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97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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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리 덥지.’
오르마즈는 등줄기로 배어나는 땀방울을 느끼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구름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으니 이 위가 다른 곳보다 시원해야 했지만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마구스의 로브와 터번 때문인지 공기가 유달리 덥게 느껴졌다.
크로이소스가 구름다리 위의 오르마즈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12개 교단의 2신관부터 10신관까지, 총 108명이 각각 한 가지씩의 질문을 던질 겁니다. 지명자는 2분 이내로 대답을 마쳐야 합니다. 평가는 즉석에서 108명의 거수로 결정되며, 적어도 80문제에서 신관 과반의 긍정을 얻지 못하면 탈락하게 됩니다. 신관님들께서도 지금의 출제와 가부 결정사항이 모두 기록되어 이후 본인 심사평가에 활용될 것이니 공정성에 만전을 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잠깐.”
오르마즈가 손을 들어 크로이소스를 막았다.
“내게 바람어가 아닌 공용어로 묻는 것은 대신관 지명자인 나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크로이소스 신관.”
오르마즈가 완전치는 않지만 또박또박한 바람어 발음으로 물었다.
“예?”
피시험자의 난데없는 역습에 크게 당황한 크로이소스가 급히 동료 신관들을 돌아보았다. 놀랐기는 이번 경연에서 당연히 공용어를 쓸 것으로 알고 질문을 준비해 온 하마피타의 대다수 신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람어 자체가 워낙 오래된 ‘종교, 정치, 제례용 상류층 특수 언어’다보니 신관들조차도 대다수가 말하기보다는 읽기에 능숙했고, 그에 관련된 분야라면 모를까 전문분야를 다루어야 하는 문제에서 바람어를 쓰라는 건 질문자에게도 상상하기 싫은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경연에서는 바람어를 써 왔거늘, 내게만 공용어를 쓰려는 의도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나를 무시하자는 수작이냐.”
크로이소스는 검은 베일 속에서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회색빛 시선에 기겁을 하며 제단 위 마구스들을 올려보았다. ‘무식한 반군 포로’라는 생각에 바람어 사용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하마피타 마구스들의 ‘배려 아닌 배려’가 생각지도 못한 부메랑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후계자의 의욕이 가상하니, 질문자들은 바람어를 쓰는 것이 좋겠군.”
베일 너머에서 들려온 대신관의 지시에 하마피타의 신관들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았다. 몇몇은 ‘바람어 사전’을 펼쳐들며 질문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나 서로 웅성대는 모습이었다.
“대신관님, 이건…….”
스루바라 교단의 가르시바 마구스가 무어라 끼어들려 했지만 야푸르는 완강하게 손을 뻗으며 입을 다물라 손짓을 보냈다.
“지금껏 내내 전통 타령을 하던 그대들이 정작 본인이 전통을 지키겠다는데 웬 참견인가. 에아 신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는데 빨리 시작하지 않고 뭐 하나! 명색이 신관이라는 자들이 바람어로 질문을 하는 게 그리 어려운가?”
야푸르는 첫 번째 질문을 맡은 이번 사회자 크로이소스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내 후계자의 확정을 빨리 보려 하니 당장 질문을 던지라!”
야푸르의 호통에 크로이소스가 마지못해 미리 준비해 온 질문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비교적 익숙한 바람어로 시작을 끊었다.
“흐, 음, 콜로니의 역사에 관해 묻겠습니다. 우리 ‘침묵의 자매들’이 본디 13개의 교단으로 시작하였으되 그 중 제 13교단이던 사바브 교단이 제명을 당하고 현재의 아라무트로 도주해 이제는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암살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당시 그들의 제명을 불러온 암살사건의 전모에 관해 논해 주십시오.”
크로이소스가 얼렁뚱땅 질문을 마무리하며 허겁지겁 질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사실 그가 준비해 온 질문은 첫 테이프를 끊는 것이니만큼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라도 이보다 훨씬 길고 세부적인 사항이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 모두를 어려운 바람어 문장으로 즉석에서 유창하게 옮길 자신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질문을 던진 크로이소스에게는 상대가 하필 ‘암살전문가’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오르마즈는 잔뜩 기가 죽은 크로이소스에게서 바로 시선을 떼며 나머지 신관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본인은 물론이고 구름다리 아래, 화로 주변에 선 ‘동반자들’ 그리고 밀리타의 운명이 그의 손에 걸려있었다.
“한때 13번째 보석이었던 오닉스 사바브 교단은 당초 약물학으로 교단 내에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교단 소속 헤네티 조직원의 일부에 하시시라는 마약을 투약해 ‘피다이’라는 불손한 암살조직을 결정하여…….”
오르마즈가 느리지만 또박또박한 바람어 문장으로 대답을 이었다. 문제 자체가 평이하다보니 대답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수준의’ 바람어를 구사하는 후보를 상대로 왜 공용어 질문을 만들어오라고 했는지가 그를 떨어뜨리려 작정을 하고 온 하마피타 신관들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더 이상한 노릇이었다.
오르마즈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때까지도 아래에서 가장 가슴을 졸이고 있던 ‘역사와 교리 담당’ 이오타 요아킴 박사가 갑자기 박수를 쳤다. 물론 이런 과장된 행동은 경연장에서는 금지된 것이었지만 이런 ‘룰’들은 첫 기세싸움에서는 종종 의도적으로 위반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잘 하셨습니다.”
나머지 동반자들도 급히 그를 따라 박수를 치며 얼른 분위기를 잡았다.
“조용히들 하게.”
소란을 떠는 이 젊은이들에게 성난 얼굴로 침묵을 명령한 크로이소스는 100명이 넘는 동료 신관들 뒤쪽, 판정결과를 뜻하는 깃발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얼마 기다릴 필요도 없이, ‘통과’를 뜻하는 푸른 깃발이 올랐다.
대다수의 하마피타 마구스들, 심지어 그를 지지하는 하마타 마구스들조차 감히 통과를 낙관하지 못했던 ‘무식한 암살수 출신’의 경연은 시작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2/3의 질문까지 넘기고 잠시 휴식을 위해 신전 한쪽 작은 밀실로 돌아온 오르마즈의에게 요아킴 박사가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여주며 말했다.
“지금까지 75문제 중에 64개가 통과되었습니다. 남은 문제는 33개니 하마피타에서 나온 문제는 포기하고 하마타에서 내는 문제만 모두 맞추셔도 통과가 가능합니다. 힘내십시오.”
“다 견딜만한데 저 위가 너무 더워.”
오르마즈의 베일을 벗겨 본 밀리타는 순간 기겁을 하며 놀랐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말을 더듬거나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던 그였지만 정작 베일 안쪽의 맨얼굴은 방금 세수라도 하고 나온 것처럼 흠뻑 젖어있었다.
“맙소사, 그렇다고 이리 땀을 흘리셨어요?”
밀리타가 지친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짐짓 다정하게 말했다. 그 와중에도 오르마즈의 턱을 타고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전 대신관 경연처럼 짜고 치는 도박이 아니니까요.”
어딘지 가시가 돋친 한 마디를 내뱉은 건 지금껏 내내 조용조용하기만 하던 요아킴 박사였다.
“아스탈 빈 다하카르 교구장의 경연이야 어차피 대부분 교단에서 거의 입을 맞춘 상태 아니었습니까? 경연이라기보다는 쇼에 가까웠으니 지금처럼 긴장할 것도 없었지요. 그때도 이 자리에 있지 않으셨던가요?”
밀리타는 그의 말을 짐짓 못 들은 척 오르마즈의 얼굴을 찬 물수건으로 정성껏 닦아주었다.
“긴장 때문이 아냐. 저 위가 더 더워, 에아 신전이 원래 이렇게 더운가?”
오르마즈가 계속 불평을 했다.
“화로 부근에 있는 우리들도 그렇게까지는 안 더웠는데요.”
니사가 어딘지 불안한 표정으로 옆에 선 요아킴을 슬쩍 돌아보았다. 반쯤 탈진한 오르마즈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작은 병에 담긴 물을 벌컥 들이켰다.
“제기랄, 목이 타는 것 같아.”
“주어지는 물은 목을 축이기 위한 1홉(180ml)이 전부입니다. 더 드시면 1홉당 1점씩이 감점됩니다. 체력과 인내심도 함께 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어. 극한을 견디는 건 내가 더 잘 알지만 이젠 머리가 돌지 않아. 탈수로 쓰러지는 것보다는 감점이 나아.”
“잠깐만요, 제가 다녀올게요.”
밀리타는 빈 통을 들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섰다. 그는 이번 경연의 운영을 맡은 다하카르 교단 성직자 아프라스 야투 박사에게로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교단 최고의 내과의로 손꼽히는 이 호호 노인은 대신관이 되기 이전의 야푸르와 함께 수명개조 기술을 발명한 팀의 일원이었고, 나이도 상당했다. 하지만 운이 없었는지, 아니면 정치력이나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있던 것인지, 아직 신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채 일반 성직자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대신관과의 오랜 친분 덕택에 이번 같은 중요한 행사에 담당으로 자주 불려오곤 했다.
“웬일이십니까?”
그는 밀리타의 손에 들린 작은 물병을 보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물을 더 가져가시면 감점인 건 아시겠죠.”
“알아, 아니까 저분께서 원하시니 1홉 더 줘.”
“알겠습니다. 1점 깎습니다.”
아프라스 야투 박사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1홉의 물과 함께 경연 운영 기록을 내밀었다. 장부에 ‘수령자’로 허겁지겁 서명을 한 밀리타는 소중한 물병을 꼭 끌어안고 오르마즈에게로 향했다.
밀리타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야투 박사는 자신에게 다가온 사회자 크로이소스 델루지 신관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물론. 그런데 저놈 아직 멀쩡해 보이던데?”
“대신관께서 보고 계신데 확 드러나도 곤란하지 않습니까. 워낙 체력이 좋은 놈이라 효과가 늦게 나타날 수도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야투 박사가 마구스들이 있는 제단 위를 힐끔 살폈다.
“첫 번째 물은 일부러 약하게 처방했습니다만 이번 두 번째는 좀 셉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나빠질 테니 염려 마십시오.”
여전히 불안한 표정의 크로이소스에게 야투 박사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최악의 경우 외에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그분의 지시이십니다. 기왕이면 탈 없이 조용히 처리하는 게 낫죠. 헤네티들은요?”
“뜻대로 안될 것 같으면 내가 수신호를 하기로 했다. 헤네티들은 이미 단속해 놓았고.”
“그래도 가능한 그런 일이 없길 바라야죠.”
야투 박사가 크로이소스에게 다시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어쨌든 저 불로 태워버리는 게 탈 없고 제일 깔끔하지 않습니까? 시체가 타서 없어지면 뭘 먹었는지 증거도 안 남는 거고요. 자, 자, 이거라도 드시고 기운 좀 내세요.”
“하긴 그래.”
야투 박사가 내민 시원한 물을 받아든 크로이소스는 별 생각 없이 마시려다가 갑자기 움찔하며 급히 입술을 떼고 눈을 흘겼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야투 박사가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염려 마십시오. 이건 아주 깨끗한 진짜 물이니까요.”
“여기요. 흘리지 말고 조심해서 나눠 드세요.”
밀리타가 내민 물을 받아든 오르마즈는 타들어가는 목구멍에 반을 부어넣었지만 극심한 탈수 때문인지 물을 마셨다는 느낌조차 오지 않았다. 그는 절반이 남은 물병의 뚜껑을 닫고 자리에서 혼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니사가 급히 오르마즈의 혈색을 살폈지만 땀을 너무 많이 흘리는 것을 빼면 아직 딱히 안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안 괜찮으면 또 어쩌겠나.”
오르마즈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고맙네.”
그는 자신을 둘러선 6명의 든든한 ‘동반자’들을 새삼 돌아보았다.
언제나 침착하고 조용한 리더 이오타 요아킴, 밉지 않은 수다쟁이 니사, 씨름꾼 같은 외모에 단순하고 우직한 에아 교단 화학자 카야, 웃음이 유달리 많은 드르바스파 교단 정치학자 혼, 섬세한 성격에 걸핏하면 우는 하오마 교단 식물학자 울피, 숫자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티시트리야 교단 물리학자 파트라가 그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다.
“시간 됐습니다.”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르마즈는 다시 얼굴을 가리고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절반 남은 물병을 들고 다시 구름다리 위로 향했다. 그는 애써 정신을 집중하며 눈을 부릅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 끔찍한 경연도 끝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열기가 몸을 더 조여 왔고 오르마즈는 자리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탈진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심한 현기증으로 머릿속이 멍해지고 다리도 힘이 풀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절반 남은 물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덕택에 뒤로 갈수록 점점 점수가 떨어져가면서 뒤에서 지켜보는 동반자들의 피를 바싹바싹 말리고 있었다.
‘물 드세요. 물이요.’
현기증으로 말을 더듬다가 106번째 문제까지 실패한 오르마즈는 자신에게 물을 마시라며 손짓하고 있는 요아킴 박사의 모습을 뒤늦게야 발견했다.
‘79점이니 하나만 더 통과되면 확정입니다. 힘내세요.’
요아킴 박사가 신전 건너편에 걸린 깃발을 가리키며 오르마즈에게 격려의 손짓을 보내왔지만 이미 같은 말만 7번째였다.
이번에 문제를 낼 사람은 오르마즈에게 호의적인 하마타의 드르바스파 교단 신관이었지만 요아킴의 걱정은 여전했다. 반쯤 판단력을 잃어가던 오르마즈는 하마타에서 낸 비교적 쉬운 문제들조차 이미 3번을 연달아 놓치고 난 후였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건 2문제뿐이었다. 이 중 하나는 어떡해서든 꼭 잡아야 했다.
‘물을 괜히 먹었나.’
마지막 1점에 발목이 잡힌 오르마즈는 물 때문에 감점당한 1점을 생각하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107번째, 통치조직에 관한 물음입니다. 우리 교단의 직속 무장조직인 헤네티 친위군단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과 앞으로의 계획을 여쭙고자 합니다. 현존하는 각 부대의 특성과 규모, 지휘관과 주둔지, 기본 전략에 관해 말씀해 주시고, 지명자께서 운용하시게 될 새로운 헤네티 부대의 구성에 관한 초안을 밝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됐다.”
요아킴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바로 오르마즈가 원하고 원하던, 군인인 그에게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의 문제였다.
‘정신 차려라, 오르마즈, 마지막 기회다.’
남은 물을 훌쩍 들이킨 오르마즈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위를 올려보았다. 그때, 그의 눈에 띈 건 그의 머리 위, 조금 이상한 천정이었다. 무슨 이유엔지, 오르마즈의 머리 위쪽 천정재 조각이 옆으로 약간 밀린 채 손 하나 들어갈 정도의 폭으로 벌어져 있었다.
순간, 빈 물병을 쥔 이 전직 암살수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머리 위, 천정 틈새에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피를 가진 누군가의 존재를 직감적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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