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80 회: 파트 9.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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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와 황빈께선 기관실에 숨어 계신다고 한다. 우리가 덮치면 기관을 꺼 주겠다고 하셨으니 놈들을 제압하는 것만 남았다.”
뒤쫓는 쾌속정의 뱃머리에 선 사에나는 세네피스와 연결된 할룩스를 켜진 채로 허리춤에 챙기며 앞을 가리켰다. 엔진이 과열된다며 선장이 불평을 할 정도로 최대한의 속도를 붙여 달려온 사에나와 자이납은 멀리 깜박이는 배와 준설선을 눈으로 확인할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조페 대장을 기다릴 시간이 없을 것 같다. 우리끼리 친다. 네가 선봉을 맡아라.”
“그러믄입죠.”
칼을 뽑아든 자이납이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지나치리만큼 가벼운 그의 웃음에 사에나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 명랑한 반쪽가디언은 무슨 이유인지 자신과는 대조적이어도 너무 대조적인 이 귀공자 앞에서 이상하리만큼 해해거리고 있었다.
“내 얼굴에 뭐 묻기라도 했는가?”
보다못한 사에나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물었지만 자이납의 대답은 아주 싱거웠다.
“아뇨.”
“그런데 왜 그러나?”
“모르겠어요. 그냥 중랑장님 옆에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사에나가 눈가를 다시 살짝 찡그리며 이 능글능글한 반쪽가디언과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사에나는 소리만 들려나오는 할룩스를 다시 확인했다. 조용하던 기관실에 쾅쾅거리며 무언가 굉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놈들이 여길 알아 챈 모양이다. 몇 분이나 더 걸리겠느냐?”
세네피스의 차갑고 침착한 목소리가 문을 버티며 악을 쓰는 솔의 고함소리와 묘하게 교차되고 있었다.
“거의 도착했습니다. 카메네이 중랑이 곧 들어갈 테니 조금만 버티어 주십시오.”
사에나와 자이납이 탄 보트가 무섭게 물살을 가르며 배 꽁무니로 접근해갔다. 배에 거의 접근한 사에나가 확성기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보안국 쉐너 중랑장이다! 너희 배에 황상을 속이려 든 반역도의 무리가 있다! 반역도와 관계없는 자들은 즉시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려라! 저항하는 자들은 무조건 사살한다! 너희 정체가 헤네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영문도 모른 채 갑판 위에 서 있던 몇몇 경비병들은 난데없는 보안국의 등장에 혼란스런 표정이었지만 곧 창을 버리고 바닥에 엎드렸다. 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계획이 들통난 것을 깨달은 몇몇 ‘반역’ 경비병들이 허겁지겁 배를 출발시키려 했지만 이미 기관실의 세네피스가 엔진의 동력을 끊어버린 후였다.
“후우.”
다시 갑판에 내려온 경비장교, 아니 헤네티 지휘관이 바싹 다가온 동맹군의 보트를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동맹군 보트에는 딱 보기에도 건장한 가디언들이 올라 있었고, 뒤따르는 더 큰 쾌속정에는 그보다 더 많은 정규군과 헌병들이 있을 터였다.
“이렇게 몸뚱이를 버리다니, 수치스럽군.”
그의 할룩스에는 조금 전 들어온 ‘못 데려온다면 제거하고 사라져라.’ 라는 아스탈의 짧은 전문이 새겨져 있었다. 작전 실패였다.
심호흡을 한 그는 할룩스를 통해 함께 온 부하 헤네티들에게 짧은 음성 한 마디를 전했다.
“그분의 은총으로 새로이 태어나겠지. 나중에 다시 만나자.”
헤네티가 옅은 숨을 내쉬며 막 햇살이 비치려는 동쪽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번쩍 하는 불꽃이 그의 몸을 에워쌌다. 뒤이어 배 곳곳에서 폭발하듯 불꽃이 터져 오르며 이 크지 않은 여객선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맙소사!”
막 선미에 뛰어오르려던 자이납은 바로 눈앞에서 거대한 불꽃으로 변해버린 몇 명의 괴한에 기겁을 하며 다시 뒤로 물러섰다.
“불꽃에 접근하지 마라! 배 위에 있는 놈들은 모두 물에 뛰어들어!”
당황한 사에나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선량한’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끔찍한 결과지만 누가 반역도인지는 밝혀내는 복잡한 단계 따위는 일단은 필요 없어진 셈이었다.
“제엔장! 뭐야, 이 새끼들은!”
자이납이 보병의 큰 방패를 빼앗아들고 엄청난 열기를 막으며 무작정 배 위에 올랐다. 그는 불이 붙은 채 타고 있는 시체들 옆을 재빨리 뛰어넘어 선실 출구로 다가갔지만 이미 그 앞에는 웬 시체에서 뿜어나오는 불꽃이 완전히 틀어막고 있었다.
“중랑장님! 이 문으로 들어가긴 어렵습니다! 다른 출구 없습니까?”
당황했기는 여전히 보트에 있는 사에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태후 폐하, 그쪽은 어떻습니까?”
“갑자기 밖이 조용해진 것 같다. 어찌 된 일이냐?”
세네피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사에나는 배 아래쪽의 창으로 보이는 불꽃에 얼굴을 찡그렸다. 선실에 있던 자들까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면 세네피스 일행 역시 꼼짝없이 불에 갇힐 판국이었다.
“배에 불이 붙었습니다. 선실에도 불이 난 것 같으니 빨리 빠져나오셔야 합니다. 카메네이 중랑이 배에 올랐지만 내부로 진입하기가 어렵습니다. 반역도들이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는데, 지금까지 보고로 보아 끄기 어려운 특수한 인화물질 같습니다.”
“그러니 어쩌라고!”
세네피스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배 오른쪽 중간 선실에 창이 보이니 제가 밖에서 깨 보겠습니다. 바로 앞에 불이 났을지도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알았다.”
짧고 분명하게 대답한 세네피스는 문을 버티던 솔에게 나가야 한다며 손짓을 보냈다. 그의 눈짓에 가로대를 걷어내고 조심조심 문을 열었던 솔은 비명을 지르며 얼른 다시 닫았다. 조금 전까지 문을 당장이라도 부술 듯 밀어붙이던 적은 이제 없었지만 대신 어마어마한 열기와 불꽃이 기관실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맙소사, 어쩌죠?”
“나갈 곳도 없으니 안에 있어도 죽기는 매한가지다. 문을 떼어내라.”
애써 태연하게 대답한 세네피스는 기관실 한쪽에 있는 소화기를 집어들었다. 지금까지 철문을 놓고 안팎에서 벌인 힘싸움 덕분에 이미 경첩이 반쯤 떨어져 있었다. 솔이 막대를 끼워넣고 비틀자 너덜거리던 문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문틀에서 그대로 떨어졌다.
“비켜라.”
세네피스가 바로 앞에서 불타고 있는 3구의 시체에 얼른 소화기를 뿌렸지만 이 기이한 불꽃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서운 열기가 짧게나마 사그러진 것으로 충분했다. 솔이 두꺼운 문짝을 방패삼아 시체들을 밀어붙이며 복도 밖으로 나섰지만 이미 그곳도 검은 연기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필요가 없어진 문짝을 내던진 솔은 연기로 앞을 거의 보지 못하는 세네피스를 얼른 등에 업고는 위층의 선실로 뛰어올랐다. 선실 복도 또한 불로 앞뒤가 모두 차단되어 있었다.
“오른쪽 선실이다.”
세네피스가 콜록거리며 힘겹게 말했지만 지독한 연기에 조금씩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을 들이받아 들어간 작은 선실에는 사에나의 말대로 창이 있었다. 창 밖의 물에는 자이납이 둥둥 떠서 빨리 나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지만 제법 두꺼워 보이는 강화유리창은 깰 수 있을까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이익!”
솔이 창을 힘껏 걷어찼지만 예상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을 다시 걷어차려던 솔은 바깥에서 석궁을 겨누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강화유리도 역학적으로 약점은 있는 법이지.”
어머니가 물려준 에아 마구스의 석궁에 큼직한 단발의 관통용 볼트를 끼워 넣은 사에나가 장력을 최고로 설정하고 강화유리의 구석 모서리를 겨누었다. 유리 안에는 기절한 황태후를 업고 있는 솔의 모습이 빤히 보였고, 양쪽 모두 물 위에서 크게 흔들리는 보트 위였다.
“주, 중랑장님, 자칫 빗나가면.”
“황빈 마마, 듣고 계시면 몸을 숙이십시오. 카메네이 중랑 너도 물러나라.”
함께 보트에 오른 헌병들이 기겁을 했지만 사에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바로 방아쇠를 당쳤다. 팡 소리를 울리며 공중을 날아간 볼트는 유리의 모서리, 고정 핀 부분에 명중했지만 관통을 못 하고 튕겨 나왔다. 하지만 그 짧은 충격이 사방으로 실금이 쫙 그어졌다.
“하나 더.”
헌병들의 새파랗게 질린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에나는 또 한 발의 볼트를 끼워 조금 전 금이 간 바로 그 위치에 서슴없이 날렸다. 두 번째로 날아간 볼트는 조금 전보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이미 금이 가 있던 강화유리에 또다시 거미줄 같은 금을 남겨놓았다.
그제야 몸을 일으킨 솔은 선실 한쪽의 철제 의자를 집어들고 고정창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후려쳤다. 찢어지는 소음과 유리파편이 날렸지만 동시에 산소가 몰려들면서 뒤에서 불꽃이 확 커지는 모습도 보였다. 자신도 숨이 막히고 다급해진 솔은 세네피스를 껴안고 다짜고짜 물 위로 몸을 날렸다.
“아푸!”
유독가스에 반쯤 질식한 솔 역시 한 팔을 못 쓰는 터라 세네피스를 제대로 받치며 물 위에 떠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물이 너무 차가워서 보통 시민인 세네피스는 순식간에 체온을 빼앗기고 죽을 수도 있는 판이었다.
“기다려! 솔!”
허겁지겁 물을 헤엄쳐가려던 자이납은 한쪽에서 쏜살같이 헤엄쳐오고 있는 누군가가 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지금껏 그를 해해거리게 했던 그 ‘뻣뻣하고 콧대 높은 중랑장님’이 석궁을 내던지고 맨몸으로 물에 뛰어든 모양이었다. 자이납은 이 차가운 얼음물에서 별다른 장비도 없이 저렇게 펄펄 힘을 내며 헤엄쳐오는 저 여자가 정말 시민이 맞나 하는 생각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황태후 폐하!”
사에나가 물에 반쯤 빠져 있던 세네피스를 허겁지겁 건져내 가슴에 안아 숨을 쉬게 했다. 숨이 막혀 허우적대던 솔도 자이납이 뻗어 온 손을 덥석 붙들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제길, 제대로 증거물 건지긴 틀렸군.”
세네피스를 안고 배로 돌아가면서 사에나가 중얼거린 건 안도의 위로도, 잘 했다는 격려도 아니었다. 재가 된 헤네티들의 시체와 함께 불길에 휩싸인 배는 조금씩 물 아래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세네피스도, 솔도 다시 황제의 진영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 비록 밀리타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지만 적의 계획 중 하나만은 확실히 차단한 셈이었다.
어머니와 솔, 그리고 밀리타의 소식만을 기다리며 회담장소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로 차 안에 말없이 앉아있던 카렐은 사에나의 연락을 받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양 눈에 붕대를 감은 황제는 소식을 기다리는 내내 의자에 기대앉은 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던 터였다. 덕분에 함께 온 시로는 황제가 분노한 것인지, 지금의 상황에 절망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읽을 수가 없었다.
“레즐린 부장이 우리 편이었을까요?”
“가해자였을지 피해자였을지는 모르지만……어느 정도는 믿어야겠지.”
카렐이 고개를 숙인 채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와 의심을 사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는 독감으로 죽음의 코앞까지 몰렸던 황제에게 치료약을 구해다 준 은인이었고, 이번에도 납치 직전까지 아스탈의 배신을 수습하려 나름대로 애썼던 터였다.
“이전은 내 믿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쳐도, 이중첩자가 막판에 충성을 바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러면 귀인 책봉은…….”
“한 번 책봉을 선언한 이상, 어디에 있건 레즐린 부장은 짐의 귀인이다.”
“괜히 의심스러운 사람을……. 어차피 승은도 내리지 않으셨는데 그냥 책봉을 취소하심이…….”
“벌을 받아도 짐의 귀인 신분으로 받는다.”
카렐의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단호했다.
당황한 시로가 다시 물었다.
“레즐린 부장을 의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적도 내 사람으로 삼는데, 최소한 절반은 내 사람이 된 이를 믿는 게 뭐가 어렵나.”
카렐은 조금 전 베흔이 타고 온 차가 세워져 있는 어두운 창밖을 향해 보이지도 않는 눈을 돌렸다.
시로는 이 괴상한 황제의 사고방식이 정상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좀스러운 것인지 혼동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내가 놈들의 꼬리를 밟았다는 건 숨기는 게 좋아. 놈들이 우릴 완벽히 속여넘겼다고 자축의 잔을 들게 만들어야 그네들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낼 것 아닌가.”
“그, 그렇군요.”
시로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어쨌든, 감히 황제의 여자를 빼앗아간 그 작자도 언젠가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카렐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차 문을 열고 비로소 밖에 나섰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를 위해 시로가 나서서 손을 잡아 그를 눈앞의 작은 농가로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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