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00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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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사가 있는 쪽을 향해 석궁을 휙 돌렸던 오르마즈는 낯익은 얼굴에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차마 바로 석궁을 당길 수가 없었다.
“대신관께서 아시면 어쩌려고 이러나?”
“아버지 말이냐?”
코윈 교구장 아스탈이 석궁을 치켜든 오르마즈에게 태연하게 대꾸했다.
“세상에 누가 쌩판 남을 해쳤다고 제 친자식을 죽일까? 아무리 널 아낀다고 해 봤자, 넌 남이고, 난 혈육이거든? 그것도 마구스 전통대로 피가 아주 진하게 섞인 유일한 자식인데?”
아스탈은 오르마즈가 입고 있는 대신관의 로브를 경멸에 찬 시선으로 죽 쏘아보았다.
“허어, 대신관이라. 표본병 속에나 딱 어울렸을 놈이.”
니사의 뒤에 몸을 숨긴 아스탈이 얼굴 측면만 살짝 드러낸 채 계속 시간을 끌었다. 니사도 키가 작았지만 다하카르 마구스 혈통인 아스탈 역시 체구가 크지 않다보니 모습이 쉽사리 드러나지를 않았다. 저자의 괴력을 잘 아는 오르마즈로서는 함부로 달려들어 니사의 목숨을 벼랑 끝으로 내몰 수는 없었다.
“쏠 테면 쏴 봐, 태생부터 더러운 놈이 친자식까지 죽였다면 아버지가 용서하실지 정말 궁금한데? 왜 못 쏘냐?”
아스탈이 니사의 뒤에 숨은 채 오르마즈를 계속 도발했다. 일행이 아스탈에게 붙들린 새 헤네티들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이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자신의 놀림에도 상대에게서 아무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의아해진 아스탈이 니사의 옆으로 살짝 눈을 더 내밀었다.
“익!”
속았음을 깨달은 아스탈이 기겁을 했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맞은편에서 그의 눈이 보이기만 조용히 기다리던 오르마즈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날린 볼트가 니사의 뺨을 스치고 뒤이어 아스탈의 한쪽 눈과 귀를 사정없이 찢어놓았다.
“그래, 쐈다, 어쩔래!”
왼쪽 눈과 귀가 찢긴 아스탈이 중심을 잃고 주춤주춤 밀려나는 새, 오르마즈는 오른손의 도끼를 꽉 쥐며 이 무서운 상대를 향해 다친 발을 끌고 무작정 돌진했다.
다친 발로 무작정 돌진한 오르마즈는 이 무서운 상대를 니사에게서 떼어내 머리부터 바닥에 사정없이 내리꽂았다. 구사일생한 니사가 허겁지겁 도망치자 오르마즈가 이번엔 왼손의 도끼로 아스탈의 머리를 힘껏 후려쳤다.
“이크!”
놀란 아스탈이 괴력으로 오르마즈를 확 밀어냈다. 힘에서 밀린 오르마즈가 뒤로 붕 날아가 떨어졌지만 아스탈도 그의 도끼를 완전히 피한 건 아니었다.
“저 죽일 년!”
도끼날에 머리가 찍힌 아스탈이 피가 줄줄 흐르는 머리를 움켜쥐고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르마즈는 여전히 한 손에 석궁을 들고 있었고, 그와 맞서는 건 바보짓이었다.
“저 새끼가!”
부상을 입은 아스탈이 헤네티들 있는 곳으로 급히 도망을 치려했지만 이 위험천만한 싹을 그대로 놓아줄 오르마즈가 아니었다.
“이번엔 내 차례다. 이 흰머리야.”
아스탈에게 밀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오르마즈는 도망치는 아스탈의 뒤통수를 향해 석궁의 방아쇠를 그대로 당겼다.
“아읍!”
목덜미에 정확히 볼트를 명중당한 아스탈이 움찔거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뒤이어 또 한 발이 그의 급소인 왼쪽 겨드랑이를 깊이 뚫었다.
급소에 두 발을 연이어 명중당한 아스탈은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빨리! 빨리요! 여기요!”
아스탈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니사와 울피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오르마즈를 급히 잡아끌었다.
“어디? 어디로?”
상대가 당연히 즉사했을 것으로 생각한 오르마즈도 다친 발과 무거운 몸을 이끌고 허겁지겁 그들을 따라 어두운 카타콤베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그 어두운 공간으로 일단 몸을 피했다.
“잡아! 들어가기 전에 막아!”
헤네티들의 악을 쓰는 고함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도망치는 그의 뒤로 몇 발의 볼트가 날아가며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지옥 같은 에아 신전만 빠져나갈 수 있다면 어디든 가야만 했다.
“닫아! 안에서 잠글 수 있어!”
니사의 고함소리에 파트라와 울피가 힘껏 돌문을 닫았다. 그리고 일순간 주변은 시커먼 암흑과 침묵에 휩싸였다.
2발이나 되는 볼트를 급소에 맞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스탈의 주변에 당혹스런 표정의 스루바라 헤네티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머리에 도끼로 치명상을 입은데다가 큰 혈관이 지나가는 뒷덜미와 폐, 심장이 있는 왼쪽 겨드랑이를 모두 뚫렸으니 즉사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들이 속한 스루바라 교단 2인자 크로이소스마저 생각지도 않게 불에 타죽었으니 그들의 이번 작전은 아직까지는 최악으로 풀려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쓰러져 있던 시체가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에 대담한 헤네티들까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끄응 소리를 내며 일어선 아스탈은 자신을 둘러선 헤네티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이 개새끼들, 안 쫓아가고 뭐 하나?”
일어나자마자 호통을 치는 이 남자의 뒷덜미와 겨드랑이에는 여전히 볼트가 박혀 있었다. 파랗게 질린 채 그 믿기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던 헤네티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방금 전 오르마즈 일행이 도망친 카타콤베 돌문으로 향했다.
몇몇 헤네티들이 악을 쓰며 문을 들이받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절단기! 절단기든 망치든 브레이커든 뭐든지 가져와! 빨리!”
“저 못난 것들 같으니라고.”
아스탈이 입을 씰룩거리며 문과 씨름하는 헤네티들, 그리고 화로 속에서 재가 된 채 아직까지 타고 있는 크로이소스의 시체를 돌아보았다. 헤네티들 몇이 시체를 꺼내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만 화로가 워낙에 훨훨 타고 있다 보니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아스탈이 끌어들인 민병대 암살수 중 살아남은 4명이 죽은 동료들의 시체 2구를 급히 살피는 중이었다.
“하여간, 애당초 못 믿을 놈들이었어.”
아스탈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저자들이 무모하게 카야를 공격하지만 않았더라면 최소한 크로이소스는 죽지 않았을 터였다.
그때, 어디선가 대형 해머를 가져온 헤네티들이 카타콤베와 이어진 돌문을 꽝꽝 두들겨 부수기 시작했다. 그들의 괴력에 문이 쩍쩍 갈라지면서 안에 숨은 자들의 운명도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였다.
“제기랄. 티시트리야까지는 길도 좋을 텐데.”
아스탈이 시계를 보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저 문을 부수어도 오르마즈 일행은 이미 한참을 달아났을 터였다. 그는 주변에서 걱정스레 두리번거리고 있던 헤네티 지휘관을 손짓해 불렀다.
“놈들은 내가 죽은 줄로 아니 분명히 제일 가까운 1시 방향 티시트리야 신전으로 갈 거다. 거기 우리 사람은 몇이나 가 있지?”
“5명 숨겨 두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경연 중에 다른 신전은 모두 비워둡니다. 그리로 나오면 바로 사냥할 수 있습니다.”
“놈들이 바깥과 연락했어. 하마타 놈들이 그리로 갈지도 모르니 그 전에 끝내라. 어차피 발을 다쳤으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아스탈은 바닥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오르마즈의 핏자국을 신발바닥으로 쓱쓱 닦아냈다.
“민병대 놈들이 그쪽으로 도망쳤다고 하고 무작정 몰아붙여.”
“대신관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아스탈은 대신관을 의식하는 이 지휘관을 대번 매섭게 쏘아보았다. 무어라 고함을 지를 뻔했던 그는 성질을 죽이며 애써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나와 가르시바 마구스와 바에자 후계자……아니, 이젠 그 친구가 마구스군. 셋이 다 책임지니 네깟 놈들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것 없다.”
아스탈이 손끝으로 민병대 암살수들을 슬쩍 가리켰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가 죽인 것도 아니야.”
카타콤베 안에 숨은 오르마즈 일행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파란빛 희미한 흐름을 느끼고 있는 오르마즈만을 제외하고, 이제 아무도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되는 거냐? 저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되는 거냐?”
오르마즈가 탈수와 현기증에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짙은 어둠으로 꽉 찬 3갈래의 복도가 어딘가로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이곳의 어둠에 조금씩 적응되면서 오르마즈의 그레이오팔 시야는 파란빛 물결 같은 흐름에 멈추었다.
“그리고 여긴 도대체 뭐냐? 이 파란 빛은…….”
오르마즈가 거추장스런 터번을 벗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지만 니사는 전혀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둔 채 더듬더듬 대답했다.
“저흰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뭐라고?”
“여기서 저흰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안 보이다니, 무슨 이상한 형광색 칠해 놓은 것처럼 그럭저럭 보이는데.”
“아르잔님에게만 보이는 겁니다. 저흰 못 보니 이제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 앞에 세 갈래길이 있을 겁니다.”
“그래, 보인다.”
오르마즈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 니사를 쏘아보았지만 그는 물론이고 울피나 파트라도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아 정말로 그들은 아무 것도 못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에아 신전이 있는 밖에서 돌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아 신을 뜻하는 활과 화살 문장이 크게 새겨진 문이 무언가 외력에 요란스레 떨리고 있었다.
“여기는 12시 위치의 에아 신전입니다. 왼쪽으로 죽 가면 1시 위치의 티시트리야 신전이 나올 겁니다. 왼쪽에서 이것과 같은 신전 출입문이 나올 때까지 앞장서 주십시오.”
“알았다.”
그때, 바깥에서 갑자기 쿵 하며 엄청나게 큰 진동이 문을 울렸다.
“밖에서 문을 부수려나본데요?”
겁먹은 울피가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정확히는 몰라도 큰 도구를 동원해 에아 신전 쪽에서 문을 두들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빨리 따라와. 떨어지지 않게 모두 손을 잡고.”
오르마즈가 선두에 서며 울피의 작은 손을 꼭 붙들었다. 니사의 말대로 이들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면 어둠 역시 이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을 터였다.
일행은 문을 부수는 소름끼치는 진동을 뒤로 하고 오르마즈의 낯선 시야에 의지해 1시 방향으로 급히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굴은 제법 넓었고, 바닥도 매끈한 화강암으로 잘 다져져 있었다. 하지만 앞을 못 보는 3명의 동반자들은 몇 번이나 벽에 부딪치거나 발을 헛디뎌 일행의 걸음을 늦추었다.
하지만 문제는 오르마즈도 몸이 성치 못하다는 점이었다. 오르마즈는 니사에게서 이곳 카타콤베의 복잡한 구조에 관해 장황하게 설명을 들으며 몇 분을 힘겹게 걸었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혔다.
“젠장, 발이 너무 아파.”
오르마즈가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볼트에 관통당한 발은 아직까지 계속 피가 흘렀고, 근육과 인대도 심하게 손상되었는지 한 발 내딛는 것도 아찔할 정도의 고통이었다.
“잠깐만요, 그냥 서 계세요.”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오르마즈의 몸을 짚은 니사는 그의 앞에 꿇어앉으며 목에 걸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아직까지 피를 흘리고 있는 이 ‘대신관 후계자’의 발에 단단히 묶어 주었다.
“어쨌든 경연을 통과하셨습니다. 이제 정식 후계자가 되셨으니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세요.”
니사가 어둠 속에서 손끝으로 오르마즈의 얼굴과 목, 손목을 더듬거리며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니사는 보지 못하지만, 오르마즈는 그의 이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가자,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오르마즈가 다시 울피의 손목을 붙들었다. 지금쯤이면 뒤쫓아오는 아스탈의 무리가 이미 문을 부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르마즈는 낯선 파란 광채 속에서, 나머지 일행은 소름끼치는 암흑 속에서 다시 걸음을 재촉해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간 걸어 나아간 후, 니사의 말대로 조금 전 에아 신전에서와 똑같은 형태의 돌문이 왼쪽에서 천천히 가까워왔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돌문에는 에아 신을 뜻하는 활과 화살 문장이 아닌, 백마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가……티시트리야 신전?”
오르마즈가 일행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긴 안전할까?”
울피의 걱정 어린 물음에 아무도 바로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하마타 신전이니 괜찮겠지.”
니사가 개미 같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별로 힘은 없었다.
“안 괜찮아도 다른 도리가 없으니.”
한 손에 석궁을 쥔 오르마즈는 떨고 있는 그들을 대신해 잠긴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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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 The Iron Vein [출판본] - 제1부 : 세상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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