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91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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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우리 편이지만 정말 정나미 뚝 떨어지는 여자네.”
네피는 사에나가 보벤을 질질 끌고 가는 그 끔찍한 광경에서 애써 시선을 떼며 손을 툭툭 털었다.
“이제 슬슬 정리가 된 건가?”
도망치던 자들 대부분은 산악에 익숙한 에키트 전사들에게 바로 붙잡혔고, 말을 타고 무모한 선택을 했던 자들도 보벤처럼 대부분 성치 못했다. 카이두가 황도가 있는 남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듣자하니 수비군하고 이그나토 가 군대가 남부연합군 선봉대에 반격을 가한다고 그러던데? 지금쯤 그쪽에서 한판 벌일 준비를 하고 있겠지. 그것까지 끝나야 조용해지겠지 뭐.”
“맙소사, 이그나토 가가 지금 싸움에 투입된다고?”
네피가 갑자기 비명처럼 소리를 꽥 지르자 카이두 경이 능글한 표정으로 슬쩍 눈을 흘겼다.
“오호, 왜 그렇게 놀라?”
“닥쳐,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네피가 절룩거리며 힘겹게 언덕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주인을 잃은 채 혼자 서 있던 말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버둥거리며 기어올랐다. 그런 그에게 카이두가 빈정거렸다.
“아픈 딸네미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황도에 간다는 말은 안 해도 알아. 그렇지?”
“쳇.”
네피는 현장을 카이두에게 맡겨둔 채 급히 황도가 있는 남쪽으로 말을 몰았다. 황도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 코리온, 마자리크 일행과 함께 이곳을 떠났던 그에게는 퍽이나 오랜만의 귀향이었다.
황도 동문 앞에 막 포진한 마누엘 델루지 장군이 본가로부터 느닷없이 ‘전면 퇴각령’을 받은 건 ‘동부기병대가 북문 앞에서 이상한 짓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는 정찰부대의 연락을 받은 것과 거의 같은 시각이었다. 같은 시각, 황궁의 북문 안쪽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샤자한 공이 동맹군 기습부대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마누엘은 아직 그쪽 사정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직 적은 반격 움직임이 전혀 없는데?”
마누엘은 당장 전군을 퇴각시키라며 길길이 날뛰는 조카 제롬에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었다. 지휘관들을 소집한 제롬의 곁에는 신임 근위대장 쿠베와 그자의 오른팔이고 신임 보안국장인 쿠마르 우펠루라는 낯선 남자의 모습도 보였다.
마누엘은 민간인에 북부 평민 출신인 저 남자가 아무리 따져봐도 영 마뜩치를 않았지만 쿠베와 제롬은 무슨 이유엔지 저자를 철석같이 믿는 기색이 역력했다.
탄현성에서 11만의 본대를 이끌고 오던 카산드라 호지 경이 침착하게 물었다.
“동부기병대하고 우리 보병 선발대만 합쳐도 적 수비군에 비해서는 충분히 압도적입니다. 퇴각을 명하시는 다른 이유라도 있으신지?”
이번엔 쿠베가 대신 나섰다.
“동부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황도 내에서 들어온 첩보에 따르면 페로 경과 짜고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페로와의 공모라는 말에 눈치 빠른 카산드라 경은 물론이고 둔감한 마누엘까지도 바로 상황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북문 부근에서 동부의 이상한 동향에 발을 구르던 마누엘 역시 그제야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북쪽으로 망원경을 돌렸다.
“하여간, 애당초 못 믿을 놈들이었어.”
마누엘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참모들에게 부산하게 퇴각 준비를 손짓했지만 문제는 10만이 넘는 대군을 데리고 도보로 서진하던 카산드라 경이었다.
단순한 마누엘은 허겁지겁 자리를 비우며 남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난 당장 병력을 빼느라 바쁘니까 나중에 보자고. 1분이 아까워.”
급히 멀어져가는 마누엘의 뒷모습을 보며 쿠베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양반 단순하신 게 차라리 다행이군. 지금 당장 재빨리 빠지면 놈들이 병력을 추슬러서 반격을 해도 닭 쫓던 개 신세로 만들 수 있겠지요?”
“마누엘 경의 부대는 가진 게 병사들과 차량뿐이라 차량을 이동해서 바로 퇴각이 가능하지만 우리는 힘듭니다.”
카산드라 경이 침착하게 휘하 장병들을 가리켰다. 수송수단을 모조리 마누엘의 선발부대에 내주고 이틀 동안 죽어라 도보로 행군을 해 온 그의 병력은 이미 반쯤 녹초가 되어 있었다.
“우리 본대는 가지고 가는 보급품도 많고 전진도 느립니다. 마누엘 경의 부대를 놓친 적이 우리 쪽으로 목표를 바꾸고 반격을 해 온다면 이 상태로는 하루면 따라잡힙니다. 이 꼴의 장병들로는 샤마시 평원 한복판에서 몰살당할 판입니다.”
“그 문제는 저희가 해결책을 준비했습니다.”
내내 잠자코 있던 ‘신임 보안국장’ 쿠마르가 불쑥 나섰다. 쿠베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이 자그만 사내의 등을 툭 쳤다.
“내가 사람 하나는 정말 제대로 뒀다니까.”
지금까지 줄곧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이던 쿠마르는 쿠베의 칭찬에도 지금은 약간 긴장하고 굳은 표정이었다.
“대형 중장비와 보급품은 어차피 차에 실었으니 탄현성으로 돌려보내시고, 기병도 단독으로 충분히 돌아갈 수 있으니 문제는 10만의 보병 아닙니까?”
“그렇지.”
카산드라 경이 냉큼 대답했다. 쿠마르가 일동에게 쪽지 한 장을 내보였다.
“욱리하와 관산수를 오가며 동맹군의 군수품 수송 업무를 담당하던 대형 수상 화물선 23척을 이번에 손에 넣었습니다. 보급품과 중장비를 모두 뺀 10만의 보병 정도는 태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적들이 따라잡기 전에 대군을 안전하게 퇴각시킬 수 있습니다.”
“적의 수송선을? 어떻게?”
의심 많은 카산드라 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물었다.
“이미 첩보로 접하셨겠지만, 적은 이번에 15척의 대형 스페이스 수송선을 잃었습니다.”
“전해는 들었다. 그런데?”
카산드라 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쿠마르로서도 ‘설득해 넘겨야 할 가장 까다로운 산’이 바로 눈앞에 있는 이 노련한 제후였다.
“적은 그 배후로 북부의 일부 세력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 운송품의 일부에서 하자가 발견된 것을 빌미로 수상 화물선단 중 제일 규모가 큰 북부 계열 수송회사와의 운송계약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적이 화물 수령을 거부하고 회항을 명령해서 22척의 배가 지금 황도 서쪽 1,000스타디아(150km) 지점 관산수에서 오도가도 못 하고 있다 합니다.”
쿠마르의 설명에도 카산드라 경은 의심어린 표정을 쉽사리 풀지 않았다.
“그러면 이미 화물을 가득 싣고 있다는 뜻인가? 거기에 10만이나 되는 우리 병력을 더 싣고 놈들 검문소를 어떻게 통과한다고?”
쿠마르가 계속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선주를 만나 담판을 지었는데, 화물 대금만 대신 보상해 주신다면 지금 선적하고 있는 화물을 강에 몰래 버리고 대신 우리 병력을 1번 도시 외부로 빼돌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나가라고 명령받은 배니 놈들의 신성 검문소를 그대로 지나가도 아무도 모를 겁니다.”
“돈만 주면 적군의 코앞을 당당히 통과하게 해 주겠다?”
카산드라 경이 그제야 납득한 듯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조용해진 새 제롬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동부가 떨어져 준 게 장기적으로 보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라. 동맹군 놈들 보급체계가 엉망이 되었고, 첩보에 따르면 놈들의 기병대에 정체불명의 말 전염병이 돌아서 군마의 절반 이상이 쓸모가 없어질 거라던데? 잘난 슈로 기사단하고 슬레이프니르인지 뭐시긴지도 전력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질 것 같아.”
“정말입니까?”
카산드라 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쪽에만 계속 안 좋은 일이 생기죠?”
“내 아나, 재수 없게 가디언 놈을 황제로 세워서 천벌을 받나보지.”
별 생각없이 대답하고는 껄껄 웃던 제롬은 옆에 앉은 쿠베의 곱지않은 눈총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당장은 양쪽 상황이 다 나쁘지만 더 궁지에 몰린 건 놈들이야. 이번 위기 한 번만 이겨내면 그 뒤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뻔해. 그냥 전쟁이 생각보다 조금 길어졌을 뿐이야.”
제롬이 손뼉을 짝짝 치며 사람들을 격려했다.
“마누엘 숙부의 3만군하고 기병 1만은 탄현성에 남아 황도의 적을 견제하고 있고, 카산드라 경과 보병 10만은…….”
뭐라 말을 이으려던 제롬은 함께 있던 쿠마르가 잡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와 급히 연락을 취하는 모습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오늘 유독 굳어있던 이 사내의 표정은 어딘가와 연락이 길게 이어지면서 점점 더 창백하게 변해갔다.
“무슨 일이냐. 감히 중요한 회의 중인데.”
제롬이 자신의 발언에도 딴짓을 하고 있는 이 평민 보안국장에게 버럭 화를 냈지만 속으로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직감하고 있었다. 별 발언도 없이 연락을 말없이 듣고만 있던 쿠마르는 알았다는 짧은 대답과 함께 통화를 끊었다.
“휴우.”
자리로 돌아온 쿠마르는 난감한 표정으로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옆에 앉은 쿠베와 잠시 귀엣말을 나누었다. 순간 얼굴이 하얗게 변한 쿠베가 잠시 생각 끝에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보안국 소식통에서 들어온 연락입니다. 적 수괴 카렐이……2번 도시의 펜지켄트에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뜻밖의 연락에 사람들이 모두 경악을 하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해야겠군요.”
멍해진 채 잔뜩 굳어 있는 제롬을 대신해 참모장 카산드라 호지 경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앉아있는 무장들 중 그래도 제일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답게, 이 충격적인 소식에도 그는 겉으로는 그다지 놀란 표시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제롬과 함께 있던 남부연합군 기병대 사령관 히르직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카렐 그놈이 살아있다면 페로와 코리온 두 놈이 버티고 있는 지금의 황도를 두드리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바로 대안을 내놓는 이 두 사람을 보며, 쿠마르는 내심 ‘남부에 저놈들이라도 남아 있는 게 정말 다행이군.’이라고 여겼다. 카산드라 경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을 받았다.
“어차피 전쟁을 여유 있게 늦출 거라면 괜히 여기서 가망 없는 황도와 씨름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음?”
카산드라 경의 제안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급선이 박살난 적 입장에서는 장기전으로 갈 수가 없으니, 놈들은 곧 사생결단을 하려 사오시안트 궁을 직접 공격할 겁니다. 카렐 그놈의 성격상, 직접 앞장서서 나올 것이 뻔합니다.”
“아마도.”
제롬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냉큼 대답했다. 그런 제롬을 보며 쿠베는 저 행동이 ‘공식적으로는 죽은’ 베흔이 이전에 자주 보이던 습관이라는 것을 문득 떠올렸다.
“놈들은 제 10만 보병이 당연히 탄현성으로 퇴각했을 것이라 여길 겁니다. 그러니 우린 아예 이 병력을 감춰두었다가 놈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사오시안트를 칠 때 전격 투입해서 적 황제 놈과 주력군을 끝장내는 게 낫습니다. 황도는 그 후에 공격해도 늦지 않습니다.”
제롬이 쿠베를 힐끔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탄현성은 마누엘 숙부의 병력으로 현상유지만 하고, 카산드라 경은 적 주력군이 죽자사자 달려들 때 결정적인 역습 한 방?”
“욕심만 버리면 옵션은 아주 많아지지요. 우리가 병력이 적습니까? 자원이 적습니까?”
카산드라 경의 가시 박힌 한 마디에 제롬이 슬쩍 눈을 흘겼다. 그간 승전을 지나치게 서둘러 온 젊은 제롬에 대한 노장 제후의 드러나지 않는 힐책이었다. 하지만 이번 그의 제안은 틀림없이 끌리는 면이 있었다.
“뭐, 나쁘지 않군요.”
제롬이 다시 턱을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카렐 그놈만 없어지면 페로와 코리온 두 놈이 죽자사자 내분을 벌일 게 안 봐도 뻔하니.”
제롬은 함께 있던 쿠마르에게 바로 눈짓을 보냈다.
“그 화물선단하고 바로 접촉하도록 해. 적의 눈에 안 띄게 오를 수 있는 적당한 승선장소와 시간을 잡아서 우리 보병대를 빼돌릴 수 있게. 이번에 우리가 저 새끼들 뒤통수를 쳐 줘야지.”
“장기전으로 간다고? 한심한 놈들. 너희도 끝장나 간다는 걸 모르는구나.”
제롬의 명령을 받고 돌아 나온 쿠마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지금까지 일사천리로 풀려 온 상황이 어딘지 이상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믿었던 아프라스 야투 박사가 카렐과 베흔을 죽이는 데 실패했고, ‘아스탈 대신관’의 그간의 숙원이던 ‘8개의 상자’도 결국 카렐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
“상관없어, 그 세포를 가지고 있어 봤자 어떻게 쓰는 줄도 모르는 멍청이들이니.”
그는 사오시안트의 복도를 걸으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카렐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질기게 버티고 있었고, 그들이 쓸 수 있는 카드는 점점 고갈되어가고 있었다.
“이젠 정말 사생결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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