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79화 (676/1,132)

< -- 679 회: 파트 9.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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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경비병 소대장이 당혹스런 얼굴로 선원들을 돌아보았고, 병사들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황태후의 머플러를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저들 중 3분의1 정도는 그의 수하들이었지만 나머지는 아무 것도 모르는 그저 보통 병사들이었다.

“안 돼, 안 돼, 죽으면…….”

그가 고개를 저었다. 세네피스가 이대로 죽는다면 그들은 동맹군에서도, 아스탈에게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터였다. 아스탈의 명령은 간단했다. 세네피스는 반드시 살려서 잡아오되, 솔도 탐이 나니 가능한 산 채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소대장이 병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장 찾지 않고 뭐 해! 다 뛰어들어서 물 속을 조사하란 말이야! 황빈 마마를 올려드려!”

병사들이 온통 머플러를 건져내는 데 정신이 팔린 사이, 선실에 숨어든 세네피스는 시간을 끌며 기다릴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배 자체가 크지를 않다보니 마땅치를 않았다. 자신의 방에는 대기 중인 시녀들이 있을 테고, 선실에는 자고 있는 병사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원군이 와 줄 때까지 숨을만한 곳을 찾던 그는 ‘기관실’이라 쓰여 있는 두꺼운 철문을 힘껏 열었다. 워낙 작은 배니 따로 상주하는 기관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매캐한 기름과 쇠 냄새, 시끄러운 소음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잠시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맨발을 한 세네피스는 발바닥이 쩍쩍 붙을 것처럼 차가운 철판 위를 조심조심 걸어 나아갔다.

“이익.”

세네피스가 순간 자리에서 굳었다. 좁고 어두컴컴한 기관실 안쪽에서 큰 상자와 씨름을 하고 있던 웬 황소만한 선원의 휘둥그레진 눈동자와 세네피스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화, 황태후 폐하?”

선원은 맨발을 벗고 있는 세네피스의 모습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런 지저분한 곳에는 무슨 일로…….”

정신을 차린 선원이 얼른 털모자를 벗으며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쩔 줄 몰라 멍해져 있던 세네피스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내 잠시 돌아다니다가 그냥 호기심에…….”

세네피스의 말이 좀 이상한지 선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뭐라 물을 처지는 아니었다.

“보시다시피 귀한 분께서 있으실 곳이 아닙니다. 게다가 신발은 또……”

뭐라 말하려던 선원은 갑자기 들려오는 선내 방송 소리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모든 선원들은 갑판으로 집결해라! 황태후 폐하께서 물에 빠지신 것 같으니 전원……”

“으음?”

또다시 눈이 주먹만해진 선원은 바로 코앞에 멀쩡하게 서 있는 황태후를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입 다물고 조용히 해라.”

세네피스가 얼른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이 거구의 선원이 첩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상대를 직접 쓰러뜨릴 처지가 못 되는 이상, 일단은 절반의 확률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 선원은 북부 억양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이유는 묻지 마라. 날 지키고 얼마간 입만 다물면 크게 보답할 터이니.”

선원이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알겠습니다.”

선원이 모자를 다시 눌러쓰며 긴장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구석에 있던 쇠파이프를 집어들며 조심조심 말했다.

“제가 문 앞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황태후 폐하.”

세네피스는 그제야 안도했지만 맨발바닥이 기관실 바닥의 철판에 닿으면서 발이 마비되는 것 같은 지독한 고통이 종아리 아래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 이 선원이 옮기려 애를 쓰고 있던 나무상자 위에 앉으며 마비된 발을 바닥에서 일단 떼었다.

“으읍.”

생각 없이 바닥을 내려다보던 세네피스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얼른 참았다. 큼직한 나무상자 틈새로 무언가 붉은 액체가 희미하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 세네피스는 쇠파이프를 든 채 문을 지키겠다며 돌아서 있는 선원을 조심스레 살피며 옆에 떨어져 있던 팔뚝만한 금속 공구를 움켜쥐었다. 쇳소리가 달그락거리는 것을 느꼈는지 그 덩치 큰 선원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세네피스는 몸을 막 돌리던 그자의 왼손이 옆구리에 있는 할룩스에서 급히 떨어지는 것을 알아챘다.

“내 몸은 지켜야 할 것 아니냐.”

세네피스가 짜증스레 대답하자 그자는 그제야 다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세네피스가 뒤에서 몇 발짝 다가올 때까지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황태후가 뒤로 너무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안 선원이 다시 입을 열며 고개를 돌렸다.

“제가 있을 테니 염려하지 마시고…….”

황태후를 전혀 경계하지 않고 있던 그 선원은 이 호리호리하고 나약해 보이는 여자가 악을 쓰며 공구를 휘두르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는 손을 뻗어 급히 막으려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이익!”

그는 세네피스의 손목을 붙들려 했지만 미끄러지며 공구에 옆구리를 얻어맞고 휘청거렸다. 공구에 맞은 할룩스 한쪽이 깨지며 조각이 나 바닥에 흩어졌다.

“아, 아악.”

제대로 맞았다면 내장에 큰 충격을 입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테지만 이 거구의 사내는 쇠파이프를 떨어뜨리며 옆으로 몇 발짝 밀려났을 뿐,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놀란 세네피스가 다시 공구를 치켜들었지만 여지없이 손을 붙들리며 그대로 바닥에 짓눌리고 말았다.

목을 눌린 채 발악을 하는 세네피스에게 이 거구의 ‘선원’이 입맛을 쩝 다셨다.

“그분의 소유물만 아니었다면 바로 목을 꺾었을 텐데.”

“그분?”

세네피스가 ‘선원’의 손을 쳐내려 했지만 쇳덩이에 눌린 것처럼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무거운 공구에 몸통을 강타당했는데도 이렇게 멀쩡한 것을 보아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네, 네놈……가디언이냐?”

세네피스의 물음에 선원은 키득거리며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네피스는 주먹으로 상대의 팔과 몸통을 있는 힘껏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만히 계시오. 그 고운 몸에 상처 나기 전에.”

한 손으로 세네피스의 목을 꽉 누른 그자는 갑자기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순간 세네피스는 끔찍한 상상에 놀라 몸부림을 쳤지만 그가 세네피스를 바라보는 초점 없는 시선은 본능에 굶주린 보통 남자의 것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버둥대는 세네피스의 손을 벨트로 묶으려던 그자는 뒤에서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여기 계신가요?”

문이 빠끔히 열리며 누군가 고개를 슬쩍 디밀었다. 이 괴물같은 선원이 뒤를 돌아보며 주의가 흐트러진 순간, 세네피스는 그자의 팔뚝을 힘껏 물어뜯었다.

“이익!”

지금껏 꿈쩍도 않던 선원이 깜짝 놀라며 손을 들자 세네피스가 허겁지겁 바닥을 기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어딜!”

선원이 팔을 뻗어서는 도망치는 세네피스의 뒷덜미를 덥석 붙들었다. 하지만 그 사이 뒤로 다가온 ‘더 무서운 적’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놈이! 놓지 못해!”

문을 닫고 달려온 솔이 막 뒤를 돌아보며 확인하려는 이 선원의 턱을 주먹으로 있는 힘껏 후려쳤다. 꿈쩍도 하지 않던 이 괴물의 턱이 체중이 실린 솔의 일격에 빡 소리와 핏방울을 공중에 날리며 옆으로 휙 돌았다. 솔은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이자의 배와 목을 무릎과 팔꿈치로 찍으며 몸을 날렸다.

“웁!”

그때까지도 세네피스의 뒷덜미를 쥐고 있던 이 거구는 그의 팔꿈치에 두 번째로 얻어맞고는 힘에 밀려 뒤로 벌렁 쓰러졌다. 그자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던 세네피스 역시 함께 당겨지며 차가운 바닥을 굴렀다.

“여기서 도망가세요!”

솔이 선원의 목을 팔꿈치로 누른 새, 세네피스는 무명포를 벗어던지고 허겁지겁 이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문 쪽으로 달아났다. 솔이 어떻게 이곳까지 알고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저 짐승같은 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문을 열고 혼자 나가려던 세네피스는 문득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이, 이이익.”

바닥에 쓰러진 채 저항하는 선원과 혼자 버거운 힘싸움을 하던 솔은 턱을 붙들리며 이를 꽉 악물었다. 몸만 성하다면 이 유리한 상황에서 상대를 제압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형편이다 보니 여의치를 않았다. 솔의 턱을 붙든 이 괴물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그의 목을 비틀기 시작했다.

“악!”

짧은 힘싸움 끝에 결국 힘으로 밀린 솔이 비명을 지으며 옆으로 붕 날아가 엔진에 튕기며 바닥에 뚝 떨어졌다.

“아, 아아아악.”

이미 골절상을 입은 어깨와 등에 큰 충격을 받은 솔이 뼈를 으스러뜨리는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 선원의 무릎이 그보다 먼저 솔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바쁘니 넌 닥치고 조용히 있어라.”

솔을 깔고 앉은 선원이 눈을 부라리며 바윗덩이만한 오른쪽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당황한 솔이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왼쪽 어깨가 보호대에 고정되어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솔의 눈앞이 아찔해진 순간, 이 괴물의 목 뒤에서 흰 무언가가 불쑥 나타나 이자의 목에 긴 줄 같은 것을 확 걸었다. 선원이 그 와중에도 주먹을 휘둘렀지만 솔의 턱을 빗맞으며 약간의 피를 낸 것이 전부였다.

“귀찮게!”

선원은 자신의 목을 움켜쥔 세네피스를 뒤로 거칠게 밀어냈다. 한 주먹감도 못 되는 이 학자님은 그로서는 신경 쓸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한 솔을 향해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무식한 놈.”

세네피스의 짧은 저주와 함께 드르륵 하는 쇳소리가 울리며 이 괴물이 무언가에 채인 것처럼 뒤로 휙 끌려갔다.

“아읍!!!”

눈이 휘둥그레진 선원이 그제야 발버둥을 치며 목을 움켜쥐었다.

“시체는 이런 걸로 드는 거다.”

세네피스가 기관실 엔진 위의 도르래에 걸린 쇠사슬을 다시 힘껏 잡아당겼다. 조금 전 세네피스가 건 사슬에 목이 얽힌 선원은 미처 줄을 풀어 볼 새도 없이 다시 뒤로 끌려가며 버둥거렸지만 그의 무시무시한 괴력으로도 쇠사슬과 도르래를 당할 수는 없었다.

세네피스가 마지막으로 힘을 주어 사슬을 죽 잡아당겼다.

“우, 우우욱.”

선원의 발끝이 바닥에서 떨어진 순간, 그의 운명은 결정된 셈이었다. 문가에 주저앉은 세네피스는 ‘교수대’에 매달린 이 정체불명의 사내가 비명도 내지 못한 채로 발버둥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쳐다보았다.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이 흐른 후, 이자의 마지막 저항도 결국 조금씩 약해져갔다.

“괜찮으세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온 솔이 멍이 든 세네피스의 목과 손목을 보며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세네피스는 산산조각이 나 있는 솔의 어깨 보호대만 힐끔 쳐다보았을 뿐 별 대답은 하지 않았다. 물론 ‘넌 어떠냐’는 식의 어색한 물음 따위는 애당초 기대도 하지 않았고, 이 정도 관심을 보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솔이 어렵게 말했지만 세네피스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혼자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돌아와 준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날 어떻게 찾아냈냐.”

“맨발로 오셔서……바닥에 체온이 남아 있었어요.”

“역시 피는 못 속이나.”

세네피스가 퉁명스레 말했지만 솔은 이번 그의 말투에서는 이전처럼 폄하당하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날 따라올 다른 놈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뜻이고.”

세네피스의 눈짓을 받은 솔이 얼른 일어나 조금 전 선원이 떨어뜨린 쇠파이프와 몇 개의 공구들을 문틈에 끼워 열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 사이 세네피스는 문제의 ‘나무 상자’에 다가가 보았다.

“으읍.”

창백해진 세네피스가 입을 가리며 뒷걸음쳤다. 상자 안에는 그가 배를 탈 때 인사를 올리던 선장과, 언제 당했는지 모르는 동맹군 호위가디언의 시체가 토막이 난 채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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