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87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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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을 배 위에 단정히 모으고 선 코리온은 그들의 참견을 완전히 무시하며 평소같은 조용조용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계획대로 추진하면 되는 것 아니었던가.”
“북문이 반쯤 부서졌는데 어쩌죠?”
자이납이 발을 동동 구르며 코리온에게 물었다. 산자락에 있던 보벤의 1만 2천 동부기병들은 산 아래 골짜기를 가로질러 북문이 있는 고개로 이미 새카맣게 접근하고 있었다.
“북문은 어차피 부서질 거다. 그래야 하고.”
코리온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무장들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순간, 눈 좋은 자이납은 먼 북쪽의 산지에서 다가오는 희미한 형상을 바로 구분해냈다. 재빨리 망원경을 들고 그쪽을 확인한 자이납이 당혹스런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맙소사! 남부보병들인데요! 동부기병들 도와주러 벌써 도착했나 봐요!”
‘남부보병’이라는 말에 수비군 지휘관들이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하기 시작했다. 동문 앞의 남부보병 선발대 3만을 제외한 또 다른 남부병력이라면 보벤을 뒤따라오던 카산드라 호지 경의 11만 남부연합군 본대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는 결론뿐이었다.
그렇다면 북문이 반쯤 부서진 황도에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웅성대는 무장들 사이로 코리온의 가늘고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내 경거망동하지 말라 이르지 않았더냐.”
코리온이 갑자기 목소리를 한 톤 높였다.
“당초 명한대로, 동부기병들을 성벽 아래까지 끌어들인다. 너희는 다른 쪽은 신경쓰지 말고 각자 위치로 돌아가 성벽만 지키고 있어라. 윗선에서 결정한 일에 감히 왈가왈부하지 말고.”
코리온의 엄명을 받은 북부보병대 지휘관들이 하나같이 불안한 표정으로 각자 자리로 흩어졌다. ‘혹시 모르니 북부 사람들은 곁에 오래 두지 마라’는 황제의 엄명으로 지금 그의 곁에는 자이납과 10명 정도의 에키트 족 뿐이었다.
“학장님, 근데 여기 너무 썰렁하지 않아요?”
자이납이 조심스레 물었지만 코리온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당초 페로가 다룬과 2명의 가디언들로 그의 곁을 지키게 했지만 그들이 주인을 구한답시고 멋대로 빠져나간 것이 자이납으로서는 못내 불안했다.
그때, 누각 아래와 연결되는 램프 쪽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엑!”
기겁을 한 자이납이 재빨리 램프 쪽으로 달려갔다. 급히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던 그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누각 위의 코리온에게 손을 저었다.
“피, 피하세요! 빨리요!”
누각 위로 다시 올라오려던 자이납은 등 뒤에서 날아드는 투창을 직감하고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램프의 북부보병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리고 돌파한 샤자한 공과 7기의 동부 중장기병, 5기의 경기병들이 말에 오른 채로 좁은 성벽 위에 훌쩍 뛰어오르고 있었다.
“엄마야!”
바싹 엎드린 자이납의 머리 위를 스친 위력적인 투창이 코리온이 있는 누각 한쪽 기둥에 박히며 그 끝을 부르르 떨었다.
“저기 있구나!”
샤자한 공이 창끝으로 누각의 코리온을 겨누며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기마술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동부기병답게 기병으로는 도저히 못 올라올 듯 보였던 좁고 가파른 램프를 뛰어올라 성벽 위를 순식간에 혼란에 몰아넣었다.
“2명은 보병들이 접근 못하게 뒤에서 지키고 나머지는 저놈을 잡아!”
목표를 확인한 샤자한 공은 거의 팔뚝만한 크기의 큰 날이 달린 관도를 휘두르며 누각 쪽으로 돌진해왔다.
“집결해! 모여서 막아!”
누각 주변은 몇 명의 보병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말까지 타고 돌진해 온 맹장 1명과 기병들을 막기는 숫자에서 역부족이었다. 쏟아지는 투창과 중장기병들의 돌격에 휩쓸린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발굽 아래 무기력하게 뒹굴었다.
“또 죽은 척 할 테냐?”
에키트 족들이 코리온을 반대편으로 피신시키려 했지만 그쪽 램프에서도 중장기병 6명 정도가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누각의 코리온 일행은 양쪽으로 꼼짝없이 기병들에게 둘러싸인 꼴이 되고 말았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성벽 위의 다른 수비군들도 미처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에키트 족들이 샤자한 공에게 쫓기는 자이납을 구하러 달려오려 했지만 그는 거칠게 손을 저으며 코리온부터 가리켰다.
“난 상관없으니까 학장님을 지켜! 지붕 때문에 기병들은 거기까지 못 들어가니까 거기만 지켜!”
자이납이 뒤로 확 돌아서며 들고 있던 석궁의 방아쇠를 얼른 당겼다. 하지만 익숙한 무기가 아니다보니 돌진해오던 샤자한 공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 전부였다.
“이크!”
귀 옆을 쌩 하고 스치는 위력적인 볼트에 놀란 샤자한 공이 반사적으로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를 스쳐 날아간 볼트는 뒤따라오던 중장기병 2명 중 하나의 겨드랑이에 명중하며 단번에 말 뒤로 꼬꾸라뜨렸다.
“저 귀찮은 잡종년부터 쏴 죽여!”
샤자한 공이 경기병들에게 도망치는 자이납을 가리켰다. 어쨌든 상대가 반쪽이라도 가디언인 이상, 그도 바로 돌진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젠장! 한 놈씩 덤비라고!”
그 사이 도망치며 또 한 발을 장전한 자이납이 뒤로 휙 돌아서며 다시 샤자한 공을 겨누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바로 등 뒤까지 샤자한 공의 창날이 쇄도해 있었다. 게다가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이런!”
아무리 빠른 자이납이었지만 한 번에 5발이나 날아드는 투창을 다 피할 수는 없었다.
잽싸게 옆으로 몸을 날리려던 그의 갈비뼈 사이로 묵직한 투창 한 발이 살점을 찢어내며 파고들어왔다.
“까악!”
치명상을 입은 자이납이 반사적으로 당긴 석궁에서 볼트가 발사되며 샤자한 공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트라카 석궁’에서 발사된 위력적인 볼트가 샤자한 공이 타고 있는 말의 이마를 산산조각 박살을 내고 그 주인의 흉갑까지도 그대로 덮쳤다.
“우웁!”
머리가 깨진 말이 꼬꾸라지면서 샤자한 공은 사정없이 바닥에 동댕이쳐졌고 뒤따라오던 기병들도 깜짝 놀라며 급히 고삐를 당겼다. 말을 타고 올라온 덕에 보병들을 제압할 수는 있었지만 성벽 위의 공간이 말 2마리 겨우 통과할 정도로 아주 좁은 것이 문제였다.
“이 망할 잡종년!”
바닥에 뒹굴었던 샤자한 공이 창을 쥐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기병으로 잔뼈가 굵은 그에게 낙마 정도는 일상사였지만 무시무시한 볼트에 명중당한 흉갑이 절반 정도 깨져 있었다. 볼트의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충격에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이익.”
샤자한 공의 발을 잠시나마 묶어놓은 자이납은 옆구리에 투창을 맞은 채 코리온 있는 누각을 향해 한쪽 팔꿈치로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아, 아악. 씨발, 빌어먹을, 개 같은 팔자 하고는…….”
거친 신음소리를 내며 도망치는 자이납의 모습을 누각 위에서 지켜보던 코리온의 표정이 대번 창백해졌다.
“당장 가서 카메네이 중랑을 지키지 못할까!”
코리온의 명령에 4명의 에키트 족들이 허겁지겁 자이납에게로 달려갔지만 반대편에서는 말을 버린 샤자한 공과 동부 중장기병 역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야만족들! 꺼지지 못해!”
샤자한 공이 온 힘을 다해 휘두른 관도에 에키트 족 전사 한 명의 방패가 꽝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날아갔지만 나머지 전사 한 명이 괴성을 지르며 이 최고제후에게 몸을 날려 들이받았다.
“최고제후님!”
몸싸움을 벌이는 샤자한 공의 모습에 당황한 기병이 어느 쪽을 공격할지 멈칫거리는 새, 다른 전사가 거대한 도끼를 힘껏 휘둘러 기병의 허벅지를 꽝 소리가 날 정도로 내리찍었다. 이 야만족들의 거구에서 뿜어나오는 무시무시한 일격에 다리가 반토막난 기병이 휘청거리며 말 옆으로 힘없이 미끄러졌다.
“중랑님! 움직이지 마십시오!”
시간을 번 에키트 족들이 자이납의 뒷덜미를 질질 끌고 허겁지겁 누각으로 도망을 쳤다. 그새 반대편에서 달려온 동부기병들이 이미 누각에 뛰어올라 그곳의 에키트 족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말에서 내린 기병들은 더 이상 그 사나운 전사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이놈들 뭐야!”
야만족 경보병이라 무시하고 별 생각 없이 말에서 내려 누각을 올라온 4명의 기병들은 선두에서 달려간 분대장이 단 두세 합만에 머리가 깨져 쓰러지는 모습에 경악을 하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 새끼들! 공격 안 하고 뭐하냐!”
자이납을 뒤쫓아온 샤자한 공이 크고 무거운 관도 대신 칼을 뽑아들고 누각 안에 뛰어올라서는 머뭇거리는 기병들에게 호통을 쳤다. 최고제후가 몸소 앞장서자 다시금 힘을 얻은 기병들이 구석에 몰린 코리온 일행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라.”
코리온은 에키트 족들이 구해 온 자이납의 셔츠를 북 찢어냈다. 순식간에 맨몸이 드러나자 마술처럼 정신을 퍼뜩 차린 자이납이 그를 얼른 쳐다보았지만 이 절박한 상황에서도 코리온은 놀란 표정도, 당황한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코리온이 머플러를 풀어 그의 상처를 꾹 눌러주었다.
“이대로 그냥 놔두는 게 낫겠다. 피가 역류하니 눕지 말고 내게 기대 앉아라.”
코리온은 가슴에 투창이 박힌 채 호흡을 잃어가는 자이납을 억지로 일으켜 한 팔로 가슴에 꽉 안았다. 이 순간, 코리온은 바로 이런 자세로, 자신의 품 안에서 죽어간 샤드니를 퍼뜩 떠올리며 온몸이 전율하는 느낌이었다.
“이거요…….”
자이납이 그때까지도 악착같이 쥐고 있던 ‘트라카 석궁’을 코리온의 손에 내밀었지만 코리온은 그가 내민 이 ‘사교도의 무기’를 여전히 받으려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세공이 된 그 귀한 보물은 어느새 자이납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거……쏘시라고요.”
그때, 앞에서 샤자한 공을 막고 있던 에키트 족 전사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에키트 족들이 정예군인 것은 틀림없었지만 제국에서 손꼽히는 맹장 중 하나인 샤자한을 1대1로 상대하기는 틀림없이 역부족이었다. 자이납이 볼트를 장전하려 했지만 더 이상은 들거나 당길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저놈을요…….”
자이납이 코리온의 손을 억지로 시위에 가져가며 다시 애원을 했다. 이대로는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누각이 피바다가 되어버릴 판이었다.
“질긴 놈!”
샤자한 공이 막 쓰러뜨린 에키트 전사의 숨통을 끊으려 했지만 전사는 손가락이 잘리면서도 목을 향해 꽂히는 적의 칼날을 움켜쥔 채 악을 쓰며 저항하고 있었다.
“후우.”
저항하는 전사를 바라보던 코리온은 결국 더듬더듬 손을 뻗어 피 묻은 석궁을 집어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는 전사와 싸우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샤자한 공의 머리를 겨누었다.
사실 그는 석궁을 단 한 번도 사람을 향해서는 쏘아 본 일이 없었다. 얼마 전, 약혼자 샤드니의 시체를 안은 채 이것으로 코나 시디크를 겨누었을 때도 분노에 사로잡혀 겨누었을 뿐, 차마 시위를 당기지는 못했던 터였다.
방아쇠에 걸린 그의 손가락이 잠시 떨렸다. 직감적으로 그의 위기를 느낀 샤자한 공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겨누고 있는 이 ‘서생’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놈이!”
놀란 그가 재빨리 왼팔의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리려 했지만 그의 발밑에 깔려 죽어가던 에키트 족 전사가 그의 방패 아랫부분을 덥석 붙들었다. 동시에 펑 소리가 울리며 볼트 한 개가 바람을 갈랐다.
“으읍!”
꽝 소리가 누각 안을 울리며 샤자한 공의 이미 반쯤 부서진 흉갑이 몇 개로 완전히 쪼개지며 파편이 되어 공중에 날았다.
“뭐, 뭐냐.”
멍해진 샤자한 공은 화끈해진 자신의 오른쪽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두 뼘 가까이 되는 굵직한 볼트에서 거의 1/3 정도가 그의 가슴에 꽂혀 있었다. 순간 그는 무언가 꽉 막히는 느낌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 이이이익.”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이 노련하고 용맹한 최고제후는 싸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유학자 서생의 석궁 한 발에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며 힘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젠장, 내 선택은 왜 항상…….”
샤자한 공이 이를 빠득 갈며 단검을 뽑아들었다. 아직 힘이 남은 그는 코리온에게 단검을 던지려 했지만 그새 상대도 새 볼트를 장전한 후였다.
“지도자는 ‘선택’이 아니고 ‘결정’을 한다는 걸 여태 몰랐더냐.”
펑 소리와 함께 또 한 발의 볼트가 공중을 갈랐다. 막 단검을 던지려던 샤자한의 머리 뒤로 두개골을 관통한 볼트와 붉은 피, 살점이 공중으로 튀었다. 놀란 동부기병들의 비명소리와 고함이 누각 안을 울렸다.
충격에 몸이 뒤로 확 꺾인 샤자한 공은 자신의 머리에서 터진 피얼룩 위로 천천히 무너져갔다. 단번에 머리를 박살낸 한 발의 치명타는 비명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우유부단함으로 무엇 하나 제대로 거둔 것 없었던 노쇠한 최고제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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