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01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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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여긴 제 교단입니다, 아르잔님.”
누군가가 앞장서려는 오르마즈를 급히 붙들며 얼른 손을 뻗어 문을 짚었다. 조금 전, 에아 신전에서도 문을 열었던 티시트리야 교단 소속 물리학자 파트라였다. 이미 죽은 카야와 함께 군대 경험이 있던 이 큰 키의 여자는 이곳에 오는 동안 계속 일행의 앞을 지켜왔던 터였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싸울 줄 아는 내가 가는 게 낫다.”
“위험에 앞장서는 지휘관은 바보가 아니면 무책임한 것이라죠?”
오르마즈를 반 강제로 밀어붙인 파트라는 손에 단검을 단단히 쥐고는 잠긴 돌문을 풀기 시작했다. 이미 에아 신전에서 한 번 문을 열고 잠갔던지라 이번엔 촉감만으로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문을 풀 수 있었다. 조심스레 당긴 문 안으로 희미하나마 빛이 스며들어왔다.
“혹시 모르니 제일 뒤에 나오십시오.”
파트라는 울피가 들고 있던 오르마즈의 마구스 터번을 덥석 집어 머리에 눌러썼다.
“뭐 하는 짓이냐?”
놀란 오르마즈가 말리려 했지만 그는 문을 확 밀며 단검을 쥐고 밖으로 제일 먼저 나섰다.
“요아킴?”
오르마즈의 터번을 대신 쓴 파트라가 티시트리야 신전 안에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원형의 이 거대한 홀은 이곳은 그에게는 꽤나 익숙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군데군데 횃불이 켜져 있는 것을 빼면 텅 비어있었다. 에아 신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신전들처럼, 이곳 역시 사방으로 12개의 기둥이 죽 둘러진 100척(30m) 정도 지름의 거대한 원형의 홀이었다.
“요아킴은 아직 안 온 모양인데.”
파트라가 뒤따라 나오는 니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긴, 몇 분 안 됐으니 아직은…….”
시계를 확인하려던 니사는 구석의 기둥 뒤에서 움직이는 희미한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꽥 질렀다.
“오, 오른쪽에!”
“응?”
놀란 파트라가 몸을 낮추며 휙 돌아선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볼트가 파트라의 옆구리를 그대로 파고들었다.
“돌아가! 돌아가!”
옆구리를 움켜쥐며 쓰러진 파트라가 자신에게 오려는 일행들에게 거칠게 손을 저었다. 그리고는 뒤에 있을 적들에 대고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들, 감히 대신관 후계자인 내게 무슨…….”
그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며 일행에게도 무어라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뒤이어 다른 곳에서 날아든 볼트가 이번엔 급소인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파트라가 쓰러지는 광경을 확인한 니사는 제일 뒤에서 절룩거리며 나오던 오르마즈를 급히 막아섰다.
“안돼요, 나오시면 안 됩니다. 제발, 안됩니다.”
니사가 악을 쓰고 오르마즈를 카타콤베 안으로 다시 떠밀며 이 광경을 보지 못하게 했다.
“하, 악.”
기둥 아래 힘없이 무릎을 꿇은 파트라는 되돌아가는 오르마즈의 모습을 지켜보며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저 바보 같은 놈들…….”
그는 기둥에 양각된 티시트리야 신의 문장을 더듬으며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갔다.
“아웁!”
숨이 끊기기 직전, 파트라는 갑자기 기둥과 벽에 대고 덩어리피를 확 토해내 이곳에서 벌어진 참극의 선명한 흔적을 사방에 선명히 남겼다. 곧 이곳에 올 요아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려야 했다.
“여긴 내 안방이라고…….”
숨이 끊어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마구스 터번의 검은 베일을 타고 턱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파, 파트…….”
니사가 울음을 터뜨리려는 울피의 입을 꽉 틀어막고 카타콤베 안으로 허겁지겁 밀어 넣었다. 파트라를 쓰러뜨린 헤네티들이 어둠 속에서 하나둘씩 조심스레 모습을 나타냈지만 언뜻 세어 봐도 4, 5명은 되어 보였다. 그들은 도망치는 니사와 울피의 그림자를 쫓아 재빨리 카타콤베 출구로 접근해왔다.
“아, 안되겠습니다. 일단 도망치는 게 낫겠습니다.”
니사는 헤네티들이 접근해오자 죽은 파트라를 밖에 놔둔 채로 돌문을 힘껏 잡아당겨 다시 잠갔다. 그리고 일행 주변은 다시 암흑 속에 휩싸였다.
3명째 동반자를 잃은 오르마즈는 닫힌 문 안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밖에서 이들을 쫓아온 괴한들이 문을 열려 애쓰는지 문이 조금씩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목표인 ‘아르잔 다하카르’는 일단 죽였다고 생각할 테니 처음처럼 결사적이지는 않을 터였다.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에아 신전에 있던 놈들도 쫓아오고 있을 겁니다.”
니사가 울먹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울피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가 1시 방향이니까……3시의 트라카 신전으로 갈까? 제일 가깝잖아?”
울피의 물음에 니사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2시의 트라에타오나 신전 앞을 지나야 하니까 너무 위험해. 거긴 하마피타니 당연히 놈들이 있을 거라고.”
“아르잔님? 괜찮으십니까?”
니사가 어둠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더듬거리며 오르마즈의 손과 얼굴을 붙잡았다. 6명 중 3명의 동반자를 차례대로 잃고 침울해 있던 오르마즈는 마지못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어디로든 가자. 여길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갈 곳이 많지 않습니다.”
니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장 가까운 하마타 신전은 3시의 트라카 신전입니다만 그 중간에 하마피타인 2시의 트라에타오나를 지나야 합니다. 물론……여기서 연락을 할 수가 없으니 트라카 신전이라고 100%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대신관께서 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12개 신전 모두를 장악하지 않으신다면…….”
니사가 힘없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가 다음 안을 내놓기도 전에, 오르마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놈들도 미리 예상하고 있을 거다. 빈 하마타 신전에 병력을 두었을 정도면 아마 이 지하 카타콤베 곳곳에 이미 병력을 배치해 두었겠지. 트라에타오나 신전에서 이미 이곳으로 우릴 조여오고 있을지도 모르고.”
오르마즈가 손에 든 석궁을 재장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 내게만 이렇게 보이고, 놈들은 어둠 때문에 랜턴을 써야 한다면 우리도 나름대로 이점은 있는 셈이군.”
오르마즈는 남은 볼트 개수를 세어 보았다. 암살수에게서 빼앗은 석궁이다보니 이제 볼트도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6시 다하카르 신전은?”
“거긴 완전히 반대편입니다.”
“알아, 하지만 에아 신전에서 후계선임이 확정되는 대로 그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내 이마의 문장을 뽑아내고 정식 임명식을 치른다고 하지 않았나? 당연히 대신관님 직속 크바르나 여단도 와 있을 테고.”
“그, 그렇군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오르마즈의 제안에 니사가 얼른 수긍했다.
“빨리 안내해라. 놈들이 파트라의 정체를 알아내기 전에 여길 떠나야겠다.”
“외곽 순환로로 빠지지 말고 정면으로 가시면 됩니다. 반대편이니 방사형 회랑을 가로지르는 게 제일 빠를 겁니다. 중앙부는 5분마다 30도씩 돌아가지만 잘 맞추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쪽으로 갈래길이 나올 때까지 계속 가십시오.”
“알았다.”
오르마즈가 다시 울피의 손을 잡았다. 어둠 속에서 잔뜩 겁에 질린 이 두 명의 성직자 학자들을 데리고, 오르마즈는 홀로 힘든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이제 살기 위해서는 6시 방향, 정남쪽의 다하카르 신전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티시트리야 신전에서 좋은 소식이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아스탈의 앞에 헤네티가 웬 여자를 질질 끌고 모습을 나타냈다.
“화로 옆에 숨어 있었습니다. 어쩌죠?”
아스탈이 갑자기 씨익 웃음을 지으며 덜덜 떨고 있던 밀리타의 뺨을 살며시 짚었다.
“오랜만이군, 델타, 나의 사랑스러운 여동생.”
파랗게 질린 밀리타는 이미 다리까지 풀렸는지 헤네티가 팔을 놓기가 무섭게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스탈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그의 차가운 뺨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놈 옆에서 아주 행복해 보이던걸?”
아스탈의 손이 밀리타의 가는 목을 이미 붙들고 있었다. 이 남자의 괴력이라면 발끈하며 성을 내는 것 한번만으로 그의 목을 으스러뜨리기에 충분했다.
“전 그냥……아버지께서 시키시는 대로…….”
밀리타가 아스탈의 회색 눈동자를 올려보며 힘겹게 변명을 했지만 그의 눈에서 줄줄 흐르는 눈물은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의 대답에 아스탈의 눈동자가 회색에서 핏빛처럼 빨갛게 변해갔다.
“그럼 여기서 말해 봐라. 나냐? 그놈이냐?”
“저, 전…….”
“나냐고! 그놈이냐고!”
아스탈의 목소리가 코앞에서 쩌렁 울리자 밀리타가 다시 파랗게 얼어붙고 말았다.
그가 다른 동반자들을 쫓아가지 못한 건 오르마즈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지독한 공포에 질리면 다리가 굳어버리는, 스스로 생각해도 혐오스러운 자신의 고질병 때문이었다.
그 역시 오르마즈를 구하러 달려 나가는 5명의 동반자들을 따라 나서고 싶었지만 눈앞을 스치는 볼트를 본 순간, 도저히 바닥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아스탈이 다시 표정과 눈빛을 돌변하며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하긴, 내 비밀은 말하지 않은 것 같더군? 고맙군, 덕택에 목숨을 건졌어.”
아스탈이 왼쪽 겨드랑이와 목에 깊숙이 박힌 볼트를 서슴없이 확 뽑아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중 한 발만으로도 죽었을 테지만 그는 여전히 멀쩡했다.
“내가 다른 사람과는 급소가 다르다는 건 말하지 않았나보지? 그래도 옛정이 남아서? 아니면 그런 말을 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까맣게 잊어버려서?”
아스탈이 다시금 밀리타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그 야만족 품에 안겨보니 내 생각은 털끝만큼도 안 들 정도로 황홀하던가? 듣자하니 그쪽에서도 어지간히 놀았다지?”
“아뇨, 아뇨, 아직 그런 적 없어요, 제 몸엔 아직 손도 안 댔어요. 정말이에요.”
“닥쳐, 그렇다고 네가 날 배신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아스탈은 밀리타를 매몰차게 바닥에 동댕이치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1시의 티시트리야 신전에서 연락입니다.”
격앙되어 있던 아스탈은 옆에서의 들려온 목소리에 그제야 숨을 가다듬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놈을 잡은 것 같다고 합니다. 맞는지 확인해 달라는 연락입니다.”
“확인은 무슨 확인? 죽였으면 된 거지?”
잡았다는 말에 잠시나마 기쁜 표정을 지었던 아스탈이 대번 짜증스런 표정으로 돌변했다.
“마구스 터번을 쓴 키 큰 여자를 죽인 건 틀림없는데 죽은 놈의 이마에 루비가 박혀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건지…….”
순간 파랗게 질린 아스탈이 밀리타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나머지 놈들은?”
“카타콤베 안으로 다시 도망갔다고 합니다.”
“제기랄, 그 질긴 놈. 잘 나가는 암살수였다더니, 명불허전인가.”
아스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놓친 겁니까?”
헤네티 대장이 잔뜩 기죽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거기서 가장 가까운 하마타 신전이 3시의 트라카 신전이니 그쪽으로 도망갈 경우를 대비해서 2시의 트라에타오나 신전 앞에서 일단 1차로 차단해라. 그러면 최소한 시계 방향으로는 더 못 갈 테니.”
“알겠습니다.”
“아참, 네가 있었군.”
아스탈이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밀리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너도 그레이오팔이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는걸. 너도 그놈과 같은 피가 섞였지?”
아스탈이 밀리타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이며 카타콤베 쪽 문을 가리켰다.
“너도 이 안에서 볼 수 있지 않나? 그놈의 존재를 느낄 수도 있고.”
“그, 그건…….”
창백해진 밀리타가 그의 팔을 떨치려 했지만 아스탈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로 그를 카타콤베 문 쪽으로 떠밀었다. 카타콤베 문 앞에서 덜덜 떨고 있던 밀리타는 등에 몸을 바싹 붙여오는 그의 존재감을 느끼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고 아스탈의 낮은 속삭임이 그의 귓가로 새어들어왔다.
“그놈에게 독이 든 물을 가져간 게 너야. 놈이 무사하면 너는 무사하지 못해.”
“…….”
“대신관 후계자의 배우자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게 해 주지. 그러니 우리 편이 그놈을 추적할 수 있게 해.”
밀리타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거절한다면 아스탈에게 바로 죽음을 당할 테고, 시키는대로 한다면 아버지 야푸르와 오르마즈를 배신하는 셈이었다. 아스탈이 밀리타를 민병대 암살수들에게 휙 떠밀었다.
“빨리. 넌 민병대에 인질로 잡혔을 뿐이야.”
“제발, 이것만은…….”
“이봐, 크로이소스 신관 시체 옆에 빈 자리 좀 있나?”
아스탈이 화로에서 시체를 끄집어내고 있던 헤네티들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맙소사.”
아직도 빨갛게 타들어가고 있는 불과, 그 안에서 이미 재가 된 시체를 본 밀리타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비록 앞으로의 그에게 ‘두 번이나 약혼자를 배신한 지조 없는 여자’라는 꼬리표가 평생을 따라다니게 될지언정, 저런 끔찍한 죽음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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