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83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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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확실한지 보여주시오.”
남자가 먼저 요구했다. 그런 그에게 파냐드는 주머니에서 캡슐 하나를 꺼내보였다.
“다 보여줄 수는 없고, 이것 하나면 일단 신뢰의 표시 정도는 되겠지?”
파냐드가 내민 건 바늘만한 크기의 작은 유리튜브였다.
“확인해 봐.”
튜브를 받아든 남자는 그것을 바로 뒤에 있는 수하에게 넘기고는 다시 파냐드에게 돌아섰다. 이번엔 파냐드가 물을 차례였다.
“내 조건은?”
“약속한 지역들은 넘겨주지. 어차피 내게도 별 쓸모없는 곳들이야. 너희 떨거지들 데리고 아케메니아에서 사라져 주기만 하면 돼. 거기선 너희가 포교를 하건 말건 난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베흔은 순간 뒷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파냐드의 이번 만남은 교단과의 휴전, 그리고 민병대 전체가 어딘가로 이동해 독립 세력을 꾸미려는 파냐드와 저 남자 사이의 어마어마한 거래인 모양이었다.
물론 이런 그의 복안에 관해 아랫사람들과는 일체의 논의도, 의견 수렴도 없었다. 어차피 이런 것이 지금까지 파냐드의 방식이었지만.
‘뭔가 어색한데.’
베흔이 눈가를 찡그렸다. 이런 ‘역사적인 거래’를 하기에 이곳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고, 앞에 있는 남자의 정체도 문제였다. 파냐드가 이쪽의 최고지도자인 이상, 상대방도 최소한 그에 필적하는 지위의 사람이어야 했다.
‘혹시 이자가 대신관?’
베흔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흘러갔다. 다시금 생각해보니 이 남자의 모습은 지난번 오르마즈가 말했던 ‘대신관 혈통’ 특유의 외모와 꽤 흡사했다. 중키, 앳되고 곱상하게 잘생긴 얼굴과 큰 눈도 모두 일치했다. 이자가 대신관이 맞다면 말 그대로 ‘전형적인 다하카르 가문 사람’인 셈이었다.
‘대신관과 고작 이런 데서 담판을?’
베흔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라 형언하기는 어렵지만 눈앞의 이 남자와 그 수하들에게서 ‘남극의 도살자’ 야푸르 대신관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기품과 위엄이 뿜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무언가 느낌도 좋지 않았다.
머리와는 달리, 그의 육감은 이 사람이 대신관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상대편 남자와 함께 온 수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맞습니다. X-5-3918번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예민한 청력 덕분에 적들의 귀엣말을 들은 베흔은 순간 재빨리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저자가 말한 건 바로 베흔 자신의 코드였다. 방금 전 파냐드가 넘겨준 바늘만한 튜브에 하필 자신과 관련된 무언가가 들어있었던 모양이었다.
“상자들을 가져와라.”
파냐드의 명령을 받은 베흔은 문제의 상자가 실려 있는 차의 짐칸으로 다가갔다. 이번 4개의 상자에는 모렌 박사가 ‘발생(發生)이 되지 않음.’이라고 표시했던 캡슐들이 들어 있었다.
저들에게 줄 상자들을 차곡차곡 챙기면서, 베흔은 저들이 ‘발생도 안 되고 쓸모도 없는’ 캡슐들을 굳이 가져가는 이유가 무얼까 혼자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비록 발생이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베흔은 이것들을 적인 교단에 넘겨준다는 것이 영 내키지를 않았다. 이것이 ‘거래의 대가’라면, 결국은 ‘발생이 된’ 캡슐들이 담긴 나머지 8개의 상자 역시도 거래 완료시 넘겨준다는 전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베흔의 이런 불길한 예상은 그가 4개의 상자를 메고 돌아왔을 때 파냐드의 말에서 바로 확인되었다.
“1차분 2,800개다. 상자 4개는 계획이 끝난 후에, 마지막 4개는 우리가 약속대로 이주한 후에 넘겨주지.”
남자의 일행들은 머뭇거리는 베흔의 손에서 4개의 상자들을 챙겨 마치 보물처럼 조심조심 들고 자신들의 차로 되돌아갔다. 상자를 확인한 남자는 주머니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파냐드에게 내밀었다.
“너희가 이주하는 데 쓸 군자금과 수송선 등록증이다.”
힐끔 쳐다본 그것들은 코윈의 대규모 조선조합이 지급을 보증하는 거액의 무기명 선박 채권이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멀어져가는 상자들을 보며, 베흔은 저것들이 어쩌면 먼 미래에 정말로 무서운 씨앗이 될 지도 모른다는 예상에 혼자 떨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파냐드는 ‘오늘만을 생각하는 사람’답게, 저들이 가져가는 상자 따위에는 별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방금 받은 채권만을 유심히 확인하고 있었다.
“네 아버지는 언제 만나게 해 줄 거지?”
서류를 베흔에게 넘긴 파냐드가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한 마디에서, 베흔은 저 남자의 정체를 바로 눈치 챘다. 그리고 저자가 ‘대신관처럼’ 생겼던 이유까지도.
‘대신관 아들?’
베흔은 티가 나지 않게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임무도 잊은 채 그 남자를 뚫어지게 살폈다. 자신과, ‘생전의’ 오르마즈가 그리도 궁금해 했던 바로 그 마구스 혈통이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회색빛으로 번쩍이는 눈빛만은 선명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야 할 일이 있을 지도 모르겠군.’
베흔은 저자의 눈빛을 자신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새겼다. 파냐드의 이 거래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 좋게 끝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생각이 굳어질수록, 저 기분 나쁜 남자의 존재가 어딘지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돌아가자.”
채권을 모두 챙긴 파냐드가 다시 차를 향해 돌아섰다. 베흔은 그를 뒤따라 돌아서면서도 저 정체불명의 남자를 끝까지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음에는 바로 알아봐 주마.’
베흔이 눈을 부릅떴다. 다른 시대, 다른 곳, 다른 처지에서 또다시 만나더라도 눈빛만으로 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망각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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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남은 아스탈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렐과 베흔이 모두 죽고, 제국이 당장 무너질 듯 환호하던 수하들도 세네피스를 놓치고, 베흔도 살아남았다는 예상 밖의 결과에 적이 당황한 듯 각자의 위치로 돌아간 상태였다.
제일 상석인 6시 방향에 앉은 아스탈은 원탁에 놓인 밀리타의 서클렛을 손가락을 툭툭 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세네피스를 구하려 한 것이 질투였을까, 살려는 발악이었을까.”
시를 읊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스탈은 조금 떨어진 옆에 놓여 있던 밀리타의 것과 비슷한 모양의 또 다른 서클렛을 슬쩍 흘겨보았다.
“임자를 놓쳤으니 저건 당장 치워버려.”
아스탈의 짜증에 시동 한 명이 황급히 그 서클렛을 집어 들었다. 자리에서 물러나려는 시동에게 9시 방향에 앉아있던 한 여자가 자리에 멈추라고 손짓을 보냈다. 시동은 고개를 숙이며 얼른 자리에 멈추었다.
“이젠 맘을 굳히실 때가 되었습니다. 밀리타는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으니 이제 제거하시죠.”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니 참견하지 마시오, 가르시바.”
“돌아가신 선친의 실수를 되밟으실 겁니까?”
아스탈이 다시 눈을 흘겼다. 자그만 키에 유달리 넓은 어깨를 한 그 여자는 언뜻 보기에도 수명개조 당대 4, 50대 나이 정도의 중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8시 방향에 앉아있던 거구의 남자가 바로 그의 말을 받았다.
“가르시바 마구스의 말이 틀리지는 않지요. 대신관께선 항상 죽인다 죽인다 말만 하셨지 실상은 지금껏 그 여자를 계속 보호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아스탈이 쓴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훗, 살름 마구스까지 내 편을 들지 않기요?”
“제 말은…….”
“밀리타가 아니면 누가 내 자식의 어미가 된단 말인가? 나머지는 이미 죽었던지, 오르마즈 그년이 다 죽여 놓았는데.”
“그러니 빨리 세네피스 그년을 잡아오셔야죠.”
처음 말을 꺼냈던 가르시바 마구스가 시동이 들고 있던 서클렛을 제자리에 가져다놓으라며 눈짓을 보냈다. 아스탈이 입을 씰룩거리며 ‘세네피스를 위해 마련했던’ 서클렛에서 퉁명스레 시선을 떼었다. 가르시바 마구스가 계속 아스탈을 채근했다.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그 오랜 시간 그년을 왜 그냥 놔두셨습니까? 결함 없는 혈통만 몇 확보하고 나서 제거하는 것이 그리 어려우셨는지요?”
아스탈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가르시바 마구스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이보시게, 기왕 못 믿을 년으로 낙인찍혔으니 그대가 뭐라 말하든 신경 쓰지는 않겠지만, 밀리타는 신성한 다하카르 가문의 일원이고, 아이를 낳을지 말지 정도는 스스로 조절할 수 있소. 그리고 내 자식을 낳고 나면 자기는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잘 알 만큼은 똑똑하오. 그런 여자가 좋다고 내 아이를 기꺼이 가져 줄 것 같소?”
창백해진 가르시바 마구스가 입술에 잔뜩 힘을 주었다.
아스탈의 바로 옆, 5시 방향에 앉아있던 여자가 냉소적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결국은 죽일 생각은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쯔쯧, 원래부터 이렇게 심약한 분이셨던가요?”
아스탈이 다시금 눈을 흘기며 냉큼 대답했다.
“바에자 그대의 평소 말버릇하고 그 빼어난 청력을 보면 정말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소이다.”
아스탈의 뼈 있는 말에도 그 여자는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웃기만 할 뿐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지금 원탁에 앉아있는 6명은 대체로 중년, 혹은 노년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오직 아스탈과 ‘바에자’ 이 여자만이 젊고 매끈한 외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밀리타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쓰지 마시구려.”
아스탈의 마지막 경고에 자리에 앉은 나머지 5명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쿠마르에게서는 연락이 왔습니까? 베흔 놈은 확실히 고립시킨 겁니까?”
‘바에자’ 마구스가 비스듬한 폼으로 자리에 고쳐 앉으며 물었다. 아스탈이 그 건방진 여자보다 더 삐딱하게 앉으며 냉큼 대답했다.
“빨리 움직였기를 다행이지, 아니면 어렵게 장악한 근위대를 놈한테 도로 빼앗길 뻔했지. 군단 한두 개 정도는 넘어간 것 같은데 나머지는 고분고분하던걸요. 무식쟁이 불량품 헤네티들이 뭘 알겠소. 맞는다고 하면 맞는 거지.”
아스탈이 ‘가짜 베흔’의 시체 사진과 유전자 분석 결과 사본을 원탁 중앙에 툭 던졌다.
“사실 내용만 따져보면 틀린 보고서도 아니고.”
보고서 제일 앞장을 펼쳐 본 가르시바 마구스가 픽 웃음을 지었다.
“베흔 그 새끼도 자기하고 유전자가 거의 일치하는 도플갱어가 우리 쪽에 있다는 걸 꿈에나 알았겠소. 체세포 상동염색체를 모두 풀어서 비교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누가 진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니.”
“그러니 이번엔 확실히 끝내야 하지 않겠소. 우리로서는 회심의 패를 던진 것이니.”
아스탈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두 손을 단단히 깍지끼었다.
살름 마구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었다.
“살아남은 베흔 놈의 선택은 빤하군요. 달랑 군단 한두 개 남은 상태로는 체면 유지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을 테니.”
“순순히 무너져 줄 놈은 아니니 어느 쪽이든 하나 골라서 붙어야겠지요.”
아스탈 대신 냉큼 나선 건 이번에도 에시마 교단의 바에자 마구스였다.
“어차피 만년 2인자감밖에 못 되는 놈이니.”
바에자의 한 마디에 마구스들이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탄현성에 있는 샤자한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니, 이제 우리는 여기서 개싸움이 되어가는 걸 느긋하게 구경만 하면 되는 건가.”
아스탈이 몸을 뒤로 쭉 뻗으며 원탁의 스위치를 툭 쳤다. 원탁 중앙에 있던 ‘황제령’의 지도가 조금씩 흐려지면서 먼 옛날, 아케메니안 궁의 웅장한 ‘검은 피라미드’가 천천히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어차피 역사는 돌고 도는 것 아니겠소.”
한 달 전, 쓰디쓴 패전의 악몽을 안겨 준 황도였지만 탄현성에서 출발해 전진 이틀째에 접어든 연합군 공동사령관 샤자한 공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홀가분했다.
사실 주변 정황은 엉망진창이었다. 골 아픈 카렐은 죽었고, 근위대 쪽 사정도 어딘지 심상치 않아보였다. 새 근위대장으로 전격 추대된 쿠베는 베흔이 죽었다고 했고, 시체까지 확인했으니 근위대의 힘도 이전 같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가짜 베흔’ 행세를 하는 자가 있다는 첩보도 상황을 어지럽게 만들었고, ‘쿠베를 말려야 한다’며 탄현성을 허겁지겁 떠났던 셈이 어처구니없이 죽은 것도 어딘지 꺼림칙했다.
그렇게 사방에서 엉망진창이었지만 이것저것 따져보니 최소한 그가 이끄는 동부에는 도리어 득이었다. 근위대도 풍비박산이고, 똘똘한 베흔도―어딘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라졌고, 한때 위세 등등하던 남부도 사분오열되면서 이전 같지 않아졌으니 이제 정말로 ‘동부의 시대’가 오리라는 기대에 그도 한껏 부풀어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페로가 기다리는 황도 아케메니아 시가 코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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