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89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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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랄.”
할룩스 키를 헌병들에게 빼앗긴 채 무기력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보벤은 이번 일에 공모한 부하들을 급히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음모가 드러나면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샤자한 공이 돌아온다면 그 본인은 물론이고 일가 모두가 멸족당할 판이었다.
“이, 이걸 어쩌지.”
보벤이 헌병들과 군단장의 눈치를 급히 살폈다. 할룩스 코드가 해제되었으니 다른 일선 지휘관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였다.
보벤이 그쪽에 정신이 팔린 새, 조금 전 중상을 입은 채로 성 안에서 빠져나왔던 ‘백마를 탄 장교’가 군단장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봐.”
“뭘?”
그를 저지하려던 경호원들은 그의 신경질적인 반응과 손끝이 향하고 있는 안장에 새겨진 ‘조황비전’이라는 글자에 움찔거리며 얼른 길을 내 주었다. 적에게서 탈취해 온 귀한 말을 바치려는 것이려니 하는 생각에 별 의심 없이 길을 내 주었다.
“군단장님, 이 장교가 적진에서 귀한 말을 가져왔습니다.”
말에서 내려 오토크 군단장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린 그 장교는 말고삐와 함께 오토크 군단장의 손에 쪽지 한 장을 불쑥 건네주었다. 오토크 장군이 깜짝 놀란 얼굴로 그 장교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피얼룩과 망토 속에 얼굴을 감추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사에나 쉐너라고 합니다. 다히르 슈트란 경의 전갈입니다.”
‘다히르’라는 말에 기겁을 한 오토크 군단장은 재빨리 한쪽으로 물러나 쪽지를 펼치고 사에나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다른 곳도 아닌 명문 쉐너 가(家) 사람이 가져온 전갈이라면 보통 전갈이 아닐 터였다. 서한을 읽어 내려가던 오토크 군단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때, 북문으로 들어서던 기병들 사이에서 거의 비명에 가까운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야!”
고개를 들어 황성의 북문을 올려본 동부기병들은 놀라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몇 명의 북부보병들이 북문 위 깃대에 피에 젖은 망토와 갑옷을 걸고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 화려함만으로도 기병들은 그 주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되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최고제후님께서 돌아가셨다!”
선봉에 있던 기수가 창백해진 얼굴로 팔을 저으며 뒤따르는 기병들에게 악을 썼다.
“이제 어쩌라고…….”
조금 전 보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던 오토크 군단장은 눈앞이 막막해지는 느낌이었다. 주군을 잃은 건 물론이었고 이제 정치적으로도 벼랑 끝까지 몰린 셈이었다.
“장군님, 성 안에 갇혔던 부대에서 연락입니다. 최고제후님과 함께 있던 병사들의 보고를 보아 돌아가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알고 있다.”
눈치없는 병사 한 명이 다급히 달려와 알렸지만 오토크 장군은 방금 받은 서한을 주먹 안에 꽉 움켜쥐며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한쪽에 있는 보벤을 매섭게 쏘아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개새끼.”
“내가 뭐랬냐고! 들어갈 필요 없댔잖냐!”
보벤이 대뜸 언성을 높였다. 조금 전까지도 궁지에 몰려있던 보벤은 차마 기쁘다는 내색도 못한 채 표정관리를 하느라 얼굴이 일그러질 지경이었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자신이 새로운 최고제후가 되었다는 느낌에 가슴이 벅차오른 보벤이 군단장과 헌병들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새 최고제후로서 명령한다! 빨리 성에서 퇴각한다! 여기 있다가는 뒤에서 쳐 오는 남부 놈들한테 다 죽는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새 최고제후’라는 말을 입에 담는 보벤의 모습에 몇몇 헌병들이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차마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했다.
“내 명령을 어긴 군단장 놈하고 이 빌어먹을 헌병 놈들 모조리 체포해!”
상황이 바뀌자마자 보벤이 바로 본색을 드러내자 지휘관들까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참모 중 한 명이 다급히 그를 말리려 했다.
“교전 중에 문제도 없는 지휘관을 교체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헌병들은 명령을 이행했을 뿐입니다. 기왕 성 안에 들어갔으니 더 전진해서 최고제후님의 시체부터 되찾는 것이 나을 듯…….”
“닥쳐라, 시체 찾자고 전군을 위험에 몰아넣을 참이냐? 당장…….”
보벤은 후방에서 접근해오는 정체불명의 남부연합군을 연신 돌아보며 짜증스레 대답했지만 그의 말을 누군가가 냉큼 낚아챘다.
“경에게는 아직 명령권이 없으니 목소리 높이지 마십시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보벤이 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뭐야? 지금 최고제후에게 감히…….”
“가문 종약에 불순한 의도로 직계 존속을 해한 자는 그 지위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경께서는 이미 반역 혐의로 전 최고제후님께 체포령을 받은 상태니 조사를 거쳐 혐의를 벗을 때까지는 최고제후가 아니십니다.”
보벤에게 갑자기 항명을 하고 나선 건 보벤에게 말도 안 되는 된서리를 맞은 오토크 군단장이었다. 보벤이 정말로 최고제후가 된다면 그 역시 끝장나는 이상, 되든 안 되는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기 위해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적 황제가 적은 용서해도 배신자는 용서하지 말라고 했다죠? 백 번 맞는 말입니다.”
오토크 장군이 눈을 부릅뜨며 보벤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는 한술 더 떠 보벤에게 폭탄선언을 던졌다.
“그때까지는 적진에 포로로 잡혀 계신 선공의 차남 다히르 슈트란 경께서 명목상 최고제후 대리이십니다.”
오토크 장군이 사나운 표정으로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옆을 가리키며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을 요구했다. 지휘관들로서도 이제 보벤을 따를 것인지, 누가 오토크 장군, 아니 정확히는 다히르 편에 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들은 양쪽의 세를 가늠하며 잠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오토크 장군이 머뭇거리는 지휘관들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 고함을 울렸다.
“이대로 퇴각하면 뭘 어쩐다고? 여기서 수치스럽게 도망치고 나서 동맹군과 협상할 텐가? 아니면 연합군과 협상할 텐가? 우리 동부는 결국은 이번에도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패배자 신세가 될 것이 빤히 보이는데! 확실히 대답하시오, 보벤 경. 당신 생각에 우린 지금 연합군 편이요? 아니면 동맹군 편이요?”
오토크 장군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보벤은 잠시 대답을 못한 채 우물쭈물거렸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의 자신감 없는 태도에 눈치 없는 무장들도 그가 배신자임을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오토크 장군이 큰 손으로 허리춤의 칼을 덥석 움켜쥐며 보벤에게 다시 성큼 다가서서 눈을 부라렸다.
“이미 부하들에게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지는 않을 텐데? 우리들이 선공을 죽인 적보다 장군을 더 원망하는 이유도 잘 아시지 않소?”
오토크 장군의 입장이 분명해졌다. 몇몇 눈치 빠른 무장들은 적이 왜 샤자한 공의 목을 잘라 내걸지 않았는지, 자신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그리 애썼는지를 그제야 눈치 챘다.
오토크 장군이 헌병들을 돌아보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선공의 명령은 아직 유효하니, 헌병들은 빨리 이 배신자를 체포해라!”
거구로 압박해오는 이 무장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은 보벤이 주춤주춤 말을 뒤로 뺐다. 헌병들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챈 그는 다른 무장들을 돌아보며 악을 썼다.
“새끼들! 이놈을 당장 잡아들이지 못해! 난 3대 최고제후…….”
“정말로 그런지 나중에 봅시다.”
헌병 한 명이 불쑥 나서 그의 말고삐를 잡으려 했다. 다행히 보벤의 측근 중 한 명이 헌병을 저지했지만 무장들 중 누구도 기꺼이 그를 지켜주려 나서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 돌아가서 두고 보자.”
자신이 세에서 밀린다는 것을 깨달은 보벤은 자신들 지키려는 측근마저도 내버려둔 채 혼자 재빨리 말고삐를 돌렸다. 당황한 그의 공모자들이 급히 뒤를 따랐지만 충성이라기보다는 남아 있어 봤자 자신들도 목숨을 건지기 어렵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보벤을 선두로 십여 명의 무장들, 그리고 그들을 따라 온 말단 호위기병들까지 허겁지겁 지휘부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막아! 당장 붙잡아서…….”
오토크 장군이 그들을 가리키며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안 보이는 곳에 조용히 서 있던 사에나의 손짓에 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에나는 조황비전에 다시 훌쩍 뛰어올라 적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잠깐.”
사에나, 아니 정확히는 동맹군의 속셈을 눈치 챈 오토크 장군이 헌병 지휘관을 재빨리 저지했다.
“적당히 쫓는 척 하다가 보내 줘라.”
“당장 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칫 나중에…….”
“우리가 잡지 않는 편이 낫다.”
창백해진 헌병대장이 급히 보벤 일행 쪽을 돌아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백마에 오른 장교 한 명이 그들 일행의 뒤를 멀찍이에서 추적하고 있었다. 말의 달리는 자태를 보아 속도만 낸다면 언제든 보벤의 뒷덜미를 낚아챌 수 있을 듯 보였지만 그자는 일정한 거리를 계속 유지한 채 뒤만 쫓고 있었다.
도망치는 보벤에게서 신경을 끊은 오토크 군단장이 기수와 나팔수에게 알렸다.
“공격 중지! 모두 공격 중지!”
오토크 장군의 명령에 곳곳의 나팔수들이 급히 공격 중지를 알렸다. 성벽 안에서 쏟아지는 사격을 이겨내며 막 북부보병들과의 접전을 막 개시하려던 동부기병들이 느닷없는 공격중지 명령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와 거의 동시에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반대편 동맹군 진영에서도 ‘사격 중지’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낮고 길게 울렸다.
“따라와라.”
오토크 군단장은 연합군 동부기병대의 군기를 든 기수단에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이미 부서진 황도 북문을 지나 조금 전까지도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던 옹성 안쪽으로 천천히 접어들었다. 마치 마술처럼 전투를 중단한 기병들은 군단장의 행차에 눈치를 보며 좌우로 쫙 갈라졌다.
오토크 장군은 옹성 바닥에 흩어진 전사자의 시체를 보며 눈가를 살짝 찡그렸지만 동맹군의 소극적인 대응 때문에 교전중의 전사자는 많지 않았다.
같은 시간, 황도 안쪽의 동맹군 북부보병대 역시 중앙이 쫙 갈라지며 수십 개의 깃발을 든 기수들이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오랜만이네, 오토크 장군.”
동맹군 기수단과 함께 걸어서 모습을 나타낸 건 그동안 황궁 지하의 감옥에서 불편한 나날을 보내 온 샤자한의 차남 다히르 슈트란 경과 그의 아들이고 제네르의 약혼자인 네자드였다.
비록 그의 양옆에는 보안국 헌병들이 형식적으로 팔을 붙들고 ‘포로 신분’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비단포를 입지 않은 저고리 차림을 빼면 용모도 깨끗했고, 혈색 또한 아주 좋은 모습이었다.
오토크 장군은 그의 옆에 세워진 수레 위에 시체 한 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체 위에는 피로 물든 다히르의 푸른색 비단포가 고이 덮여 있었다.
“맙소사.”
주군의 시체임을 직감한 오토크 장군이 급히 말에서 내렸다. 다히르가 시체에 덮은 비단포를 여미며 눈가를 훔쳐냈다.
“미운 분이시나……내 아버지이신 것을 어쩌겠나.”
그는 북문 누각 위에 무표정하게 있는 코리온을 원망스레 올려보았지만 하는 수 없다는 듯 힘없이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모든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본 그로서는 아버지를 죽인 코리온을 뭐라 나무랄 수도 없었다.
“못난 양반……결국 이런 결과를 스스로 자초하셨으니……황상께서도 이걸 원하지는 않으셨을 텐데.”
“황상이라뇨? 페로 경 말씀하시는 겁니까? 카렐 황제는 이미 죽지 않았습니까?”
“그분이 아니었다면 어느 누가 페로 대공과 코리온 대군 같은 거물 둘을 조연으로 손바닥 안에서 다룰 수 있었겠는가?”
카렐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에 동부기병들이 일제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동맹군의 힘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뜻이었다.
말문이 막힌 채 멍하니 서 있던 오토크 장군이 북쪽을 가리켰다.
“북쪽에서 오고 있는 남부연합군은 그럼…….”
“남부 5제후 마자리크 이그나토 경의 군대. 오늘 막 탈라스에서 돌아왔지. 카렐 황제께 충성하는 동맹군의 일원이다.”
“맙소사.”
할아버지 샤자한 공을 속이려던 보벤, 그리고 동부기병대 전체를 역으로 감쪽같이 속여 넘긴 이 엄청난 사기극에 오토크 장군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럼 어떡해야 합니까?”
그때, 북쪽 누각 위에서 코리온의 낭랑하고 고운 목소리가 축축한 밤공기를 울렸다.
“반역자 샤자한이 죽었으니 이제 또 다른 배신자 보벤만 잡아온다면 동부인들의 죄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 죄인 다히르도 아비를 잃은 슬픔을 생각해 조건을 두지 않고 석방하라는 황상의 자비로운 칙명이 있었다.”
여전히 오만함이 밑에 깔린 코리온 특유의 어투였지만 그 의도는 말단 기병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분명했다. 코리온의 명과 동시에, 다히르의 양 팔을 붙들고 있던 보안국 헌병들이 기다렸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동부기병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다히르는 오토크 장군의 부관이 끌고 온 빈 말에 천천히 올랐다. 장군은 등에 걸고 있던 대장군 망토를 급히 벗어 저고리만 옹색하게 걸치고 있는 다히르의 축 처진 어깨에 급히 덮어 주었다.
“북문 밖으로 나가자.”
기병대 지휘부와 기수단을 거느린 다히르는 동부기병들 사이를 가로질러 황도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샤자한의 시체가 실린 수레 역시 덜크덕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누구도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히르가 앞으로 어떤 지위에 오를지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히르 슈트란 공.”
북문 아래를 지나던 다히르는 성문 위 누각에서 들려 온 고운 음성에 어깨를 움찔했다. 난생 처음 들어본 ‘공’이라는 호칭이 차남인 그에게는 너무도 낯설었다.
코리온이 성문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마자리크 경의 군대가 황도 수비군을 도와 동문 밖에 있는 남부연합군 보병 3만을 선공할 예정이요. 황상께선 이 전투에 동부기병대도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소.”
코리온의 말은 새 최고제후에게 자신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하는 지극히 공식적인 표현이었다. 오토크 장군을 힐끔 돌아보았던 다히르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무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최대한 빨리 행동을 개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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