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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02화 (697/1,132)

< -- 702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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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타를 카타콤베 안으로 보내놓은 아스탈이 헤네티 대장에게 일렀다.

“혹시라도 놈이 카타콤베의 중앙을 돌파해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갈지도 모르겠다. 모든 하마피타 신전 지하에 우리 사람들을 배치하고, 시계바늘 중앙부 홀에 있는 놈들에게 자리를 단단히 지키라고 일러라. 놈은 카타콤베 안에서 너희보다 훨씬 잘 본다는 걸 잊지 말고.”

“하지만 저 큰 곳을 어떻게……. 대신관께서 크바르나 여단이라도 동원하시면 저희로서는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아스탈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최소한 절망에 빠진 표정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조금씩 자신을 잃어가는 기색이 역력한 이 헤네티 대장의 모습에 내심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신관에 대한 두려움, 적인 민병대와 손을 잡았다는 데 대한 불만이 신심에 가득한 저 광신도를 조금씩 흔들어놓고 있었다.

“내 알아서 할 테니 신경쓰지 말라니까.”

짜증스레 대꾸한 아스탈은 자리에서 할룩스를 빼들며 사람이 적은 청중석 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다른 놈도 끌어들여야겠어.”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아스탈은 화로에서 여전히 타고 있는 크로이소스 델루지의 재가 된 시체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는 코메트 사령관 테번 델루지가 동생의 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궁금해졌다.

“그놈 정도면 쓸모가 있으려나.”

“대신관님, 이오타 요아킴입니다.”

다친 몸을 힘겹게 이끌고 대신관 야푸르 앞에 서둘러 나아간 요아킴은 야푸르 대신관을 마주한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경연장에서 반 강제로 끌려나오다시피 한 대신관은 에아 신전 지상 건물의 한 방에서 마구스들과 신관들에 둘러싸인 채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지만 그 주변이 문제였다.

스루바라 교단의 가르시바 마구스는 물론이고 나머지 하마피타 마구스들이 대신관 곁에 모여 있었고, 이번에 아버지를 잃은 바에자 빈트 에시마 후계자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 대신관의 집중력을 계속 흐려놓는 참이었다.

요아킴이 간곡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

“좀 기다리게.”

살름 마구스와 무언가 귀엣말을 나누던 대신관은 요아킴에게 잠시 기다리라며 손짓을 보냈다.

후계자 오르마즈에 대한 그의 마음이어 어쨌든, 그는 공적으로 교단의 최고지도자였고, 동시에 6개 하마피타 교단의 수장이었다. 민병대 손에 마구스가 목숨을 잃고 교단의 큰 행사장이 아수라장이 된 판국에 그로서도 자기 후계자의 안전 타령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급한 연락입니다.”

요아킴이 애타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르시바 마구스가 대신관의 옆에서 짐짓 걱정스런 표정으로 ‘우리 헤네티들이 곧 좋은 소식을 보내 올 테니 염려 마십시오.’라며 계속 시간을 끌고 있었다.

‘저것들이…….’

‘저놈들이 이번 일의 주범들입니다’라는 말이 요아킴의 혀끝에 걸렸지만 이런 상황에서 일개 학자에 불과한 요아킴이 감히 마구스들을 역적으로 몰아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르잔님에게서 연락입니다.”

“그 애하고 연락이 되었다고?”

야푸르가 그제야 고개를 휙 돌리며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무사히 있는 건가? 상황이 어떤데?”

요아킴은 대답을 머뭇거리며 이번엔 대놓고 가르시바의 눈치를 보았다. 이번 일의 배후인 가르시바의 코앞에서 ‘오르마즈가 티시트리야 신전으로 갈 예정이다’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다행이야, 그 애가 군인 출신이니 최소한 자기 앞가림은 하겠지. 그렇지?”

야푸르가 애써 태연한 척 했다.

어쨌든 오르마즈는 베테랑 군인이고, 폐쇄된 경연장에는 적 암살수보다 훨씬 많은 교단 정예 헤네티들이 ‘오르마즈를 지키고’ 있으니 대신관이 아주 크게 걱정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수하 마구스들 앞에서 자신의 후계자가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속내도 있을 터였다.

그때, 살름 마구스가 짜증스런 표정으로 다시 대신관의 주의를 빼앗아갔다.

“잠깐만, 귀 좀, 아래에서 연락입니다. 급한 일입니다.”

“대신관님, 지금 상황이…….”

말할 기회를 또 잃은 요아킴이 다급한 나머지 대신관에게 바싹 다가서려 했지만 신경이 잔뜩 예민해져 있던 크바르나 여단 헤네티들에게 바로 차단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사이, 가르시바 마구스가 요아킴에게 위협적으로 바싹 다가섰다. 요아킴이 입술을 꾹 다물며 대신관의 관심을 호소하려 돌아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살름 마구스와 대화중이었다.

“그래, 뭐라 하시던가? 아직 무사하신 건가? 어디 계시지?”

애가 탄 요아킴에게 가르시바가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계시냐고!”

당혹스런 표정의 요아킴은 순간 무언가 찡한 두통과 함께 낮은 속삭임이 머릿속을 울리는 것을 느꼈다.

“쓸데없는 참견으로 마구스들의 중요한 대화를 흐리지 마라.”

깜짝 놀란 요아킴이 주변을 휙 돌아보았지만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 말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번에 새 에시마 교단 마구스가 된 바에자 후계자가 마구스들 한편에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표정이 굳어진 요아킴은 다시 대신관을 돌아보았지만 온통 ‘적’들에 둘러싸인 대신관과 이 일을 직접 상의하기는 애당초 불가능해 보였다.

“젠장,”

대신관과의 알현을 포기한 요아킴은 방을 나와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한쪽에서 하마타 마구스들과 서 있던 수나 마구스에게로 향했다. 수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 병상을 박차고 나온 그를 보자마자 대번 화를 버럭 냈다.

“성치도 않은 것이 여기서 뭐 하는 짓이냐. 이 꼴로 밖을 돌아다니다니!”

겉으로는 마구 화를 냈지만 동료 마구스들과의 논의까지 미뤄둔 채 이런 몸의 그에게 바로 관심을 보인 건 사실 그뿐이었다. 하지만 요아킴에게는 이런 그에게 사적인 속내를 표현할 여유조차 없었다.

“제발, 빨리 손을 써 주셔야 합니다. 대신관님께는 접근할 수도 없으니 어떡해야 합니까.”

“무슨 말이냐?”

요아킴의 다급한 설명을 들은 수나는 한쪽에서 하마피타 마구스와 신관들이 들락거리고 있는 대신관의 방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가증스런 것들에 둘러싸여 계시군.”

수나는 티시트리야 교단의 보우루카 마구스에게 재빨리 손짓을 보냈다.

“마구스께서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시오. 그리고 혹시 모르니 다른 분들도 각자 신전으로 수하들을 보내서 지하 카타콤베와 이어진 신전들의 안전을 확보해 주시오. 나도 내 수하들을 우리 신전으로 보내놓을 테니.”

수나의 지시를 받은 하마타 마구스들이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시를 끝낸 수나는 하마피타 마구스들에게 둘러싸인 대신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쪽 일은 잘 처리된 거요? 여긴 에시마 교단 후계 문제로 정신이 없어서…….”

수나는 자신을 보자마자 엉뚱한 소리부터 하는 대신관에게 대놓고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리고는 주변의 하마피타 마구스들과 수하들에게 이를 드러내며 쏘아붙였다.

“다들 좀 여기서 꺼져줬으면 좋겠소.”

“예?”

수나의 험악한 말투에 하마피타 마구스들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서로서로 존중해 온 마구스들의 전통과 예의에 크게 어긋난 태도가 틀림없었지만 어쨌든 수나는 하마타 파벌의 수장이었고, 같은 마구스여도 대신관 바로 아래 서열의 틀림없는 상급자였다.

당혹스런 표정의 바에자 후계자를 선두로, 하마피타 마구스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자칫 저년 때문에 일을 다 망치겠군요.’

젊고 눈치 빠른 바에자 마구스가 가르시바 마구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아스탈이 일을 잘 처리했는지 제가 직접 내려가서 확인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대신관님을 더 묶어두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다른 분들은 각자 신전을 책임져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절대 놈을 살려둬선 안됩니다.’

다른 선배 하마피타 마구스들에게 반쯤 명령처럼 자신의 의사를 알린 이 젊고 의욕적인 새 마구스는 아스탈이 있는 에아 신전 지하로 급히 향했다.

하마피타 마구스들이 주변에서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야푸르가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인 거요, 아무리 경우가 없다 해도…….”

대신관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수나 마구스의 큰 손이 다짜고짜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수, 수나?”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하고 놀란 야푸르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가 있었다. 소리도 어찌나 컸는지 밖으로 나간 하마피타 마구스들도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표본병 속에서 당신을 저주할 그레이오팔이 하나 더 생기겠군요.”

멍한 얼굴로 쳐다보는 대신관에게 한 마디 남긴 수나 마구스는 요아킴의 할룩스를 던져놓고는 두말없이 휙 돌아 방에서 나섰다. 그리고는 밖에 모여 웅성대고 있던 하마피타 마구스들을 한 번씩 매섭게 쏘아보고는 그대로 멀어져갔다.

졸지에 뺨을 맞은 야푸르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수나가 놓고 간 할룩스 안에서는 필사적으로 도움을 청하던 오르마즈 일행의 애타는 목소리 녹음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텅 빈 그의 눈가에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마를 짚은 채 멍하니 있던 그는 갑자기 밖에 대고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여단장!”

대신관의 부름에 경호원들을 이끌던 크바르나 여단장이 급히 뛰어 들어와 자세를 잡았다.

야푸르는 조금 전 수나에게 쫓겨난 마구스들이 서성대고 있을 문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밖에 있는 하마피타 마구스들은 모두 회의실에 ‘모셔놓고’ 외부인들의 출입과 연락을 일체 차단해라.”

“예에?”

다른 사람도 아닌, 마구스들을 억류하라는 황당한 명령에 크바르나의 여단장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야푸르는 단호하게 명령을 이었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모조리 불러내 이 일대를 포위해라. 12개 신전 모두를 접수하고 내 후계자를 구해내야겠다. 내 지금 당장 지하로 다시 내려간다.”

1시 방향의 티시트리야 신전에서 빠져나온 오르마즈 일행은 이번엔 중앙을 향한 방사형 회랑을 타고 정면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스탈의 무리가 12시 에아 신전에서 출발해 시계 방향에서 접근해 오고 있을 테고, 2시 트라에타오나 신전에서 출발한 또 다른 무리가 반시계 방향에서 접근해 오고 있을 테니 다하카르 신전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이 거대한 시계의 중앙을 향해 뚫린 길뿐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온 넓은 복도와는 달리 이번은 길도 좁은데다가 바닥도 울퉁불퉁해서 계속 일행의 걸음을 붙들었다. 그나마 오르마즈는 이 어둠 속에서도 파란 빛의 흐름을 보아가며 길을 나아갈 수 있었지만 함께 있는 니사와 울피에게 이곳은 장님이 돌밭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울피는 워낙 작으니 발이 아파도 그냥 내가 업는 게 차라리 낫겠어.”

막 엎어지려는 울피를 얼른 껴안은 오르마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떨결에 오르마즈의 품에 안긴 울피가 동반자들 중 제일의 울보답게 이번에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또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다하카르 신전까지만 가면 되니 모두 힘내. 니사, 한 손으로 내 허리를 안아라. 그러면 훨씬 낫겠지.”

울피를 일으켜 등에 업은 오르마즈는 뒤처진 니사도 바싹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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