴거나 높은 가문 행세를 하려 드는 건 아니었지만 루토에게는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황제에게서도 그런 인상을 자주 받고는 있었지만, 저 여자 역시 ‘사람 같지 않다’는 느낌이 종종 들곤 했다.
“저기 있군.”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본 사에나가 차를 급회전하자 안에 타고 있던 헌병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차를 세운 사에나와 자이납이 헌병들과 함께 석궁을 뽑아들고 재빨리 차에 다가갔지만 차 안은 시체 한 구만 빼면 이미 텅 비어있었다. 보통 사람들이었으면 욕 한 번쯤 내질렀을 이 상황에서도 사에나는 눈가를 살짝 찡그린 것이 고작이었다.
“중랑장님! 이게 뭐죠?”
뒷자리를 조사하던 자이납이 다급히 사에나를 불렀다. 의자 아래 구석에 누군가의 부러진 손톱이 핏자국이 남은 채 박혀있었다. 혈흔이 선명한 것을 보아 방금 떨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벨벳으로 마무리된 바닥 시트에는 손톱으로 마구 긁은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사에나는 그 자국들이 그냥 발악의 흔적이 아님을 바로 깨달았다.
사에나는 언젠가 서투르게 익힌 바람 문자를 바로 머리에 떠올렸다.
“람다 아스탈……세네피스를…….”
문장은 미처 끝을 맺지 못한 채로 내버려져 있었지만 사에나의 눈가는 이미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웬만한 일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던 이 여자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져 있는 모습에 자이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희는 모두 물러나 있어.”
사에나가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헌병들에게 매서운 눈짓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헌병들을 믿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든 의심해야 할 때였다. 황제는 ‘사방팔방 적의 첩자가 숨어있으니 그 누구도 함부로 믿지 마라’며 신신당부를 했던 터였다.
“황태후 폐하께서 항구를 언제 떠나셨지?”
“20분이나 30분쯤 됐을 겁니다. 솔이, 아니, 황빈 마마께서 함께 가셨습니다.”
생각없이 말했던 자이납이 허둥지둥 말투를 고쳤지만 사에나는 그의 무례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듯 급히 할룩스부터 켜고 황제와 연결했다. 다른 일이라면 모르지만 내명부인 황태후와 황빈, 귀인이 될 사람까지 모두 얽힌 문제였고, 그가 혼자 독단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잠시 후, 화면에 나타난 황제는 그거 조금 전 통화했을 때처럼 흐릿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몸으로 어딜 가십니까?”
사에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근위대와 약속이 있다.”
“예?”
“전쟁을 끝내는 마지막 전투를 위해 담판을 지으려 한다.”
사에나는 조금은 낯선 이 상황이 잠시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고 지금까지 알게 된 사항들을 빠른 어조로 설명했다.
“그 동안……우리가 완전히 속아왔다는 뜻인가.”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황제의 흐린 눈가에 흐르는 참담한 후회를 읽어냈지만 그는 여느 때처럼 아랫사람들 앞에서 절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전투’라고 한 말을 취소해야겠군.”
황제가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단호하게 명령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조금 메이고 있었다.
"상관 없다. 아스탈 그 작자의 속내야 어쨌든 어차피 그자가 없었다면 동부의 배신 직후에 나도 몰락했을지 모르니. 날 도와준 걸 자충수로 만들어 버리면 돼."
눈물을 감춘 황제는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듯 표정에 대범함의 가면을 덧씌웠다.
“난 이곳에서 연합군을 끝낼 계획을 세울 테니 넌 그곳에서 어머니와 황빈을 당장 구해내고 레즐린 부장을 찾아내라.”
“알겠습니다.”
황제가 멀리 앞에 보이는 한 작은 외딴집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일단 연합군 일당의 씨부터 말린 후에 짐과 식솔들을 능멸한 그 패거리들을 모조리 내 옥좌 앞에서 울부짖게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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