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07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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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시작이야.”
평소 어떤 일이 있어도 대신관의 곁을 지켰던 경호대 헤네티들이 눈짓을 주고받으며 그의 주변에서 슬금슬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오르마즈를 지키며 싸우던 경호대 헤네티들도 당황한 얼굴로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경호대장은 적병들 사이에 동댕이쳐져 있던 오르마즈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엎드리십시오! 귀와 눈 막고 아무 것도 보거나 들으시면 안 됩니다!”
경호대장의 절박한 외침을 들었지만 당장 코메트들의 칼을 코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오르마즈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젠장, 다 끝장이야, 아버지가 죽든 내가 죽든 이제 둘 중 하나는 끝장이라고.”
아스탈의 이 저주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오르마즈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주변에서 내리꽂는 코메트 병사들의 칼을 부러진 칼로 힘껏 쳐내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 사이, 경호대 병사들이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 일제히 엎드렸고 제단 옆에 있던 니사와 울피도 얼떨결에 그들을 따라 몸을 움츠렸다.
바로 다음 순간, 붉은 눈을 크게 부릅뜬 야푸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가슴을 후려치는 것 같은 굵고 무거운 고함소리가 거대한 신전 안을 쩌렁 울렸다.
“모두 나의 집에서 꺼져!”
두 주먹을 움켜쥔 야푸르 대신관의 포효가 폭풍처럼 신전 안을 휩쓸었다. 막 싸우려던 코메트 병사들, 공격을 할지 말지 머뭇거리고 있던 자들은 물론이고 뒤쪽에서 ‘아르잔의 최후’를 지켜보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던 몇몇 의사와 성직자들의 휘둥그레진 눈에 바로 자신들의 신, ‘공포’가 그 폭풍을 타고 번졌다.
“아, 아악.”
휘청거리던 성직자 한 명이 갑자기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숨이 끊어진 그의 입과 귀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도 신전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100명이 넘는 코메트 병사들, 심지어는 미처 대비를 못 했던 운 없는 경호대 병사들까지 하나 둘씩 무기를 떨어뜨리며 자리에 쓰러져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공포에 압도당한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붉게 적셨다.
조금 전까지도 피비린내나는 싸움터였던 신전 안에 일순간 소름끼칠 만큼의 고요함이 흘렀다. 온통 시체로 뒤덮인 신전 안은 말 그대로 대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몰골이었다.
“대신관님?”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여단장이 고개를 힘겹게 가누며 몸을 일으켰다. 대신관에게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피아 할 것 없이 모조리 시체가 되었고, 그에게서 적당히 떨어졌던 경호대 전사들 역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바닥에서 심한 구역질을 하거나 비틀거리며 일어나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었다.
“하, 학.”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야푸르는 갑자기 다리가 풀리며 자리에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 감돌던 핏빛도 일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던 야푸르는 다리가 풀리며 그대로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대신관님!”
여단장이 대신관에게 다가가려다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그 역시 몸도 가누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괜찮으십니까?”
여단장이 애타게 물었지만 기진맥진한 대신관은 쓰러진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넓은 신전 바닥은 온통 뒤덮은 헤아릴 수도 없는 시체들, 시체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피로 어느 한 군데 발을 디딜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아르잔 님! 계십니까?”
이번엔 제단 옆에서 몸을 일으킨 경호대장이 조금 전까지 오르마즈가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이곳 제단 부근의 경호대 전사들은 대신관과의 거리는 충분했지만 적과 어울려 싸우느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당한 운 없는 병사들이 많았다.
제단 밑에 엎드려 있던 니사와 울피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울피가 시체들 사이를 헤치고 엉금엉금 기어 주변을 살폈다.
“맙소사! 아르잔 님?”
울피가 입을 가리며 또 울음을 터뜨렸다. 부러진 칼을 쥔 손 하나가 시체더미 아래에서 비죽 모습을 내놓고 있었다.
“세상에, 아르잔 님, 제발, 제발.”
아직 몸도, 정신도 온전치 못한 니사와 울피가 피로 천지가 된 바닥을 구르듯 내려가 그의 위를 덮은 무수한 시체들을 허겁지겁 치워내기 시작했다.
“내가 죽인 건 아냐.”
대신관 반대편 기둥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이 와중에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 피신했던 아스탈이 옷자락에 묻은 누군가의 피를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어차피 저놈이 죽었으니 다 끝났군. 목격자도 없고, 아주 깨끗해.”
아스탈이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신전 안을 빙 둘러보았다. 코메트들은 모조리 죽은 것 같았고, 경호대 병사들도 절반 넘게 목숨을 잃은 듯 보였다. 이제 안에는 탈진해 쓰러진 대신관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20여 명의 경호대 병사들이 전부였다.
“이 많은 시체들을 보시죠. 이제 아셨나요? 아버지와 제가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
아스탈이 쓰러져 있는 아버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며 말했다.
“이 꼴을 보세요, 아버지도 저처럼 타고난 악당이시라고요. 그런데 왜 갑자기 변하셨죠? 하루에도 수십 건의 해부를 명령하고 멀쩡한 머리통을 가르셨던 양반이, 이제와 갑자기 선한 척 하면서 저 따위 놈에게 집착하셨던 게 애당초 잘못이었단 말입니다.”
그제야 반쯤 정신을 차린 대신관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시뻘개진 눈으로 다가오는 이 엇나간 아들을 쏘아보았다.
“저도 우리 가문의 이 잘난 능력 한 번 써 볼까요?”
아스탈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칼 한 자루를 집어들었다.
“제기랄! 저놈 쏴!”
그가 칼을 드는 모습에 당황한 여단장이 옆에 떨어져 있던 석궁을 들어 아스탈에게 대고 쏘았다.
“누가 나가서 막아!”
그나마 상태가 나은 몇 명의 경호대 병사들이 여단장의 명령에 그에게 달려가거나 볼트를 쏘았지만 대부분 그의 방패와 갑옷에 미끄러지거나 빗나가 버렸고, 한 발이 운 좋게 옆구리에 명중했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저 질긴 놈!”
주변의 병사들이 다시 그를 쏘아 어깨에 한 발을 명중시켰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누가 저 미친놈 좀 막으라고!”
여단장이 악을 쓰며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났다. 병사 두 명이 차례대로 그를 앞을 막아섰지만 그의 칼놀림 한 번에 무기와 몸통이 두 조각나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뒤쪽, 제단 부근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아스탈은 막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옆에서 달려든 크바르나 여단장에 깜짝 놀라 미처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목을 향해 악 소리를 지르며 칼을 내리꽂는 이 충성스런 헤네티 무장에 기겁을 하며 손을 뒤로 감추었다.
“이놈이!”
손을 감춘 아스탈은 대신 방패를 휘둘러 아직 움직임이 좋지 못한 여단장의 옆 목을 모서리로 꽝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그의 괴력에 급소를 얻어맞고 반쯤 잘린 여단장의 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벌컥 솟구쳐 올랐다.
“이, 이이이이익.”
자신의 대신관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이 용맹한 무장도 결국 이 괴물을 당해내지 못한 채 힘을 잃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젠장!”
크바르나 여단장까지 죽인 아스탈에게는 이제 한 가지 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시뻘건 핏빛 눈을 치켜 뜬 그는 벽에 기대 막 일어선 아버지, 야푸르 대신관에게 그대로 내달렸다.
“원래 이렇게까지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아스탈이 붉은 눈을 치켜뜨며 아버지를 향해 칼을 치켜들었다.
“이젠 저도 다른 도리가 없다고요!”
“팔이다, 아르잔.”
벽에 기대 선 야푸르가 이를 갈며 이 독한 아들을 노려보았다.
“목이나 팔을 잃어야 죽는다……나중에라도……꼭 명심해라.”
가늘게 뜬 야푸르의 암갈색 눈동자와 목소리가 마치 울먹이듯 파르르 떨렸다. 아스탈은 이 사실을 알리고 있는 ‘아르잔’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고요!”
아스탈은 비틀거리는 아버지의 목을 왼손의 방패로, 그리고 오른손에 든 칼로 그의 왼팔을 힘껏 내리쳤다.
“이익!”
대신관이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아들의 방패를 막았지만 손목을 향해 꽂히는 칼만은 피할 수가 없었다. 위에서 내리꽂힌 예리한 칼날에 야푸르의 왼쪽 팔이 그대로 동강나 너덜거렸다.
“날 원망하지 마시라고요!”
거의 떨어져나간 야푸르의 팔로 붉은 피가 확 솟구쳐 아들의 얼굴을 적셨다.
“어차피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니!”
“응?”
아버지의 목을 쳐 숨통을 끊으려던 아스탈은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위험을 직감한 그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애당초 잘못은.”
그곳에는 온몸에 검붉은 피를 온통 뒤집어 써 알아보기도 어려운 누군가가 다가와 있었다. 놈이 아스탈의 손목을 향해 긴 칼을 힘껏 내리찍었다.
“너 따위 놈도 자식이라고 차마 죽이지 못하신 거다!”
무언가 번쩍 한 순간, 막 야푸르의 목을 치려던 아스탈의 오른손이 잘려 바닥에 뚝 떨어졌다.
“이익!”
일격에 한쪽 손을 잃은 아스탈은 허겁지겁 옆으로 몸을 피했다. 덕택에 오르마즈가 두 번째로 휘두른 칼이 섬뜩한 붕 소리를 내며 그의 목 옆을 스쳐 지나갔다. 경호대 병사들과 여단장이 시간을 끄는 새, 시체더미를 헤집고 기어 나온 오르마즈가 그의 뒤로 따라붙은 모양이었다.
“끄, 끄으윽.”
구사일생한 아스탈은 피가 솟구치는 손목을 꽉 움켜쥐고는 이 신전 출구 쪽을 향해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마치 저승사자 같은 몰골이 된 오르마즈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의 잘린 손을 집어들고 다시 이를 드러냈다.
“이거 되찾고 싶지?”
걸음이 불편한 오르마즈는 뒷걸음치며 물러나는 아스탈을 쫓아 비틀비틀 다가갔다.
“그럼 덤벼 봐라. 도망만 치지 말고.”
“네, 네놈은 어떻게…….”
“글쎄? 난 마구스들한테 천적인 모양이지?”
오르마즈가 히죽거리며 아스탈에게 다가왔다. 아스탈은 그제야 오르마즈가 바에자의 수작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빌어먹을 놈.”
모든 것을 계산하며 아스탈이 이를 갈았다. 운이 없다면 이 상처로 목숨을 잃거나 능력 일부를 잃겠지만 이 상태로 오르마즈에게 덤비는 것도 멍청한 짓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오르마즈가 다시 째져라 소리를 질렀다.
“빨리 덤비라니까!”
오르마즈의 무시무시한 협박에 기가 죽은 아스탈이 계속 뒷걸음쳤다. 순간 다시 이를 드러낸 오르마즈가 잘린 아스탈의 손에서 손가락 하나를 대뜸 물어뜯었다.
“저, 저놈이!”
놀란 아스탈이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랑곳없이, 오르마즈는 물어뜯은 아스탈의 손가락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러니 빨리 덤비라고!”
아스탈을 죽이는 데 눈이 뒤집어진 오르마즈가 목이 찢어져라 악을 썼다. 하지만 겁먹은 아스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더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이씨!”
오르마즈는 나머지 손가락까지 또다시 물어뜯어 삼켜버렸다.
“되돌아올 테니 그때 보자!”
완전히 기가 죽은 아스탈이 허겁지겁 돌아서서 출구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르마즈가 허리춤의 석궁을 들어 등을 겨누고 한 발을 쏘았지만 등짝에 볼트를 명중시켜 저 괴물을 잠시 주춤거리게 만들었을 뿐 별 소용이 없었다.
“돌아오라고!”
오르마즈가 목이 찢어져라 포효했지만 그는 어두운 복도 쪽으로 허겁지겁 사라져가고 있었다.
“나즈라?”
오르마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무너진 벽 앞에는 팔이 잘린 대신관이 쓰러져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오르마즈는 그를 일으켜 무릎에 안았지만 그의 숨소리도, 눈빛도 모두 희미했다. 팔꿈치에서 베인 그의 왼팔은 약간의 살점과 피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을 뿐, 뼈까지 완전히 잘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르마즈가 머플러를 급히 풀어 그의 팔을 꽉 동여맸다.
“난……곧……죽어.”
야푸르가 오르마즈의 가슴에 힘없이 얼굴을 묻었다.
“뇌간이 손목에 분산된 돌연변이거든…….”
오르마즈가 움찔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팔이 잘린 건 뇌, 그것도 생명반응을 관장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잃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스탈이 손을 잃고 벌벌 떨었던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조금만 참으면 되니 헛소리 좀 그만 하시오.”
대신관을 등에 번쩍 업은 오르마즈가 어두운 복도를 향해 랜턴을 켜 들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불편한 걸음걸이로 방금 전 야푸르가 무너뜨리고 들어온 어두운 터널로 들어섰다.
어렵게 목숨을 건진 경호대 병사들과 니사, 울피가 서로의 어깨에 기대 그의 뒤를 힘겹게 따랐다. 도망간 아스탈이 지원군을 데리고 돌아오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이 낯선 지하 복도는 한때 많은 사람들이 썼던 듯, 타일로 사방이 마무리되어 있었고 옛날에 쓰던 조명기구와 전선까지 천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르마즈는 먼지와 거미줄이 그득한 그 어두운 복도를 휘청거리며 힘겹게 걸어 나아갔다.
“제발, 조금만 참으라고요.”
오르마즈가 축 늘어진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지만 야푸르는 숨을 쉬기도 힘든지 몇 번이나 거친 신음을 토해내며 괴로워했다. 그런 그에게 오르마즈가 계속 악을 썼다.
“내 머리통에 박힌 빌어먹을 흉물 빼 주기 전까지는 이승이든 저승이든 절대 못 보내주니 제발 좀 참으란 말이요!”
오르마즈는 뒤에 업힌 야푸르가 가늘게 흐느끼는 것을 느꼈지만 모른 척했다. 그의 숨결은 희미했고, 목숨은 경각에 다다라 있었다.
“내 죄가 너무 커…….”
“나 살려놓고 가지 않으면 그땐 정말로 용서 안 할 거요.”
입으로는 험악하게 쏘아붙였지만 오르마즈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고 있었다. 오르마즈는 맞쥔 손에 더 힘을 주어 보았지만 대신관의 거친 숨소리도 어느 순간부터 거의 들리지 않았다.
죽어가는 그의 숨결처럼 오르마즈의 목소리에서도 점점 힘이 빠져갔다.
“제발, 제발 가지 말라고요. 제발. 날 봐서라도.”
“내 주머니의 유언과 보물은 네 것이고……”
필사적으로 쥐어짜내는 대신관의 목소리에 어색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오르마즈는 이를 악문 채 계속 걸음만 옮겼다.
“다 필요 없으니 제발 죽지만 말라고요.”
“난……이제 네게 새로이 깃들 것이니…….”
야푸르는 오르마즈의 어깨에 고개를 건 채 숨소리인지, 말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음성으로 속삭였다.
“아르잔 오르마즈, 이제 네가 31대 대신관이다.”
“나즈라?”
성큼성큼 걷던 오르마즈가 갑자기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야푸르가 갑자기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난 언제까지 살 수 있는 거요?”
대신관을 업은 채 멍하니 서 있던 오르마즈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어깨에 기댄 대신관의 얼굴에는 더 이상 표정이 없었다. 그의 코와 입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 오르마즈의 무거운 어깨와 가슴을 붉게 적셨다.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냐고…….”
오르마즈가 작은 소리로 물었지만 숨이 끊어진 대신관에게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빌어먹을! 이 무책임한 인간 같으니!”
오르마즈가 등에 업힌 대신관에게 악을 쓰고 고함을 질렀지만 힘없이 처진 그의 고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젠장! 책임은 지고 가야 할 것 아냐!”
오르마즈의 피어린 외침이 지하 복도 안을 허무하게 메아리쳤다.
“이렇게 가 버리면 어쩌라고……나쁜 사람 같으니…….”
오르마즈가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피 같은 눈물이 솟구쳤지만 이 많은 아랫사람들 앞에서 맘 놓고 울 수도 없었다.
대신관의 죽음을 직감한 경호대 헤네티들이 멍한 얼굴로 자리에 꿇어앉았다. 그들은 가슴에 손을 겹치며 오르마즈에게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현신에 깃드심을 축하드리옵니다.”
제일 상급자인 경호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최소한 겉으로는 그들 중 아무도 울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에게 대신관의 죽음은 신이 새 거처를 찾아간 것에 불과했다.
“다하카르의 새 현신이신 31대 아르잔 대신관님께 복종을 맹세하나이다.”
오르마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마 530년, 혹은 기원 41년이라고도 기록될 해의 어느 날,
이 날은 콜로니의 30번째 대신관 야푸르의 몸을 떠난 신이 31대 아르잔 오르마즈에 새로이 깃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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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과거편 마지막 부분은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왜 작가인 제가 탈진할 지경인지.......이제 한 편 남았으니 좀 나아지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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