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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95화 (690/1,132)

< -- 695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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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아스탈 그놈도 정체를 드러내고 사생결단을 하는 판국이니 새삼 감출 건 없어. 더 이상 그자의 신분을 지켜준다는 약속에 얽매일 것도 없고.”

“다 알았다고?”

사에나는 이 만만치 않은 상대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는 용기를 내어 코나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그놈이 전쟁을 크게 만들어서 제국을 분열시키고 몰락시키려 했다는 것도 이제 알고, 네가 어떤 명령을 받았었는지도 알아.”

코나가 허탈한 표정으로 키득거리며 넓고 구부정한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너희가 내 역할을 다 알았다니 차라리 속 편하군. 갑갑한 포승 하나가 풀려나간 느낌이야.”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네 문제가 아니고 교단의 정체다. 그자들의 조직과 지금까지 어떻게 생존해 왔는지, 앞으로의 계획이 뭔지.”

“나도 어차피 많이 알지는 못해.”

코나 시디크는 다시 마무리 바느질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용당했을 뿐이니까. 자이센 가와 근위대의 추적에서 날 지켜주는 대가로 몇 가지 잡일을 해 준 게 전부지.”

“네가 아는 만큼이면 충분하다. 지금 당장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열쇠가 되면 충분해.”

사에나가 의자를 끌어다가 그의 앞에 더 바싹 대고 앉았다. 사에나의 숨결을 느낀 코나가 움찔하며 다시 바느질을 멈추었다.

“듣자하니 도망다니던 중에 오르마즈 경에게 도움을 구하러 카파키 가에도 찾아갔었다지?”

“그건 또 누가 말했지?”

코나 시디크가 바늘을 내려놓으며 사나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리아노 라자루스 법무관이 그때까지도 널 쫓고 있었어. 페로 경이 당시 아리아노 경의 수사 자료를 운 좋게 구해서 알게 되었지. 네 수하들이 오르마즈 경과 만났다지? 오르마즈 경도 교단과 무슨 연계가 있었나?”

“허어, 아리아노 그 끈질긴 년. 아니, 같은 부류로서 존경해야 하나.”

코나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가만, 이제야 알겠군. 아스탈 그놈이 일부러 날 오르마즈 경에게 보낸 건지도 모르겠군.”

“무슨 말이지?”

“황실 수사관들한테 거의 잡힐 뻔 했다가 어떤 용역 놈들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어. 난 중상을 입어 의식이 없었고, 우리 일행을 구해준 용역 놈들이 우왕좌왕하던 아랫놈들한테 오르마즈 경에게 가면 도와줄 거라고 했다지.”

“이유를 아나?”

“모르겠어. 난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깨어보니 오르마즈 양반이 알아봐 준 병원이었어. 도와주긴 도와줬으니 그 용역 놈들 말이 맞긴 한 거지.”

“그분이 도망자인 널 왜 도와줬을까? 그 용역 놈들 정체는 뭔데?”

“글쎄, 이제와 생각해보니 아스탈 그놈 패거리였는지도 몰라. 그 녀석 오르마즈 경을 무지하게 싫어했거든.”

“황실 수사관이 널 쫓고 있는데 오르마즈 경에게 보냈다? 결국은 널 이용해서 연금 중이던 오르마즈 경을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는 수작이었겠군. 반역도당과 어울린다는 죄목으로?”

“그랬나보지. 하지만 나도 그 양반은 딱 한 번밖에 못 만났어. 어둠 속에서 내 뺨을 한 번 만져주고 가신 게 전부였지. ‘헌병감 시디크 대령, 그동안 고생 많았네.’ 이 한 마디뿐이었지. 그 양반 민병대 출신이신데 어째 내 직속상관 같은 느낌이 들더군.”

“오르마즈 경이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널 도와준 이유가 뭘까?”

“글쎄, 나도 모르지. 내가 교단 헌병감 시절에 중요한 사건들을 많이 다뤘어서 나름 쓸모 있다고 여기셨는지도 모르지.”

“그러면 오르마즈 경이 네 생명의 은인인데, 그 양반을 싫어하던 아스탈 밑에 들어간 이유가 도대체 뭐냐?”

사에나의 물음에 코나가 눈가를 잔뜩 찡그렸다.

“그러니 병신 같은 년이지. 속은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코나가 이를 빠득 갈았다.

“아랫놈들 두 놈 갑자기 살해되고 오르마즈 경을 못 믿을 것 같아 야반도주를 했지. 조금만 머리를 썼더라면 그렇게 멍청하게 속지는 않았을 텐데. 오르마즈 경이 날 보호해주는 척 하다가 팔아넘기려는 줄로 알았지. 멍청한 년.”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코나는 갑자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그것 때문에 오르마즈 경이 정말로 궁지에 몰렸었나? 날 보호해 준 것 때문에?”

코나의 갑작스런 물음에 사에나는 이 여자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마음 약하고 선한 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뻔 했지만 세나우스 2세 황제가 오르마즈 경을 보호하기 위해 아리아노 법무관의 수사를 강제로 중단시켰던 것 같다.”

코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머플러에 바늘을 꽂았다. 그가 슬슬 마음을 여는 것을 확인한 사에나도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그분께 진 빚을 지금이라도 갚아. 폐하께선 네 충성을 원하신다.”

“내가 자이센 일가를 죽였는데도?”

“상께선 만약 그 입장이셨다면 자이센 일가의 껍질을 다 벗겨 황제에게 선물로 보냈을 거라고 하시더군.”

사에나의 분명한 대답에 코나가 웃음인지 울음인지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목 메인 소리로 물었다.

“저 유골단지는 내게 주는 게 맞나?”

“내가, 아니 황상께서 두말 할 분으로 보이나?”

사에나는 한참동안 대답을 기다렸지만 코나는 겉으로는 계속 바느질에만 열중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간중간 멈추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럼 1시간 후에 다시 오지.”

거의 30분을 말없이 기다린 사에나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코나가 만들고 있는 자신의 머플러에 이미 몇 번이나 떨어진 눈물자국을 이미 본 후였다. 그것이 지나간 과오에 대한 뒤늦은 후회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 때문에 잔인하게 살해당한 가족의 유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존심 강한 이 여자가 자신 때문에 가족들의 뼈 단지에 관심을 보이지도, 맘 놓고 울지도 못하고 있으리라 생각한 사에나는 얼마간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때, 코나 시디크가 고개를 들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가지 마.”

사에나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이제 다 만들었어. 기왕 온 김에 가져가.”

자리에서 일어선 코나가 두 손에 머플러를 펼쳐보였다. 사에나는 지난 수십 일간의 정성이 그대로 깃들어 있는 비단 머플러로 시선을 돌렸다.

“왜 하필 내걸 만들고 있었지?”

사에나가 처음으로 이 여자에게 사적인 질문을 던졌지만 그가 솔직히 대답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악당’은 이번에도 그를 놀라게 했다.

“그냥. 네 자신에 찬 눈빛이 마음에 들어.”

사에나의 어깨에 머플러를 걸어 준 코나 시디크는 그의 목 양쪽에 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 키 큰 상대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나도 이런 눈빛을 가져보고 싶었거든.”

활짝 열린 코나의 동그란 눈에는 조금 전의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사람들이 상상하듯 매섭지도, 살기로 번득이지도 않았다. 까만 동공이 그대로 보이는 그의 크고 선한 암갈색 눈동자는 마치 어린 소녀의 그것처럼 아주 맑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바싹 마주선 채 서로의 눈을 한참이나 말없이 응시했다.

잠시 후, 코나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사에나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

“내게 활동이 편한 평민 신분 하나 정도는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코나 시디크’는 이 땅에서 모든 노예가 없어질 때까지는 계속 노예다.”

“원하는 대로.”

사에나가 쿵쾅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어깨에 건 자신의 새 머플러를 더듬었다. 코나가 깨끗한 새 잔에 따뜻한 과일차를 담으며 말했다.

“그리고 수나 마구스와 트라카 교단을 너무 믿지 마.”

코나의 뚱딴지같은 말에 사에나의 눈가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드디어 황제가 원하던 내용이 그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왜?”

“도둑맞은 8천개의 헤네티 세포를 되찾고 싶어 하는 건 그네들도 마찬가지거든. 내가 맡았던 사건이라 잘 알아.”

“민병대가 교단 연구소에서 훔쳐왔던 것 말이냐?”

“그건 원래 6개 하마타 교단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거야. 모든 노력을 기울여 어렵게 만들어낸 8천개의 개량형 헤네티 세포하고 자료들을 민병대에 도둑맞으면서 교단 내에서 하마타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지. 프로젝트를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하마타 수장 수나 마구스의 세력도 그것 때문에 위기를 맞았고.”

‘하마타 교단’이라는 말에 사에나가 자기도모르게 손목의 마구스 팔찌를 더듬었다. 따져보면 바로 그 자신이 하마타 소속인 에아 교단 마구스의 혈통이었다.

코나가 사에나의 손에 잔을 들려주며 말했다.

“물론 민병대도 훔쳐가기만 했지 제대로 이용해먹지도 못했어. 하기야, 초급 연구원 하나 포로로 잡아다가 그걸 발생시켜 보라고 맡겼으니 그 어린 연구원이 뭘 알았겠나.”

“자그룰라 모렌 박사?”

“훔쳐간 X는 1세대부터 5세대까지 총 5종류가 있었지. 전투형인 3, 4, 5세대는 모렌 박사가 서투르게나마 발생을 시켜서 지금의 가디언들을 만들었지만, 조금 용도가 다른 1, 2세대 2천은 그자의 지식으로는 발생이 되지 않았거든. 민병대 지도자 파냐드는 해도 해도 안 되니까 포기하고 그걸 아스탈에게 팔아버렸지.”

“그럼, 지금 설치는 헤네티들이 X의 1, 2세대?”

상황을 눈치 챈 사에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스탈은 그때 넘겨받은 1, 2세대 X 2천을 발생시켜서 ‘코런덤’이라는 조직을 만들었지. 표면적으로는 소규모 사설 용병단이지만 실제 전력은 아무도 몰라. 내가 타르서스에 데려갔던 놈들도 그 중에 일부였고.”

지난번 타르서스 별궁에서 상대했던 끔찍한 헤네티들을 떠올린 사에나는 ‘2천’이라는 말에 온몸에서 소름이 쫙 돋는 느낌이었다.

코나가 찻잔을 든 사에나의 손을 손바닥을 감싸며 말을 건넸다.

“네 말대로 아스탈이 사생결단을 하고 나올 타이밍이라면 이번엔 정말 놈들이 등장할 지도 몰라. 하지만 수나 마구스도 그네들에 관해서라면 너희들에게 별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할 거다.”

“원래는 자기 것이니?”

“결국은 수나 마구스 것을 한 다리 건너 아스탈이 훔쳐간 셈이 되지 않았나. 수나 마구스는 속으로는 그걸 되찾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테고. 이번에 너희를 돕는 것도 그놈들하고 나머지 세포 6천개까지 되찾으려는 수작일 뿐이야. 너희가 이뻐서가 아니고.”

사에나는 타르서스에서 죽은 헤네티들의 시체를 결사적으로 챙기던 수나 마구스와 그 부하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순간 전율했다.

“어쩐지, 돕는 것 같으면서도 중요한 건 감추는 것 같고, 도무지 알 수 없이 행동하더니.”

사에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수나 마구스가 황제를 돕는 것도 이전의 손해를 만회하려는 철저한 계산의 결과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X 1, 2세대는 용도가 뭐지? 3, 4, 5세대와 뭐가 다른데?”

“영생의 방법.”

코나의 이상한 대답에 사에나의 눈가에도 더 힘이 들어갔다.

“아스탈 빈 다하카르는 마구스 혈통 치고는 꽤 별난 놈이야. 의학이 아니고 정치학과 사회학을 공부했거든. 아버지 야푸르는 생물학적인 영생을 개발했지만, 아스탈은 그걸 정치에 접목시켜서 마구스와 신관들에게서 폭발적인 지지를 얻어냈지.”

“정치적인 영생? 무슨 뜻이지?”

“야푸르가 수명개조를 개발하면서 영생이 가능해졌지만 늙는 것을 중단시켰을 뿐이지. 어차피 육체가 죽으면 정신과 기억도 죽기는 매한가지야. 설사 날 복제한다고 해도 쌍둥이처럼 별개의 자아를 가진 별개의 존재니 영생이라 말할 수는 없어. 하지만 아스탈이 개발한 1,2세대 X들은 그런 일이 없어.”

“어떻게?”

사에나의 당연한 질문에 코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네들은 시간이 지나면 늙거든.”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은 사에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지?”

“그놈들은 육체가 2개야. 하나는 활동 중이고, 그보다 젊거나 비슷한 나이의 또 하나는 실험실에 있지. 활동 중인 육체는 만일을 대비해 모든 기억을 백업해. 그리고 지금의 몸이 늙거나 죽으면 새 육체에서 이전의 기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지. 글쎄, 그렇게 태어난 존재를 나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네들에게는 영생의 방법이야.”

“맙소사.”

사에나는 그 결과를 바로 머릿속에서 추리해내며 전율했다. 코나가 그의 이해에 설명을 덧붙였다.

“그네들의 주인인 아스탈은 ‘여분 육체’와 언제든 여분 육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모세포를 쥐고 있어. 헤네티가 배신을 원하면 물론 도망칠 수는 있어. 하지만 더 이상 젊고 강인한 새 육체를 얻을 수 없고, 결국은 지금 있는 자신의 몸이 추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하겠지. 너라면 뭘 택하겠나?”

“영생은 영생이되, 아스탈에게 저당잡힌 영생이군.”

사에나가 떨리는 목소리와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동료들이 나의 시체를 거둬가면 몸 속에 기록된 내 마지막 기억을 새 몸에 이식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게 어렵다면 내 기억과 유전자를 남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불태워 없애고 조금 이전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게 나아.”

“그래서 그놈들이 죽기 직전 자기 몸에 불을 붙이는 건가?”

“내 몸이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되면 스스로를 기꺼이 파괴해 버리지. 어차피 놈들의 지금 몸은 노화가 진행되고 있고, 능력이 더 떨어지기 전에 가치를 증명하고 빨리 죽어야 해. 더 젊고 강한 새 몸을 받으려면 말이지. 그래서 아스탈을 위해 죽을 방법만 눈이 벌개져서 찾고 있지.”

“그게 그네들의 영생?”

“죽은 헤네티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스탈은 죽은 자의 육체와 기억을 없애버리고 처음부터 새로운 별개의 존재로 키워낼 수 있어. 나와 비슷하게 생긴 자가 몇십 년 후에 다시 세상에 나타나겠지만 그건 더 이상 내가 아냐. 내 유전자를 지닌 몸에서 다른 자아가 자란다는 게 그네들에게는 진짜 죽음이고, 진짜 공포야.”

“그런 놈들이 2천이나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

사에나는 자신을 응시하는 코나에게 멍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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