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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90화 (686/1,132)

< -- 690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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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급한 상황에서 일단 몸만 빠져나온 보벤은 뒤쫓아오던 헌병들이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자 일단 안도할 수 있었다. 다행히 황도 북쪽은 험준한 산악이었고, 칼날같은 초승달만 떠 있는 밤하늘은 짙은 어둠 속에 드문드문 지나가는 먹구름과 별만 보일 뿐이었다.

“젠장, 헌병놈들은 떨어진 거야?”

가파른 골짜기 사이로 말을 몰며 보벤이 급히 물었다.

“예, 야전부대 사이를 지나올 때 뒤섞여서 우릴 놓친 모양입니다.”

보벤이 잠시 속도를 늦추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를 따라 도망친 건 11명 정도의 젊은 측근 무장들과 그들의 가문 혹은 부족에서 함께 온 기병 30여명까지 모두 합쳐 40기 정도가 전부였다.

넘치는 혈기와 자신감에 비슷한 나이대의 보벤을 선택했던 그들이었지만 이제 그들 모두 위험한 선택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판국이었다. 그들에게도 각자 가문에서 뒤따라온 호위기병들이 있었지만 워낙 출신지역과 소속, 가문이 제각각이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모두 잘 아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꽁무니쯤에 백마를 타고 조용히 합류해 있는 기병 또한 ‘누군가의 호위병이려니’ 하는 생각에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길이 험하니 속도를 늦추는 게 낫겠습니다.”

무장 중 한명이 주변을 걱정스레 둘러보며 말했다. 북쪽에서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남부 병력도 피하고, 동쪽에 있는 마누엘의 남부연합군에도 걸리지 않으면서 추격군까지 피하려니 그들이 갈 길은 뻔했다.

어둠 속에서 허겁지겁 도망을 친 그들 앞에는 황도 동북쪽의 험준하고 좁은 바위골짜기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가파른 산 중턱을 타고 이어진 좁은 길 양옆으로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었지만 늦겨울이라 앙상한 가지뿐이었고, 별다른 은폐물도 되지 못했다. 왼쪽으로는 언제든 산사태가 있음직한 돌밭이, 오른쪽으로는 쳐다보기도 싫은 험한 내리막 골짜기가 입을 쩍 벌린 채 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망할, 오토크 개 같은 새끼.”

보벤이 이를 갈며 앞으로 말을 몰았다. 흥분을 해서인지, 아직 덜 낫은 얼굴의 화상이 갑자기 화끈거리면서 더 짜증이 솟구쳤다. 그런 그에게 무장 한 명이 걱정스레 물었다.

“설마 우리가 페로 경에게 속은 것 아니겠죠?”

“아직은 모르니 조금 두고 봐. 그냥 일이 조금 꼬인 것일 수도 있어. 할아버지가 혼자 독하게 덤비다가 운 없이 죽은 것인지도 몰라. 오토크 그놈이 갑자기 항명하지만 않았어도 계획대로 다 잘 풀릴 참이었다고.”

보벤이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물론이고 휘하 무장들 모두, 아직까지 자신들이 철저하게 속았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하는 모습이었다.

“그래, 그냥 일이 꼬인 것뿐이야. 일단 위험한 곳만 빠져나가면 돼. 다 잘 풀릴 거야.”

“그러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지금 말들도 지쳤고 가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가다가 민간인들 만나면 좀 털면 되잖아.”

보벤의 어처구니없는 대꾸에 ‘우리가 무슨 도적떼냐.’며 버럭 화를 내려던 무장은 불만스런 얼굴로 일단 성질을 죽였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앞에 ‘불운한 민간인’들이 모습을 나타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것 봐.”

보벤이 가리킨 곳에는 언덕 위에서 쏟아진 돌덩이를 끌어안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웬 황소만한 사내 두 명이 보였다. 심야의 산사태로 길이 막힌 덕분인지 마주오던 큰 짐마차 한 대가 반대편에 꼼짝없이 선 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다니까.”

보벤이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눈치 채지 못하게 없애버리고 마차 확인해. 쓸모 있는 거 들었는지도 모르니.”

그의 명령을 받은 경기병 3명이 창을 앞세우고 그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얼굴까지 망토를 푹 뒤집어쓴 채 길 위로 큰 돌을 굴리고 있던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말굽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다 너 때문이야. 10개는 더 쌓을 수 있었다고.”

“허, 이게 왜 내 탓이야?”

“너 믿고 둘이서 나왔는데 고작 돌 7개가 뭐냐?”

“너야말로 덩치 값도 못 하면서.”

2명의 사내들은 코앞으로 다가오는 군인들에게 겁을 먹기는 고사하고 갑자기 자기들끼리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당연히 달아나거나 살려달라고 할 줄로 알았던 기병들은 상대의 엉뚱한 반응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 너희들!”

기병이 고함을 쳤지만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라? 니 목하고 허리만 멀쩡해도 이 지경은 아니었다고. 그 몸뚱이로 밤일은 어떻게 치렀나?”

“밤일이라니? 누가 멋대로 그런 소릴 해?”

“알 사람은 다 알던데? 그 양반한테 여쭤봐도 깔깔 웃기만 하시고.”

“그 양반한테 여쭤봤다고? 미쳤어?”

“말이야 바른 말로 네 처지에 그 정도면 봉 잡은 거지.”

발끈하며 돌격하려던 기병들은 비로소 몸을 일으킨 그들의 실루엣에 멈칫거리며 뒤의 보벤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웅크리고 있어서 제대로 확인을 못 했지만, 몸을 세우고 선 이 두 사내들의 체격은 ‘그냥 큰’ 정도가 아니었다.

“됐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저놈들이나 때려잡아, 씨발.”

둘 중 그나마 조금 작은―그래도 거의 카렐의 키에 육박하는― 거한이 양손에 손도끼 하나씩을 불쑥 꺼내며 번쩍거리는 날에 침을 퉤 뱉었다. 걸음걸이가 약간 불편해 보였지만 망토 안으로 보이는 떡 벌어진 가슴과 바닥을 디디며 다가오는 위압적인 자세만으로도 기병들은 순간 상대가 그냥 민간인이 아님을 직감했다.

“너, 너희들 누구냐?”

“알아서 뭐 하게?”

그 거한이 왼손에 들고 있던 두 개의 도끼를 번쩍 치켜든 순간, 그들은 그자의 굵은 손목에서 번쩍거리는 파란색 가디언 팔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디언이다!”

놀란 기병들이 얼른 말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그 뒤로 손도끼 두 개가 번쩍거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막 말에 속도를 붙이려던 기병 두 명 중 한 명은 뒤통수가, 한 명은 어깨가 두 조각으로 쪼개지며 바닥에 맥없이 굴렀다.

“도망가십시오! 매복입니다!”

운 좋게 목숨을 건진 마지막 한 명이 보벤과 다른 일행들에게 손을 저으려 했지만 그 역시 끝까지 무사하지는 못했다. 방금 도끼를 던진 괴한의 동료―덩치로는 한참 더 큰―이 날린 투박한 투창이 그대로 등에서 가슴까지 사정없이 꿰뚫었다.

“뭐어?”

그제야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은 보벤이 황급히 말을 돌렸지만 야음을 틈타 가파른 절벽 바위틈에 매복해 있던 수십의 에키트 경보병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그들의 후미에 긴 창이 줄줄이 꽂힌 장애물을 깔아 길을 막았다. 좁은 길목의 좌우 모두가 가파른 절벽이다 보니 말을 탄 그들에게는 사실상 앞뒤가 모두 차단당한 셈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가!”

당황한 보벤이 일단 정면으로 창을 향했다. 장애물과 에키트 전사들을 돌파하는 건 어차피 자살행위였고, 아무리 가디언이라고 해도 고작 2명밖에 안 되니 정면 쪽이 그래도 만만해 보였다. 하지만 그새 짐수레에서 쏟아져 나온 남부 중장보병들이 큰 방패와 창으로 그들 특유의 단단한 방어진을 짜 놓고 있었다.

“뭐야, 남부 놈들이 또 왜 여기 있어?”

소리를 지르던 보벤은 보병들의 큰 사각방패에 새겨진 나뭇잎 문장에 순간 전율했다. 몇 달 전, 제후 마자리크 경과 함께 동맹군에 돌아섰던 남부 5제후 이그나토 가 보병들이었다.

“제, 젠장, 저놈들이 언제 돌아왔지?”

보벤은 그제야 조금 전, 동부기병대 후방으로 다가오던 정체불명의 대규모 남부보병대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이 그저 ‘어쩌다가 약간 어긋난’ 것이 아닌, 페로에게 철저하게 속은 결과라는 것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흩어져서 도망가! 모두 흩어져!”

머뭇거리고 있는 보벤을 대신해 다른 무장이 팔을 저으며 병사들에게 악을 썼다. 몇몇은 말에서 뛰어내려 도보로 양쪽 언덕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고, 기마술에 자신이 있는 몇몇 기병들은 말을 탄 채로 가파른 언덕을 뛰어오르거나 절벽을 달려 내려가려 했다.

“젠장!”

당황한 보벤은 제법 말을 잘 타는 기병 한 명이 가파르고 거친 길 왼쪽으로 달려 내려가는 모습에 고삐를 꽉 쥐었다. 아직 몸이 완전치 않은 그로서는 두 발로 빨리 달아날 자신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저들에게 잡혔다가는 그저 죽음을 당하는 정도로 끝날 것 같지도 않았다.

“젠장! 죽어도 여기서 죽는 게 낫지!”

다른 사람들도 언덕을 뒤따라 내려가는 모습에 나름 힘을 얻은 보벤이 절벽 쪽을 향해 말에 박차를 가했다. 보벤이 내려가자 우왕좌왕하고 있던 다른 기병들까지 일제히 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웬만한 상황에서는 말을 타고는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할 가파른 골짜기, 그것도 심야의 짙은 어둠 속이었지만 궁지에 몰린 이들에게는 낭떠러지의 공포도 문제가 아니었다.

“이 새끼들아! 한데 따라오지 말고 흩어져! 다 뒈질 거냐!”

거의 10명이 넘는 병사들이 패닉 상태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모습에 놀란 보벤이 마구 팔을 저었다.

“저 새끼가!”

도끼를 던졌던 첫 번째 거한, 네피가 거추장스런 망토를 벗어던지고 언덕을 뛰어내려가려 했지만 아직 성치 않은 목과 허리 때문에 걸음이 영 둔했다.

“빌어먹을, 황제령 돌아와서 첫 전투인데!”

그는 한 손에 도끼를 든 채 말을 안 듣는 몸을 탓하며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끼들아! 뭐 하냐! 쫓아가!”

네피의 명령에 발 빠른 에키트 경보병들이 달아나는 기병들을 쫓아 언덕을 급히 달렸지만 험한 곳이어도 기병은 기병이다 보니 그들의 두 다리로 따라잡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기병들의 행운도 그다지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이크!”

기병들의 후미에서 달리던 말의 발굽 밑이 쫙 미끄러지며 기병의 비명과 말의 울음소리가 동시에 찬 겨울밤을 울렸다.

“으악!”

가파른 언덕을 굴러내려오는 말과 기병의 몸뚱이, 그리고 휩쓸려 내려오는 흙더미, 돌더미에 다른 기병들까지 말려들면서 아래 있던 기병들까지 순식간에 잇따라 언덕을 굴렀다.

“으읍!”

일행을 조용히 미행하며 언덕까지 함께 내려온 ‘백마를 탄 기병’ 사에나는 말의 고삐를 휙 돌리며 말에 힘껏 신호를 보냈다. 그를 태운 명마 ‘조황비전’은 그 이름답게 서슴없이 공중으로 확 솟구치며 흙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기병과 그 말의 몸뚱이를 단번에 훌쩍 뛰어넘었다.

“뭐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놀란 보벤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위에서 떠밀려 내려오던 말 한 마리가 버둥거리며 옆을 스치자 기겁을 한 보벤이 몸을 움츠렸지만 그는 자신이 전방을 제대로 살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말았다.

“이익!”

보벤은 자신이 탄 말이 큰 돌부리에 걸리며 앞으로 나동그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위험을 깨달았지만 이미 한 발 늦은 상태였다. 중심을 잃은 그 역시 말과 뒤엉킨 채 마른 흙바닥에 바로 동댕이쳐졌다.

“아아아악!”

가파른 절벽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보벤은 한쪽 다리가 말의 몸뚱이에 깔린 채로 언덕을 계속 미끄러져 내려갔다. 하지만 다행인지, 아닌지, 큰 바윗덩이에 말이 걸리며 그 역시 경사진 돌밭에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학, 학.”

한참을 굴러 내려온 충격에 꼼짝도 못한 채 멍하니 쓰러져 있던 보벤은 누군가 또각거리며 말을 몰고 다가오는 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십니까.”

무언가 하나 빠진 것처럼 차가운 음성이었지만 보벤은 누군가 자신에게 안부를 묻는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느꼈다. 말에 끌려오며 어딘가 부러졌는지 몸을 제대로 일으킬 수가 없었다.

힘겹게 눈을 뜬 보벤은 키큰 백마에 올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여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빌어먹을, 누굴 감히 내려다봐? 빨리 내려와서 일으켜주지 못해!”

보벤의 역정에 그 여자는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실제로 주는 느낌은 웃음이라기보다는 방금 전 말투처럼 무언가가 빠진, 전혀 웃음 같지 않은 느낌을 주는 기묘한 표정일 뿐이었다.

“뭐 이런 년이 다 있어?”

다급한 보벤은 이자의 표정 따위는 일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이자가 타고 있는 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조황비전을 아직 눈으로 본 일은 없는 보벤에게 여자가 탄 크고 날렵한,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 백마는 일개 기병이 타기는 과하다 못해 괘씸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 정도 말이면 쫓아오는 자들을 떨치고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에서 내려. 빨리.”

자신의 말이 쓰러져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떠올린 보벤은 비틀비틀 힘겹게 일어나서는 여자에게 내려오라 손짓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웃기만 했다.

“내 말이 말 같이 안 들리냐?”

보벤은 손에 든 말채찍을 휘둘러 여자의 허벅지를 치려했지만 그보다 먼저 상대의 발길질이 그의 얼굴, 그것도 화상을 입어 붕대를 감아놓은 위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극심한 고통에 보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또다시 나동그라졌다.

“내리라고? 그래 주지.”

조황비전에서 내려선 사에나는 거추장스런 망토와 그 안에 대강 걸치고 있던 누군가의 동부기병 갑옷을 풀어 내던졌다. 보안국의 검은 제복 차림으로 돌아간 그의 얼굴과 몸 곳곳에는 일부러 바른 듯한 피가 곳곳에 묻어 있었지만 정말로 칼로 벤 흔적도 곳곳에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 챈 보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적이다! 이놈을 공격해! 빨리!”

보벤이 주변에 대고 외쳤지만 부하들은 이미 도망쳤거나 붙잡혔거나 말과 함께 굴러 중상을 입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말이다.”

사에나는 쓰러진 보벤의 붕대를 감은 한쪽 얼굴 위에 발을 척 하니 얹었다.

“난 고통이라는 걸 거의 느끼지 못해. 심지어 내 살을 직접 베어낼 때도 말이다.”

사에나는 화상으로 물크러진 그의 살 위를 신발 바닥으로 천천히 문대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쳐도 몇 배는 빨리 나아. 그래서 그런가, 다른 놈들이 상처를 입으며 고통스러워하는 광경에서도 난 별 감흥이 없거든?”

“이, 아, 아아아악!”

아문지 얼마 안 된 생살껍질이 다시 벗겨지면서 보벤이 극심한 고통에 발버둥을 쳤지만 사에나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표정을 태연히 만끽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날 때마다 지금처럼 못된 놈들 들볶는 걸 즐기지.”

그는 보벤의 얼굴을 짓밟은 발을 천천히 비틀며 그의 자지러지는 비명에 마치 음악처럼 고개를 조금씩 옆으로 흔들었다.

“맙소사, 뭐 하는 짓이야?”

절룩거리며 힘겹게 쫓아 도착한 네피와 동부 7제후 카이두 바툴 경은 눈앞에서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몸서리를 쳤다. 이 기분 나쁜 여자는 그들보다 낮은 중랑장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보안국 제복 차림에 황제 비서관을 뜻하는 배지까지 달고 있다보니 그들로서도 무조건 호통부터 치기는 어딘지 껄끄러웠다.

“이, 이봐.”

“황상께서 이자는 보안국을 통해 처리하겠다고 말씀하셨으니 이자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졸개들을 남김없이 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제야 발을 뗀 사에나는 보벤의 살점이 붙은 장화 밑바닥을 바닥에 툭툭 쳐서 털어냈다. 얼굴 껍질의 반이 벗겨져나간 보벤이 바닥에서 악을 쓰고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르는 광경에 네피와 카이두의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느낌이었다.

“시끄러워.”

보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힘껏 걷어찬 사에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그의 얼굴에 자루를 씌우고 발목에 밧줄을 매 말 안장에 걸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에 올라 보벤을 바닥에 질질 끌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봐, 그렇게 데려가다 죽으면 어쩌려고?”

“갑옷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사에나는 참견을 하는 네피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이놈이 우리 기병을 포로로 잡았을 때는 갑옷도 벗겨서 이렇게 끌고 가 산 채로 태워죽였는데 이 정도면 자비로운 것 아닙니까?”

사에나는 여전히 기분 좋은 표정으로 언덕 위로 향했다. 발목이 묶인 보벤이 버둥대며 지르는 울음에 가까운 비명소리가 골짜기를 울렸지만 이 ‘특별한 혈통’의 귀에는 전혀 들어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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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데서 자르다보니 이번 편은 조금 길어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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