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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86화 (682/1,132)

< -- 686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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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가만히 있지 못해!”

비무장인 페로는 샤자한 공이 칼을 뽑기 전에 재빨리 팔을 꺾어 제압하려 했다. 그가 칼 한 자루 지니지 않은 채 이 모험을 감행한 것도 자신의 힘이면 이 늙은이 정도는 충분히 제압 가능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이익!”

측면에서 날아드는 귀에 익은 쉬잇 하는 소리에 샤자한 공의 팔을 붙들고 있던 페로의 고개가 휙 돌았다. 바로 샤자한 공을 따라온 경기병이 날린 투창이었다.

“이 배신자놈!”

상대의 집중력이 분산된 것을 눈치 챈 샤자한 공이 큰 포효를 내지르며 페로의 손을 떨치고 그의 턱을 팔꿈치로 힘껏 후려쳤다.

“이익!”

단단한 갑주로 가려진 팔꿈치에 뺨과 턱을 얻어맞은 페로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았다. 뒤이어 샤자한 공의 칼이 날아드는 것을 알아 챈 페로가 급히 몸을 뒤로 꺾었지만 칼끝이 그의 턱과 뺨, 코를 사정없이 베고 공중을 날았다.

샤자한 공은 말 위에서 휘청거리는 페로의 목을 향해 다시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저! 이, 빌어먹을 노인네야!”

북문 누각 위에서 위기에 처한 페로의 모습을 보며 발만 동동 구르던 자이납이 비명처럼 고함을 꽥 질렀다. 보다 못한 그가 석궁을 꺼내들고 볼트를 채우자 놀란 다룬이 재빨리 이 성마른 아가씨를 저지했다. 그가 꺼내든 건 수나 마구스가 코리온에게 물려주었던 무시무시한 ‘트라카 교단 석궁’이었다. 이 보물도 코리온이 소지를 거부한 덕분에 아직까지 자이납의 손에 있었다.

“미쳤어!”

웬만한 중투창을 능가하는 그 어마어마한 위력을 전해 들었던 다룬으로서는 이 성급한 반쪽가디언이 페로 주변에 이 괴물을 쏘아대는 아찔한 상황을 놔둘 수가 없었다.

“그럼 어쩌라고요!”

자이납이 장전된 석궁을 다시 빼앗으며 악을 썼다. 하지만 정작 그쪽에 대고 석궁을 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크!”

페로에게 칼을 휘두르려던 샤자한 공은 어디선가 핑 소리를 내며 날아든 볼트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샤자한 공의 목을 겨냥했던 그 볼트는 약간 빗나가 목을 가린 갑주 구석을 찌그러뜨리며 어딘가로 날아갔다.

“저건 또 어떤 놈이 쏜 거야! 헌병 놈이야?”

가슴이 철렁했던 다룬이 멀리 옹성 위에 있던 엄한 헌병대 쪽에 삿대질을 했지만 헌병대 장교가 자신들의 짓이 아니라며 팔을 크게 휘젓고 있었다.

“제기랄! 따라와!”

다급해진 다룬은 함께 있던 2명의 가디언들을 이끌고 성문 아래로 허겁지겁 내려갔다. ‘이곳에서 학장만 지켜라’라는 페로의 명령이 있었지만 주인이 위험에 처한 상황을 그냥 보고 있기는 그의 다혈질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페로의 명령을 까맣게 잊은 채 자이납에게만 북쪽 누각을 맡기고는 허겁지겁 옹성 쪽으로 향했다.

위험하기는 했어도 그 볼트 덕분에 샤자한 공의 칼끝을 피한 페로가 악 소리를 지르며 상대를 몸으로 힘껏 덮치는 모습이 뽀얀 먼지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페로의 육중한 체중과 젊은 혈기에 밀린 샤자한 공이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면서 둘은 동시에 말 등에서 떨어져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익!”

샤자한 공을 밑에 깔며 바닥에 떨어진 페로가 비명과 함께 몸을 움츠렸다. 바닥에 떨어진 충격이 몸을 울린 순간, 무언가 화끈한 느낌이 페로의 배를 엄습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채 확인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기세가 뻗친 페로는 상대의 칼을 쥔 손을 발로 꾹 밟으며 쓰러진 적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각하! 몸을 낮추십시오!”

“응?”

귀에 익은 다룬의 고함소리에 페로는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재빨리 숙였다. 어딘가에서 날아든 투창 한 발이 그의 정수리를 스치고 땅바닥에 딱 소리를 내며 꽂혔다.

“이 배은망덕한 놈!”

기회를 잡은 샤자한 공이 칼을 쥔 손을 뽑아내며 페로를 힘껏 밀어냈다. 중심을 잃고 뒤로 벌렁 밀려난 페로에게 샤자한 공이 다시 몸을 날렸다. 하지만 페로 역시 필사적이었다.

한때 친손자와 할아버지처럼 서로를 의지했던 이 둘이었지만 이젠 양쪽 모두에게 그저 전장의 무서운 적수일 뿐이었다.

“그놈의 빌어먹을 은혜 언제까지 갚으라고!”

페로도 질세라 땅에 박혀 있던 투창을 재빨리 뽑아 투구를 쓰지 않은 샤자한 공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관자놀이에 투창을 그대로 얻어맞은 샤자한 공이 악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쓰러진 그를 향해 기를 쓰고 돌진하려던 페로는 또다시 배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다시 자리에 뻗고 말았다.

“아, 아아악.”

페로가 배를 쥐고 자리에서 부르르 떨었다. 쓰러진 샤자한 공의 뒤에서 동부 중장기병 한 명이 불쑥 나타나 창을 겨누고 돌진해오고 있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카렐, 카렐……, 안 돼.”

페로를 겨누고 돌진해오던 기병이 속도를 늦추며 창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때, 조금 전 샤자한 공을 저지했던 바람같이 빠른 무언가가 이번엔 그 기병의 측면에서 휙 날아들어 말의 왼쪽 눈을 정확히 맞춰 터뜨렸다.

“으앗!”

눈에서 무언가가 팍 하고 터져 나오며 놀란 말이 거친 울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거칠게 꼬꾸라졌다. 그리고 위에 올라있던 기병 역시 중심을 잃고 앞으로 튕겨나가 말과 함께 바닥에 사정없이 꽂혔다.

“으, 으아!”

떨어지는 기병을 피해 엉금엉금 기어서 자리를 빠져나온 페로가 배를 쥐고 바닥에 다시 쓰러졌다. 그 와중에 그가 본 건 망토로 온몸을 가린 한 여자가 석궁을 감추며 조금 전 자신이 내린 조황비전에 오르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페로의 귀에 높낮이도 전혀 없는 차가운 톤의 여자 목소리가 들어왔다.

“상께서 각하 곁을 엄호하라 명하셨습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각하! 각하! 정신 차리십시오!”

그 사이 누각에서 달려 내려온 다룬이 흙바닥에 뒹구는 페로를 급히 끌어내 후방으로 질질 끌고 갔다. 페로의 복부 상처는 심각했다. 말에서 떨어질 때 충격으로 샤자한 공이 들고 있던 칼에 배를 베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페로는 고통의 신음소리 대신 이유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천생연분인가봐.”

지난 황도 전투 당시, 동북문 앞에서 베흔과 사투를 벌이던 카렐의 상황과 자신이 왜 이리 비슷할까 하는 생각에 페로의 입에서는 자꾸 웃음이 새나왔다. 중상을 입은 주인의 모습에 가디언들은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정작 페로 본인은 계속 웃고만 있었다.

“각하, 괜찮으신 것 맞습니까?”

피가 새어나오는 페로의 배를 단단히 묶은 가디언들은 화급히 그를 들쳐 업고 후방의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제 어쩌죠?”

“뭘?”

부하 가디언의 물음에 다룬이 짜증스레 물었다.

“각하께서 안 계시니 이제 누가 지휘를…….”

잠시 머뭇거리던 다룬은 북문 누각 위를 힐끔 올려보았다.

“맙소사, 저길 지켜야 되는데…….”

페로가 후송되는 동안 마찬가지로 부하들 사이로 돌아온 샤자한 공에게 참모들이 다급히 알렸다.

“페로 총리가 중상을 입고 실려갔다고 합니다! 각하의 용맹이 빛을 발했습니다! 지금 보벤 경이 이끄시는 우리 주력군이 도와주러 다가오는 중입니다! 기병이라 빠르니 여기서 조금만 버티면 됩니다!”

상황은 언뜻 절망적으로 보였지만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성문 바로 옆에 있던 기병들이 재빨리 성문의 크레인 고리를 풀어낸 덕분에 원래 있는 두꺼운 금속제 철문은 작동불능이었고, 성 외부와의 사이에는 적들이 급히 내린 허름한 철창 하나가 전부였다. 모양새를 보아 저 철창이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사이, 해는 이미 완전히 지고 주변은 칠흑같이 컴컴해져 있었다.

“수비군에 서부 사역병들이 없으니 시간만 끌면 됩니다!”

참모의 격려에 샤자한 공이 일단 힘을 내기로 했다. 성벽 위에는 수성전의 핵심을 맡아 온 서부 사역병이 없다보니 적 수비군들도 투창을 던지고 석궁을 쏘는 정도의 소극적인 저항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놈들의 매복공격이 이상하게 너무 약한 것 같지 않나?”

샤자한 공이 투창 자루에 맞아 찢어진 관자놀이를 손수건으로 꽉 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옹성 내부가 워낙 작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페로가 이곳에 고작 가디언 30명만 데리고 나온 것도 이상했고, 이런 좁은 공간에서 접근전이 벌어지면 별 쓸모도 없어지는 투창병들을 성 위에 잔뜩 둔 것도 이상했다.

물론 샤자한 공은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상대의 의도를 바로 간파할 정도로 충분히 노련했다.

“날 미끼로 우리 본대를 끌어들어는 거냐, 페로.”

샤자한 공의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지만 이 정도에서 무릎을 꿇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조금 전 페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를 빠득 갈았다. 보벤이 정말로 페로와 내통해 이 일을 꾸몄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혹시 모르니 보벤 놈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못 가게 잡아놔라.”

그의 시선은 자그만 옹성 안에서 가디언들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기병들, 그리고 머리 위, 북문 누각을 번갈아 향했다. 조금 전, 다룬이 ‘코리온의 시체’를 업고 저 위로 다급히 올라가던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룬은 조금 전 페로를 구하느라 다시 내려왔으니 저 위에는 있지 않을 터였다.

성문 양쪽으로 누각과 이어진 2개의 가파른 램프가 보였다. 원래는 걸어서만 올라가도록 만들어져 꽤 좁았지만 기마술이 아주 뛰어난 동부기병들 정도면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올라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중간에 통로를 막은 북부보병들이 보였지만 일단 성벽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코리온이 있는 누각을 양쪽에서 조일 수도 있을 듯 보였다.

페로를 꺾고 자신감을 얻은 샤자한 공이 칼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 말에 올랐다. 관자놀이 상처는 심하지 않았고, 싸울 기운은 아직 충분했다.

“말 잘 타는 놈들로 경기병 5명하고 중장기병 12명만 따라와라. 그 질긴 서생 놈을 내 손으로 끝내야겠다. 페로를 쓰러뜨렸으니 이제 그놈을 죽이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어쩌면 남부 놈들 힘 얻지 않고서도 우리가 여길 쉽사리 차지할 지도 모르지.”

북문 앞에서의 ‘쇼’를 끝내고 북문 위 누각으로 올라온 코리온은 얼굴과 머리에 묻은 가짜 피와 살점을 닦아내고는 몸을 일으켜 성 안팎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옹성 안쪽은 이미 난장판이었고, 건너편 산자락에 있던 1만2천의 동부기병들이 이곳을 향해 다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저렇게 미련한 양반이었다니.”

코리온은 페로가 샤자한과의 대결에서 중상을 입고 실려 갔다는 보고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페로가 사투를 벌이는 모습에 걱정은 고사하고 무감각한 얼굴로 누각 위에서 마치 남의 일처럼 내내 구경만 하고 있었다.

“황상께서나 저지르시는 무모함까지 따라하다니, 쯧쯧.”

“총리께서 안 계시니 이제 학장님께서 명을…….”

한쪽에 있던 자이납이 코리온에게 슬쩍 상황을 알려주자 다른 무장들이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대번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누각에 있는 북부보병대와 투창병단 지휘관들은 싸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일개 유학자의 명을 받아야 한다는 말에 잔뜩 불만어린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학장님께선 아무래도 군문에는 익숙하지 않으시니 지휘는 다른 무장에게…….”

“닥치지 못할까.”

코리온의 가늘고 매서운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자 일순간 기겁을 한 장교들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그의 눈길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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