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92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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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집무실로 돌아온 쿠마르는 할룩스가 한참 전부터 깜박이고 있던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잔뜩 짜증이 오른 아스탈이 술잔을 든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역시 지난번 입었던 요란스런 로브와 서클렛 대신 평소 같은 평범한 사업가의 차림새로 돌아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아스탈이 다짜고짜 묻자 쿠마르도 잠시 당황했다.
“카렐 놈이 죽지 않은 건 네 책임이 아니니 묻지 않겠다. 하지만 놈들이 그 사실을 감추고 동부최고제후를 갈아치울 계략을 세울 동안 네놈의 정보망은 도대체 뭘 한 거냐.”
“이번에 우리 정체가 드러나면서 동맹군 진영 내의 제 정보통 상당수가 무너졌습니다. 모두 제 무능함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쿠마르가 즉시 바닥에 꿇어앉으며 가슴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지만 아스탈은 보기 싫다며 대번 손을 저었다.
“필요 없다. 사죄 따위 듣자는 거 아니니까. 오르마즈 놈 하나 쓰러뜨리느라 200년을 기다렸고 베흔과 페로 놈에 걸려 또 130년이 걸렸다. 나도 더 이상 기다리는 데는 지쳤다.”
“…….”
“다음 전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연합군 놈들이 이기게 만들어라. 완전히 회생불능으로 박살을 내라. 그 뒤에 코런덤을 투입할 테니.”
아스탈이 손에 쥔 주석잔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어마어마한 손아귀 힘에 주석잔은 그대로 찌그러지며 형태가 사라져 버렸다. 순간 파랗게 질린 쿠마르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코런덤을 투입해라. 드러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순간 쿠마르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지, 진심이십니까? 그네들은…….”
“내가 농담하는 것으로 들리나?”
“그저……하임달 때도 헤네티들을 절반이나 잃어 기회를 놓쳤기에…….”
“너도 수십 년 후에나 다시 태어나고 싶냐?”
아스탈의 말에 온몸에 전율을 느낀 쿠마르의 차가운 얼굴을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스탈이 찌그러든 주석잔을 내던지며 말했다.
“화물선 22척까지 정체를 드러내면 우리가 가진 큰 패는 이제 다 쓴 셈이다. 지금 끝장을 못 내면 새 세대가 자랄 때까지 어차피 수십 년을 또 기다려야 한다. 알겠나? 난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다.”
“예, 알겠습니다. 명대로 수행하겠나이다.”
쿠마르가 바닥에 다시 이마를 가져갔다. 사나운 표정을 한 아스탈의 형태가 조금씩 사라진 후에도 그는 한참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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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케메니안 궁에서 열린 ‘크바르나’ 월례 회의에서 대신관 야푸르의 제안에 제일 먼저 반기를 든 건 4교단 스루바라의 수장인 가르시바 마구스였다.
“이미 내정된 후계자 아스탈 대신 새 후계자를 삼으시려는 것은 다하카르 교단의 내부 사정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자격요건도 갖추지 못한 자를 후계자로 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르시바의 강력한 항의에 다른 하마피타 마구스들이 동의한다며 일제히 손뼉을 쳤다. 언뜻 수명개조 4,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이 여자는 다른 대다수 마구스들보다는 조금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스루바라 마구스 가문 특유의 다부진 체격과 넓은 어깨 덕분에 유달리 강건해 보였다.
“혈통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문제는 내 자녀를 배우자로 삼아 해결할 것이라 하지 않았소.”
야푸르가 즉시 반박했지만 가르시바의 항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학력에, 반역도당에 몸을 담고 무고한 우리 성직자들을 숱하게 죽인 자입니다. 후계자는 고사하고 당장 남극성당 앞에서 불태워 죽여 마땅한 자입니다.”
“그대는 대신관인 나의 신성한 사면권을 부정하는 건가?”
가르시바의 공격이 오르마즈 본인의 경력을 겨냥하자 야푸르의 말투가 갑자기 험악해졌다. 대신관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회의장의 분위기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나의 조상 아프라시아께서 당신을 찌른 암살범을 사면하고 숨을 거두셨으니, 그 전통은 우리 다하카르 가문의 가장 큰 덕목이며 12개 가문 중 가장 숭고한 위치에 오를 수 있는 힘이었거늘! 그런데 고작 4마구스인 그대가 내 일생에 단 한 번 쓸 수 있는 사면권을 멋대로 부정하는 거냐!”
“사면권은 전통적으로 다하카르 가문 내부 문제에 국한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자는 이미…….”
목소리를 높이려던 가르시바는 5시 방향 에시마 교단 마구스 뒤에 선 한 젊은 여자의 눈을 힐끔 쳐다보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바에자 빈트 에시마.”
야푸르가 눈을 부릅떴다. 가르시바에게 눈짓을 보냈던 그 젊은 여자는 대신관의 부름에 얼른 두 손을 모으며 허리를 굽혔다.
“소리 없이 의사를 전할 수 있는 그대의 특별한 능력은 잘 알고 있으나 회의장에서는 금한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대신관에게 의도를 간파당한 바에자가 창백해진 얼굴로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 그저 의도하지 않게 상대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있어…….”
“나가 있게.”
야푸르는 두말없이 손끝을 문으로 향했다. 창백해진 바에자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황황히 회의실을 나섰다.
“에시마 교단에서는 후계자 관리를 잘 하셔야겠소. 신탁까지 받은 후계자가 저리 버릇없이 굴어서야 쓰겠소? 그대의 나이가 많다고는 하나 후계자 선임을 너무 서둘렀다가 괜한 실수를 저지른 것 아니요?”
대신관의 매서운 힐책에 당황한 에시마 마구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거의 80대 혹은 90대가 넘어 수명개조된 듯,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 노인은 회의 참석도 버거울 정도로 기력이 떨어져 보였다.
“그리고 가르시바 마구스도 동료 마구스도 아닌 고작 후계자의 언질에 입을 다무는 모습이 품위가 없어 보이오. 마구스로서 품격을 지키시오.”
“허나.”
궁지에 몰린 가르시바를 대신해 바로 그 옆에 앉아있던 5교단 샤마시의 살름 마구스가 뒤를 이어 입을 열었다.
“관례상 대신관 후계자를 교단 내에서 내정하면 1개월 이내에 경연 날짜를 결정해 왔습니다. 후계자를 이미 선임한 상태에서 경연을 1년이나 미루는 건 절대 불가능합니다. 오르마즈 그자를 굳이 원하신다면 1개월 후, 경연을 여는 것이 좋겠습니다.”
살름이 한 발 물러나는 태도를 보이자 가르시바가 그에게 험악한 눈길과 함께 작은 소리로 쏘아붙였다.
“이보시오, 지금 여기서 물러나자는 거요?”
“어차피 1달 안에 경연 준비는 불가능합니다. 어차피 통과하지 못할 테니 그놈 태워죽이기는 매한가지죠.”
“그것도 바에자 그것이 방금 그대에게 한 말이요?”
“대신관 경연은 전통적으로 그대 교단에서 주재하지 않았소? 장소는 에아 교단에서, 주재는 스루바라에서, 잘 아시지 않소? 그러니 힘 좀 써 보시구려.”
살름이 가르시바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괜히 무리수로 저 양반 성질 건드려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지 말자고요. 저 양반 입장에서야 놈이 얼마나 소중하겠소.”
그제야 마지못해 수긍한 가르시바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시그마 오르마즈는 지난번 입은 부상으로 몸이 성치 않아 한동안 경연 개최는 어렵소. 내년 새해가 오기 전에 열 예정이요.”
야푸르가 바로 선을 그었지만 먼저 한 발 양보를 해 준 하마피타 마구스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저희가 혈통 문제에서 타협을 해 드렸으니 대신관께서도 타협을 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정말 그렇게 대단한 자질을 갖추었다면 1달 정도로 능력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앞다투어 쏟아지는 강력한 항의에 야푸르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회의장이 조금씩 시끄러워지자 3시 방향에 앉은 트라카 교단 수나 마구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시그마 오르마즈가 부상을 입은 것도 사실이고, 하마피타 여러분들의 주장도 나름 일리가 있으니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보는 것이 좋겠지요. 준비기간은 3개월 정도로 하되, 여러분께서 적진에 있던 문제로 자질을 염려하시니 원래 규정된 것 외에 과목 1개 정도를 추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수나의 타협안에 하마피타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설마 군사학 같은 것을 생각하고 계신다면…….”
“역사학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교양을 드러내는 데 그만한 분야가 없을 테니.”
수나의 청천벽력같은 발언에 가장 놀란 건 야푸르 대신관이었다. 그리고 과목 추가라는 말에 당연히 오르마즈에게 유리한 군사학 정도를 생각했던 건 다른 마구스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초급학교 수준 역사를 묻자는 건 아니겠죠? 하기야, 그것도 어렵겠지만.”
초급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오르마즈에 대한 경멸이 그대로 담긴 가르시바의 물음에 몇몇 마구스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야푸르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달아올랐다. 하지만 수나 마구스가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른 과목과 마찬가지로, 신학교 전공자 상위 졸업생 수준에서 말입니다.”
“글쎄, 그 정도면 생각해 볼만도 하겠지요.”
살름 마구스가 결국 수긍한다며 수나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정작 야푸르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다.
“그럼 일단 하마피타 여러분들은 받아들인 것으로 알아도 되겠지요?”
수나 마구스가 재빨리 탁자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문제는 제가 대신관님과 상의할 테니 오후에 다시 논의합시다.”
“미리 상의도 없이 그렇게 멋대로 중재하기요? 수나?”
수나 마구스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야푸르가 대번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간 수나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아지드 신관이 원래 신학교의 역사학 부교수였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야푸르가 그제야 눈을 부릅뜨며 수나를 휙 돌아보았다.
“외과 봉사의(醫)로 지낸 기간이 길기는 했지만 주 전공분야는 역사종교학이었죠. 임무만 없었다면 지금쯤 다시 신학교로 돌아가 있었을 겁니다.”
“어미가 잘 안다고 그 자식까지 잘 알라는 법이 있소?”
“다행히도 이번은 그렇더군요. 요아킴 박사 말이 역사에 대한 지식만은 대단한 것 같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도서관에 데려가 직접 역사 공부를 시켰다고 합니다.”
야푸르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수나의 표정은 여전히 단호했다.
“그리고 대신관님의 믿음처럼 그렇게 잠재력이 대단하다면 이 정도는 충분히 넘어서야 한다고 봅니다.”
“여전히 오르마즈, 아니 새 아르잔이 그렇게 마땅치 않으십니까. 사적으로 말입니다.”
오르마즈에게 매번 가시 돋친 태도를 보이는 수나에게 야푸르가 퉁명스레 물었다.
“아직 말 한 마디 건네시는 것을 못 봤습니다. 도리어 그 애를 먼저 피하시는 것 같더군요.”
정곡을 찌르는 야푸르의 물음에 수나가 잠시 망설였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제가 마땅치 않아 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이전의 죄는 이미 대신관께서 사면을 하셨으니 이러쿵저러쿵 할 이유도 없는 것이고. 그저 저 역시도 자질이 걱정될 뿐입니다. 그리고 모질지 못하신 대신관님이 도리어 더 걱정이 되고요.”
야푸르는 엘리베이터 창밖으로 비치는 아케메니아 궁 북쪽을 조용히 응시했다.
“여기서 얼마나 더 모질어지라고요?”
야푸르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아케메니안 궁 북쪽에는 조만간 ‘대신관 후계자’ 오르마즈의 경연이 있게 될, 그리고 지금껏 교단의 운명을 가른 숱한 사건들이 있어 온 에아 신전의 지상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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