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98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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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마즈는 뒷짐을 지는 척 뒤쪽에 선 요아킴 박사에게 손끝으로 슬쩍 천장을 가리켰다. 처음에 그가 가리키는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던 요아킴은 오르마즈가 몇 번이나 손으로 천장을 가리킨 후에야 상황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 경연의 운영을 맡은 스루바라 교단은 애당초 오르마즈의 반대세력이니 믿을 수가 없고, 그나마 믿고 상의할 하마타의 마구스들은 모두 단상의 베일 너머에 있었다.
다급해진 요아킴은 수나 마구스가 보고 있으리라는 기대 하나로 일단 마구스들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지명자께선 빨리 답변을 시작해 주십시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 보이는 오르마즈를 크로이소스가 재촉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미 여러 문제에서 계속 산만한 모습을 보였다보니 그는 이번에도 오르마즈가 답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혼자 혼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오르마즈는 일단 더듬더듬 대답을 시작했지만 머리는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현재 헤네티 요원은 총 5천으로, 그 중 3천은 일반인 중 선발된 자들이며, 2천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선천적으로 키워진 자들로, 절반은 하마피타, 나머지 절반은 하마타 소속이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각자 소속 교단의 마구스에게 절대 복종하나 제1여단 크바르나만은 예외다.”
기계적으로 대답은 하고 있지만 오르마즈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누군가 그의 머리 위를 겨누고 있고, 섣불리 행동하면 정수리에 바로 볼트가 박힐 터였다.
“그리고 1여단 크바르나는…….”
오르마즈가 다시 대답을 더듬거렸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것을 보아, 머리 위의 암살수는 오르마즈가 경연에 통과할 경우를 대비해 배치한 것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맞히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오르마즈가 대답을 하다 말고 갈등에 휩싸였다. 통과하는 것도 자신의 죽음을 뜻했고, 실패한다 해도 역시 불에 던져져 죽기는 매한가지였다.
“우욱.”
오르마즈가 대답을 하다 말고 갑자기 탈진한 척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웅성대는 신관들에게 오르마즈가 괜찮다고 손짓을 했지만 사실 절반은 야푸르의 주의를 끌어 요아킴을 마구스들에게 들여보내기 위한 연기였다. 마구스들에게 다가가려던 요아킴이 제단 밑을 지키는 헤네티들에 막혀 접근하지를 못하고 있던 차였다.
그의 예상대로, 오르마즈의 모습에 놀란 야푸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친구 들여보내, 급히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그는 앞에서 헤네티들과 입씨름 중이던 요아킴에게 빨리 올라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오르마즈의 기지 덕분에 기회를 얻은 요아킴이 허겁지겁 마구스들이 있는 제단으로 뛰어올랐다.
같은 순간, 비틀비틀 일어난 오르마즈는 일반 청중석 한쪽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코메트 장교복을 차려입고 마누엘 델루지 대령 주변에 서 있는 매서운 눈의 한 남자가 오르마즈와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암살 0팀?’
이번에도 말을 더듬거릴 뻔했던 오르마즈가 급히 대답을 이어갔다.
“전갈 문장, 붉은 색을 상징으로 하는 제1여단 크바르나는 8백의 유전자 조작된 ‘합성 헤네티’로만 구성되며, 출신 교단에 관계없이 오직 대신관에게만 복종할 의무를 지닌다. 이들은 콜로니 전역에 걸쳐 교단의 진리를 위협하는 이단 세력을 응징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또한 이곳 아케메니아에 주둔하면서 마구스와 주요 신관들의 경호 업무를 담당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답을 하면서, 오르마즈의 눈동자는 그 남자에게 줄곧 멎어 있었다. 저자는 민병대 지도자 파냐드 직속 암살팀인 소위 ‘0팀’ 리더 X였다. 저 ‘0팀’은 적보다는 조직 내 불만세력들을 제거하는 데 주로 동원되다보니 민병대 내에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로 그 팀이 오르마즈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도대체 민병대냐, 하마피타냐?’
적이 도대체 누군지 가늠할 수가 없어진 오르마즈가 제단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제단에 오른 요아킴 박사가 야푸르와 수나 마구스에게 구멍이 난 천장을 가리키며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12개 교단의 지도자이며, 동시에 하마피타 수장인 대신관 후계자로 지명되는 순간부터, 내 독자적인 헤네티를 합성하고 운용할 수 있게 되니…….”
대답을 하는 한편으로 오르마즈가 다시 그 X를 노려보았다. 같은 암살수로서, 그는 자신이 지금 완전히 노출된 상태의 쉬운 목표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마구스들 쪽을 돌아본 오르마즈는 마구스들이 있는 제단 아래, 헤네티들의 출입문에서 슬금슬금 모습을 나타낸 웬 수상한 자를 발견했다.
그자는 헤네티들의 의도적인 묵인 속에서 마구스들이 있는 제단 쪽으로 천연덕스럽게 접근해가기 시작했다. 야푸르가 위기에 처했음을 깨달은 순간, 오르마즈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적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이상으로 답변을 마무리하겠다.”
놀란 나머지 허겁지겁 답을 마무리한 오르마즈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암살팀 하나가 보통 4명 이상, 많게는 7, 8명까지로 구성되니 저 X팀장, 그리고 머리 위에 숨은 저격수 말고도 최소한 둘 이상이 어딘가에 또 있을 터였다.
“통과 여부를 결정해 주십시오.”
진행자인 크로이소스 신관이 심판을 맡은 신관들에게 평가를 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오르마즈의 대답이 지금까지에 비해 형편없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중간중간 이상한 태도를 보인데다가 마무리가 엉성했던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계속 더듬더듬 말도 안 되는 대답을 늘어놓았던 지금까지의 몇 문제들보다는 나았다.
“어떡해야 하지?”
신관들이 일제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이전의 답변들보다 평가에 유달리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반자들의 표정에도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정작 오르마즈의 시선은 주변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무기를 생각해 보았지만 코윈의 전통에 따라 어머니 아지드에게 성인식 선물로 받았던 작고 화려한 타바진 손도끼 하나가 전부였다.
“흐음.”
보좌관에게서 결과를 전해받은 진행자 크로이소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며 짧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크고 푸른 깃발이 확 오르면서 화로 옆에서 떨고 있던 니사와 동반자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됐습니다! 통과에요! 통과됐다고요! 아르잔님!”
펄쩍 뛰는 니사와 고함과 함께 통과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신전을 울렸지만 오르마즈에게는 그것을 기뻐할 시간조차 없었다.
오르마즈는 제단 밑으로 다가가고 있는 수상쩍은 자의 얼굴을 언젠가 민병대에서 보았었다는 것을 퍼뜩 떠올렸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제단의 마구스들까지도 위험에 처한 이상,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저놈 잡아! 암살수다!”
자신의 통과가 선언된 순간, 오르마즈의 손끝이 마구스들이 있는 단상을 향해 가고 있던 자를 정확히 향했다.
“암살수가 들어와 있다고!”
오르마즈가 그 암살수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다리가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손에서 미끄러진 물병이 데구르르 굴러 난간에 부딪히는 것을 쳐다보던 오르마즈는 자신의 몸이 왜 그렇게 이상했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약물?”
한참을 자리에 그대로 놓아두었던 물병 밑에는 무언가 하얀 침전물이 고여 있었다. 오르마즈는 구름다리 위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마구스의 경호 헤네티들에게 악을 썼다.
“대신관 선임자로서 명한다! 당장 제단에 아무도 접근 못하게 해!”
군인으로 돌아간 오르마즈가 마구스들을 지키는 헤네티들에게 악을 썼다. 대신관 후계자의 느닷없는 고함소리에 경연장 안은 놀란 신관들의 비명과 몸짓에 에아 신전은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빌어먹을!”
제단 위 야푸르만을 생각하며 혼자서 기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오르마즈는 천장에 있는 적을 그제야 떠올렸다. 지금 가장 위험에 처해 있는 건 정작 그 자신이었다.
“이런!”
그때, 천장 사이에서 누군가가 쏜 볼트가 구름다리 밖으로 기어가려던 오르마즈의 얼굴 옆을 스쳐 발등에 딱 소리를 내며 꽂혔다.
“악!”
몸을 일으키려던 오르마즈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지만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볼트 때문에 발등이 바닥에 박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르마즈는 발등에 박힌 볼트를 손으로 힘껏 꺾어 버리고는 살이 찢기는 지독한 아픔을 참아내며 발을 볼트에서 억지로 뽑아냈다.
발을 빼낸 오르마즈가 막 고개를 들자 이번엔 아수라장이 된 청중석 쪽에서 그를 향해 석궁을 겨누고 있던 조금 전의 0팀장 X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앗!”
오르마즈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몸을 굴렸다. 오르마즈의 머리 위로는 X가 쏜 볼트가, 얼굴 옆으로는 머리 위의 저격수가 쏜 볼트가 동시에 쌕 소리를 내며 스쳐 벽과 바닥에 파르르 소리를 내며 꽂혔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제일 위험한 상대는 바로 머리 위의 저격수였다.
“어느 새끼야!”
지금까지 날아든 볼트의 방향에서 적의 위치를 읽어낸 오르마즈는 허리에 차고 있던 타바진 도끼를 뽑아 온 힘을 다해 천장에 던졌다. 갖은 문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자그만 손도끼는 공중으로 무섭게 솟구쳐서는 무른 천장재를 조각조각냈다.
“이크!”
가볍고 약한 천장재 위에 숨을 죽이고 엎드려 체중을 분산시키고 있던 저격수는 밑에서 위력적인 도끼가 날아들자 놀라 재빨리 피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체중을 버티고 있던 바닥이 부서지면서 피할 곳도, 피할 방법도 없었다.
“아아악!”
바닥이 꺼지면서 저격수는 부서지는 천장재와 함께 오르마즈가 있는 구름다리 위로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죽어!”
떨어진 도끼를 다시 집어든 오르마즈는 중상을 입은 채 얼떨떨해져 있는 민병대 저격수의 턱을 왼손으로 덥석 붙들며 오른손에 든 도끼로 이마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저격수의 조각난 머리에서 튀어오른 피와 누런 살점이 그의 검은 베일을 순식간에 물들이고 바닥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 사이, 마구스들의 제단 바로 아래에서 정체가 탄로난 암살수가 재빨리 석궁을 빼들며 제단을 향해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가장 철저하기로 유명했던 마구스들에 대한 경호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뚫린 순간이었다.
“막아!”
마구스들을 지키는 경호 헤네티들이 악을 썼지만 볼트는 베일을 그대로 뚫고 12명의 마구스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노인의 얼굴에 그대로 작열했다. 자리에 앉은 자세 그대로 눈에 볼트를 명중당한 늙은 에시마 교단 마구스의 고개가 뒤로 홱 꺾였다.
“아버지! 아버지!”
에시마 교단 후계자 바에자가 즉사한 아버지의 시체를 와락 껴안으며 그 암살수를 휙 노려보았다. 제단 위에는 마구스는 물론이고 후계자와 헤네티들, 수행원들까지 함께 있었지만 암살수는 마치 누가 누군지 다 알고 있다는 듯 곧바로 수나 마구스 쪽을 겨누었다. 제단 아래에서 이자를 제압해야 할 스루바라 헤네티들은 마구스 한 명이 쓰러진 후에야 비로소 이 암살수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그냥 계세요!”
느닷없는 사태에 놀란 요아킴은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는 수나 마구스의 얼굴을 재빨리 가슴으로 감싸며 그의 앞을 몸으로 막아섰다. 암살수가 쏜 볼트가 그런 요아킴의 뒤로 바로 날아들었다.
“악!”
등에 볼트가 박힌 요아킴은 수나 마구스의 어깨를 양손으로 짚은 채 그의 품 안에서 힘없이 다리가 꺾였다. 고통에 물든 이 남자의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며 파랗게 질린 수나가 그의 가슴을 꽉 안았다.
“이오타, 이오타?”
표적을 놓친 암살수가 또 한 발을 쏘려 했지만 수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미처 방아쇠도 당기지 못한 채 그 자세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이놈이 감히!”
암살수를 단숨에 마비시킨 수나 마구스가 쓰러지려는 요아킴을 한 팔로 품에 바싹 당기며 얼굴의 흰 베일을 확 걷어냈다.
“네놈이 얼마나 끔찍하게 죽고 싶길래!”
격노한 수나 마구스와 눈이 마주친 암살수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고는 온몸의 구멍이라는 구멍에서는 모조리 피를 뿜어내며 자리에서 거칠게 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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